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농민과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지난해 10월 소천하면서 7명에게 장기를 나눠준 전생수 목사의 유고집 ‘더 얻을 것도 더 누릴 것도 없는 삶’(도서출판 kmc)이 나왔다.
죽음을 준비하며 2004년 작성한 유언에 따라 2명에게 각막을,2명에게 신장을,1명에게 간장을,심판막 연골까지 모두 7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떠난 전 목사. 농부의 마음을 간직한 목사로서,치열한 수행자로서 평생을 살아온 그는 ‘반쪽 목사’ ‘만득이’ ‘허이(虛耳)’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정규 신학교를 마치지 않아서인지 스스로를 반쪽 목사라고 부르는 그는 온전한 목회자로 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또 농촌교회 성도들에게 살갑게 다가가려고 목사보다는 ‘촌놈’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만득이로 불리기를 즐겼다. 허이는 ‘빈 귀’라는 뜻이지만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역설적으로 ‘귀 있는 자로 살겠다’는 신앙의 표현이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충북연회 충주동지방 추평교회를 섬기다가 소천한 전 목사는 유고집 곳곳에서 농촌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믿음,슬픔과 기쁨을 표현했다. 전 목사는 이른 봄 돌미나리 햇순을 뜯고 있는 연로한 집사를 보면서 “평생을 흙과 함께 살아온 집사님은 땅이 생명의 품임을 터득하고 계셨습니다(27쪽)”라고 묘사했다.
여자 집사가 남편의 도움을 받아 교회 뒷간을 청소하는 걸 본 전 목사는 스스로 몸을 낮춰 뒷간 청소를 도맡았다(93쪽). 그의 뒤를 이어 추평교회를 섬기는 이기록 목사는 “그는 똥을 치우며 싱글싱글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코를 막곤 하는데(243쪽)”라고 전 목사를 회상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구부러진 허리에 쉬기를 몇 번씩 하며 예배당에 오곤 하시던 당신께서 아픈 몸을 딸에게 의탁하러 떠나셨다가 시신으로 돌아와 고향 땅에 묻히신 집사님(98쪽)”을 위해 전 목사는 “이제 허리 굽은 몸을 떨쳐내고 영원한 생명의 떡을 잡수시며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샘물을 마시세요(99쪽)”라고 기원했다.
빙판길도 마다하지 않고 온천길에 올랐던 마을 어른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든 것을 본 그는 “모두들 새색시 얼굴처럼 고왔다. 가으내 먼지 속에서 지내다 말끔히 씻어냈으니 곱지 않을 수 있을손가(103쪽)”라고 반문하며 어른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그렸다.
바람이라도 쐬었으면 좋겠다는 어른들을 모시고 동해에 갔다 온 전 목사는 “바람 스치고 지나가듯 휙 갔다 온 여행길이었지만 동해의 시원한 바다처럼 교우님들의 마음이 시원하게 맑아졌다면 얼마나 다행이랴(110쪽)”라고 흡족해 했다. 그는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도 진한 애정을 보여줬다. “몇 명의 아이들을 태우고 영월 별마루 관측소와 곤충박물관을 돌아보고 오는 것으로 여름성경학교를 대신했다(115쪽).”
구절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시편 136편을 읽은 전 목사는 성도들에게 “여러분의 시편을 써 보라”고 권면했다. 그랬더니 “사과밭에서 일하면서 나비를 보고 꽃망울을 만지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제 병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겸손할 수 있고 아픈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113쪽)”라는 성도들의 시편이 탄생했다.
농촌과 농촌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노인들을 “이 시대의 모퉁이돌(116쪽)”이라고 존경했고,가을걷이를 앞두고 쓰러진 벼포기들을 보면서 “일년 내내 녀석들을 가꾸던 농부들의 정성도 녀석들과 함께 쓰러져 아프다”며 노인들의 시린 가슴을 쓸어줬다.
전 목사는 베트남 새댁이 교회에 출석하자 “우리는 베트남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이 땅의 사람으로 삶의 뿌리를 잘 내리도록 도와주세요(121쪽)”라고 설교했고,평화 환경 장기수 역사 민주화 등에 대해서도 뼈대 있는 유고를 남겼다.
추평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전 목사가 가족에게 남긴 재산은 140만원으로 병원비로도 부족했다. 장기를 나눠준 전 목사의 시신은 화장한 뒤 고향인 강원도 인제군 나무 아래 뿌려졌다. 속초시에서 영세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는 박영자 사모는 “가난한 할머니들을 모시고 행복한 양로원을 운영하고 싶다”고 소원했다. 이 책의 수익금은 유족에게 전달될 예정이다(02-399-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