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너와 내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
written by 새끼늑대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 난 반쯤 감긴 눈을 그대로 감았다. 새벽 2시 반. 내가 누워있는 침대
의 주인이 들어올 시간이다. 곧이어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다시 잠그는 소리. 난 그대
로 침대 위에 흐트러진 채로 누워있었다. 곧이어 반쯤 열린 방문이 완전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그리곤 침묵.
조금 더 긴 침묵.
"……일어나."
그녀의 목소리. 난 그대로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잠시 후, 이번엔 짜증을 담
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자는 거 알고 있어. 일어나. 그리고 다음부터 술에 취한 연기 하려면 아까운 술만 버려놓지 말
고 조금이라도 마셔. 빈 맥주캔만 있으면 뭐해? 니 몸에선 술 냄새 하나도 안 나는걸."
난 이미 1시간 전에 그 실수를 알아차렸지만 어차피 술을 마신다고 해도 그녀는 내가 잠들지 않
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난 그냥 이대로 있었다. 그래서 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 나 피곤해. 아님 내가 씻고 올까?"
"……."
"뭘 원하는데? 너 지금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침대에 드러누워 있어. 뭐 하자는
거야? 나랑 자자는 거야?"
빌어먹을. 난 그 말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결국 눈을 떴다.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그럼 어서 비켜."
"싫어."
"여긴 내 집이야. 비켜."
"……얘기 좀 하자."
"싫어. 나 피곤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핸드백을 옆에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난 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옷을
정리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지금, 당장 얘기 좀 하자."
"싫다고 말했잖아."
"그럼 나도 못 일어나."
"……소파에서 잘게."
"야!"
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날 쳐다보며 말했다.
"일어난 김에 나가. 아니, 정 오늘 집에 못 들어가면 소파에서 자."
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내 귓가론 계속해서 부스
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녀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고개 숙이고 있어. 나 옷 좀 갈아입고."
"……알았어."
그녀의 살결을 스치는 옷의 바스락거림. 난 눈앞이 막막해졌다. 이렇게 냉담하게 대할 줄은 몰랐
는데. 난 오른손으로 왼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때였다.
"그 습관 고쳐. 초조할 때마다 그러는 거. 안 좋아 보인다고 그랬잖아."
"……얘기 좀 하자."
탁. 옷장을 닫으며 그녀가 나에게 돌아섰다. 그리곤 이번엔 피로감이 잔득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 피곤해. 그리고 할 얘기도 없어. 정말이야. 난 더 이상 들을 말도, 할 말도 없어. 그러니까,
이불 꺼내서 소파에 가서 자. 나 내일 일찍 나가야 되니까, 너도 일찍 일어나야 해."
"딱,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럼 깨끗하게 나갈게."
"뭔데?"
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너랑 내가 헤어져야 하는 건데?"
.
.
.
"우리 헤어지자."
막 농구공을 던지려던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동안 그렇게 뻣뻣히 서있던 난 천천히 고개를 돌
렸다. 추위에 뺨을 붉게 물들인 그녀가 서 있었다. 난 잠시 내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의심했
다. 그리고 난 그 의심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을 실천에 옮겼다. 잠시 후,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
며 나에게 말했다.
"못 들은 척 하지 마. 그리고 그렇게 귀 잡아당기다간 다 늘어날 걸?"
차분한 말투. 무슨 말을 하든 차분한 말투. 하지만 그런 얘기까지 차분하게 할 줄은 몰랐는데.
난 멍하니 아무런 말도 못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왜…… 왜?"
"……헤어져야 하니까."
"그러니까 왜?"
"말 그대로야. 헤어져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곤 그녀는 물끄러미 날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마
침내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 다 해. 이제 다시 보기 힘들 테니까."
"무슨…… 소리야. 잠깐만, 너 지금 나랑 헤어지자고 하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다시 확인해 줘? 그래. 너랑 나랑 헤어지자."
"우리…… 우리 사귀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엄청나게 후회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안절부
절 못하는 날 조용히 쳐다보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 그래.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하지만 넌 날 진심으로 좋아하고 나도 널 진심으로 좋아
해."
"지금도…… 그렇잖아? 아니야?"
"아니. 지금도 좋아해."
"그런데, 왜?"
"헤어져야 하니까."
난 기어코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서, 서로 좋아하는데, 그런데 헤어져야 한다고? 그리고 그 이유
가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건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밥을 먹어야 하
기 때문이란 말이나 마찬가지잖아!"
"한 마디로 그게 그거란 소리지? 아냐, 이건 달라."
여전히 차분한 그녀에 비해 난 다시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좋아하는데 어떻게 헤어져!"
"좋아해도 사귀지 않았잖아."
그녀의 말에 난 잠시 주춤했다. 곧이어 난, 의혹을 잔뜩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너, 내가 사귀지 않는 다는 것 때문에……."
"아니야.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그 것 때문일 리가 없잖아."
"그럼 다른 남자?"
"장난해? 너 있는데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나?"
난 잠시 기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제기랄. 그럼 도대체 뭐야?
"그럼…… 혹시 장난?"
"긴장이 풀렸나 보구나? 내가 그런 것 가지고 장난 칠 사람으로 보여?"
"……아니. 전혀 아니야. 그런데 너 말하는 게 꼭 장난같아. 도대체 왜 헤어지자는 건데?"
"말 했잖아. 헤어져야 하기 때문……,"
"그러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이유 말고!"
그녀의 말을 자르며 난 다시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 후, 다
시 눈을 뜨며 말했다.
"너 나 좋아하지."
의문형이 아닌 평서형.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난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응."
"나도 너 좋아해."
"응."
"그런데?"
"응?"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렇게 오전 11시, 한 겨울 텅 빈 농구 코트 위를 천천히, 하지만
확고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랬기에 난 감히 그녀를 따라가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
침내 그녀가 거의 농구 코트 위를 벗어날 무렵, 내가 막 그녀에게 뛰어가려고 했을 그 때.
"서로를, 네 표현처럼 미친 듯이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이별을 막을 이유가 될 수 없어."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통, 통, 데구르르. 난 떨어진 농구공을 붙잡을 생각도 하
지 못하고 그대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그날 이후로 나 많이 생각했어."
"그래? 그래서?"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녀는 절대로 내 말을 비아냥거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렇게 들리는 걸까? 난 억지로 거칠어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헤어져야하는 이유, 네 말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나 나름대로 많이 생각해 봤어."
"말해 봐."
"이별의 이유는, 복잡하지만 공통점이 있어. 둘 중 한 명의 사랑이 식었을 때야. 사랑해도 상황
때문에 이별한다고 하지만, 그건 물리적인 이별일 뿐이야. 정서적인 이별은 아니야."
"응, 맞아."
"그런데…… 지금 우리 둘의 이별은 전혀 그런 게 아니잖아!"
차분한 그녀의 말투에 못 이겨 난 결국 고함을 질러버렸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다시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래. 맞아."
"……그게 다야?"
"응."
"도대체, 왜? 상식적인 수준에서 설명해 줘."
"…… 둘 중 한 명의 사랑이 식었을 때라고 했지?"
"그래."
"우리 애초에 서로를 사랑했을까?"
뭐라고? 난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로를……,"
"그래. 좋아했지. 우린 서로를 좋아했어. 진심으로. 그런데? 사랑하진 않았어."
"그게…… 그게 그거…… 아냐?"
"아냐."
그녀의 확고한 말투. 난 지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갑자기 지금까지의 피로가 한꺼
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사랑은 뭔데?"
"니가 그걸 몰라서 헤어져야 하는 거야."
그 말에 난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난 널 정말 좋아해."
"안다니까."
"1년이 지났어. 처음 한 달간은 가끔씩 만나 데이트나 하고, 평범하게 지냈어. 하지만 그 후론 도
저히 널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서, 그래서 매일매일 널 찾아갔어. 그리고……,"
난 과거가 덧씌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
.
.
"나 좋아해?"
"응."
그녀의 말에 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곤 그런 나 자신에게 놀랐다. 난 혹여나 내
가 무슨 바람둥이나 그런 걸로 보일까봐 노심초사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녀는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 아하하, 아하하하. 너무 웃겨."
"뭐, 뭐가?"
"넌 진심을 너무 쉽게 드러내. 거짓말도 티가 너무 많이 나고. 그러고 보니까 너, 나 진심으로 좋
아하나 보다?"
"……응.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많이. 아니 그보다 더 정말-"
"됐어 됐어. 알았어. 풋. 왠일로 날 웃겨주네?"
"그럼…… 여태까지 재미없었어?"
"아아, 솔직히. 무슨 남자가 말만 했다하면 농구, 농구, 농구.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자기 친
구들 멋있다고 친구 칭찬이나 잔뜩 하고. 나중에 군대 갔다 오면 딱 매일 입만 열면 축구 타령할
남자 같아."
그 말에 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 것을 감추기 위해 난 앞에 놓인 음료수 병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그렇게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자, 턱을 괴고 날 빤히 쳐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겨우 가라앉힌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 그래서 내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이려 했
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해. 너 얼굴 한두 번 빨개져? 영화관에서 영화는 안 보고 나만 계속 쳐다보다가 내가 고개
라도 돌리면 새빨개지고, 사람 많은데서 손 붙잡고 걷다가 한산한 데서도 계속 손잡고 있다가 혼
자서 또 얼굴 빨개지고. 하여튼, 넌 너무 어리버리해."
"미안…… 하다고 해야 하나?"
"풋.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리곤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보니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모두 우리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노려봤을 나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시선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 없어?"
"듣고 싶은 말 있어?"
"응."
"미안."
"……왜?"
"그 말, 하기가 싫어. 대신 다른 말 해줄게."
"사귀자는 말 대신…… 다른 말?"
"나 너 정말 좋아해."
그렇게 말하고 난 내 스스로도 내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빌어먹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나도 참……,
"왜 사귀기 싫어?"
난 급히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슬픈 표정. 난 나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울
컥함을 느꼈다. 빌어먹을, 멍청한 자식아! 그냥 사귀면 되잖아. 굳이 그렇게 복잡한 의미를 부여
할 필요는 없잖아!
"사귀면,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잖아."
"응."
"나 너랑 헤어지기 싫어. 10년, 아니 수 십 년이 지나서라도."
주변 테이블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기랄. 이런 닭살 돋는 말은 왠
만하면 단 둘이 있을 때 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내가 다시 빨대를 입에 물었을 때, 따스한 뭔가
가 내 뺨에 와 닿았다.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주변 테이블에서 거의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쎈데?" 하는 소리나 "저 여자
정말 멋있다!" 등등의 소리가 들려왔다. 난 힘겹게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왜, 왜 이래? 사람들도 많은데."
"고마워."
"응?"
"사실은, 나도 네가 나랑 사귀자고 하면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거든."
"정말?"
"응."
"그럼 너도 친구들한테 미친…… 아, 아니, 아니야. 하하."
난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평소에 나의 이 독특한 연애관을 들은 친구
들은 하나같이 <미친놈. 평생 독신으로 살겠네>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물론 점잖은 그녀나
그런 그녀의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할 리는……,
"아아, 나도 미친년 소리 많이 들었어."
……없을 줄 알았는데. 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고, 그런 날 보며 그녀도 차분히 미소 지었다.
행복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린 사귀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물어보면 <애인이에요>라고 서
슴없이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난 그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같이 가 주었고, 그녀도 내
가 농구하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조용히 봐주었다. 그녀와 난 길어봐야 사흘 이상 거르지 않고 만
났다. 아침에 만나다 헤어져 밤에 또 만났다. 그리고 단 10분이라도 시간이 나면 꼭 만났다. 그러
면서 그녀와 난 서로의 일에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그녀는 디자이너로써, 난 외무고시를 준
비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나는 그녀의 모델이었으며 그녀는 내가 라틴어나 독일어로 말하는 온갖
달콤한 미사여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난 1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녀
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
.
.
"좋아는 하지만…… 사랑은 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
"넌…… 그래, 넌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난 아니야."
"아니, 너도 그래."
"어떻게……?"
"그 날 말했잖아. 헤어지기 싫어서 사귀지 말자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그래, 맞아."
"난 깨달았어. 그렇게 서로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는건,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책임…… 회피?"
"그래."
"난 너에 대해 충분히 책임 질 수 있어!"
"그럼 지금 나랑 잘래?"
그녀의 말에 난 충격을 받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입을 뻐끔거리던
난 겨우 입을 열었다.
"너…… 우린 아직……,"
"그것 봐. 넌 아직 날 책임 질 수 없어."
"나, 난 아직 군대도 안 갔어."
"난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
"너랑 나랑 아직 사회적으로……,"
"아니, 그게 아니야. 제발……."
내 말을 끊으며 그녀가 말했다. 갑작스레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그렇게 그녀는 흐느
낌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날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 나도 그래. 하지만…… 하지만 그게 다야. 우린 서로 어린아이였
어. 어린아이들이 사랑하듯이, 그래 그냥 보고 싶을 때 만나고 손잡고 싶을 때 손잡고, 키스하고
싶을 때 키스하고……, 그리고 금세 다른 일에 빠졌다가 다시 보고 싶으면 만나고……, 하지만 사
랑은 그런 게 아니야. 그 이상을 하더라도 책임을 져야하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생각나야 해. 그
리고 절제도 필요해. 우린 서로 절제하지 않았어. 무슨 일이든 한 사람이 보고 싶다고 하면 내팽
개치고 만났어. 그리곤 다시 멋대로 헤어져버렸지. 우린 그때그때 만나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
고 쉽게 헤어져버렸어. 우리가 여태껏 한 건, 항상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랑>이라는 뜨거운
피가 아니라 필요할 때만 뜨겁게 데워지는 <착각>이라는 물이야. 그리고 물은 언젠가 말라버려.
너와 난, 언젠간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그 착각을 느낄 거야. 그리고 그건 이별이라는 말
로도 불릴 수 없는, 단순한 헤어짐이겠지……."
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착각이 뭔데?"
"책임지지 않을, 부담 없는 사람과 만나면서 <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난 이 사람을 책임지
고 있어. 나와 이 사람은 지금 사랑하는 사이야. 그러니까 난 외롭지 않아>등의 착각을 하지. 정
작 책임지는 건 없으면서.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냥 호감이 가는 거야. 그냥, 그냥 마냥 좋아하
는 것뿐인데 말이야."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 않고 말했다.
"그래. 우린 여태껏 착각만 하고 있었어."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그런 날 쳐다보고 있었다.
10분가량 흘렀을까? 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소리 없는, 조용한 울음. 눈물은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난 그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니 말이 맞아."
"……."
"착각. 아니, 착각이라기 보단 대리만족이었을 거야. 부모보다 조부모가 손자, 손녀를 왜 더 좋아
하고 잘 대해주는 지 알아? 그 아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비록 자신
의 피붙이지만 이미 자신들이 책임졌던 자식들이 그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조부
모는 마치 자신의 손자, 손녀들을 자신이 예전 자식들처럼 여기고 귀여워하지. 정작 아무런 책임
은 지지 않으면서. 그들은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거야. 자신들이 다시 예전 그 시절로 돌아가 자
식을 키우는 듯한, 하지만 정작 책임은 전혀 지지 않을, 그런 착각…… 대리만족…… 마치 지금까
지의 우리들처럼."
내 말에 그녀의 눈물이 더 흘러내렸다. 마침내 그녀가 작게 흐느꼈다. 그렇게 흐느끼는 그녀를,
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이제 알았어. 그러니까…… 됐지?"
"뭐…… 가?"
울음으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난, 슬퍼지는 기분을 억누르며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
가에 속삭였다.
"우리, 같이 자자."
"……."
"책임질게. 그리고, 솔직히 나 군대 다녀올 때까지 고무신 거꾸로 안 신게 확실히 족쇄는 채워나
야 되잖아. 안 그래?"
"……나한테 할 말 없어?"
"듣고 싶은 말 있어?"
"응. 이번엔…… 이번엔 해 줘."
"사랑해. 우리 사귀자."
난 그대로 그녀와 입맞춤을 했다.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이 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열리며 상상하기도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변태."
.
.
.
<우린 그 날부터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와 난 아지 '절제'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
국 그녀와 난 사고를 쳤고, 그래서 난 군대를 가기도 전에 결혼을 준비하게 되었고, 그리고 결혼
을 준비하기 전에 임신 2개월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대신 우리 둘은 더 이상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그녀와 내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서로 사랑을 시작하지
않아서. 하지만 이제 사랑을 시작 한 이상, 이 영원히 식지 않을 사랑에 이별이란 말 따위가 끼어
들 곳은 없었다.>
.
.
.
"농구 좀 그만하고 빨리 공부해!"
"어, 잠깐만. 이 게임만 마저 뛰고."
"그렇게 공부해서 외무고시는 무슨! 당장 안 뛰어와? 나 확 넘어져 버린다!"
"야야, 자기애를 그렇게 협박의 도구로 사용하기가 어디있냐!"
"니가 만들었잖아! 빨리 안 와?!"
"가, 갈게!"
난 낄낄거리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곤 재빨리 그녀에게 뛰어갔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랑하고 나선, 저렇게 다 성격이 바뀌나?
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선 다른 사람과도 실험삼아 사랑해
봐야 하는데, 내 사랑은 모조리 그녀에게 가 있었다. 물론, 조금 후면……,
"너, 아기 나왔다고 나 내팽개치면 죽는다?"
"하하, 알았어. 자, 마누라 업혀라. 업어줄게."
"땀 냄새나. 으이구 하여튼. 얼른 가자. 맛있는 거 해 줄게."
"마, 맛있는 거? 나 그냥 우리 엄마가 보낸 반찬에 밥 먹으면 안 될까?"
"야!"
그렇게 난 그녀와 술래잡기를 하듯 집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
다. 하지만 저 해도 오늘과 이별하는 것은 아니다. 내일이라는, 또 다른 오늘과 만나기 위해 잠
시 쉬는 것일 뿐.
-The End-
.
.
.
..
오늘은 정확히 27분만에 썼습니다. 무슨 기록 갱신하는 것도 아니고=_ =;; 하여튼 나날이
대충대충 쓰는군요. 하지만 글은 조금씩 매끄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계속 필 받을 때마다 미친듯이 써서 올리다가 언젠가 옛날의 감을 되찾으면,
개인적으로 새싹3에 Last carnival 이라는 제목으로 장편을 연재해보려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충 쓴 단편을 보고, 미리 실망하진 말아주시길...=_ =;;
카페 게시글
인소닷단편소설
[단편]
[새끼늑대] 너와 내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
새끼늑대
추천 0
조회 219
07.02.06 01:53
댓글 6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다음검색
첫댓글 야아~히히 내용이 되게 흥미로워요...읽는내내 왜 뭔가 찔리는듯한 느낌이?...난 남친도없는데...................- _-인생이란............우하하;;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내용을 이렇게 허점을 잡아서 찔러주시니깐...음 ..새롭고 대단하세요~히히
네 감사합니다ㅎ 남친 빨리 만드세요=_ =ㅋ
재미있어요 ㅋㄷㅋㄷ!!새롭고! ~대단해요 ㅎㅎ^ㅡ^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당!!
넵 감사합니다~
색다른 ㅎㅎ 너무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음 색다르다라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