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백평야 너머로 보이던 개성의 송악산과 벽란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버스에 실려 밤길을 달려
도착한 강화의 창후리 선착장, 바다는 검붉은 빛으로 높게 출거렁렸다.
멀리 보이는 교동도 사이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배를 타고 도착한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
다시 버스에 실려 도착한 화개사 지나 화개산 가는 길에
찔레순이 푸릇푸릇하지만 아직 겨울의 잔해가 남아 있다.
그 길목에 있는 교동향교를 지나 가다가 만난 문무정
다시 산을 오르자 붉게 핀 진달래꽃을 따 먹자 입안에 감도는 향긋한 봄 냄새를 통해
옛 시절을 회상한다.
내 어릴 적엔 진달래꽃을 한 아름 꺾어다 놓고
얼마나 따 먹었던지 머리가 아프기까지 했는데,
정상에 오르자 보이는 연백평야 이렇게 날이 좋을 수가 없다.
질펀하게 펼쳐진 연백평야를 지나자
꿈인 듯 생시인 듯 보이던 개성의 송악산과 장단의 오관산이 지척처럼 보인다.
그 산자락 아래에 예성강의 끝자락이 보이고,
살포시 보이는 듯한 벽란도는 어떤 사연을 지니고 있는 곳인가?,
“고려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던 강이 예성강이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 “예성강은 개성부의 남쪽에 있어 바다와 통하였다”고 기록된 예성강은 황해북도 수안군 성교리에서 시작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황해북도의 수안군․곡산군․신계군․평산군․금천군과 황해남도의 평천군을 지나 배천군과 개성시 개풍군 일대를 지나다가 황해의 강화만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187.4킬로미터에 유역면적 4,202.3제곱킬로미터이며 유역평균폭은 23.2킬로미터이다.
이 강은 신계․곡산의 현무암 지대를 깎아가지고 흐르다가 지석천․신계천․구연천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지천을 받아들이면서 흐른다. 이 강의 하구에 벽란도가 있다. 지금은 개풍군 삼성리의 자그마한 강변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수도인 송도의 관문이었고,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던 곳이다. 출입하던 외국 무역선은 송나라 상인이 가장 많았고, 일본 상인과 동남아 여러 나라,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찾아왔으며, 벽란도 근처에 외국사신을 영접하기 위한 벽란정(碧瀾亭)이 있다. 그러한 사실을 노래한 ‘예성강곡’이 남아 있는데, 고려사 「악지」를 보자.
“예성강 노래 두 편이 있다. 옛날에 당나라 상인 하두강(賀頭綱)이 바둑을 잘 두었다. 그가 한번은 예성강에 이르러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서 바둑으로 내기하여 따가려고 하였다. 그는 그녀의 남편과 바둑을 두되 일부러 지고는 물건을 약속한 양보다 배나 실어다 주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그녀의 남편은 더 많은 물건을 따 가지려고 자기 처를 대고 바둑을 두었다. 하두강은 단판에 이겨 그 여자를 배에 싣고 가버렸다.
그 남편은 너무도 원통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 세상에 전하여 오기를 그 부인이 배에 실려 갈 때 몸단속을 심히 굳게 하여서 하두강은 그녀를 간음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배가 바다의 한 가운데에 이르러서 빙빙 돌면서 나가지 않으므로 점을 치니 ‘절개 있는 부인에게 감동된 바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 부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배는 반드시 깨질 것’이라는 것이다. 뱃사람들은 그만 겁을 먹고 하두강에게 권고하여 돌려보냈다. 이 부인도 역시 노래를 지었으니 그 후편이 바로 이것이다.”
노래가사는 전해오지 않는데, 추정하기로는 남편의 노래는 회한을 노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고 남편과 아내의 합작품이었을 것이다.
한편 권근은 기(記)에서 벽란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도 서북쪽 여러 골짜기 물이 모여 긴 강이 되어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나루터를 벽란이라 한다. 국도에 가까우므로 건너다니는 사람이 많고, 산이 가까우므로 강류가 빠르며, 바다에 가까우므로 조수가 세게 밀려서 건너는 이들이 매우 괴롭게 여긴다. 나라에서 관원을 두어 맡게 하였는데, 강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옛날에는 초루(草樓)가 있었으니, 나루터 일을 맡아보는 관원이 거처하는 곳이다. 강은 바다 하늘에 잇닿았고 산은 들판에 가로놓여 구불구불하여 아득히 멀어 바라보아서 끝이 없으며, 형세의 절승한 것이 제일이라고 할 만하다.”
경기도 개풍군 벽란도는 고려시대 예성강 하구의 무역항이자 요충지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중국과의 통교를 통해 교역하였다. 934년(태조 17) 7월에는 고려 상선이 후당(後唐) 등주(登州)에 가서 교역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고려의 배가 청주(靑州)에서 무역을 하였으며, 958년(광종 9)에는 후주(後周)에서 비단 수천필로 구리를 무역해 온 기록도 있다. 이러한 대외무역의 중심지가 바로 벽란도였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황해안에 위치한 벽란도는 원래 예성항으로 불렀으나 그 곳에 있던 벽란정(碧瀾亭)의 이름을 따서 벽란도라고 이름 지었다. 고려 전기의 대외무역은 송(宋)을 비롯하여 요(遼)·금(金)·일본(日本) 등 주변 나라와 행해지고 있었으며 멀리 아라비아의 대식국(大食國)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했다. 각국의 해상선단이 개경의 문호인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중심으로 몰려옴으로써,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황해도 편에서
자연은 그대로 변함이 없는데,
자연의 극히 일부인 사람만이
자연을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고,
저마다 자기 구역으로 정하고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북진나루를 지나 남산포와 교동읍성의 연산군 적거지를 지나 돌아오는 길,
곧이어 개통될 교동대교가 바람결에
손짓하고 있는데.
갑오년 사월 초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