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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중심에는 아주 커다란 분수가 하나 있다.
햇살은 미울 만큼 따뜻했고 사람들은 증오스러울 만큼 행복해 보였다. 많이 어색해진 내 짧아진 머리를
오른손으로 한 번 쓸어 넘겼다. 길고 가늘던 긴 머리카락은 이제 더 이상 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지 않
았다. 미용실 거울에 바뀐 내 머리를 비추어 본 그때서야 조금은 그와 함께였던 추억이 한 움큼 녹아내
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이제 더 이상 갈색 생머리를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풍성
하게 띄어 올린 짧은 머리를 마치 풋 사과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거리는 거의 잔잔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두 걸음에 한 번씩 심겨있는 거리의 나무에는 풍성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자신의 희고도 엷은 분홍빛을
자랑하는 듯 피어있다. 바닐라맛 콘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었다. 앙, 하고 부드러운 크림을 한입 가득
물었을 때에 입술 끝에서, 혀끝에서 찾아오는 시린 기운에 두 눈이 질끈 하고 감겼다. 혀끝으로 낼름낼
름 바닐라 크림을 녹여 먹으니 혀끝이 얼얼해졌다.
공원 분수에 잠시 앉았다.
분수 중앙에는 천사조각상이 하나 있는데, 그녀의 입가에 은은하게 드리워진 미소는 항상 내 기분을 편
안하게 만든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남은 콘 과자까지 깨물어 먹었다. 콘은 썩 맛있진 않다. 하지만 아
이스크림이 녹은 후 바닐라 향이 베인 체 흥건히 젖은 콘은 혀 위에서 녹는 재미가 맛있다. 난 콘이 맛있
어서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이 묻어 눅눅해진 콘을 혀 위에 녹여먹는 재미로 콘을 깨물어 먹는다.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버리고 나면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던 손이 휑해지긴 하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휑해진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가만히 천사 조각상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물이 나는 걸 꾹 참았다. 그러다 웃음이 났다.
지금 내 모습은 시련당한 여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난 얼마 전 그와 헤어졌다. 3년간 함께 했던
그가 떠난 자리는 찬바람만 불고 있다. 그는 그랬다. 내 갈색의 긴 생머리가 예쁘다고...그래서 난 머리
를 잘랐다. 그는 미안하지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내게 말했다. 난 믿고 싶었다. 3년 이라는 시간이 그
냥 흐른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에게서 나는 아마 콘 아이스크림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남김없이
다 먹어버리고 나면 잠깐 동안 휑해지긴 하지만 금새 잊어버리고 마는 아이스크림. 또 웃음이 났다. 계
속 웃음이 났다.
이러다 그냥 우는 방법을 까먹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밤잠을 설치곤 한다.
사실 난 몽유병이 있다. 늘 그와 함께했던 침대에서의 3년은 큰 증상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떠나고 난
후 증상이 부쩍 심각해짐을 느끼다. 항상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잠들던 그의 팔이 어깨에 감기지 않아서
일까. 문득 잠을 자다 가끔씩은 어깨가 참 시리다는 기분도 든다. 가끔은 수면제를 복용한다. 수면제를
먹고 난 후 잠이 들면 평상시보다 푹 잠에 들 수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선 생각보다 개운하지가 않다. 약
이 시키는 억지로의 단잠이기 때문일까. 가끔 몸에 상처가 있기도 한데 난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몸에 상처가 있는 날도 요즘 들어 부쩍 빈도가 커지고 있다.
집에 돌아왔다.
그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나란히 놓인 두 켤레의 실내화, 앞치마 두벌, 베개 두 개, 칫솔 두 개. 모두
그의 것, 그리고 내 것. 이렇게 사이좋게 나누고 있지만 지금은 그가 없다. 정작 집 청소를 하며 모두 버
려야 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 하고 있다. 혼자 남은 하나가 지금의 나처럼 너무 아파 할
테니까. 하는 억지를 쓰며 계속 청소를 미루고 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얼굴이 베개에 닿자마자 갑작스럽게 느끼는 건데, 오늘은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난 천사 조각상 앞에 앉아 있었다. 공원은 한
산했고 난 그 어느 때 보다 예쁘게 차려입고 있었다. 봄바람이 살랑, 하고 불자 풍성하게 피어있던 벚꽃
가지가 흔들리며 꽃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난 그 풍경에 탄성을 질렀다. 흐드러지게 벚꽃의 비가
한산한 공원을 가득 매웠다. 주욱-둘러보았다. 조금 더 그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어 눈을 움직이다 어
느 한 곳에서 내 눈이 멈추었다. 그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는 그의 옆의 새로운 여자와 함께였다.
난 그냥 눈물이 났다.
그것뿐이다. 날 떠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그가 미운 것도 아니었고, 내가 있어야할 그의 옆 자리를 꽤 차
고 있는 그 여자가 미운 것도 아니었다. 난 그냥 눈물이 났다. 평생 보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너무도 당연하게 내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번쩍 눈을 떴다. 내가 눈을 뜬 것이 아니라 눈이 저
절로 번뜩 뜨였다.
“가지마...사랑해...사랑해요, 가지마요...”
난 침대에서 울고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었을 때 흰 베개가 거뭇거뭇하게 물들어 있었다. 마스카라가 번
진 것 이다. 분명 샤워를 하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난 꿈속에서처럼 옷을 예쁘게 차려 입고 화장까지 하
고서 자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몸에 상처가 없다. 팔을 뻗어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4시 28분...잔뜩
무거워진 눈을 비비며 화장실에 들어섰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아직도 어색하다.
천사 조각상 앞으로 조금 다가섰다.
어젯밤 꿈에 내가 있었던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 이다. 새벽 공기는 아직까지는 차갑다. 새벽 공기는 아
주 차가우면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난 숨을 더 깊이 들이 마쉬었다. 천사 조각상의 얼굴을 올려
다보았다. 온화한 미소는 내 심장을 뜨겁게 만든다. 가끔 잠이 오질 않는 밤에는 눈을 꼭 감고 천사 조각
상의 그 미소를 마음속에 그리는데, 그 온화한 미소를 그리고 나면 심장이 뜨거워져 머리를 편안하게 만
든다. 벚꽃은 여전히 아름답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벚꽃은 모두 떨어질 것 이다. 난 사실 그 것이 두렵
다. 벚꽃이 모두 떨어진다는 것. 그리고 또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카페에 들렀다.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그와 함께 이 카페에서 하루 종일 진을 치고 눌러 앉아 있곤 했다. 그 당시 우리
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둘만의 여행을 간다거나 바닷가로 피서를 가기에는 너무 빈곤했다. 번
화가가 가장 잘 보이고, 가장 시원하고, 가장 편안하면서도 가장 싼 곳. 그 곳이 바로 여기였다. 가게에서
가장 왼쪽의 구석진 자리에서 항상 그와 내가 체리 아이스티를 한 잔씩 시켜놓고 수다도 떨고 장난도
치다 낮잠도 자곤 했다. 벤치처럼 생긴 의자에 빨간 방석이 깔려 있는데 푹신한 방석에 앉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이 감긴다. 새벽 7시 즈음 되는 시각인데도 사람이 꽤나 많았
다. 이 집의 토스트와 우유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회사원들과 학생들이 카운터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
긴 했지만 그와 내가 앉았던 가장 왼쪽 구석의 자리는 다행이도 비어있다.
그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 했을 때 난 웃어버리고 말았다.
장난치지 말라며 그의 손을 잡고 흔들흔들 애교를 부렸지만 그의 표정은 냉담했다. 아무 말 없이 날 내
려다보는 그의 눈을 보니 이미 그의 마음은 나에게서 아예 돌아섰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는 나
에게 ‘헤어지자’라고 말 하고 나서 ‘다른 여자가 생겼어’라고 말 했다. 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 버
리고 말았다. 울고 싶었지만 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가 그 때 왜 울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
“다른 여자가 생겼다니까...그 동안 고마웠어...정말.”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차갑게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나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에게 전화를 할 힘도, 그를 찾아 갈 힘도, 밥을 먹을 힘도 없어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그
러다 잠이 들었고 난 또 잠을 자면서 울었다. 이상하게도 난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그가 밉다고
생각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은 조금 후회하고 있다. 그 때 돌아서려는 그의 바지자락에 매달려 미
안하다고, 내가 더 잘 한다고 울며 빌었더라면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돌아 섰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이스티의 얼음이 녹아 양이 더 많아 졌다. 빨대로 휘휘 아이스티를 젓고 빨았
는데 신기하게도 빨간 아이스티가 투명한 빨대를 따라 올라온다. 내가 끊임없이 빨아들임으로 아이스티
는 끊임없이 따라 올라왔다. 난 멍하게 따라 올라오는 아이스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와 테이블 의자에 가방을 던져두고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거품을 가득 받아 놓았다. 그와 난 비누거품 놀이를 하곤 했다. 목욕을 하다 양 손에 거품을 가득
올려놓곤 후-하고 불면 깨알만한 비눗방울들이 욕실 공중에 웅웅-떠 다녔는데 그때는 그게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양 손에 거품을 얹고 후, 하고 불었다. 비눗방울이 떠다닌다. 보이
지도 않을 만큼 작은 비눗방울 들이...하지만 지금은 웃기지가 않다. 갑자기 날 떠난 그가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눗방울도, 그와 함께 마셨던 체리아이스티도...화가 날 정도로 미워졌다. 욕조에서 나와 몸에
묻은 비누를 헹구어냈다. 오늘 카페에서 마셨던 체리아이스티의 향이 입에 남아 있는 것 같아 이를 닦았
다. 하지만 개운하지가 않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
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체리아이스티의 향이 하는 것 같아 이를 닦았다. 하지만 개운하지가 않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체리아이스티의 향이 나는 것 같다.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입에 손가락을 넣었다. 헛구역질과 고통의
땀만 올라올 뿐이다. 몇 분을 쪼그리고 앉아 있다 체리 아이스티를 뱉어 냈다. 아주 소량이었지만 그나
마 마음이 놓이는 듯 한기분이다.
침대에 누웠는데 몸이 피곤하다. 서랍을 뒤적거려 수면제를 찾았다. 세알을 꺼내어 물도 없이 그냥 삼
켰다. 수면제는 될 수 있으면 줄이려고 했는데 오늘은 내가 아닌 내 몸이 너무 원했다. 나도 모르게 수면
제를 찾아 들었던 것 이다. 억지로 마음속으로 천사의 미소를 그렸다.
침대에는 그가 누워 있었다.
내 어깨를 감싸 안았던 것처럼 그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잠들어 있다.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가
지런한 속눈썹을 따라 내려와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분홍빛 입술은 살짝 벌어져선 새근새근-잠에 취
한 그의 숨을 뱉어 내고 있다. 빨간 이불에 가려진 그의 쇄골 뼈와 가슴팍은 정말 숨이 탁 막힌다. 하지만
가슴팍에는 다른 여자의 얼굴이 기대어 있다.
“당신은...행복한 여자야”
새근새근 그의 숨소리가 나의 발을 자꾸 잡는 듯, 한 느낌이다.
그의 숨소리 때문에 발을 옮길 수가 없다. 그의 숨소리를 가지고 싶다. 미치도록 가지고 싶다. 갑자기 오
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난 침대에 기댄 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지경이다. 난 미치도록 그의 숨소리를 원했다.
...
이제 방은 조용했다. 그의 숨소리가 내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고, 내 발을 붙잡지도 않았다. 빨간 이불 속
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이 함께 단잠에 빠져 있다. 마지막으로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지난 3년 동안 우리의 키스 중에 가장 달콤한 키스이길 바랬다. 거울 속의 검은 머리가 이젠 그렇
게 낯설지 않다. 머리를 정리했다.
난 이제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벚꽃을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기도를 하기로 했다.
날 사랑해 줬던 그에게, 잠 못 드는 밤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어 주었던 천사 조각상에게, 그리고 희열의
끝을 알게 해 줄 나에게. 두 손을 모았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난 바람에 내 몸을 맡기기로 했다. 벚꽃은 이
제 1년 365일 언제나 피어 있을 것 이다. 몸이 떠오르면서 가벼워 지는 느낌이다. 이것이 희열의 끝일
까. 그리고 잠시 뒷면 난 고통의 끝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흐드러진 벚꽃과 천사
조각상 아이스크림의 생각을 끝으로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아마 난 꿈에서 깨어나지 못 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의 나는 꿈속에서 영원히 잠들었고, 두 번째의 나는 죽었다.
...난 미쳤다. 날 미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미치다.
첫댓글 와...진짜 뭐라그래야되지. 멋져요. 문체도 너무 깔끔하시고 조금은 가라앉은듯한, 우울한분위기도 멋지고..묘사도 너무 멋져요! 건필하시구요, 와...진짜 여운이장난아니네요.
감사합니다, 문체 칭찬에 기분이 좋네요. 하나하나 섬세하게 칭찬해주시는 배려에 감사의 말씀을(...)고맙습니다
와, 대단하세요. 묘사가 참 깔끔하게 잘 되어있네요!
대단까지야...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멋진글이였어요. 내용의 분위기가 엄청 고요한게 묘사도 잘되있고... 작가님의 느낌이 잘전달되는거 같네요^^ 좋은소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자주자주 찾아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짜 최고에요........이말밖에 안나와요,,,,깔끔하고 뭔가 정돈된듯한 느낌도 나고,...우울한거같지만..너무 심하지도 않고...쵝오!
최고...아직 멀었죠, 아직 바닥에 빌빌 기는걸요-. 힘을 듬뿍 실어주시는 응원에 불끈불끈 힘이 솓습니다아- 감사드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어이, 흑...아아 오늘 너무 아까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