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꽃 단상
문경자
살구나무는 겨울 추위를 잘 견디지만 꽃눈은 늦추위에 종종 얼어 죽기도 한다. 살구꽃은 짧은 줄기의 마디에 한 두 송이씩 피어난다. 살구꽃이 피면 불을 밝힌 듯이 주위가 환해진다. 봄 꽃이 많이 피지만 나는 살구꽃을 으뜸으로 여겼다. 벚나무는 무리 지어 꽃을 피우지만, 살구나무는 고향집 마당 한 쪽에 한 그루 서있어 정이 갔다. 봄 바람에 꽃잎이 날리면 그 속을 달렸다. 보드라운 꽃잎이 내 입술에 입맞춤하였다. 파란하늘에 뭉게구름이 일듯이 아담한 초가지붕 위에 내려앉은 꽃잎은 그리움과 여정이 피어난다.
유년시절 살구나무아래서 소꿉놀이도 하였다. 깨어진 사금파리를 주워다 그릇으로 썼다. 아빠 엄마라 부르면서 부모님들의 모습을 재현 하기도 했다. 내가 자식을 낳고 살아보니 부모 노릇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다. 추위를 이겨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듯이 내 삶도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 좋은 열매를 맺겠지.
어릴 때 그 시절은 배가 고팠다. 꽃잎은 팔랑팔랑 춤을 추고 노랑나비 흰나비들이 날아 다녔다. 나비를 따라 청 보리 밭을 뛰어 다니다 보면 허기가 졌다. 보모님들은 보리가 빨리 피기를 기다렸다. 봄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 밭은 보기만 하여도 배가 불렀다. 초가집 굴뚝에서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온 가족이 보리 밥을 먹는 것도 다행이었다. 부모님은 이 고통스런 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세상도 빠르게 변화는 만큼 꽃이 지고 살구가 나오는 시기도 점점 빨라졌다. 꽃을 대신하여 살구가 살이 오르고 있었다. 잘 익은 것은 반으로 잘라 먹으면 껍질은 약간 까칠하게 느껴 지기도 하고, 속살은 단맛이 나기도 한다. 우리 집 살구도 노란빛이 도는 오렌지색을 띠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옆집에 살구를 따기 위해 동네 개구쟁이 머슴아가 나무에 기어 올라갔다. 살구나무주인이 오는지 망을 보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동네 개가 짖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매미같이 착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하여도 웃음이 나왔다. 잔 가지를 마구 흔들었다. 살구가 툭툭 떨어졌다. 푸른 빛 노란 빛이 도는 살구를 먹었다. 단 맛은 별로 없고 신맛이 났다. 오만상을 찌푸리게 하였다. 몇 개를 줍는데 주인여자가 쫓아 왔다. 나무에서 내려 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결국은 싹싹 빌고 용서를 구했지만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먹을 욕까지 다 먹었다.
언젠가 친한 언니는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살구를 따자고 부추겼다. 밤이라 보는 사람도 없다는 말에 용기가 났다. 들키는 것은 운이고 좋아하는 살구를 실컷 따먹자. 결심을 하고 지하 주차장을 통하여 살금살금 걸었다. 언니는 계속 소곤그리면서 손짓을 하였다. 한편으로 엄청 재미도 있고 스릴도 있다. 가로등불빛아래 살구가 숨어있었다. 언니는 낮에 보아둔 것을 손으로 더듬어 계속 땄다. 손이 떨려서 잡히지도 않았다. 누가 올까 봐 한 봉지를 채우고는 경비아저씨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킥킥 웃음이 나왔다. 길 건너 공원에서 운동하고 있는 친구에게 살구를 내밀었다. 힘들게 따왔는데 반응이 시시했다. 봄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웃에 살고 있는 외숙모는 노랗게 익은 살구를 한 소쿠리를 주었다. 돌담 사이에 서있는 살구나무는 담을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꽃이 피면은 달력에 나오는 그림과 똑 같았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살구나무 꽃을 그렸다. 선생님은 게시판에 부쳐두고는 “교실이 훤하구나”라고 하였다.
살구나무 가지는 옆집으로 뻗어 나갔다. 그 집 초가에도 꽃잎은 마당까지 날아가 꽃 천지를 만들었다.
살구나무가 있는 곳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우물 속에도 살구나무 꽃이 일렁이고 나는 두레박으로 꽃물을 퍼 올려 물동이에 부었다. 이웃에 사는 언니도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어 올렸다. 치렁치렁한 댕기머리는 보기만하여도 아름다웠다. 살구색 볼 앵두 같은 입술에 눈웃음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살구나무 아래로 지나가는 언니. 예쁘기도 하다. 수줍어 부끄러워하는 모습. 발자국을 뗄 때마다 하얀 고무신에 분홍색 꽃잎이 붙어 꽃신을 만들었다. 팔랑팔랑 꽃잎이 물동이 속에도 내려 앉았다. 살구꽃잎의 꽃말은 처녀의 부끄럼이다.
아파트 주변이나 공원에도 살구나무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고향을 그리게 한다. 살구를 줍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따가지고 가는 일도 있었다. 살구를 나누어 먹으며 고향사람처럼 친하게 말을 주고 받는다. 살구꽃이 피면 어디서나 고향 같다.
고향에 살구나무도 사라지고 초가집도 기와로 바뀌었다. 외숙모님 어머님! 살구꽃이 피면 그립다. 시멘트로 난 길만 봄빛을 받아 더욱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돌담에 버팀목이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던 살구나무는 아련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