[찬샘통문 Ⅲ-67]오수찰방 최주하(崔柱夏) 이야기
‘개나무골’ 오수(獒樹)에 역참(驛站)이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 아시리라. 역참은 공문서나 왕명을 빠르게 전달하고, 공무 여행자들의 숙소 등 편의시설과 이동수단인 역마(驛馬)를 제공하는 게 주요 기능이고, 국가 물자와 공물을 운송하는 등 교통 -물류의 거점역할을 한 곳이다. 1462년(세조 8년) 전국의 역참 도로망을 재정비하면서 찰방(察訪. 종6품 외관직)을 파견하고, 찰방이 주재하는 역도(驛道) 체제가 확립됐다. 오수역참을 중심으로 '오수도'(獒樹道)라는 역로체계가 이루어졌다.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된 오수도 찰방의 관할지역은 창활(昌活) 응령(應嶺) 인월(引月) 잔수(潺水) 익신(益申) 섬거(蟾居) 낙수(洛水) 지신(知申) 동도(東道) 양책(良策) 덕양(德陽) 등 11개역인데, 이 역참들은 남원, 운봉, 구례, 순천, 광양, 하동, 곡성 등 전라도 동부와 경상도 경계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관장함으로써 오수가 전라도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역참은 찰방 1인을 비롯해 말, 역리(驛吏), 노비 등 인원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으나 그 규모 등을 우리가 상세히 알 필요는 없는 터. 허나, 최근 귀담아 들은 18세기에 오수찰방을 두 번 지낸 최주하(崔柱夏.1659-1729. 본관 화순. 호 청간재聽澗齋)에 대한 이야기는 적시해 놓을 필요가 있다하겠다. 그는 1708년(숙종 34년) 가을 오수찰방으로 부임하여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현재도 남아있는 금암동 바위에 망북정(望北亭) 세 글자를 암각하고 임금이 계신 궁궐을 향해 예를 차렸다고도 한다(康熙戊子(1708) 察訪崔柱夏來督是郵 每往此亭北向四拜 仍刻石面曰望北亭:출처 ‘오수도지지’). 1년도 안돼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자 지역민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등 여론이 악화되자, 4년만인 1713년 다시 부임했으니, 이는 그가 후덕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임하자마자 양로청(養老廳. 요즘의 경로당)을 설치하여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양로연)를 여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고 한다(당시의 ‘양로청선생안’ 등 고문서가 TV에도 방영됐다). 그가 떠나자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리고 향을 마련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1845년 오수찰방을 지낸 김우동의 글에 나온다. <오수역지서> 서문을 쓴 김우동의 글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도 오수찰방을 지냈는데 아버지가 임기를 마칠 때 백성들이 모두 감화해 수레를 잡고 가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가 100년 전의 찰방 최주하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주었기에 이 얘기가 전해 내려온 것이다.
김우동 역시 서문에서 의로운 개 이야기를 예로 들며 “감동하게 하는 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오래 전해져도 더욱 새롭다”면서 “사람이 덕을 갖춘 김개인과 같이 정성으로 개를 기르면 개 역시 어리석지 않으므로 능히 주인을 위해 죽을 수 있으니, 하물며 김개인 같은 정성으로 남을 감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을 다스릴 때 갓난아이를 돌보듯 백성을 보살피면 백성이 모두 요순시대의 백성과 같이 될 것이다. 시대는 고금(古今)이 있으나 백성은 고금이 없다. 오직 백성을 인도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時有古今 民無古今 惟導率之是從)”이라 한 아버지의 말씀도 기록해 남겼다. 또한 “최주하는 오수 의견설화에 감동을 받아 ‘오수이야기’를 최자 <보한집>을 바탕으로 다시 구성해 썼는데, 개와 나무를 중국 ‘육가의 흰 꿩’과 ‘악묘의 도끼자루’에 비유하는 등 감탄하며 그 얘기를 후세에 전했다”고 기록했다.
위 글은, 필사본 ‘최주하의 글씨’ 필체가 만만치 않다며 엊그제 금석문학자 손환일 박사가 보내온 사진을 보면서, 2023년 임실군과 ‘서화문화연구소’가 펴낸 <오수의견비 비문 고증 학술연구보고서>에 기록된 오수찰방 김우동이 쓴 최주하관련 기록을 찾아 정리해본 것이다. 현재 ‘오수도’가 있던 자리에 표지석이 있는데, 바로 그 옆에 <최주하송덕비>가 잘린 채 세워져 있다. 어찌된 일인지 <찰방최공주>(察訪崔公柱)로 잘려져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가 쓴 오수이야기 원문의 줄거리야 <보한집>과 비슷하겠지만, <의견묘>와 <오수의견비> 관련해 쓸 가능성이 많은 <오수관기>(獒樹館記)가 <오수도지지>에 원문이 있다하니, 못내 궁금하여 하루속히 찾아볼 작정이다. 역사(歷史)는 유구(悠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