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has sprung.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동방규(東方虬)의 시구(詩句)가 생각나는 봄이
왔다.
흔히
점잖게 나이를 물을 때,
“금년에 춘추(春秋)가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한다.
나이를 에둘러
‘봄/가을’을 몇 번이나 지냈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제
그 봄이 왔으니
다시
또 한 살의 반은 먹은 셈이다.
‘나이’는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 비아냥대는
“나이가 벼슬이냐?”도 아니고,
“젊은
것들”이라며
언성을 높이는 늙은이들의 권리도 아니다.
오묘한 섭리에 의하여 세상에 와서
시류(時流)를 좇아 가만히
있어도,
아니면
발버둥을 쳐도
어느덧 늙게 되는 것이 ‘나이’이다.

‘난국(亂國)이 영웅을 만든다’는 말도 있듯이
인생은
시련을 통하여 옥석(玉石)을 가릴 수 있으니
그것도 섭리라 할 수 있다.
공자는 만년(晩年)에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三十而立),
마흔에는 세상에 미혹되지
않았고
(四十而不惑),
쉰에는 내 분수를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
(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칭찬에 들뜨거나
남의 비난에 분내지
않았으며
(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몸에 밴 내 언행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3대
성현(聖賢)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공자도
나이가 차는 대로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고
하니

인생을 아는 것은
유식(有識)하거나 무식(無識)한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인생은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누구나 세상에 있는 동안의 여정이
그
사람의 인생이다.
인생은 유한(有限)하나
그
사연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신정아씨의
자서전(自敍傳)에 대하여
비난 일색이다.
원래
자서전은 참회록(懺悔錄)이 아니라
자기미화를 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겸양지덕을 내 세우기 위한 자기비하,
혹은
세태(世態)를 힐난하는 게 그 속성이다.
저자의 주관이지
객관적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신정아씨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신씨가 금호미술관에서
큐레이터(Curator)로서 인정을
받았다면
학위와 상관없이
전문직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큐레이터는
미술에 대한 식견뿐만이 아니라
작가와의 섭외,
리플렛 작성,
케이터링 섭외와 예산,
개막식 총괄 등등
그의
지시를 받는 사람들도 모두 전문직이기에
‘빽’ 하나만으로는
그
자리를 감당할 수가 없다.
학위문제는
그가 주장한 대로
브로커에게 속았을 수도 있다.
다만
그녀가 너무 욕심을 내서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학을 택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미술분야는 알 수 없으나
철학이나 신학등은
학위 수여식 날 만 참석해도 되는 대학도 있다.
한국의 목사님들이
철학박사가 많은 것도 그런 연유에 있다.
불법이 아니라
해당대학의 커리큘럼을 충족을 시키면 된다.
전문직으로 학교에 출석을 하지 않고
학위를 받은 예는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를 들 수 있다.

그는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를 중퇴 하였으나 그가 유명해지자
그
대학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1994) 했고,
대학 입학 후
35년만인
2002년,
CSULB 프로그램을 통하여
학사학위를 받았다.
(
B.A. in Film Production and Electronic
Arts)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는
캐나다의 고교 중퇴자였지만
미국 ABC 방송국의 간판 앵커로서
“ABC’s World News Tonight” 프로를
담당 하다가
67세의 일기로
폐암으로 2005년에 타계를
했다.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고
끝까지
캐나다 영주권으로 살은 일화도 있는 사람이다.
공정사회란
학벌이 아니라
실력이 인정 받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학벌위주의 한국사회도 문제지만
학벌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배울 생각보다는
남의 실수를 찾아 내는 것이
학위를 얻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도 문제다.
매사가 부정적이니 적을 만들고,
자기계발이 될 수 없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는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어떤 범죄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다.
신정아양의 자서전에 대하여
윤리관이나 사랑의 정의를 대입하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 35세의
처녀에게
58세의 청와대의 권력자가
물심양면으로 공세를 해 온다면
그것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신양의 직업상 해결해야 일들을
일사천리로 처리해 주니
그보다 더 고마울 데가 없었을 것이다.
윤리를 따지려면
변실장에게 따져야 한다.
권력자들은
상대의 여자에게
순장(殉葬)을 요구하는 생리가 있다.

신문의 기사가 사실이라면
김대중씨나 김영삼씨는
자신의 소생에게까지 순장을 요구한 셈이다.
그
사정을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우선
생계대책을 해결해 주는 것이 순리이다.
그게 아니니
세상에 노출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신양의 자서전도 같은 맥락일 수도 있다.
한
때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랑을 했다면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변실장은 신양이 출소 후에
재기를 할 수 있는 경제적인 배려는 있어야 했다.
흔히 사랑을
에로스(Eros),
아가페(agape),
필리어(philia)
식으로 구분을 하나
그
본질은 다 같다.
부모님의 조건없는 숭고한 사랑이지만
노후에 불효하는 자식을 보며
배신감으로 화병을 앓는 사람들도 있듯이
사랑은 언젠가는 셈을 하게 된다.
사랑, 아름답고 또 가슴 설레는
단어이다.
어느 블로거의 글처럼
숭고한 게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즐거움만 나누는 게 아니라
아픔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당연히
대상도 같은 또래야 하겠고,
권력이나 금력이 개입되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왕소군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봄날의 내 기분이 그렇다.
by/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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