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美에 155mm 포탄 50만발 대여 계약
美 작년 우크라 지원 물량의 절반
미국이 우크라이나 측에 지원한 ’M777 155mm 견인포’. 155mm 포탄을 사용하는 무기다. 한국은 155mm 포탄 50만 발을 미국에 대여하기로 했다. 미국 국방부 홈페이지 캡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한국산 155mm 포탄 50만 발을 대여 형식으로 제공받는다는 내용의 계약을 지난달 한국 정부·방위산업 업체와 체결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50만 발은 지난해 말 정부가 미국에 판매한 155mm 포탄 10만 발보다 5배 많다. 특히 미국이 지난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약 100만 발의 절반에 달하는 양이다. 소모성 무기인 포탄을 타국에 판매가 아닌 대여 형태로 제공하는 건 이례적이다.
11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미 행정부는 지난해 한국 정부로부터 155mm 포탄 10만 발을 구매한 데 이어 올해 2월에도 10만 발 이상을 추가로 판매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정부는 미국에 50만 발을 제공하되 대여해 주는 방식으로 미국 정부와 합의했다. 소식통은 “한미 정부 관계자들이 지원 방식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고 밝혔다.
다른 소식통은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정부 원칙을 지키면서 혈맹인 미국의 요구에 성의 있게 응할 방법을 찾은 끝에 포탄 제공 물량을 대폭 늘리는 대신 대여 방식으로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50만 발을 곧바로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미군 비축분으로 채워 넣은 뒤 미군의 기존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미국이 지난해 한국에서 구매한 10만 발을 활용한 방식과 같다. 정부는 포탄을 대여하면 포탄 소유권이 한국 정부에 있고 나중에 돌려받아야 해 미국이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우려가 낮다고 본다. 그럼에도 사실상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간접적으로 무기 지원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韓 ‘살상무기 직접 제공 없다’ 원칙 유지… 美에 포탄 대여로 절충
포탄 판매 아닌 대여, 이례적 방식
양은 작년 美구매의 5배로 늘려
尹 방미 앞두고 명분-실리 챙기기
러 감안해 외교적 리스크도 줄여
정부와 방산업체가 지난달 바이든 행정부에 155mm 포탄 50만 발을 판매가 아닌 대여 형식으로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한 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미국의 거듭된 지원 요청을 무시하기 힘든 상황을 고려한 절충안으로 풀이된다. 이달 말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명분과 실리를 최대한 챙기기 위한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진위 논란이 있지만 미 뉴욕타임스는 감청 의혹이 제기된 지난달 김성한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대통령외교비서관 간 대화에서 ‘미국의 포탄 제공 요청에 응하면 미국이 최종 사용자가 되지 않아 살상무기 지원 불가 원칙을 어길 수 있다’는 취지의 우려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50만 발은 지난해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포탄 약 100만 발의 절반에 달할 만큼 많은 양이다. 미국에 대여하는 방식을 취해 한국 포탄이 우크라이나에 직접 지원되지 않더라도 러시아가 반발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 尹 방미 앞두고 美에 이례적 포탄 대여
지난해 정부는 미국에 155mm 포탄 10만 발을 수출할 당시 ‘최종 사용자를 미국으로 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그럼에도 일단 판매한 뒤엔 미국이 포탄을 운용하는 만큼 한국산 포탄이 우크라이나로 들어가 살상용으로 사용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계속 나왔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무기 수요는 꾸준히 늘었다. 정부 소식통은 “올해 초부터 우크라이나 내 포탄 재고가 매우 부족해졌다”고 전했다. 미 국방부는 지난달 우크라이나에 155mm 포탄을 비롯한 3억5000만 달러(약 4630억 원) 규모의 무기 추가 지원 방침을 밝히며 동맹국의 무기 지원을 호소했다. 지난달 유럽연합(EU) 역시 향후 12개월간 155mm 포탄 100만 발 이상을 우크라이나에 추가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2월경 한국 정부에도 포탄 지원 필요성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정부 소식통은 “미국 측에서 무기 지원에 무조건 나서 달란 식으로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전쟁이 오래 걸릴 거고 심각해질 수 있는 만큼 이를 우려한다는 식으로 우리의 참여를 독려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한미 관계를 고려해 우리 입장만 고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감청 의혹이 제기된 김 전 실장과 이 전 비서관 간 대화가 나온 맥락으로 보인다.
결국 바이든 행정부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정부는 고심 끝에 대여 방식으로 지난해 말 판매한 포탄의 5배를 제공하기로 지난달 미 정부와 합의했다는 것이다. 특히 윤 대통령이 이달 말 미국을 국빈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는 상황도 포탄 제공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 “미-러 사이 외교 리스크 최소화 방안”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할 경우 한-러 관계는 파탄 날 것”이라고 위협한 바 있어 러시아가 반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다만 대여라는 방식이 대러 관계 관리 차원에서도 합리적인 방식이란 분석도 있다. 판매가 아닌 빌려주는 형식을 취해 최악의 경우 러시아가 크게 반발해 러시아 내 우리 교민이나 기업인 등에게 보복 조치를 하는 상황 등이 발생해도 미국에 요청해 포탄을 돌려받는 식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정부가 외교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소모성 무기인 포탄 제공에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여 형식을 적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 소식통은 “대여를 통한 간접적인 우크라이나 지원은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한국이 국제사회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 전쟁을 방관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줄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전했다.
손효주 기자, 신진우 기자, 신나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