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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10월5일 목요일 [(녹)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수도회]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 걸어가는 복음 선포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느헤 8,1-4ㄱ.5-6.7ㄴ-12
† 복음 루카 10,1-12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열두 제자만을 강조한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지명하시어 모든 고을에
파견하십니다.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자신이 들어가는 그 집에
평화를 빌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다고 히브리서는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 파견된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온 존재로 전달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양동이와 같아서, 그 양동이에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이라는 물이 채워져야만 그것을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 양동이에 물을 채우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깨달아야 하며, 온 마음을 다해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기에서 에즈라가 백성들 앞에서 율법서를 들고 읽어 주자,
온 백성은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
일흔두 명이라는 숫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젖어서, 세상에
나아가 그 향기를 풍길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인 나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견하신 제자이며,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훌륭한 증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세상에 평화를 전할 수 있다면
2017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즈라가 율법서를 펴고 주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 느헤미야기의 말씀입니다. 8,1-4ㄱ.5-6.7ㄴ-12
복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던 2017년도 프로야구도 6개월간의 일정을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워낙 프로야구를 좋아해서 3월 개막
할 때부터 관심 있게 봤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제게 참으로 많은 재미를 주었습니다. 특별히 한 팀을 열심히
응원했지요. 그런데 비록 응원하는 팀은 아니지만 이 선수만 나오면
열심히 마음으로 응원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응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열심히
응원하게 되었지요.
이 선수의 이름은 두산 베어스의 ‘유희관’ 선수입니다. 2009년에
입단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무명의 불펜
투수였지요. 왜냐하면 강속구 일색의 투수들 사이에서 그의 공은
느려도 너무 느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투수로서 엄청난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구속을 높일 수 없음을
깨닫고 대신 제구력을 극대화시키는데 온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빠른공만 겪다가 느린공을 상대하려니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고,
더군다나 뛰어난 제구력에 타자들은 제대로 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극복했다는 점이 바로 이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약점을 뛰어넘는 장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점을 더욱 더 극대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인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주머니 없이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당일치기의 여행도 아니니 여행 보따리도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신발을 오래 신을 수 있는 만큼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여행을 위해서는 여분의 신발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 없이는 도저히 전교 여행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지니지 말라고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족한 약점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에게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오는 평화면 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그들은 훌륭히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세상의 것이 부족하다고 해서
불안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그래서 세상에 평화를 전할 수 있다면 훌륭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를 나로 마주하지 않으면, 그렇게 마주한 나를 긍정하지 않으면,
긍정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정하지 못하면 삶은 영원히 어딘가
뒤틀리고 말 것임을 알고 있다(김현우).
유희관 선수.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글(‘내일의 희망 글’ 중에서)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좋은 글입니다.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화’는 마른 솔잎처럼 조용히 태우고 기뻐하는 일은 꽃처럼 향기롭게
하라. ‘역성’은 여름 선들바람이게 하고 ‘칭찬’은 징처럼 울리게 하라.
‘노력’은 손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반성’은 발처럼 가리지 않고
하라. ‘인내’는 질긴 것을 씹듯 하고 ‘연민’은 아이의 눈처럼 맑게
하라.
남을 도와주는 일은 스스로 하고 도움 받는 일은 힘겹게 구하라.
내가 한 일은 몸에게 감사하고 내가 받은 것은 가슴에 새겨 두어라.
‘미움’은 물처럼 흘러 보내고 ‘은혜’는 황금처럼 귀히 간직하라.
‘사람’은 축복으로 태어났으며 하여야 할 일들이 있다.
그러므로 생명을 함부로 하지 말며 몸은 타인의 물건을 맡은 듯
소중히 하라. 시기는 칼과 같아 몸을 해하고 욕심은 불과 같아
욕망을 태우니 욕망이 지나치면 몸과 마음 모두 상하리라.
모든 일에 넘침은 모자람 만 못하고 억지로 잘난 척 하는 것은
아니함만 못하다. 내 삶이 비록 허물투성이라 해도 자책으로 현실을
흐리게 하지 않으며 교만으로 나아감을 막지 않으리니.
생각을 늘 게으르지 않게 하고 후회하기를 변명 삼아 하지 않으며
사람을 대할 때 늘 진실이라 믿어하며 절대 간사한 웃음을 흘리지
않으리니.
후회하고 다시 후회하여도 마음 다짐은 늘 바르게 하리라. 오늘은
또 반성하고 내일은 희망이어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내일의 희망을 볼 수 있도록
해줍니까?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죠? 저의 집안에만 있는 뽕트로피입니다. ㅋㅋㅋ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 걸어가는 복음선포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루카 10,1-12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루카 10,6)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 걸어가는 복음선포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뽑아 당신이 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사명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특히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삶에 있어 복음적 생활양식을 따르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 중요한 말씀이기도 하지요.
특히 성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에 영감을 받아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며 모든 이에게 회개와 평화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는 그 사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10,4)는 말씀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처럼 가난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순례하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그대로 실행하고자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변화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명이 열두 사도라는 작은 제자공동체에
한정되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에게 맡겨진 자비와 치유, 해방과 평화를 선포하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실행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10,4-5)
그렇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뒤로 미루거나 다른 일을 한
다음에 시간나면 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매순간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지금’ 복음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안전을 보장해줄 여장을 꾸리고, 일일이
인사치레를 다 하고, 악의로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급한 사명 수행을 위해 현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에게 주어진 그 사명만을 바라고
그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소유하지 않고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영광과 안락, 개인의 이익과 세상의 가치들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결코 하느님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이지요.
아울러 우리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는 평화이신 하느님께서 함께하길
기원하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비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축복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만나기도 하지요. 그럴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과
씨름하느라 헛되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생명과 해방의 선물을 거절함으로써 하느님과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판한 셈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가난한 순례자로서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 자유와 평화를 선포하는 ‘걸어가는
복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왜 이리 떠남이 힘겨운지...
2017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루카 10,1-12)
왜 이리 떠남이 힘겨운지...
주님 은총과 자비에 힘입어 이 세상에 온 존재라면, 그 누구든
예외없이 지배받게되는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누구든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주님 자비의 품에서 시작된 우리의 생명은
결코 이 세상에서 영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이 세상 소풍을
만끽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겪었다면, 이제 다시 한번 그분 품으로
돌아가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거스를수 없는 준엄한 대자연의 이치지만, 막상 떠나야할
그 순간이 오면 그 누구든 망설여지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이기에 그리도 두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다 가도 나만은 절대로 못가겠다!’고 버틸 수 없습니다.
무조건 가야만 합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다보면 유달리 이승과의 작별이 힘겨운 분들을
만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들이 대체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재물이면 재물, 권세면 권세, 학벌이면
학벌로 한때 잘 나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좀
떵떵거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럴만도 한것이,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재물의 탑, 수백억,
수천억, 두고 떠나려니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남들 다 잘때
수면시간 줄여가며 공부벌레처럼 산 결과 획득한 전문성을 더 이상
활용할 수 없으니, 얼마나 속쓰리겠습니까?
가만히 살펴보니 저희 같은 수도자, 사제들 사이에서도 그 ‘떠남’이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성이면 영성, 상담심리면
상담심리, 사회복지면 사회복지 쪽, 자기만의 특화된 분야에 오랜
세월 쌓아올린 전문성에 대한 애정이 너무 크기에 그렇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이런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사회는 점점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가는데, 그에 따라 수도자들도 한 분야에 전문가, 대가(大家)로
자리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도움이 필요한 양떼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사목적 봉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20년, 30년 쌓아올린 그 전문성과 노하우를 다 내려놓고 한
평범한 수도자로 돌아가라고 하니, 얼마나 아쉽고 안타깝겠습니까?
오랜 세월 맺어온 소중한 인맥도,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대상자들도, 후원자들과 봉사자들도 다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임지로 떠나라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그 모든 것들, 사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전문가라고 외쳐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현직에서 물러나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또
다른 곳에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봉헌생활자들이,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본질적인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뭔지, 그리고 부차적인 것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기도를
계속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복음 10장 3~4절)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지속적인 자기 비움, 지속적인 자기 낮춤, 언제든 떠날 준비를
갖추는 노력,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기는 마음...
- 살레시오 수도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평화에 이르는 길 - 이기양 요셉 신부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느헤미야기 8,1-4.5-6.7-12
루카복음 10,1-12
< 평화에 이르는 길 >
오늘 복음을 들으면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를 열두
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복음에는 72명의 제자들을 파견하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12명이 아니라 많을
때는 72명까지 되었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음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72명의 제자 파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자의 숫자는
대부분 열둘을 언급하고 있는데 루카 복음만이 72제자의 파견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견 시의 주의사항이 열두 제자나
72제자 모두에게 같다는 내용으로 봐서 일부학자들은 루카가 임의로
재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카의 근본 의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열
두 명의 제자에게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에는 70 혹은 72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지요.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이 세상에 퍼져 새 민족을 이룰 때 70인종으로 나열되어
있고(창세 10장), 모세를 부를 때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원로 70명을
대동하라고 말씀하셨으며(탈출 24,1), 유다의 최고 의회 산헤드린은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70인역 그리스 성경에는 창세기
10장의 새 민족을 72인종으로 서술하였고, 원로들 역시 72인으로,
또 세계 안에는 72명의 왕자와 72개의 언어가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에녹 3서 17,8;18,2-3;30,2) 따라서 72제자라는 표현에서 72의
의미는 숫자적인 의미보다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먼 길 떠나는 제자들에게
충분한 준비는커녕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는
부분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잘 준비해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으면
그것이 더 좋을 것 같이 생각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치
않으시지요. 제자들이 오로지 의지해야 할 것은 돈도 지팡이도
식량자루도 아닌 하느님이심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루카 10,7)라는 말씀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뒷바라지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 집에 주님의
평화를 빌어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로지 복음 선포의 의무만을
주셨을 뿐 결실의 의무까지 지우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루카 10,6)
중요한 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제자들이 빌어주는 평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역시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하며 살아가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평화에만
집착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과 재물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갈증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우리를 참 기쁨과 평화에로 인도하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지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도박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일종의 도박 환자였지요. 손에서 화투짝을
놓으면 늘 불안했고 곧 돈을 딸 것 같은 착각 때문에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늘 딸 것 같은 생각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지요. 차차 건강도, 가정도, 그리고 사업 마저도 병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화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뜻대로 안
되었지요. 부인은 돈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눈물로
호소를 해보기도 하고 이혼을 하자고 협박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도박 자체가 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밤낮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구제불능의 친구가 어느 성령 세미나에 참석해서
그 몹쓸 병을 고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지도 않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묘한 일이었지요. 손에서 화투짝을 떼면
생 자체에 아무 의미를 못 느끼고, 손에 화투가 있어야 살 맛을
느꼈던 사람이 이제 그 헛된 평화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는 차츰 건강을 찾고 일할 의욕도 찾았으며, 가정에는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이웃과도 화목하게 되었지요. 믿음이 평화를
가져왔고 평화는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72제자에게 복음 선포의 자세를
가르치시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평화를 빌어줄 것을 사명으로
주십니다.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이 복음을 우리는 받아들였고,
하느님의 평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도 복음 선포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말씀과
함께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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