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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휴가지에서 생긴 일-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이 세상을 내리쬐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갈색 생머리를 가진 그녀는 혼자 기차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창 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은아..」
오랜만에 만난 주혁이와 사귄 지 1년째 되던 날..
하루 종일 즐겁게 그와 웃고 떠들며 그 동안 느끼고 있었던 묘한 불안감이
씻은 듯 날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집 앞까지 데려다 주던 주혁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밤공기를 가르며 등뒤에서 들려오는 주혁이의 낮은 목소리에
대문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제 옆 반 김민영이랑 주혁이랑 영화 보러 갔대. 너 알고 있었어?」
「그저께 내 친구가 민영이랑 너 남자친구랑 둘이 손잡고 가는 걸 봤다고..」
「옆 반에 김민영이랑 주혁이랑..」
주위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민영이와 주혁이의 관계를 애써 무시했다.
..친구들이 오해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던가..
["다음 역은 xx역 입니다. 손님들께서는.."]
그녀는 귀에 꼽고 있던 mp3의 이어폰을 빼고 짐 가방을 챙겨 들었다.
몇 년간 혼자 짝사랑 해왔던 주혁이와 사귀었던 1년간..행복했다.
그리고..불안했다.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주혁이는 언제나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정신적인 피곤함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도..좋았다.
혼자 짝사랑 해 왔던 시간까지 합해서
3년 동안 한번도 주혁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잊자.
주혁이를 잊고..에너지를 가득 채워서 돌아가자.
그래서 온 여행이 아니던가.
나를 위한 나만의 휴가.
거기에 주혁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금상첨화..
'피식'
그녀의 입에서 힘 빠진 웃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주혁이보다 더 멋진 남자가 있긴 있을까..
기차에서 내리자 한 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과 함께 바다의 짠 내음이 섞여 왔다.
"우선 여관? 거기 가서 짐부터 갖다 놓고.."
"여관이 아니라 민박이라니까! 이 자식이 계속 여관이래!"
바로 옆에서 떠들어 대는 남녀가 섞인 한 무리의 아이들.
여럿이 함께 놀러 온 건가..
갑자기 혼자인 자신이 괜히 초라하게 느껴지는 은 이였다.
그들은 그녀를 스쳐 즐겁게 휴가계획을 세우며 떠들썩하게 지나갔다.
탁-
누군가의 어깨와 부딪친 그녀의 손에서 들려있던 짐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하얀 얼굴을 감싸 흘러내리는 남자의 부드러운 갈색머리카락..
..예쁘다..
"정힌아 뭐해! 얼른 와!"
방금 지나갔던 그 남녀 무리의 일원인 듯 남자는 다시 짐을 들어주더니 해맑게 웃으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 나갔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은이는 주머니 속에서
이모가 아는 분이 하신다는 민박집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꺼내어 들었다.
'휘이잉~'
한차례 바람이 불자..
'끼익 끼익'
모서리 한쪽이 떨어진『바다민박』이라고 씌어 진 현판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바다민박..
은이는 멍하니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듯한 허름하기 짝이 없는
나무로 된 2층 민박집을 바라보았다.
"야..여기 맞아?"
"맞다니까! 약도 보면 여기가 정확히.."
"이게 무슨 민박집이야! 완전 폐가다 폐가 "
옆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은 이의 시선으로
아까 역에서 보았던 남녀 무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까만 머리가 인상적인 귀여운 여자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까 짐을 들어주었던 그 예쁘장한 남자아이.
"여 어 일찍도 왔네 그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노인 목소리에 그 무리들과 함께 은 이의 고개도 뒤로 돌아갔다.
그 곳에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 한 분이 생선이 들어있는 작은 바케스를 든 채
웃으면서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다민박에 온 걸 환영하네."
*
"그래. 강자한테 애기 들었지. 손주녀석이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좀 시끄럽긴 하겠지만..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머물다가 가게나."
늙은 할머니의 미소를 보며 은 이는 가방을 챙겨 민박집 주인이신
할머니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이 자리하고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갈 때마다 삐걱 삐걱 낡은 나무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여자 애들은 왜 1층이야?"]
["낸들 아냐! 우리 할머니 마음이다 왜."]
바로 옆방에서 떠들어 대는 남자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은 이는 바닥에 깔린 이불 위로 짐 가방을 던지고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로 보이는 해변가의 모습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먹거리장터.
은 이는 창문을 열어둔 채 선풍기를 중으로 틀어 놓고 이불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괜히 혼자 왔나.
아무 곳도 나가기 싫었다.
"야야 곧 불꽃놀이 시작한대! 우리도 얼른 자리 잡자."
옆에서 떠들어 대는 친구 지용이를 바라보던 정힌이의 시선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해맑게 웃고 있는 소녀에게로 돌아갔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불알친구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친한 지용이와..
그 녀석의 여자친구 김유정.
녀석의 여자친구 이전에 자신이 오랫동안 혼자 짝사랑 해 왔던 여자..
지용이가 유정이를 알기 전부터 그는 유정이란 소녀를 알고 있었다.
"야야 지용이 여자친구랑 있게 우린 좀 있다 빠져 주자."
옆에서 킥킥대며 소근거리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정힌이가 자리에 일어 났다.
"응? 정힌아 어디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 나자 유정이의 친구인 다른 여자아이가 그를 따라 일어 섰다.
기차에서부터 계속 추파를 던져 댔던 그 여자아이는
그와 함께 따로 시간을 가지고 싶은 듯 보였으나 정힌이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는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가다가 일행들과 멀어지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외진 해변가..
혼자 바람을 쐬고 싶어 그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모래밭에 앉아 멍하니 밤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여자.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감싸고 흩날리고 있었다.
고혹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던 정힌이는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갔으나 그녀는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처음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가만 보니 그녀의 귀에 이어폰이 끼워져 있었다.
낯익은 그 여자의 얼굴..아,
자신들과 함께 바다민박에 머무르게 된..
친구들이 예쁘다고 난리 쳤던 그 여자.
그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매우 외로워 보였다.
털석-
그녀의 옆에 정힌이 주저 앉자 그녀가 깜짝 놀라 정힌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귀에서 한 쪽 이어폰을 빼고 그를 바라 보았다.
"내 이름 윤정힌이예요. 바다민박에 함께 머무르게 된 무리 중에 끼어있는.. 기억 못하죠?"
그녀는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귓가로 흐르는 잔잔한 발라드의 음악에 섞여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전해왔다.
"이름이 뭐예요?"
정힌의 눈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최 은."
"예쁜 이름이네요..나이는?"
"열..아홉.."
"아, 저는 한 살 어려요."
그리고 잠시의 침묵..
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어지럽혔고
정힌이와 은이는 시선을 마주한 채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정힌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가만히 말없이 앉아 있기가 어색했던 은 이는 자신의 한쪽 이어폰을 그에게 내밀었고
그는 말없이 그녀의 한쪽 이어폰을 받아 자신의 귀에 꽂았다.
밤이라는 시간과 찰랑거리는 파도..
그리고 귓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사람을 묘하게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내가 중학교에 막 입학하던 날..
강당에서 아침에 조회가 있었는데 어떤 한 여자가 막 뛰어 오는 거야.
검은 머리에 눈이 참 컸던 그 애는 지각하지 않으려고 정신 없이 뛰어 오는 게
꼭 엎어질 것 같더라고.. 그런데 정말 내 앞에서 차악-"
정힌이는 손을 앞으로 뻗어 보이며 포즈까지 취한 채 입을 열었다.
"슬라이딩 하면서 엎어져 버리지 뭐야..
그래서 그냥 앞에서 보고 있기가 민망해서 손을 뻗으며 그 여자애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줬어."
정힌이는 옛날 일을 회상하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 역에서 봤을 때부터 그랬지만.. 이 애는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얼굴이 빨게 져서 고맙다고 중얼거리는데
순간 처음으로 여자아이가 예쁘다고 생각했지.
그때까지 나는 여자애들을 그냥 귀찮은 존재라고 밖에 생각 안 했었거든..
그때부터 내 눈은 항상 그 애를 쫓고 다녔어.
그리고 그 여자애가 넘어질 것 같으면 괜히 손톱을 물어 뜯곤 했지.
몇 년 동안이나 나는.. 음
결국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마디 말을 못 걸고 the end-"
은 이는 가만히 그의 옆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친구가 자기 여자친구라면서
한 여자애를 데리고 오는 거야. 커다란 눈동자를 돌돌 굴리며 쑥스러워 하는 그 애를."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정힌이의 얼굴을 보며
은 이는 주혁이를 혼자 짝사랑했던 시절의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자신도 그랬겠지. 저 애처럼 웃음 속의 슬픔을..
"누군가에게 이런 애기 꺼내본 적 처음이에요.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속 시원하게 털어 놓아도 곧 헤어지기 때문에 나에 대해 상관할 수 없는 사람."
은 이는 정힌이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왜 갑자기 존대 말 해. ..반말 써."
정힌이가 웃었다.
"누난 왜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야?"
은 이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별 것 아냐.. 남자친구에게 차였어. 기분전환 하려고.."
"흐음."
정힌이는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는 은 이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없는 그녀는 외로움에 둘러 싸인 듯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예뻐 보였다..
밤바다와 발라드가 주는 로맨틱한 분위기 때문일까?
아무튼..
유정이 다음으로 유일하게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게 만든 여자.
"..누난 언제까지 있을 거야?"
"한 사일 정도만.."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잠시의 침묵 뒤에 정힌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그 동안만 사귈래?"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정힌이의 얼굴로 향했다.
"야! 넌 무슨 화장실을 한 시간 동안 갔다오.. 어? 누구야?"
정힌이를 향해 삿대질을 하던 친구는
곧 그의 옆에 있는 은 이를 보며 정힌이에게 물었다.
그러나 정힌이가 말하기도 전에 다른 여자아이가 끼어 들었다.
"어? 우리랑 같이 바다민박에 머무르는 그 여자 아냐?"
"아 진짜다! 뭐야 아는 사이였어?"
정힌이는 웃어 보이며 내 손을 잡았다.
"앞으로 우리 휴가 온 동안 나랑 사귀는 누나. 인사해."
"에엑?!!!"
그의 친구들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은 이의 눈은 그런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휴가라고 바닷가에 온지 이틀째 되는 날.
은 이는 파라솔 아래 뜨거운 태양빛을 피해 누운 채로
한창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는 정힌이를 바라 보았다.
정힌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자아이..
검은 생머리에 큰 눈을 가진 여자는 하루 종일 무언가 잃어 버리기 일수였고
혼자 잘 엎어지기도 했다.
손이 많이 가는 타입.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김유정 이라는 그 여자아이가
바로 정힌이가 좋아한다는 그 여자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그 애를 보며 웃는 정힌이의 미소가 유난히 해맑다.
파라솔 아래 태어나 처음으로 나름 대담하게
비키니를 입은 채 누워있는 그녀에게로 정힌이가 다가 왔다.
"왜 바다에 안 들어가?"
"..바닷물 싫어. 진득거리고.."
"쳇, 그러면 산으로 갈 것이지. 왜 해변가를 왔어."
자신도 그게 의문이었다. 왜 해변가로 왔을까?
그냥 파란바다 사진에 반해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네가 좋아한다는 애가 쟤지? 김유정 이라던가.."
정힌이는 조금 놀랐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정힌이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예쁘지?"
그 아이를 보며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정힌이의 모습에
은 이는 순간 묘한 감정이 이는 것을 느꼈다.
정힌이 친구들과 함께 또는 정힌이랑 같이 있는 시간은 즐거웠다.
함께 해변가에서 하는 비치 볼도 재미있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거웠다.
갑자기 다가온 정힌이와 그의 친구들이 자신을 들어 올려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은 몹쓸 짓을 할 땐 한 대 때려주고 싶기도 했지만..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낳은 시간이었다.
은 이가 느끼는 정힌이는 항상 유정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습관처럼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야야 우리 배 안탈래? 가까운 섬에 가서 낚시나 한번 하고 오자. 배 삯도 싸던데!"
"낚시? 너 네야 재미있겠지! 여자인 우리들은 얼마나 지루하기만 한데."
"에 뭐야. 그럼 그냥 가지 말든가."
낚시이야기는 그렇게 무산 되는 듯 보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정힌이에게 시선을 돌린 은 이는 아쉬워 하는 듯 보이는 그를 바라 보았다.
"..낚시 가고 싶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힌이.
"응. 내가 사실은 낚시 마니아라서."
싱긋 웃는 정힌이의 얼굴이 예뻐 보여
은 이는 충동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었다.
"나도 낚시 좋아해. 우리 둘이 갔다 올까?"
"어? 정말 그래도 괜찮아? 나 사실 무지 가고 싶었거든!"
신난다는 듯 웃는 정힌이를 보며 흐뭇한 마음이 드는 것을 느끼며
은 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왜 흐뭇한 거지?
아무튼 그렇게 정힌이와 은 이의 낚시행은 결정이 되었다.
가장 가까운 섬으로.. 바닷가에 온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와우! 봐 엄청 커!!”
한참 낚시질을 하던 정힌이 낚싯대 끝에 달린
이름 모를 커다란 물고기에 해맑게 웃으며 은 이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턱을 괸 채 낚시질을 하는 정힌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정힌이를 보며 웃던 그녀의 시선이 곧 아까부터 줄곧 신경 쓰였던 하늘로 향했다.
올 때는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갑자기 왜 이렇게 음울하게 변했는지..
“정힌아,”
“응?”
“하늘이 이상해.”
은 이의 말에 정힌이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정말로 올 때 보았던 하늘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회색구름이 잔뜩 낀 잿빛하늘이 비추고 있었다.
“아저씨한테 데리러 오라고 전화 해 봐.”
정힌이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누나, 아저씨 번호가..어?”
그녀의 시선이 정힌이의 손가락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 나가는 핸드폰으로 향했다.
정힌이는 놀란 얼굴로 멍하니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허공으로 빠져 나가는 핸드폰을 바라 보았다.
‘풍덩-’
..핸드폰은 그의 손을 빠져나가 깊은 어둠의 나락으로 사라졌다.
[“현재 북태평양 쪽에서 올라오는..
번개와 강풍을 동반한 비구름이 오후 한 때 제주, 남부지방을 지나갈 것으로..”]
“어? 아까 정신이랑 은 이누나 낚시하러 간다고 그러지 않았어?”
“왔겠지. 설마 아직도 그 섬에 있을라고.. 하여튼 윤정힌 그 자식 또 어디로 샜어. 확실해.”
“킥킥 내일 아침에 둘이 다정하게 손잡고 나타나는 것 아냐?”
‘우르릉 쾅쾅-‘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천둥소리에 은 이는 몸을 움츠렸다.
핸드폰을 떨어뜨린 이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들에게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를 피해 정힌이와 은 이는 작은 동굴로 피신 해 온 상태였다.
한 여름이기에 얇은 옷을 입었던 은 이는 갑자기 닥쳐오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추워?”
“아, 아니 난 괜찮..”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 주는 정힌이.
그녀는 자신의 어깨 위로 옷을 덮어 주는 정힌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미안해. 내가 핸드폰을 떨어뜨리지만 않았어도..누나?”
정힌이는 가만히 핏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누나.. 어디 아파?”
정힌이가 그녀의 이마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불덩이 같은 그 뜨거움에 놀란 그가 그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 당겼다.
은 이가 작게 입술을 달싹거리자 정힌이는 그녀의 입술 가까이로 귀를 가져다 댔다.
“추…워…”
또 다시 한기를 느꼈는지 그녀가 몸을 떨었다.
“젠장”
그가 그녀를 품 속으로 끌어 당겨 꽉 안았다.
“미안해. ..제기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모르겠어.”
정힌이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그녀를 꼭 안은 채 계속 중얼거렸다.
그의 품속에 갇힌 은 이의 귓가로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두근 두근’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박동.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 이는
귓가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신경이 쓰이는 것을 느꼈다.
온몸에서 열이 나면 오감은 더 깨어 나는 걸까..
자신의 심장소리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싫지 않은 느낌.
아니, 어떻게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이 반응.. 언젠가 한번 겪은 적이 있었다.
주혁이를 처음 보았던 날..
그 때도 지금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었지.
“누나, 괜찮아?”
귓가에서 들려 오는 정힌이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온몸을 녹아 들게 했다.
그렇게 낮지도 높지도 않은 중간 음,
솜사탕처럼 달콤하고..부드러운 그 목소리.
아,
불현듯 깨달았다.
처음 역에서 나와 부딪쳤던 순간부터 정힌이를 쫓아 다니던 내 시선의 의미를..
사람들이 운명적인 사랑이라며 찬양하는 그 말.
나는 정힌이에게 첫 눈에 반했던 것이다.
정힌이는 자신의 품 속에서 한결 안정적으로 변한 숨결을 느꼈다.
새근 새근 날숨과 들숨을 반복하며 잠이 든 그녀..
여자가 원래 이렇게 연약한 존재였던가.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 온 모든 여자들은 표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나운 암고양이 같다고나 할까..
대부분은 어머니가 내게 전해 준 여자의 모습이었지만.
물론 유정이는 제외하고..
“음..”
잠결에 은 이가 그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 들자 정힌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식은땀을 너무 많이 흘린다..
열 감기에 걸린 걸까? 애들이나 걸린다는 그 열 감기..
어디선가 그럴 때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정힌이는 옆에 있던 생수통을 열었다.
“누나..? 물 좀 마셔봐.. 누나.”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지도 않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입에 살짝 생수 물을 대어 보지만 그녀의 입가로 흘러 내리는 게 시원찮아 보였다.
정힌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절대 다른 생각을 한 게 아니라.. 누나가 물 마실 힘도 없어 보여서 그런 거야.”
작게 중얼거린 그는 자신의 입 속으로 물을 한 모금 집어 넣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포개지고
그의 입을 타고 전해진 한줄기 물이 그녀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 이거 내 첫 키스야.”
정힌이는 그녀의 이마에 ‘쪽’ 하고 작은 입맞춤을 했다.
“내 첫 키스까지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낳아.”
무거워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 그녀의 시선 속으로
제일 먼저 나무로 된 천장의 모습이 들어 왔다.
..민박집인가?
내심 바랬었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이 그 아이의 얼굴이기를..
하얀 얼굴과 부드러운 갈색머리가 예쁜..
은 이는 가만히 누운 채로 귀를 기울였다.
정힌이의 친구들은 매우 떠들썩해서 민박집에 있으면
아래층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까지 모두 다 들려오곤 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어째서? 아무도 없는 건가..?
그 불안한 정적에 은 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 보았다.
그래..2박 3일이라고 했었지. 그럼 간 건가..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정힌이의 핸드폰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어디 사는 지도..
‘벌떡-’
은 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이제야 일어났네그려.”
아래 층 현관에 서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 그녀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애들은요?”
할머니는 빨간 바케스에 조개를 한 가득 담은 채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방금 기차 탄다고 나갔지.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으면 떠나는 얼굴들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마자 은 이는 아무 슬리퍼나 구겨 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역에는 여름을 즐기기 위해 해변가로 놀러 오는 학생들과
여름 휴가를 받고 가족들과 함께 피서를 온 이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오니…안전을 위해 손님들께서는 노란 선 밖으로..”]
사람들을 해치며 철로가 놓여진 쪽으로 뛰어가던 은 이는
멍하니 걸음을 멈춘 채 떠나가는 기차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갔..어..?
그녀의 눈동자에 울렁이며 고여 있던 눈물들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갔다.
그가…가 버렸다.
“누나..?”
..잘못 들은 걸까?
은 이는 천천히 뒤돌아 섰다.
“누나 울어? 아직도 아픈 거야?”
잘못 들은 게 아니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갈색머리의 남자를 보며
그녀는 눈물샘이 고장 나 버렸다고 생각했다.
눈물은 끝을 보이지 않고 더욱 더 소낙비처럼 줄기차게 흘러 내리고 있었다.
정힌이가 그녀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왜 울고 있어.”
은 이는 눈물을 멈추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안 갔어? 왜 친구들이랑 같이 안 갔어? ”
정힌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에
쑥스러움을 느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생각 해 보니까 나는 누나 핸드폰번호도 모르고 누나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니까..”
“좋아해.”
갑자기 터져 나온 그녀의 한마디에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 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울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은 이는 정힌이의 품으로 뛰며 말했고 그는 그런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멍했던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나도..좋아해. 최 은..”
은 이는 그의 품에서 울면서 웃었다.
주혁이를 잊기 위해 온 이 작은 휴가 속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어쩌면 주혁이를 능가하는 더 큰 사랑을.
이런 곳에서..
주혁이보다 이렇게 잘난 남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정힌이를 만난 지 겨우 삼일 째..
그렇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사랑은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
이렇게 첫 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다고.
“..유정이는? 너 유정이 좋아했잖아..”
그의 품 속에서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몰라. 친구랑 행복하든지 말든지..그런데..”
은 이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 나 때문에 운 거야?”
“아니.”
“거짓말.”
정힌이의 말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그런데 그거 정말 첫 키스였어?”
잠시의 침묵.
“깨어 있었어?”
“응.”
정힌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그의 품속에 안겨 있던 그녀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너 의외로 응큼하다? 깨어 있었으면서..”
다시 이어지는 침묵.
“..너 왜 반말해. 누나라 불러.”
갑자기 말을 바꾸는 그녀의 태도 정힌이가 킥킥거리며 웃어댔다.
“왜 말 바꾸는데?”
갑자기 그를 밀쳐 버리는 그녀.
그리고 은 이는 뒤돌아 휘적 휘적 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너 다시 돌아가!! 이런 녀석인 줄 몰랐어!”
그가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건 피차일반이라고! 같이 가!!”
그와 그녀.. 그들의 얼굴 위로 즐거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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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모집에 응모했던 단편소설입니다;
단편방에 올려도 된다는 공지를 이제서야 확인했네요..
음 모자란 실력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코멘트 남겨주시면 정말 감사해요~
첫댓글 즐독했어요
요호~ 히히 기분좋아지는 얘기에요..바다> < 가구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