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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영성은 삶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한가운데에서 존재를 우선순위로 삼는 태도입니다.
마르타의 손길도, 마리아의 침묵도 모두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 위에 존재에 대한 의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성취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말씀 앞에 앉는 그 자리,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열립니다.
주님,
바쁘고 분주한 하루 속에서도
당신 앞에 머물게 하소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부드럽게 불러 주시고,
당신의 말씀 앞에
있는 그대로 앉을 수 있도록
저의 존재를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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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0. 연중 제16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손님을 맞이한 마르타는 손님 접대에 분주합니다.
이것 저것 신경 쓰고 있는 상황에서
마르타는 동생 마리아를 보게 됩니다.
자기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편하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의 바쁜 상황과 비교해서
마리아가 편하게 있다고 생각하니
마르타는 예수님께 불만을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가지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실 마르타도 마리아도
손님을 잘 접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손님에게 필요한 것이 없는지
먹을 음식과 마실 음료, 손과 발을 씻을 물을 준비합니다.
마리아는 손님을 잘 접대한다는 의미에서
손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두 사람의 초점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한 가지는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내 마르타의 초점은
예수님에서 마리아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동생을 비교합니다.
방향을 잃은 손님 접대는 불만으로 바뀝니다.
손님 접대에서 각자에게 좋은 몫이 있습니다.
누구는 시중을 들면서
누구는 대화를 하면서
손님을 접대합니다.
누구의 역할이 더 중요하고
누구의 역할이 더 크다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둘 다 필요한 부분이고
둘 다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우리는 이 두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한다면 두 역할을 바꿀수는 있어도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와 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기에
하느님과 관계 맺는 방식도 다릅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방식이 더 좋은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초점을 관계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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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0. 연중 제16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38-4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 박사는 우리가 살면서 하는 일들을 ‘중요한 정도’와 ‘긴급한 정도’라는 두 가지 기준을 토대로 4가지 항목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중요하고 급한 일, 두번째는 덜 중요하지만 급한 일, 세번째는 중요하지만 덜 급한 일, 그리고 네번째는 덜 중요하고 덜 급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중요하고 급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가장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은 ‘덜 중요하고 덜 급한 일’일 겁니다. 문제는 어떤 일을 ‘두번째’로 처리하느냐인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중요한 일’보다는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려고 듭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덜 중요하고 급한 일’을 먼저 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덜 중요하지만 급한 일’을 하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았던 일’이 당장 처리해야 할 시급한 일이 되어버리고, 시간에 쫓기면 마음이 급해져 중요한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가 많아질수록 삶에 있어서 정말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고 나중에 후회할 일이 늘어나겠지요. 그러니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지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주님께 시중 드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1독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천사들 일행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물과 양식이 귀하고, 살인적인 폭염과 매서운 추위가 번갈아 나타나는 사막지역에서, 길 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그의 생명을 지켜주는 매우 고귀한 일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렇게 고귀한 덕행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하느님을 모시게 된다고까지 믿었지요. 그래서인지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 근처를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모습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나가 환대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들을 시중들게 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청하면서, 귀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지극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합니다. 오늘날 우리 생각으로는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왜 그렇게까지하나 싶지만,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기에 만사를 다 제쳐두고, 자기 재물을 아낌없이 써가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많은 나이와 육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귀한 외아들을 얻게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시고 난 후 두 자매는 서로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언니 마르타는 그 집의 주인으로써 예수님과 그 일행들에게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반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가만히 앉아서 그분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마르타는 부아가 치밉니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던 예수님이 집에 오셨는데, 그래서 자신도 예수님 곁에 머무르고 싶은데, 동생 마리아만 그 좋은 몫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질투심이 생기고 화도 났던 겁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앉아있던 그 자리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일까요? 마르타는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르타도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마리아처럼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자신은 집 주인으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일이 예수님 곁에 가만히 앉아 그분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일을 먼저 했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는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먼저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마르타도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시중드는 일을 했는데 왜 그녀는 복을 받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는 커녕 예수님으로부터 ‘고생이 많다’, ‘정말 고맙다’는 칭찬 조차 듣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마르타를 나무라시는 것처럼 보이니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건 마르타가 주님을 시중드는 일을 아브라함처럼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기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동생에 대한 질투와 시기, 자신이 고생하는 걸 알아주지 않으시고 편 들어 주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섞여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봉사와 희생이 기쁨과 보람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지요.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면 조용히 마리아에게 가서, 지금 일손이 부족하고 시간이 촉박하니 언니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동생을 비난한 것은 그분께서 마리아의 이기적이고 철 없는 행동을 질책해주시기를, 또한 자신의 노고를 인정하고 칭찬해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이신 주님’을 섬기지 못하고 ‘사람이신 주님’만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비교하여 누가 더 잘했는지 우열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대체 왜 그렇게 속좁게 굴면서 다른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느냐고 마르타를 질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은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며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을 먼저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당신을 위해 하는 일 자체에서 보람과 기쁨을 찾지 못하고, 시기 질투 원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에 휘둘려 스스로를 깊은 불행에 빠뜨리는 것에 대한 염려와 걱정입니다. 또한 그녀도 마리아처럼 정말 중요한 것을 먼저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좋은 몫’으로 여기기를, 그 좋은 몫이 주는 기쁨과 보람을 쓸 데 없는 걱정과 근심 때문에 잃지 말고 소중하게 잘 지켜가기를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따라 신앙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한 가지’는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하여 즉시 실행에 옮기는 일입니다. 내가 선택하여 실천하는 그 일을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좋은 몫’이라 생각하며 소중히 여겨야 그것이 주는 기쁨과 보람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과 나를 비교하거나 시기 질투하지 말고 내가 가야할 방향만 바라보며 힘차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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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90
7월20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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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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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안동교구 안영배 사도 요한(한국가톨릭농민회협의회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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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봉사에 여념 없는 마르타가 아니라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시는 듯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따라서 자신의 일상생활이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몰입할 수 없는 평신도들께서 약간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담컨대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이전, 3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평범한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30년의 세월은 복음사가들조차 별로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청년의 삶을 사셨던 나날이었습니다. 때로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도 하셨을 것이고 마당도 청소하셨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동고동락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도와 묵묵히 대패질에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다 만든 물건을 납품하러 다니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30년이란 세월 동안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참 인간으로서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가치’를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평신도들께서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가를 몸소 삶으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우리의 이 일상적인 일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마주치게 되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일상의 삶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 만사 안에 늘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는 노력(Finding God in All Things)을 계속할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기도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참으로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사 안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자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능동적이었던 박해시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교계제도가 확립되어가면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화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했던 초기교회의 탁월했던 평신도들의 영성이었는데, 성직자들의 역할이 강화되어가면서 힘을 잃어갔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와 불충분한 개념 정립은 평신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불이익과 손실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신도 영성의 쇠락은 교회의 퇴보와 늘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과제 하나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입니다. 평신도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평신도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창의력을 존중하고 교회 쇄신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2중대가 절대로 아닙니다. 장교인 사제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병사 역시 절대로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고 그들의 업무가 과중하기에 이를 보완해주기 위한 존재도 결코 아닙니다.
평신도들 역시 성직자나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복음적 완덕에로 불림을 받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단 평신도들께서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이나 성전 안에서 살지 않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의 성화 여정은 당연히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 전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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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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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이것만 물어보라>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집에 방문하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타는 손님 대접을 위해 마음이 온통 분주합니다. 성경은 그녀가 “온갖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루카 10,40)라고 표현합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최고의 식사를 대접하고, 가장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 자체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각,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일손은 부족하고 마음은 조급해진 마르타는 결국 예수님께 볼멘소리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가서 저를 도우라고 이르십시오.”(루카 10,40) 이때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주신 답변은,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봉사와 수고를 절대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녀의 ‘분주한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만약 마르타가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말도 들을 필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 즉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doing)’에 집중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느냐(being)’에 집중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마키아벨리가 쓴 『악마 벨파고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지옥의 왕은 인간 세상에서 결혼 생활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 알아보기 위해 악마 벨파고르를 지상으로 보냅니다. 부유한 귀족으로 변신한 벨파고르는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지만, 그의 삶은 곧 지옥보다 더한 고통으로 변합니다. 사치와 허영에 빠진 아내는 그의 재산을 물 쓰듯 썼고, 돈이 떨어지자 온갖 경멸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벨파고르가 겪은 고통의 근원은 단 하나였습니다. 아내는 ‘벨파고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재산과 지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사라지자 사랑도 사라진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영화 ‘슈퍼맨’으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던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95년 승마 경기 도중 낙마하여 목 아래로는 전신이 마비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하늘을 날던 슈퍼맨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존재가 되자,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 아내에게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다나는 남편의 눈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가졌던 그 무엇과 결혼한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과 결혼했어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에요.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이 말은 꺼져가던 그의 삶에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아내의 사랑은 ‘슈퍼맨’이라는 화려한 배우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전신마비가 된 ‘크리스토퍼 리브’라는 한 인간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지지와 사랑에 힘입어 재활에 매진했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척수 마비 환자들의 권익을 위해 평생을 바치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자칫 주님이 아닌 주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0년 동안 정말 죽을힘을 다해 사목했지만 신자 수는 늘지 않았고, 교회의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십자가 앞에 엎드려 절규했습니다. “주님,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깜짝 놀란 그는 되물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성공했다면, 그것이 너의 성공이었겠느냐?”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공의 영광은 자신의 것으로 돌리고, 실패의 책임은 주님께 미루는 모순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장 극적인 예는 ‘기적의 순교자’로 불리는 베트남의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입니다. 그는 주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무려 13년 9개월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중 9년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독방이었습니다. 처음 몇 년간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습니다. 그는 사목자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찾아와 물으셨습니다.
“투안아, 너는 나를 선택했느냐, 아니면 나의 일을 선택했느냐?” 이 질문 앞에서 그는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주님의 일’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말입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다른 모든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 고백의 순간,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모든 고통과 어둠, 무력감이 사라지고 참된 자유와 평화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감옥은 그에게 주님과 가장 깊이 만나는 사랑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유능한 ‘가정부’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신랑이신 그리스도만을 갈망하는 순결한 ‘신부’가 되고 싶습니까? 진정한 신부는 신랑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스스로에게 이 질문 하나만 던져보면 됩니다.
“나는 하루 중 어떤 시간을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망설임 없이 ‘기도 시간’일 때, 우리의 신앙은 길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내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과 그냥 ‘함께 머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신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기도 시간이 줄어든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곤 합니다. 신자분들 중에는 평생 신부님이 성체 조배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르타처럼 주님을 위한 봉사에 분주하여, 정작 주님 곁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자리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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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당 전구 교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장 난 전구만 바꾸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구를 바꾸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기가 흐르는 길, ‘배선’을 먼저 점검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전구를 갈아 끼워도 전기가 흐르지 않으면 불은 켜지지 않습니다. 천장을 열고, 도면을 살피고, 전기가 끊긴 부분을 고친 뒤에야 마침내 불이 환히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빛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형식이나 노력만이 아니라, 그 빛이 흐를 수 있는 내면의 통로를 먼저 고치는 일, 즉 마음의 배선 작업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기 쉬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열매 맺기를 바라면 먼저 씨를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을 때도 먼저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잘 모르는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환대하였습니다. 손님들이 피곤을 풀 수 있도록 목욕물을 제공했습니다. 아내 사라에게 음식을 마련하도록 하였습니다. 종들에게 튼실한 송아지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부모님처럼, 오랜 친구처럼 그렇게 환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3,500년 전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환대를 받았던 분은 사실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아브라함에게 100세가 넘은 아브라함에게 내년에는 늙은 아내가 아이를 출산할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느님 사람의 축복은 현실이 되어,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서 아이를 얻었습니다. 성서의 일관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의 환대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세였습니다. 그는 “혹시 이 낯선 사람 안에 하느님이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전기가 흐르는 배선처럼,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들 수 있는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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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루카 10,40)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외롭고(“혼자”[10,40]) 아무도 자신을 신경 써 주지 않는다고(“내버려 두는데도”[10,40]) 느낍니다.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이러한 느낌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마르타도 다른 사람 때문에 어렵다고 여기어 그를 변화시키려고 합니다(“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10,40].)
이제 주님께서 마르타를 도와주십니다. 상대에 대한 친밀감의 표시인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면서 그의 영혼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는 마르타가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10,41)
마르타는 예수님을 모셔 들였지만 예수님은 잊은 채 일을 중심에 두고 일에 끌려다니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이런 상태에 빠지는지요!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해 주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10,42).
어차피 사람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일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때 정말 필요한 한 가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마리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이 무엇인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 주십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섬기려 모셨고 예수님께서도 마르타를 돌보고 계십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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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38-42: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씀은 제1 독서의 아브라함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주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인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일을 보여주면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손님 접대의 의무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손님 접대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모습 자체를 알아보도록 해야 한다는 신앙의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이든 간에 모두가 다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메시지 표지로 삼으신 그들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그네, 가난한 이, 굶주린 사람 등으로 나타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이는 단순히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 하나를 대접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거나, 베타니아에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환대를, 카파르나움과 예리코에서 마태오와 자캐오의 환대를,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의 초대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셨던 그리스도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과 우정의 축제를 지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과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새로운 아브라함의 천막이 될 수 있고, 또한 진실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바로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새로운 베타니아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는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 찬 나그네 대접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두 자매의 서로 다른 태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자매는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분께 자신들의 사랑을 바쳐드리고자 한다. 마르타에게 중요했던 것은 갑작스럽게 오신 주님께 훌륭한 식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도와주지 않는 것이 짜증이 났다. 그래서 주님께 제 뜻을 거들어 달라고 청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40절) 그러나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채우는 것이었다. 그분이 찾아오시는 것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순종하는 자세로 진리와 사랑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말에 마리아를 옹호해 주신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필요한 것은 한 가지”(42절),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면 식사나 음식은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그가 선택한 것은 상해버리거나 없어져 버리지 않는 그러한 몫을 택한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완성될 실체이다.
주님을 맞아들이는 데 두 자매의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마르타의 잘못은 주님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데 몰두한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41절)하여 그 일의 결과를 돌려드려야 할 대상인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떨어지기 쉬운 위험은 행동주의에 빠져 “내 활동이 모두 기도다.” 하면서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자기 자신만 찾게 된다. 반면에 오직 귀 기울여 들으려는 자세와 자신을 비울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내용과 가치 있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르타는 스승의 메시지를 우선 내면 깊숙이에 새겨듣는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분을 알리고 그분을 특별한 상황에 있는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안에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마르타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려면 더 깊은 관상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42절)임을 알게 되면 쓸데없는 일들에 시간을 덜 낭비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예수님께서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알아, 그분으로 자신을 채울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습을 닮고 그 모습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통해 그분도 채워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도 주님의 뜻을 헤아려 우리가 그분으로 채우는 동시에 그분의 모습인 우리 이웃들을 통하여 그분의 배고프심과 목마르심을 채워드리는 손님 접대, 이웃 사랑의 삶이 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청하며 살아가도록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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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르타, 마리아, 예수님>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 마리아, 예수님>
◇ 마르타 ◇
오늘 따라 예수님께서 너무나 피곤해 보인다. 하기야 당신 몸 돌보지 않고 쉼 없이 사람들을 만나시고 가르치시느라 동분서주하시니 그럴 수밖에 없지.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지. 요즘 들어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마음고생은 또 어떠하실까. 우리 집에 얼마나 계실지 모르지만, 그동안 드시지 못한 것도 맘껏 드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모처럼 편히 쉬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지.
가만, 예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더라. 갓 구워낸 빵과 양 구이가 좋겠구나. 아니 손 씻으실 물부터 갖다 드려야 하는데. 기왕이면 식탁도 예쁘게 꾸며야 할 것 같고. 지난번에 깨끗이 빨아 놓은 식탁보가 어디에 있더라. 꽃도 좀 사다 놓을까. 할 일은 많은데 일손이 부족하네.
마리아가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얘는 예수님께서 쉬시지도 못하게 옆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아, 예수님께서 지난 번 고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시는구나. 나도 듣고 싶은데. 있다가 밥 먹으면서 듣지 뭐. ‘마리아야, 나 좀 도와줘. 예수님께서 시장하시니까, 빨리 음식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 ‘응, 언니.’ 아니, 얘는 대답만 하고 왜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 거야.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내 편을 들어주시리라 생각했는데.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지. 속상하다.
◇ 마리아 ◇
언니가 예수님을 모셔왔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뵙다니. 너무 설레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예수님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듣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언제 이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아무튼 너무 기쁘다.
역시 우리 언니는 대단하다. 음식이면 음식, 방 정리면 정리, 하여간 못하는 것이 없단 말이야. 그래도 혼자 하기는 벅찰 텐데. 내가 어설프지만 뭐라도 도와야 할 텐데. 근데, 언니랑 내가 이래저래 분주히 일하면 예수님께서 혼자 어색해하지 않으실까? 내가 옆에서 말벗이라도 되 드려야 할 것 같아. 언니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언니는 워낙 뭐든지 혼자서도 잘 하니까, 이해해 주겠지.
‘마리아야, 나 좀 도와줘.’ ‘응, 언니.’ 흔쾌히 대답을 했지만, 예수님께서 한창 흥에 겨워 말씀하시는데,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언니, 미안해.’ 언니는 나를 이해해주리라 믿어.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언니가 내게 화가 났나 보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기분이 마냥 좋지만 않다. 왠지 언니에게 더 미안하다.
◇ 예수님 ◇
마르타야, 집으로 초대해주고 환대해 주어서 너무나 고맙구나. 덕분에 편히 쉬면서 그동안의 무리한 일정 때문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단다. 참, 네 동생 마리아 말이야. 참으로 기특하더구나. 내 발치에서 꼼짝 않고 하느님나라며 복음이며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지. 물론 네가 내 시중을 드느라 애썼기에 동생이 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단다. 이 역시 고맙구나.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지. 하지만 너희 자매가 모두 일한다고 내 곁을 떠나면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할까. 난 네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다. “마리아야! 내가 지금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구나. 잘 들어 놓았다가 나중에 나에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 해주겠니. 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구나.”라고 말이야.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내 말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렴. 내게는 너희 자매 모두가 소중하고 필요하니까. 네 덕분에 맛난 음식도 실컷 먹고 편히 쉴 수 있었고, 마리아 덕분에 모처럼 세상 사는 이야기 행복하게 나눌 수 있었단다.
◇ 주님의 길을 걸으며 바치는 기도 ◇
착하고 고우신 하느님
정의와 평화의 주님
당신과 함께
당신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 길이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벗들이 함께 함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벗들의 길과 저의 길이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벗들에게 주신
벗들이 걷는 당신의 길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으며
저에게 주신
제가 걷는 당신의 길에
기쁨과 열정으로 충실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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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것이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것이 곧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받아먹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면서 양들을 먹이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것이 곧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일이 바로 ‘미사 전례’입니다.
우리는 미사의 ‘말씀의 전례’ 때에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양식을 받아먹고, ‘성찬의 전례’ 때에는 ‘주님의 몸’인 ‘성체’ 라는 양식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는,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받아먹는 잔치”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봉헌금을 바치는 순서가 있긴 하지만, 봉헌금은 가장 중요한 요소도 아니고, 필수 요소도 아닙니다. <평일 미사 때에는 봉헌금을 바치는 순서가 아예 없습니다. 만일에 주님께 헌금을 많이 바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사이비 종교입니다.>
2)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라는 가르침을 잘 드러내는 일이 ‘빵의 기적’입니다.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 8,1-3)
지금 이 상황은, 군중이 사흘 동안 계속 굶은 상황이 아니라, 먹을 것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함께 지낸 사흘 동안에는 먹을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군중에게만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도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고, 군중만 굶는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도 굶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마르 8,6-9)
<그 기적은, 군중이 각자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힘’을 주기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은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청하는 ‘일용할 양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오늘 필요한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3) 요한복음 4장에 있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1-34)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실 때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고(요한 4,8),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서 돌아왔을 때에는, 그 여인은 고을로 돌아간 뒤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호의호식하는 것은 전혀 바라시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만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따라서 음식을 잘 장만해서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잘 따라가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4) 다시 마르타의 이야기를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마르타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그의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서 방문하신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기가 예수님을 접대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마르타가 예수님을 잘 섬기려고 애를 쓴 일은 분명히 좋은 일이고, 마르타의 그 마음과 정성 자체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님을 잘 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단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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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밥보다 말씀이 먼저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먼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8,3)고 하셨고, 실제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요한 1,14)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아주 가깝게 오셔서 영적인 양식을 주십니다.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가운데 복을 받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과의 만남의 깊이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영육의 합일체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구지 영과 육으로 구분해 본다면 ‘영을 지닌 육이 아니라 육을 가진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밥도 먹고 말씀도 먹어야 산다고 할 때, 말씀이 먼저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이지, 밥을 먹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25절이하에서 주님께서는 세상걱정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6,33)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 4장12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말씀이 우선입니다. 근본을 택하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타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마르타는 열심히 음식준비를 하였습니다.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타가 참다못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활동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마르타와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역할이 다 필요하지만 무엇이 근본적인 선택이고 우선이냐를 생각하면 마리아의 몫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르타도 자기가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으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 준비하였으면 그것으로 행복해야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와 비교하여 시기나 질투, 얄미운 마음을 갖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처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신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마르타는 깜박 잊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으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섬기는 최상의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일에만 너무 집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 버렸습니다. 그녀에게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활동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생활에도 선택과 집중이 요구됩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님을 경청의 달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마리아도 경청에 몰두하였습니다. 우리도 경청의 달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르타의 유형으로 삽니다. 가끔 신부가 가정 방문을 가면 텔레비전을 켜 놓고는 ‘잠깐 보고 계십시오’ 하고 말한 다음 차나 과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신자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과일이나 음식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지만 그래도 체면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모습이 꼭 마르타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활동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 동네 다 쫓아다니며 봉사한다고 합니다. 음식도 만들고, 청소도 하고, 단체 활동을 많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이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 없이 자기만족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마리아 유형을 흉내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서서 하는 활동은 아예 외면하고 성체조배를 한다. 무슨 기도회를 한다. 신심활동을 한다면서 자신의 기도 생활에만 열심입니다.
사실 기도를 제대로 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그렇다면 기도와 실천이 어우러진 삶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고 실천하는 신앙생활이 조화를 이뤄야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이중생활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활동과 기도의 조화는 꼭 필요합니다. 사실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와야 바른 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활동이 되려면 기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활동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기도가 없었다면 그 일은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더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활동은 힘을 잃게 됩니다. “활동은 창조사업의 연장이요 구원사업의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기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성 줄리 빌리아르)
기도를 뒷전으로 미루고 활동을 앞세우는 것은 아무래도 내세우고 싶은 교만함이 쌓여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실 겨를이 없이 바쁘셨지만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새벽에, 한 밤중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업이 바쁘다고 주일을 소홀히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한 주간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주일 하루는 쉬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보내기 위해서 한 주간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에 주님과 함께 쉬기 위해 한 주간을 정성껏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한 주간이 즐겁습니다. 사업뿐 아니라 모든 것이 잘되어 복으로 돌아옵니다.
주님을 만나는 기쁨으로 일하십시오. 그리하면 분명히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의 영적인 축복과 경제적인 물질의 축복도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이든 근본을 바로 세우십시오. 길이 열립니다. 사실 마리아가 선택한 몫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것에 앞서 하느님을 알고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한 주간 밥보다 말씀을 우선 선택하여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복을 짓고, 주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출처 - 신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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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권오준 B. 루치아노 신부님]
<둔 예 검>
한때 둘 다 나의 동지였던 후배 부부와 30여 년 만에 식사를 같이했다. 밥술 먹는 식당에서 아내는 늘 그래왔다는 듯이 휴대용 컵을 꺼내어 물을 따르고 아이와 남편도 그것으로 물을 마신다. 이유는 이제는 거의 모든 식당에서 제공하는 일회용 종이컵을 쓰지 않기 위해서. 일상 안에서 생태적 삶의 실천을 강의하고 다니는 나는 당연한 것이니 별다른 멘트 없이 고기 굽는 것에 열중한 사이 갑자기 부부간에 불꽃이 튄다. 조금 전에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였던 휴대용 컵 사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벌어진, 부부간에 흔하지만 첨예한 대립이다.
남편은 아무리 뜻이 좋아도 좀 여유롭게 해야지 방식이 너무 과하게 하는 건 불편하다, 반면 아내는 지금 당장 이것저것 해도 모자랄 판에 뭐가 과하냐며 언성 높여 맞선다. (이것들이 집에 가서 쳐 싸울 것이지. 오랜만에 만난 내 앞에서. 나는 뭐 안중에도 없냐! 내가 만만해?).
둘 다 생태 위기를 인정하고, 또 일상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일치하지만, 나는 여기서 둘의 차이점을 금방 발견했다. 그 흔한 성격 차이도, 의견 차이도 아닌 위기의식 즉, 체감의 차이다. 남편도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자식들을 키우고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고는 싶지만, 생태 위기를 비상 위기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러하듯이 당장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윤택하게 키울까를 고심하지 어떻게 해야 깨끗한 공기와 파괴되지 않은 자연을 물려줄까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고인이 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런 말씀을 했나보다. “지구는 우리가 부모에게서 받은 유산이 아니라, 우리가 풍요롭게 만들어 되돌려 주도록 우리 자녀가 우리에게 빌려준 자산입니다.” 그러니 잘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칼에는 칼끝의 예리함에 따라 예검과 둔검이 있다고 한다. 내가 그 녀석의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가 평생 휘둘러온 예검은 이제 제발 던져 버리고, 둔검을 꺼내 들어 다른 이를 부드럽게 설득하는 법을 배워, 실질적인 효과를 보라고 하고 싶다. 반면, 남편에게는 오랜 시간 휘둘러서는 안 되지만, 너는 당장 예검을 꺼내 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줄 이 세상을 날카롭고 예민하게 보고 가열차게 변화해야 하는 시기를 마련하라 말하고 싶다.
예리함이 없는 둔검은 어디서나 쓸 수는 있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그 칼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 못 하니 예검도 함께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런 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혹 사람이라면 가능할 수 있는 둔검, 예검을 동시에 지니라는 것이다. 둘 다 옳지만 한 가지만 고집하면 결국 둘 다 틀리고 만다.
사실, 그날 두 녀석이 보인 모습은 내가 늘 고민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생태, 생명에 대한 실천적 교육과 강조가 혹 관계 안에서 평화를 깨는 것이 아닐까를 우려하지만, 이내 금방 늘 같은 결론을 내린다. 잠시 동안의 편안과 평안을 위한답시고 그 평화조차 떠올리지 못할, 생명과 기본적인 삶마저 무너뜨린 세상을 맞이하는 것보다야 이런 불편함이 훨씬 낫지 않을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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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강민성 시몬 신부님]
<분주함을 멈추고 말씀 앞에 머무는 시간>
현대인은 늘 바쁘게 살아갑니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불안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뒤처질까 두려워 끊임없이 무엇이든 하려 듭니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합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러한 현실을 ‘피로사회’, 더 나아가 ‘불안사회’라 부릅니다. 더 이상 누구도 우리를 억누르지 않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는 초조함과 피로가 쌓여 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복음 속 마르타의 분주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정성껏 맞이했지만, 자신의 일에 몰두한 나머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조용히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단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마리아가 그‘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하십니다.(루카 10,41-42 참조)
오늘날 많은 이들이 마르타처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좋은 몫’을 갈망하고 선택하길 바라십니다. 그 ‘좋은 몫’은 주님 곁에 머물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일을 하지만, 그 중심에 말씀이 없으면 쉽게 길을 잃고 지치게 됩니다. 반대로, 말씀 앞에 잠시 멈추어 귀 기울일 때 삶은 정돈되고, 불안하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찾게 됩니다.
마음이 지치고 불안할수록, 더욱 말씀 앞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마르타처럼 분주함에 머물 것인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 갈림길 앞에 선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삶을 어루만지고 변화시키며 악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라지지 않는 기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가 택했던 ‘좋은 몫’입니다.”
이번 한 주간,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주님의 말씀 앞에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잠깐이라도 괜찮습니다. 그 시간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 주님과 깊이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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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임성호 베네딕도 신부님]
"주님께서 보살피고 살려 주시어 땅에서 복을 받으리라."(시편 41,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농민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9.11)
농부들은 하느님께서 창조 때부터 주신 ‘씨앗’을 땅에 뿌리고 보살피며 가을의 풍요를 마련하는 이입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례를 거행하듯 ‘하늘 일’(天職)을 오직 굵고 누런 두 손으로 끊임없이 잇고 있나니, ‘주님께서 보살피고 살려 주시어 땅에서 복을 받으리라.’(시편 41,3 참조)
‘땅’을 대하는 농부의 마음을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이 비단 기도나 전례에만 있지 아닐 바에야, 분명 하늘을 두려워하고 하늘 뜻을 따르며 하늘 앙망의 눈길, 손길은 가히 농부의 관상이자 농사 사도직입니다.
한낮 볕 아래 켜켜이 밭고랑, 논두렁으로 가득한 농부의 이마 주름, 맑고 깊은 혜안의 눈동자는 가늠할 수 없는 지혜의 밝은 흔적입니다. 매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씨앗’을 먹고 살지만, 진정 ‘씨앗’을 만들어 내는 창조의 힘은 그 누구에게도 가당치 않으니, 다만, 농부의 눈과 손을 빌려 하느님께서 어제도 오늘도 지금도 ‘씨앗’을 돌보고 계시니 그저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땅’도 농부와 함께 익어가고 늙고 아픕니다. 아침 외양간 누렁 소가 혀를 빼물고 한 여름날 열심히 일한 노고에 ‘고맙소!’ 하며 따뜻하게 소죽을 끓여주는 농부의 마음은 위로입니다. 소처럼 ‘농부’도, ‘땅’도 이제 오래도록 익고 늙어 손목이며 팔목, 어깨며 허리,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쉴 때가 되었습니다. 쉬엄! 쉬엄! ‘쉼을 위한 창조 영성 노래’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농민 주일 맞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참조)라고 하셨고, 하느님께서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 1,29)
하느님께서는 ‘땅’, ‘농부’와 함께 일하시며 온갖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한히 갖고 싶은 욕망이나 소비하려는 마음은 반드시 내려놓고, 생명을 해(害)치려는 그 어떤 생각이나 계획, 의도도 지금 즉시 멈추며, 내 주변에 있는 생명이 ‘있음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기며 ‘공동의 집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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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거리에 돈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요? 아마 돈을 줍기 위해 온 힘을 쏟을 것입니다(돈 주인에게 돌려주든 아니면 자기가 갖기 위해서든).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나뒹구는 돈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돈 욕심이 전혀 없는 착한 사람들만 사는 곳일까요? 아닙니다. 돈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나뒹굴어도 아무도 줍지 않았고, 환경미화원이 쓰레기 치우듯 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땔감으로 화폐를 사용합니다. 빵 한 덩어리를 사기 위해 돈을 수레 가득 싣고 가야만 합니다.
아프리카 후진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가장 선진국이라고 하는 독일의 옛날 모습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패해 이후, 독일 정부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분별하게 화폐를 발행했고, 그 결과 물가는 전년 대비 1조 배 이상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혼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극단주의 세력의 등장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나치 정권의 집권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혼란은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나만 잘되고, 안정적으로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평안할 때 나도 평안할 수 있었으며,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 나 역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기심과 욕심. 이를 없애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어디서 해야 할까요?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그리고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지만,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마르타가 말합니다.
마르타가 처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일 때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자기를 돕지 않고 주님 발치에 앉아 있는 여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가 깨진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은 여동생이 아닌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불편함을 따질 것이 아니라, 모두가 평안함을 따져야 했습니다. 자기의 불평등을 따질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따져야 했습니다. 그래야 혼란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단치는 것으로도 보이지만, 사실 애정과 부드러움을 담은 부르십니다.
함께하는 마음에서만 진정한 평화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의 불편함, 자기의 불평등만을 따지다 보면 결국 자기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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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10,38.42)
사람이 살다 보면 지치고 힘들 때, 가서 쉴 곳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쉴 곳은 바로 삶의 쉼과 삶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야 부모님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휴가 갈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 휴가도 허락받았고 휴가비도 받았지만, 막상 갈 곳이 없다는 게 여간 불편하고 당황스럽더군요. 수도 생활하면서 바쁜 사도직으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 때 단지 혼자만이 보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머물면서 사람 냄새도 맡고 사람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비울 것은 비우면서 새롭게 시작할 필요를 많이 느낍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기꺼이 받아 줄 사람과 환대하는 집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이는 단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반겨 준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이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겐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녀들의 오라버니 라자로는 누구입니까? 먼저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 여정에서 쉼이 필요할 때마다, 마르타와 마리아 집을 방문해서 쉬셨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요11,5) 그러기에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찾으셨고,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주기도 할 만큼(요12,1~8) 예수님은 이 가족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엔 손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면 처음에는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존재가 되지만, 서로를 잘 알고 익숙하다 보면 때론 그 위치가 바뀌어 손님이 주인에게 베푸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즉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되는 것인데 이를 잘 증명해 준 사례가 바로 오늘 독서의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주님의 천사 셋을 보고 손님으로 맞아들인 경우와 같습니다. (창18,1-10)
이 점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그리고 마르타와 그 여동생인 마리아를 통하여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자신들의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이 마르타에게는 오직 음식 대접을 필요한 손님으로만 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당하신 거부로 마음이 복잡했고, 이제 곧 예루살렘에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는 그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라도 그 짊을 내려놓고 누군가가 관심 가져주고 이해해 주고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당신 죽음에 대해 예고를 할 때마다 이해받지 못한 것은 물론 다들 진저리를 내고 들으려는 마음이 없음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이런 당신에게 마르타는 당신을 맞아들이면서 당신을 접대한답시고 일로 분주하였고, 그로 인해 몸도 마음도 무거워서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10,40)라고 마리아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예수님께 쏟아 냈던 것입니다. 이런 마르타의 불편한 느낌이 드러난 부분은 마리아의 이름 대신 ‘동생’이라고 호칭하는 표현에서 잘 드러납니다. 또한 이런 마르타 내면의 감정 표현은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함을 통해서 질문에 대한 답이나 해명을 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속내를 쏟아 냈던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마르타의 느낌은 물론 그녀의 목소리 톤도 강하게 느낄 수 있는데, 이에 반해 예수님의 목소리나 느낌은 무척 차분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마르타야 ,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구나.”(10,41) 사실 마르타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삶에는 많은 복잡한 일과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과 책임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진정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놓쳐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타를 책망하기보다 에둘러 말씀하십니다. 사실 주님을 환대하면서 대접도, 시중드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영원히 가치 있는 한 가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주님 발아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금 지치고 힘든 일을 눈앞에 두고 계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함께 공감하려는 마음으로 다만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표현은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10,38)라는 표현 중에서 좋은 몫이란 단어입니다. 여기서 좋은 몫이란 곧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타가 준비 중인 음식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잔치와 대비해서, 식사의 가장 좋은 몫은 부엌에 있지 않고 마리아가 앉은 자리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말씀의 잔치에 무게가 더 쏠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친교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일이란 수많은 반찬과 양념 접시만 두루 갖춘 뷔페 식사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혼인 미사를 주례하고 난 뒤, 뷔페 식사를 가장 싫어합니다. 그렇잖나요. 수많은 하객 속에서 서로 먹겠다고 난리 아닌 난리를 치며 먹는 뷔페는 먹고 나면 후회하고 실망합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우리 모두에게 삶을 단순화해야 하고, 중요한 한 가지 일이란 바로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는 일보다 더 마리아처럼 중요한 몫과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의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께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 하지 다른 일에 정신을 팔아서 아니 됩니다.
혹여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성인들 가운데 결혼한 여성이 그렇게 드문 이유는 다름 아닌 순결이나 자녀 문제라기보다 주로 마음이 갈라지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하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실 아내와 어머니이며 주부로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분산되어 살아가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갈라지게 하는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함을 유지하고 생활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씨름해야 하는 물음과도 같습니다. 그 해답은 오늘 복음의 마리아처럼 삶의 가장 분주할 때라도 잠시 멈춰서(시46,11참조) 주님 앞에 머물기 위해 시간을 내어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면 됩니다. 시간이 없겠지만 최소한이라도 주님 발아래 앉는 쪽을 선택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많은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좋은 몫을 선택한 곳이며 삶의 재생과 활력을 되찾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많은 일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고 그분의 보살피심을 받아들이면서 그분의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엔 예수님께서 받는 존재가 아니라 베푸시는 존재가 되실 것이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마태20,28)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온전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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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많은 것이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성장하고
관계를 통해
사랑을
실천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통로인 관계는
무엇이
더 본질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먼저입니다.
마르타는
해야할 일에
갇혔고
마리아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그분 앞에
머무는
시간 안에서
우리는 기쁘게
깨어납니다.
사랑이
머무는 곳에
하느님이
머무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바로설 때
모든 관계가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진짜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중심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듯
보이지만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
중심입니다.
중심을 잃으면
방향도 잃습니다.
일관된 신앙과
삶의 힘은
중심에서
나옵니다.
바로 그 중심에서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조용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삶의 중심과
방향을
가장 좋으신
하느님 안에서
다시 찾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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