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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25일 금요일 말씀묵상 ♣
성경:마가복음4:35-41(신59P)
제목: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1)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도입}*** 할렐루야!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깨달으신대로 실천하며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제목}***“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여러분!지금까지 “겨자씨 비유”의 내용을 좀더 깊이ㅡ 살펴보았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합니다(30-31절).
2.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크게 성장합니다(32절 상반부).
3. 하나님의 나라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32절 하반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에는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해석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 비유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차근차근 깨달아갑니다.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삽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삽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을 높이며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시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막4:35-41)
막1:1에 명시된 것처럼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41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하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떨면서 서로 말하기를 예수님이 누구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바람과 바다는 예수님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요1:3을 보면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님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이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또한 히1:2을 보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지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울러 히1:3을 보면 예수님이 만물을 붙들고 계심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계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친히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찬송가 32장 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사람이 되신 하나님 나 사모하여 영원히 섬길 내 영광되신 주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심을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의 큰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고 있는 어떠한 풍랑도 잔잔케 하십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오늘 본문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1.풍랑 전의 고요입니다(35-36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막4:35).
막4:1을 보면 그 날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날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셔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날 예수님은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해석하셨습니다. 그 실례로 마가복음 4장에는 “여러 땅의 비유,” “등불 비유,” “그릇 비유,” “자라나는 씨의 비유,” 그리고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그 날 온종일 예수님은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시고 또한 따로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낮이 다 지나가고 땅거미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할 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은 예수님의 본 동네 가버나움의 바닷가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막5:1을 보면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곳은 갈릴리 바다의 남동쪽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바다 이편에서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시고자 하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왜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서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가시기를 원하셨습니까?
우리는 다음절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막4:36).
“그들이 무리를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가시고자 했던 이유는 무리를 떠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붐비던 가버나움에 비해서 거라사인의 지방은 비교적 한산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막3:20에 의하면 몰려드는 무리로 인해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조차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날도 분명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그의 제자들에게 다소간의 쉼을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날 하루 온종일 배 안에 계셨던 셈입니다.
그만큼 그 날 하루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는 쉴 틈이 주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빴습니다.
막1:16, 19에 의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네 명 곧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또한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었습니다.
아울러 요21:2-3을 보면 이들 이외에도 세 명이 더 어부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아마도 그 날 예수님이 타신 배는 이들 중 한 사람의 소유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었기 때문에 배를 몰고 가는 일에 능숙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갈릴리 바다의 지리나 환경에도 익숙했을 것입니다.
1986년 갈릴리 바다의 밑바닥에서 아주 오래된 배 한 척의 잔해가 발굴되었습니다. 보존 상태가 꽤나 괜찮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면밀하게 조사를 해보니까 놀랍게도 그 배는 예수님 시대의 것으로 추정이 되었습니다.
그 배의 크기는 길이가 8m 정도였고, 너비는 2m가 조금 넘었습니다. 그 정도 크기의 배라면 십오 명 정도가 함께 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그 날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그와 같은 종류의 배를 타셨을 것입니다(성지 순례가시면 이 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4:10을 보면 예수님의 곁에는 열두 제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36절의 끝을 보면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라고 했습니다. 열둘 이외의 사람들은 다른 배들에 나누어 타고서 건너편을 향했던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8:23에 의하면 그 날 그들은 행선했다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돛을 달고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서 배가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만일 역풍이 불거나 물결이 거세었더라면 그들은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 날 저물 때의 갈릴리 바다는 고요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순풍에 돛을 달고서 아무런 걱정 없이 바다 건너편을 향했습니다. 무척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풍랑 전의 고요였습니다.
2.풍랑 속의 고요입니다(37-38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4:37).
갈릴리 바다의 고요가 갑작스런 풍랑에 의해서 깨어지는 장면입니다. 그 날 있었던 풍랑의 심각성은 세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째,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둘째,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왔습니다.
셋째,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첫째,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주변이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때때로 북쪽에 있는 높은 산에서 찬 공기로 이루어진 기류가 형성이 됩니다.
그 기류가 산과 산 사이의 좁은 계곡 사이를 지나서 갈릴리 바다 쪽으로 불어오면 저절로 속도가 매우 빨라집니다.
게다가 갈릴리 바다는 해발 -200m입니다. 아주 낮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눅8:23을 보면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바람이 아주 무서운 속도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사납게 불어닥쳤던 것입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찬 공기가 갈릴리 바다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면 서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갈릴리 바다에는 소용돌이가 일어나게 됩니다. 소용돌이가 부는 방향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광풍이라는 말 그대로 그 때의 바람은 미친 듯이 제멋대로 붑니다.
이렇듯 갈릴리 바다는 그 지형적인 이유로 인해서 빈번하게 광풍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광풍은 그저 흔하게 일어나는 광풍의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큰 광풍”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정된 특별한 광풍이었습니다.
둘째,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왔습니다.
고요한 바다에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어납니다. 바람이 거셀수록 물결은 더 크게 일어납니다.
갈릴리 바다는 자그마합니다. 그래서 해변을 때린 물결이 되돌아오면서 해변으로 다가가는 물결과 충돌합니다. 그러면 물결은 더 크고 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8:24을 보면 그 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배를 덮어버릴 만한 큰 물결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물결이 해변으로 밀려가면서 또한 해변에서 되돌아오면서 배의 양쪽을 심하게 부딪혔던 것입니다.
셋째,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탄 배에는 갑판이 따로 없었습니다. 속이 완전히 개방된 배였습니다. 따라서 큰 물결이 쉴새없이 배에 부딪쳐 들어오자 순식간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눅8:23 말씀처럼 그 배는 가라앉을지도 모를 정도로 위태하게 되었습니다(세월호 참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의 상당수는 어부들이었습니다. 아니더라도 그들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만큼은 그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배를 덮어버릴 만한 물결이 계속해서 배에 부딪쳐 들어오니까, 그들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4:38).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그저 관광이나 즐기던 여행객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상당수는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이제 자기들은 죽게 되었다고 여겼으니 그 날의 풍랑이 얼마나 심하고 위태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큰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고물은 배의 뒤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 곳에서 모래주머니나 또는 그 비슷한 것을 베개 삼아서 주무셨을 것입니다.
실로 그 모습은 풍랑 속의 고요였습니다. 거세게 부는 바람도 높게 이는 물결도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습니다. 배 안에 들어온 차가운 물도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제자들의 부산한 움직임도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풍랑 속에서도 고요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갈릴리 바다의 큰 풍랑 속에서도 평안하게 주무셨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인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주무신 것은 이 때가 유일한 경우였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주무신 것은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신 참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셨기에 그 동안의 피로가 분명 많이 누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 배가 출발하자 말자 예수님은 깊은 잠에 빠지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그 날 육체적으로 아주 고단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큰 풍랑이 일어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주무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풍랑 속의 고요였습니다. 우리는 그 까닭을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양면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풍랑 속의 풍랑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풍랑을 이겨보려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써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마8:25을 보면, 이 때 어떤 이는 예수님을 “주여”(Lord)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선생님”(Teacher)이라고 불렀습니다. 눅8:24에서는 “주여, 주여”(Master, Master)라고 불렀습니다. 너무도 다급한 나머지 그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조차도 제 각각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이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깨우며 예수님에게 도움을 간청했던 것은 바른 일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성도들이 삶의 풍랑을 맞이할 때, 하나님을 깨우는 심정으로 하나님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시44:23).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사51:9).
뜻하지 않는 풍랑을 만나셨습니까? 풍랑 속의 풍랑으로 남아있지 마십시오. 풍랑 속의 고요이신 예수님을 깨우십시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은 깨셔서 우리가 겪는 풍랑을 고요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3. 풍랑 후의 고요입니다(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4:39).
이는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깨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8:26을 보면 예수님은 곧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간구를 외면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곧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말씀하셨습니다. 마8:26에 의하면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동시에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는 바람과 바다로 나누어서 이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곧 이어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면서 그것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바람에게는 잠잠할 것을 명하셨고, 바다에게는 고요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저 이 말씀이 전부였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권세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이 말씀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만 이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과 바다는 창조주의 음성을 듣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 날의 바람은 큰 광풍이었습니다. 수백 만 마력의 힘을 가진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미친 듯이 불던 바람은 곧 그치면서 잠잠해졌습니다.
바람이 그치더라도 큰 물결이 사라지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배를 덮을 만큼 아주 컸던 물결들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거울의 표면처럼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욥26:12).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시89:9).
이와 같이 오로지 하나님만이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들을 잠잠하게 하시며 고요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그의 권세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계속해서 드러내셨습니다. 예컨대 막2:10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막2:28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십니다. 또한 막3:27을 보면, 예수님은 사탄보다도 더 강하십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은 말씀과 이적들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계속해서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심으로 다시 한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4. 고요 후의 풍랑입니다(40-41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풍랑을 고요하게 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물어보셨습니다.
첫째,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둘째,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사실 그들은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운 듯이 그저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풍랑을 무서워했던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그들도 예수님처럼 풍랑 속의 고요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풍랑을 무서워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모든 병자들을 고치셨고 귀신들도 내쫓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으며 또한 예수님이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돌보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 자신이 풍랑을 만나자 그들의 믿음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경우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한 경우는 말씀에 불순종할 때입니다. 선지자 요나가 겪었던 풍랑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서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셔서 그를 돌아서게 하셨습니다.
또 한 경우는 믿음을 더하실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겪었던 풍랑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해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풍랑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을 그들에게 더하셨습니다.
풍랑을 만나셨습니까?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얼른 바른 길로 돌이키십시오. 말씀에 순종을 하는 데도 풍랑을 만나셨습니까?
그러면 감사하십시오. 분명 놀라운 이적을 체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4:4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때 제자들의 답변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주여, 이제부터는 더 이상 풍랑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풍랑 속에서도 돌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풍랑을 무서워했지만 이제는 풍랑이 그치고 고요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요 후의 풍랑이 새롭게 그들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심히 두려워했습니까? 그 이유가 하반부에 나옵니다.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이 질문에는 대답이 따로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분명하게 그 대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바람이 저절로 그치고, 바다가 저절로 잔잔하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면 바람과 바다를 그토록 온전하게 다스리시는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대답은 자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가 되셔서, 바람과 바다를 온전하게 다스리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앞에 서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심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들인 인간은 누구라도 심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여러분!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1.풍랑 전의 고요입니다(35-36절).
2.풍랑 속의 고요입니다(37-38절).
첫째,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둘째,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왔습니다.
셋째,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3. 풍랑 후의 고요입니다(39절).
4. 고요 후의 풍랑입니다(40-41절).
첫째,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둘째,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떄문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이십니다. 그러므로 시55:22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짐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또는 벧전5:7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염려를 다 예수님께 맡깁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모든 풍랑을 아주 잔잔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질책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풍랑이 높이 이는 때는 정말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능동적으로 믿음을 보여야 하는 때입니다.
실패와 질병과 위기속에서 여러분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더 강해지기 바랍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건져 주실 것을 내다보며 묵묵히 견디어 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마가복음4:35-41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세월호 침몰로 우리나라가 큰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이 때에 주님을 깨우셔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