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68]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삶은?
가족묘지(150평) 벌초를 하고나면 기분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진짜로 ‘착한 일’을 한 듯해 뿌듯하다. 어머니를 비롯해 숙부모, 조부모, 합장 증조부모 다섯 기(基)의 봉분에 올라 예초기를 들이댈 때면 ‘어머니 이발해 드리러 올라갑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부모님 머리 깎아드립니다’고 혼잣말을 한다. 1년에 두 차례(양력 7월초순과 추석 직전)는 해야 수고로움이 조금 덜한다. ‘처서가 지나면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래도 빈말인 듯, 두 달도 안돼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면 질려버린다. 어제 비온 뒤끝이라 해가 나지 않아 오전 2시간 꼬박 매달렸다. 지하에 계신 당신(존칭)들도 이발이나 한 듯 개운할 것 같다. 2,3일후 풀들이 바짝 마르면 갈퀴로 긁어모으면 추석 준비 완료.
‘나홀로 벌초’를 하면서 올해 처음 든 생각을 말하겠다. 나로서 4. 5대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는 있지 않고 묘비만 있을 뿐이다. 원래의 묘는 구례 간전면의 ‘삼배등’에 있다고 하는데, 당신의 고모부(박진규)가 12살 아버지를 데리고 가 알려줬다고 한다. 오직 100살 된 아버지의 머리 속에 12살 때 ‘딱 한번’ 가본 ‘가난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일단 상할아버지(증조부)의 삶은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조금 들어 안다 하겠으나, 그 위 고조와 현조부의 삶은 아버지조차 들은 적이 없기에 완전깜깜일 뿐이다. 아버지라고 8살 겨울에 조부를, 9살 봄에 증조부를 잃으셨으니 어찌 아시겠는가. 오늘 요양원에서 모시고 나와 아구갈비찜을 사드리며 여쭸다. 고모부가 알려줬다는 토막이야기는 “증조부가 구례읍내에서 상권을 쥐락펴락했던 분이네”가 전부였다. 농부는 아니었던 것같은데, 지물상이든 뭐든 업종이라도 알았으면 정말 좋을 것같다.
고조-현조 묘비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면서 “할아버지들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사셨어요? 지금은 세상 어디에도 흔적 하나 없는데, 궁금해 죽겠네요”라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서재에 내려와 족보를 뒤적였다. 일단 족보상으로 나의 할아버지는 8대 독자이다. 할머니가 숙부를 낳지 않았으면 아버지는 9대 독자였을 터. 여동생의 이름이 족보에 있다. 아주 손(孫)이 귀한 집으로 흔치 않게 독자(獨子)로 내려온 것은 확실하다. 역시 12살 아버지 기억으로 순천에 사는 고모할머니집을 가봤다 한다. 10대조 서무(瑞武)의 아들 3형제중 둘째 상표(祥杓)가 9대조. 8대조부터 독자로 이어진다.
8대조 준(俊.영조 원년 1725.3.3.-1795.8.9.)
7대조 득어(得魚.1750.9.9.-1802.10.15.)
6대조 규오(奎五. 정조 원년 1776.1.25.-1834.8.8.)
5대조 복문(福文.순조 원년 1801.9.9.-1849.10.23.)
4대조 시관(時寬. 1825.3.25.-1895.10.8.)
증조부 정수(定秀.1874.5.24.-1935.5.8.)
조부 형우(亨友. 1904.5.22.-1934.12.25.)
아버지 세태(世泰.1927.5.23.-)
어찌하여 4대조 시관 할아버지 이후 집안내력이 끊겼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동학혁명의 와중에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나? 아니면 구한말 의병이 되어 가정을 돌보지 않았을까? 그것이 나는 몹시 궁금하다. 최근 증조부 이름으로 뗀 제적증명서에 4대조 할머니 성함은 이소숙(李小淑). 증조모 신계주(申季住. 1880-1907) 님이 1904년에 할아버지(형우)를, 1906년에 고모할머니(점옥)를 낳은 후 27세로 돌아가시며, 낙망한 증조부가 2살 딸을 처가에 맡기고 4살 아들과 대를 끊겠다며 섬진강 압록에 뛰어들었다던가. 백내장이 악화해 실명을 했다던가. 이후 아들과 함께 봇짐을 메고 임실지역 동네서당을 돌아다니며 한문교재를 파는 이동서점상을 했다던가. 이재가 있었던지 돈을 모아 사돈동네의 논을 9마지기나 사 고독한 손자에게 물려주었다던가. 31살 아들 참척상을 당하자 다섯 달 동안 곡기를 끊고 뒤를 따랐다던가. 세상에 버려진 듯, 28살 며느리와 9살, 3살 손자만 남았다던가. 정숙한 며느리와 영명한 9살 손자는 초계 최문의 뿌리를 잇고 일가를 일으켜 세웠다던가. 8대 독자로 내려온 한미한 집안이 손자대에 이르러, 두 집 슬하 총생이 50명이 되었다던가.
아, 오늘 점심을 하면서 100세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었다. 당신(존칭)이 기억하는 당신의 아버지 모습 두 건. 할아버지는 무학(無學)이었어도 손재주가 좋고 술을 좋아하는 한량이셨던 듯하다. 당시엔 귀한 자전거를 타고 양복을 입고 다니셨으며(손바닥보다 훨씬 작은 흑백사진 2장이 남아있다), 야매(돌팔이. 무허가) 치과의사였다고 한다. 31살에 돌아가신 후 외상술값을 달라고 여러 사람이 찾아왔는데, 28살 청상 할머니가 매섭게 거절했다고 한다. 누가 무허가 진료라고 고발하여 구치소 생활을 몇 번 했다던가. 그때 쓰던 치과 교재도 유품으로 남아 있다. 당신이 손수 이빨에 금박을 해박았다던가. 그 금이빨을 60년만에 얼굴도 모르고 자란 숙부가 묘를 헤치고 찾아내 손에 올려놓고 우셨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장면은 방안에서 풀무같은 것을 돌리며 금(金)을 녹이던 장면 하나와 자전거에 당신을 태우고 인근 산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상영한 활동사진을 목마 태워 보여주며 자막에 나오는 한자 ‘亦’자를 가리키며 ‘또 역’이라고 또렷이 알려줬던 게 상기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나이로 지천명 50 이후에야 대부분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족보’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 맞는 듯,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질문은 스님들만의 화두(話頭)는 아닐 것이다. 집요하게 ‘뿌리’를 찾던 알렉스 헤일리에게 아프리카까지 건너가 7대조 외할아버지의 성함을 족보를 구술하는 원주민으로부터 직접 듣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나에게도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는 없는 걸까? 어떠한 노력을 해야 그런 일이 기적처럼 일어날까? 19세기를 관통하고 20세기 초반을 사셨던 할아버지들의 혼령이시여! 저에게 무슨 지침을 주실 수는 없는지요? 영감(靈感)을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