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월전 작 장우성 충무공 표준영정
충무공 초상화 하면 월전 장우성 화백(1912~2005년)이 그린 근엄하면서도 온화함을 갖춘 표준영정(현충사 소장)이 널리 각인돼 왔다. 100원짜리 동전의 충무공 영정도 이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이 영정은 충무공의 진짜 얼굴과는 전혀 무관한 작가의 상상화에 불과하다.
충무공의 영정은 서거 후 민간에서 다수 그려져 전해 내려왔던 것으로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아산 현충사를 비롯해 통영 제승당, 여수 충민사, 역시 여수 소재 장군의 영당인 해신당 등 4곳 이상의 이순신 장군 사당에 오래된 초상화가 걸려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후 국외 반출 및 국내 행방불명으로 모두 사라져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됐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된다.
1960년대 문교부에서 이순신 진영을 통일할 때 여수 장군 영당에 전해 내려왔던 이순신 장군 초상화가 가장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조선말 여수 군수를 지냈던 오횡묵이 영당에 제사를 올리면서 쓴 제문에 "당머리에 영정을 모셔 놓았다. 임진란 후에 당을 앞바다에다 세워놓으니 지나는 배들이 축원하고 갔다"고 했다.
임진왜란 직후에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모셔졌음을 짐작케 한다. 문교부는 제주시장이던 김차봉이 여수경찰서 고등계 형사 재직시절 가져간 것으로 판단하고 연락해 확인하자 그는 골동품점에 팔았다고 진술했다.
▲ 충민사 영정(좌)과 제승당 초상화(우)
여수 충민사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전래 초상화가 존재했지만 사라졌다. 충민사는 1601년 왕명으로 세워졌으며 이순신 장군과 같은 배를 탔던 승군 출신의 옥형 스님이 사당 곁에 암자를 짓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1929년 4월 17일 기사에는 충민사 영정의 사진과 함께 "충민사에 봉안한 영정을 찍은 것"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통영 한산도 제승당에 존재했던 장군의 초상화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1928년 4월 28일자 조선일보에는 제승당에 봉안된 진영은 누가 가져갔으며 남은 그림은 모사가 잘 되지 못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1928년 7월 5일자 동아일보에도 이와 동일한 영정이 나온다. '충무공유적사진첩'이라는 책에 제승당에서 1606년부터 충무공 영정을 모셔왔다고 기록돼 있다.
아산 현충사에도 전래 초상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산 현충사 봉안 영정과 충민사 영정은 같은 것이라는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
▲ 이상범 1932년 작(좌)과 동아대박물관 소장 영정(우)
일제시대 이후 유명 화가들이 자료를 참고해 영정을 제작했다. 간송미술관 소장 '한산 충무'(1918년)의 작가 안중식 화백은 이 영정을 그리기 위해 한산도를 직접 방문했다.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할 때 초상화를 그린 청전 이상범 화백 역시 여수와 통영, 한산도 등지를 답사했다.
이 화백은 "충무공 영정을 물색했지만 신통한 것은 없었다. 할 수 없이 한산도 제승당의 영정을 사본해왔고 통영, 여수 등의 사당에 모신 영정도 몇 점 봤다"며 당대 전래돼 오던 다양한 초상화를 대본으로 새롭게 그렸음을 털어놨다. 안 화백과 이 화백의 그림은 모본들이 같아서인지 느낌이 비슷하다.
현존하는 영정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는 동아대박물관 소장 '충무공 이순신상'은 살이 찌고 수염이 많은 전형적인 무인의 얼굴이다. 동아대 정재환 초대 총장이 1958년 4월 16일에 구입했으며 판매자는 기록돼 있지 않다.
판매자는 임진왜란 직후 이순신을 따라 종군했던 한 승려가 그렸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 초상화는 조선 말엽에 모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그와 함께 살았던 인물들의 인물평은 장군의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자료다. 충무공과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친분을 유지해왔던 서애 유성룡은 "공의 얼굴은 아담하여 수양 근신하는 선비와 같지만 마음 속에 담력이 있고 웃음이 적었다"고 썼다. 동아대박물관이 갖고 있는 무인상의 영정과는 전혀 상반되는 평가다.
충무공의 용모와 관련해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 있다. 삼가현(합천군)의 현령 고상안(1553~1623년)은 전란 중이던 1594년 한산도에서 개최된 수군 선발 시험에 참시관으로 참가하면서 보름가량 이순신의 진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고상안은 그의 문집에서 이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동갑인 이순신 통제사와 함께 여러 날을 생활해 보았는데 말 솜씨와 지혜는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를 가졌지만 얼굴이 풍만하거나 후덕하지 못하고 관상으로 볼 때도 입술이 뒤집혀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라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이순신 사후의 기록이어서 관상과 운명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한 듯한 인상이 풍긴다. 서애와는 사뭇 다른 인물평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얼굴에 살집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 기록상 충무공 용모와 닮은 현손 이봉상
이 둘의 묘사와 영정이 현존하는 충무공의 현손(5대손) 이봉상(1676~1728년)의 풍모와 매우 흡사해 관심을 끈다. 이봉상은 1728년(영조4년) 발생한 이인좌의 난 때 반란군에 의해 피살됐다. 충청도병마절도사로서 충주를 지키던 이봉상은 반란군에게 기습을 받아 싸우다가 한쪽 팔이 잘려 결국 체포됐다.
반란군이 "같은 편이 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이봉상은 "충무공의 후손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부하고 기꺼이 죽음을 맞았다. 그 조상에 그 후손이라 할만 하다.
그는 고상안이 언급한 것처럼 얼굴이 야위었으며 입술도 뒤집혀 있다. 그와 동시에 서애의 얘기대로 웃음이 적고 수양 근신하는 선비의 얼굴도 하고 있다. 이봉상의 초상화는 일본 교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 <한국초상화 읽기> -
|
첫댓글 많은 것을 알게 해주는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