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돌아보는 공동체
“서로 돌아본다”라고 하면
‘아, 이건 아주 의도적인 거구나’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말은 피상적 만남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진지하게 만난다는 의미입니다.
피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서로 돌아보는 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서로”라는 말이 참 중요한데,
관계는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돌아본다는 게
우리에게 사명이 됩니다.
‘서로’라는 공동체를 좀 더 생각해봅시다.
교회의 소그룹 공동체가 ‘사명’과 연관이 있는 건
세상의 공동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서로 돌보고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서로’를 이룹니다.
세상은 자기 유익만 구하라고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 세상의 모든 지체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공동체를 “지체”로
비유했습니다(고전 12장).
이 지체의 비유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므로 몸의 어떤 부분도
서로에게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는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데
호수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드릴로
자기 자리에 구멍을 뚫으며
“내 자리에만 구멍을 뚫으니까
염려하지 마!”라고 말한다면,
정말 염려하지 않아도 될까요?
어거스틴은 죄에 집단성(사회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죄는 절대로 혼자 짓지 않으며,
모이면 혼자일 때보다
죄짓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거지요.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공동체에 영향력이 확산되고,
한 사람의 부정적 영향력으로 공동체가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함도 같은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약하고 추하고
죄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도 붙들어줌으로써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당신의 공동체는 어떤가요?
죄의 전염성이 있는 곳인지,
구성원들이 서로를 돌아봄으로
선한 영향력을 가졌는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전 4:9-11
공동체란 좋은 일만 아니라
가장 험하고 어려운 일을 함께 헤쳐나가는 것이고,
함께 자멸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위협 아래 있을 때,
너무 춥고 서러운 곳에 있을 때일수록
공동체가 더욱 필요합니다.
악의 위협 가운데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가 의지할 수 있을 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례식에 가보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장례를 치르는
3일 내내 교우들이 와서 함께하며
자리를 지키는 가정도 있지만,
너무 사람이 없어서 공동체 리더와 코치에게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자리를 좀 채워야 하지
않겠어?”라고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참 안타까울 때입니다.
전에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회복 중인 권사님을 심방했는데
그 분이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기도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아,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살았구나.
내가 필요할 때 기도를 부탁할 사람이 없구나’ 하고
깨달았어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권사님의 삶을
이만큼 연장해주셨으니 사명이 되도록
사시라고 권면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난과 아픔의 시간에
함께한 사람에게는 그가 아픔을 당할 때
함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아픔을 당하지 않고
고통을 나누지 않은 사람에게는
힘든 시간을 지날 때 함께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공동체를 이루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만들어집니다. ⠀
-하나님의 마음 알기, 김병삼
출처: 향유 냄새 나는 집 - 아굴라와 브리스가 원문보기 글쓴이: 아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