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재 그림 길 (64) 독백탄 ②] 독백탄 위 산줄기를 걷는 구름길 20km
cnbnews 제686호 ⁄ 2020.10.29 10:28:17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독백탄은 남종면 쪽 한강에서 족잣여울(족자섬, 두물머리) 방향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는 이들의 시각은 여울의 물과 섬, 그리고 주변 강가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 그림의 또 한 부분은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산줄기이다. 독백탄도(獨柏灘圖) 위에 걸어 갈 산길을 표시해 보았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기는 산행은 산줄기를 이어 가는 산행이다. 백두대간과 9정맥 길, 지맥 길을 이어 종주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산줄기를 이어 가는 산행은 가슴 설레는 레저가 되었다. 히말라야 트레킹, 돌로미테 트레킹 등등 해외 유명 트레킹과 아울러 우리 산줄기를 이어가는 트레킹이 백두대간에서 유행을 타더니 서울 주변 산줄기를 타는 명코스들이 생겼다. 이 중 예봉산 ~ 운길산 종주도 매력 있는 코스로 떠오른 지 오래다.
겸재의 독백탄을 배경 삼아 이번 회차에는 이 산길을 가보려 한다. 예빈산(禮賓山) ~ 예봉산(禮峰山) ~ 철문봉(喆/哲文峰) ~ 적갑산(赤甲山?) ~ 운길산(雲吉山)이다. 총 길이가 20km쯤 되니 베테랑이 아니면 한 번에 종주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두 번, 또는 세 번에 나누어 가 보시기를 권한다.
중장년의 낭만 길, 조선시대엔 동해 가는 관동대로
경의중앙선이 전철화되면서 접근성이 더없이 좋아졌다. 팔당역에서 하차하여 역 앞 길, 즉 옛 6번 경강국도를 건너면 양수리 양평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한 세대 전 우리의 길을 만난다. 중년이 된 세대들에게는 팔당, 양수리, 양평으로 이어지는 이 길이 나들이 길이며 설악산과 동해로 가는 낭만의 길, 고행의 길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관동대로(평해로)였다.
여기에서 167번 시내버스를 타고 팔당댐 지나 천주교묘역에서 내린다. 흔히들 예봉산(禮峰山)은 팔당역에서 바로 오르지만 예빈산(禮賓山)은 버스 몇 정류장 앞이라 버스로 환승하는 것이 좋다. 먼 산길 오르려면 차로를 걸으면서 공연히 심신의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천주교묘지는 예빈산 남쪽 기슭 양지바른 곳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수십 년은 된 묘역인데 예빈산이 이렇게 된 것은 마음 아프다.
묘역 아래 강가와 좌측 마을은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이다. 오래된 마을로 겸재의 독백탄도(獨柏灘圖)에도 족자섬 뒤로 이 마을을 그려 놓았다. 그 아래로는 다산 선생의 생가 마을 마재가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 옛 봉안역(奉安驛)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시대 길을 떠나면 민간은 객주집(주막)에 머물었고, 관원은 역참(驛站)에서 말 먹이고 쉬며 원(院)에서 잠을 잤다. 우리가 잘 아는 청파역, 구파발, 이태원, 퇴계원 이런 지명은 모두 역원(驛院) 체계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이 봉안역은 망우리 넘고 덕소, 팔당 지나 양수리 건너 양근, 지평으로 이어지던 관동대로 옛 국도변 역이었다. 원주와 대관령 넘어 강릉, 양양, 평해로 이어지던 길이었으니 아마도 사임당, 율곡, 난설헌, 허균 모두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월계나루 정초부도 배를 안 탈 때는 이 길을 걸어 동대문밖으로 나무 팔러 갔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단종도 이 길로 갔느냐고 묻는데 단종이 유배를 떠난 길은 이 길은 아니다. 영월, 정선, 평창 가는 길은 광진나루 건너 지금의 강동구와 하남을 지나 이포나루, 여주를 경유하는 길이었다.
이제 예빈산 산행들머리로 간다. 이 지역 산행 안내판이 잘 정리되어 세워져 있다. 표지석도 서 있는데 ‘천마누리길’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옆으로는 천마지맥의 남양주시 구간이 잘 그려져 있다. 느닷없이 이곳에 웬 천마산 이야기일까? 언젠가 여암 신경준 선생의 ‘산경표’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책은 백두산을 우리나라 산의 종조(宗祖)로 해서 모든 산의 계보를 정리한 멋진 책이다. 백두대간에서 벋어 나간 13개 정맥(正脈)을 정리했는데 우리 시대의 산꾼들은 그것으론 성이 안 차서 정맥에서 벋어나간 산줄기를 다시 지맥(支脈)으로 표기하고, 1 대간과 남쪽 9 정맥 산길 종주가 끝나면 다시 지맥 길에 오른다.
천마지맥도 그 중 하나인데 한북정맥(漢北正脈) 운악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에서 남쪽으로 분기해 나간 산줄기를 천마지맥이라 부른다. 주금산 ~ 철마산 ~ 천마산 ~ 백봉 ~ 갑산 ~ 적갑산 ~ 철문봉 ~ 예봉산 ~ 율리봉 ~ 예빈산이다. 필자도 10여 년 전 이 산길을 타 보았는데 아름답고 가슴설레는 산 길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많은 분들이 예봉에서 운길까지 종주 산행에 나서고 있지만, 예빈산에서부터 하실 것을 권한다. 천마지맥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잠시 후 설명드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천주교 묘역은 차가 산 중턱까지 오를 수 있게 포장길이 정비되어 있다. 포장길이 끝날 무렵 능선길이 시작된다. 묘역이 끝나는 지점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는 아래 소박한 묘지들과는 달리 큰 묘석에 울타리도 치고 큰 봉분에 넓은 땅을 차지한 묘지들이 보인다. 묘표를 보니 알 만한 이름들도 보인다. 종교 시설 묘역에서조차 이렇게 해야 하나?
뒤돌아서 올라온 길 아래 강 마을을 바라본다(사진 1). 사진 속 번호 1은 봉안마을, 2는 다산 선생의 마재마을, 3은 겸재 독백탄의 모티브를 제공한 족자섬, 4는 두물머리, 5는 우천마을이 있었던 소내섬, 6은 분원, 7은 우천(경안천)이다. 고만고만한 민초들이 살던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고요하다.
예빈산 기슭은 태종 이방원의 사냥터
사냥을 좋아하던 태종은 이곳에 와서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봉안역 뒷산이니 옛 이름으로 하면 예빈산 기슭이며 지금 기준으로 하면 예봉산, 예빈산에서 사냥을 한 기록들이 전한다. 소수의 아랫것들을 데리고 와 말 타고 활을 쏘아 노루 두 마리를 잡았다. 1405년 왕 5년 이른 봄 2월인데 “경기병을 인솔하고 봉안역 등지에서 노루 두 마리를 쏘아 잡았다(率輕騎畋于奉安驛等處, 射獐二)”는 것이다.
중앙선이 뚫리면서 예빈산, 예봉산에 봉안터널이 뚫렸고, 전철화되면서 옛 터널은 자전거길이 되었으니 예빈산의 심장은 이제 우리 곁으로 파고들었다. 봉안역에 어떤 옛사람들은 은거해 들어 와 살았고 어떤 이들은 지나며 시(詩)를 읊었다. 조선초 양촌(陽村) 권근은 누군가 썼던 봉안역정시를 차운해서(次奉安驛亭詩韵) 한 수 지었다.
옛 역정은 무성한 나무 사이 보이는데 古驛亭開茂樹間
서늘한 저녁나절 쉬니 몸은 평안하네 晩凉來憩覺身安
산숲 궁벽한 곳 민가도 드물고 山林僻處民居少
숙식 일 적으니 아전 한가롭네 廚傳稀時吏役閑
벼랑길 강 나직이 누가 뚫었나 崖路俯江誰鑿險
계류 돌에 부딪히니 절로 춥구나 溪流激石自生寒
내 왔는데 내놓을 것 없다 말하지 마소 我來莫噵無供給
말이 푸른 꼴 먹는 것도 염치없거늘 馬飽靑蒭尙厚顔
택당 이식도 젊었을 때 지나갔던 봉안역에 다시 들러 앞강에 배를 대고 옛날을 회상했다. 노쇠한 택당의 그 마음은 이제 시간과 강물에 떠내려 갔다. 이곳에 이제는 별장과 카페들이 들어앉았다. 시간은 참 무심도 하구나.
봉안역(奉安驛) 앞강에 배를 대고 (泊奉安驛前江)
한여름에 여강(驪江)에서 한 잔 하고 盛夏黃驪飮
임술년 초가을에 (여기에) 노닐었네 初秋壬戌遊
풍진 속 두 줄기 흐르는 눈물 風塵雙下涕
강은 예나 지금이나 동에서 흘러 오네 今古一東流
역점(驛점) 앞에는 산 꽃이 늦고 驛店山花晚
어촌 물가 나무는 그윽하네 漁村水樹幽
희망을 읊었던 자리에 돌아와 向來吟望地
희끗한 백발로 외로운 배 대는구나 衰白艤孤舟
능선길을 따라 예빈산을 오른다. 팔당에서 오르는 예봉산은 가파름에 비해 산행 맛은 없는데 예빈산 오르는 능선길은 상당한 운치가 있다. 돌아보면 항상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절경이 일망무제(一望無際),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첫 봉 승원봉을 지나고 둘째 봉 견우봉을 지나고 정상 직녀봉에 닿는다. 견우봉과 직녀봉에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써 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직녀봉이 예빈산 정상인데 있어야 할 정상석은 구석 절벽 앞에 깨진 채로 조그맣게 서 있다. 가슴 아프구나.
조선 시대 옛 지도들을 보면 이 구역의 산은 예빈산(禮賓山)이 전부였다. 운길산 구역으로 오면 운길산(雲吉山, 水鐘寺山)과 조곡산(鳥谷山)이 있을 뿐이다. 지금의 예빈산과 예봉산은 모두 예빈산으로 불렸다. 지금의 직녀봉(예빈산)은 예빈산의 동봉, 예봉산은 예빈산의 서봉 정도로 여긴 것이 조선 시대의 인식이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철문봉과 적갑산도 달리 명칭이 없으니 예빈산의 한 봉우리로 여겼으리라. 왜 이 산들이 모두 예빈산이었을까? 옛 지도에는 그 답을 알 수가 있는 힌트가 있다. 예빈산 기록 옆에는 어김없이 의정부시장(議政府柴場)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우선 예빈산이란 이름이 붙게 한 조선 시대 예빈시(禮賓寺)라는 관아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시대 육조(六曹) 이외의 관아로서 6시 7감(六寺七監)이 있었다. 6시(寺)는 태상시(太常寺), 종부시(宗簿寺), 위위시(衛慰寺), 사복시(司僕寺), 예빈시(禮賓寺), 전농시(典農寺)이고, 7감(監)은 태부감(太府監), 소부감(小府監), 선공감(繕工監), 사재감(司宰監), 군기감(軍器監), 사천감(司天監), 태의감(太醫監)을 말한다.
예빈시의 기능은 태조실록에 잘 설명되어 있다. 1392년 태조 1년 7월 기사인데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하면서 예반시의 관장 업무를 명백히 하고 있다.
예빈시(禮賓寺)는 빈객(賓客)과 연향(宴享)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종4품이고, 승(丞) 1명, 겸승(兼丞) 1명 종5품이고, 주부(注簿) 2명, 겸주부(兼注簿) 1명 종6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고, 녹사(錄事) 2명 정8품이다.
禮賓寺: 掌賓客, 宴享等事. 判事二, 正三品; 卿二, 從三品; 少卿二, 從四品; 丞一, 兼丞一, 從五品; 注簿二, 兼注簿一, 從六品; 直長二, 從七品; 錄事二, 正八品.
즉 예빈시는 사신, 종친 등 손님 맞이와 궁중연회를 책임진 부서였다. 출근하는 의정부 삼정승 등의 식사도 책임진 부서였다. 그러다 보니 예빈시는 의정부 옆에 자리잡았다. 예빈시는 땔감이 많이 필요했다. 이런 예빈시의 땔감 공급처(시장: 柴場)가 바로 이 산이었으니 자연히 그 이름도 예빈산이 되었다. 참고로 강 건너 검단산은 군기시(軍器寺)의 시장(柴場)이기도 하였다.
위세 좋았던 예빈산 이름이 쪼그라든 사연
그러다가 조선 말기가 되면서 예빈산의 큰 봉우리가 슬그머니 예봉(禮奉)으로 기록되더니 일제강점기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나 조선지형도 등에는 아예 예봉산(禮峰山)으로 독립하여 버렸다. 아쉬운 것은 해방 후에 일제의 자료가 여과없이 그대로 대한민국 지도로 굳어지니 이 지역 산의 주산(主山)은 예봉산(禮峰山, 683m), 곁다리 산은 예빈산(禮賓山, 590m)이 되었다. 더욱 이상한 일은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 의해 그나마 예빈산이라는 이름도 주봉은 직녀봉, 작은 봉은 견우봉 표지판이 점령해 버리니 아아, 예빈산 산신령님은 아연실색(啞然失色)을 하고 계실 것이다. 이렇게 예빈산 신령님은 안방을 내어주고 건넌방 신세가 된 후 이제는 행랑채 신세가 되었다.
예빈산 신령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예봉산으로 향한다. 길은 예빈산 정상에서 곧바로 좌(서쪽)를 향하여 좌향좌, 가파르게 떨어지는 길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곳에는 안내판도 없고 길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필자도 안내 꼬리표가 붙어 있는 북쪽 길로 산 하나 다 내려갔다가 되돌아오는 이른바 알바(산꾼들이 길을 잃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이르는 그 바닥의 은어)를 했다. 가파른 길을 내려오면 예빈산과 예봉산 사이 안부 율리고개다.
예봉산 오르려면 율리고개 통해서
팔당에서 예봉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필자는 이곳 율리고개로 오르기를 권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팔당역 가까이에서 막바로 오르는 예봉산 길은 경사도만 숨이 턱에 찰 뿐 산행의 즐거움이 적다. 율리고개 능선길을 오르면 낮은 봉우리 율리봉에 닿는다. 다시 안부를 거쳐 오르면 오늘의 최고봉 예봉산 정상(683m). 최근에 생긴 기상관측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는 도미강 건너 검단산이 우뚝하고 서울 주변 모든 산줄기가 시원하게 보인다. 앞으로 가야 할 운길산 능선길은 오후 햇살 아래 그 모습이 선연하다.
여기에서 산길을 북으로 방향을 잡아 종주길로 접어들면 억새밭 지나 철문봉(喆文峰)이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목민심도’란 길 이름을 붙여 놓았다. 설명판 내용인즉 “목민심도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저술한 문헌 ‘목민심서’를 본따 만든 용어로, 백성을 생각하던 정약용의 마음을 일깨우며 걸어보라는 의미이다. 이곳 철문봉은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가 본가인 여유당에서 집 뒤 능선을 따라 이곳까지 와서 학문(文)의 도를 밝혔다(喆)하여 철문봉이란 명산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나? 다산은 산에서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세상에 멋있는 소리라 했다.
賦得山北讀書聲 : 산 북쪽 책 읽는 소리 듣다
天地何聲第一淸 천지간 무슨 소리가 가장 맑을까
雪山深處讀書聲 눈 쌓인 깊은 산속 글 읽는 소리
仙官玉佩雲端步 신선이 패옥 차고 구름 끝을 거니는 듯
帝女瑤絃月下鳴 천녀가 달 아래서 거문고를 타는 듯
不可人家容暫絶 사람 집에 잠시라도 끊겨서는 안 되는 것
故應世道與相成 그래서 세상 도리와 함께 이룩될 일
北崦甕牖云誰屋 북쪽 산등성이 오막살이 그 뉘 집일까
樵客忘歸解送情 나무꾼도 돌아가길 잊고 정취를 풀었다네
철문봉을 지나 적갑산 길로 향한다. 툭 트인 시야가 나타난다. 활공장이다.
능선길은 흙길인데 높낮이 차도 그다지 없어 쾌적하다. 물푸레나무 군락지, 철죽 군락지를 거쳐 적갑산을 지난다. 적갑산이란 지명의 근거는 찾지 못했는데, 두보(杜甫)가 옮겨가 살던 곳이 적갑산이었다. 역시나 다산의 시 중에 적갑산과 용문산을 언급한 것을 보면 이곳 적갑산도 다산과 관련이 있는 이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다지 재미있는 시는 아니지만 전거(典據)를 위해 올려 본다. 동료 현계에게 보낸 시다(簡寄玄溪).
단풍잎 가을 바람에 병든 눈을 떠서 보니 黃葉風中病眼擡
가을이라 그 기운 참으로 구슬프구려 秋之爲氣信悲哉
일천 숲을 들레던 매미는 어디로 갔나 千林喧沸蟬何去
한 줄로 나는 기러기만 또 왔도다 一字飛騰雁又來
적갑으로 옮기어라, 슬피 바라만 볼 뿐 赤甲遷居空悵望
좋은 술로 뒤따라 뫼실 수가 없었네 靑酒從事莫追陪
용문서 콩 구워 먹던 게 어느 해의 일이던고 龍門煮菽何年事
동에서 흐르는 물 다시 돌아오지 않아라 逝水東流不復回
(기존 번역 전재)
이제 적갑산을 지나 새재고개로 향한다. 산길은 소나무 군락지인데 이곳 소나무는 어느 것 하나 곧은 것 없이 모두 모두 제 마음대로 한껏 몸을 틀고 있다. 재목으로는 값어치가 없으나 정원수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윽고 종주길 한 구획을 긋는 새재고개에 닿는다. 힘든 이는 이곳에서 일단 하산하여 다음 기회에 운길산 구간에 도전하고, 체력이 되는 이는 이어서 종주길을 계속하자. 하산 길은 두 길이 있는데 남쪽 계곡을 내려오면 조곡(鳥谷)을 지나 운길산역으로 내려온다. 4km가 넘는 길이니 길을 즐기며 하산할 것. 또 하나 북으로 새재고개를 넘으면 도심역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길도 4km는 좋이 되는 길이다. 운길산 종주길을 그리며 일단 여기에서 글을 줄인다.
[겸재 그림 길 (65) 독백탄 ③] 새재는 새가 넘는 고개일까, 새(新) 고개일까
cnbnews 제687호 ⁄ 2020.11.16 09:45:26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난번에 이어 예빈산 ~ 운길산 종주길을 이어간다. 적갑산 능선길을 내려와 운길산 능선길로 접어드는 안부가 고개4거리인데 여기에서 남쪽 계곡 길을 내려오면 조곡(鳥谷)골을 지나 운길산역에 닿는다. 이 남쪽 고갯길을 언제부터인가 새우젓고개라 부르고 있다. 반면 고개사거리 북쪽 길로 잠시 가면 천마지맥의 적갑산 능선과 갑산 능선이 이어지는 안부가 있는데 이 고개는 새재고개라 부르고 있다.
그 길로 내려가면 도심역으로 향한다. 한편 옛 지도를 보면 이 위치쯤 되는 곳의 고개 이름을 시유치(時踰峙)로 표기하고 있다. 이제는 이 지역에 이런 이름의 고개가 없으니 의미나 유래를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새재(고개), 새우젓고개, 시유치(時踰峙), 시유치 넘어 마을 시우리(時雨里), 또 새우젓고개 아랫마을 조곡(鳥谷)골, 이런 지명들을 곰곰 살펴보면 전혀 무관한 것 같으나 짚이는 바가 있다.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짚어 보자.
어느 날 가시덤불 우거졌던 골짜기가 뚫려 새로 고갯길이 생겼다 하자. 사람들은 이름 없는 이 고갯길을 ‘새 고개’ 또는 ‘새 재’라 부르기 시작한다. ‘새고개’는 중세 우리말에 흔히 있는 현상으로 ‘ㄱ’이 탈락하여 ‘새오개’가 된다. 세월이 흘러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발음 편히 ‘새우개’라 부르고 슬그머니 ‘새우고개’가 된 후 새우젓 장수가 넘나들던 고개라는 말이 생기면서 ‘새우젓고개’로 변신한다.
한편 기록을 하거나 지도를 그리는 한자문화권 양반님들은 ‘새’를 新으로 썼으면 좋으련만 ‘鳥’로 쓰기도 하고 ‘새넘이 고개’를 ‘새유치’로 쓰지 않고 잘못 듣고 ‘시유치(時踰峙, 嶺)’라 썼다 하면 지나친 추측일까? 더 나아가 시유치(時踰峙) 뒷마을은 ‘시유리’가 되면 좋으련만 ‘시우리(時雨里)’로 진화했다고 보면 더욱더 억측일까?
새고개 → 새우개 → 새우고개 → 새우젓고개?
새우젓고개는 이곳뿐 아니라 전국 도처에 새로 생긴 고개에 있으니 새우젓 장수는 서운하겠지만 이곳 새우젓 고개도 새고개에서 변신하였으리라. 또 이곳 아랫마을 조곡(鳥谷)도 새(新)를 오해하여 새(鳥)로 쓴 것은 아닐까? 다른 이야기이지만 문경 새재 조령(鳥嶺)도 이런 혐의가 짙은 고개 이름이다.
머릿속으로 이런 소설을 쓰면서 운길산 능선길로 접어든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가니 능선길은 붉게 물들었다. 흙길과 바윗길이 알맞게 섞인 운길산 능선길은 산행에 맛이 있다. 호젓한 산행길 한 시간 반여 지나 드디어 운길산 정상에 닿는다. 정상에는 아담한 운길산 정상석이 고도 610m를 알리고 있다. 주위를 살필 수 있는 우뚝한 봉우리이다 보니 우리의 발길이 지나온 산줄기가 굽이굽이 물결치고 아래로는 두물머리를 감싸고 도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그야말로 그림이다. 한나절 대중교통으로 와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한국의 산과 강, 참 멋있다. 코로나 세상에서 답답한 이들, 외국 갈 수 없는 이 때를 기화(奇貨)로 삼아 우리 국토 많이 다녀 보시기를 권해 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운길산 안내판은 무언가 어설프다.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서 멈춘다 하여 운길산이라 불린다 하며…’ 이렇게 시작하는데, 운길산의 유래치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남아 있는 옛 지도들을 보면 이 산이라 짐작할 수 있는 이름이 지금처럼 대체로 ‘雲吉山’이며 간혹 ‘水鐘山’ 또는 정확한 위치를 지정하기는 어렵지만 ‘鳥谷山’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필자 개인의 느낌으로는 강을 배경으로 운길산을 바라보면 그 위를 떠가는 구름은 길상(吉祥)스럽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정상에는 넓은 데크를 깔아 놓아 쉬어가기에 그만이다. 어느날 늦은 오후 이 산을 내려오는데 어떤 이가 야영 배낭을 메고 힘차게 오르고 있었다. 어디서 비박하느냐? 했더니 정상 데크에서 한다는 것이다. 내려다 보는 두물머리 야경이 최고라고 한다. 그럴 것 같다. 부럽다. 이제 정상을 거쳐 골짜기 길로 내려오면 수종사로 바로 가는 길인데, 앞 봉우리로 오른다.
겸재의 독백탄에도 그려져 있듯이 운길산은 주봉(主峰: 610m) 옆에 또 하나의 봉우리가 있다. 수종사는 이 봉우리 아래에 있으니 수종사의 주산(主山)은 이 봉우리인 셈이다. 겸재의 독백탄에도 이 봉우리 아래쪽에 수종사가 그려져 있다. 그동안 없던 이 봉우리에 정상석이 새로 섰다. 한글로 ‘절상봉 522m’라 했는데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다. 혹시 절(寺) 뒷봉 정상이라 붙인 이름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세조가 머물렀다는 수종사의 절경
이제 가파른 산길을 내려와 수종사(水鐘寺)에 도착. 세조가 행차(幸次: 임금의 움직임에는 行 대신 幸을 쓴다) 길에 여기에서 머물었는데 어디에서인가 종(鐘) 소리가 들려 찾아보니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부처님 상을 만났다는 전설의 절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는 참으로 절경이다. 정초(正初)에 맞이하는 신년(新年)의 해는 또 어떻고. 두물머리가 내려다보이는 삼정헌(三鼎軒)에 앉아 마시는 차 한 잔도 일미(一味)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느 해인가 이곳에 앉았다가 이곳을 지키는 보살님의 퉁명스러움에 차 한잔의 낭만을 잃은 적도 있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요즈음에는 절에 갔다가 봉사에 나선 보살님들의 상심(上心)에 하심(下心)하려던 내 마음을 놓친 날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 절과 인연을 맺은 이는 여럿 있었다. 그중 한 사람으로 겸재의 든든한 후견인 장동 김씨 농암 김창협(金昌協)이 있었다. 농암은 앞에서 소개했듯이 석실 넘어 삼주삼산각에 있었는데 학동들을 데리고 가까운 수종사에 와서 여러 날 지내고 있었다. 농암이 47세 되던 1697년(숙종 23) 겨울이었다. 이때 백부에게 보낸 편지와 수종사에서 쓴 시가 농암집에 전한다.
백부님께 올립니다 정축년
제가 산방에 와서 거처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이곳은 지대가 높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게다가 얼음과 눈으로 길이 막혀 버렸기 때문에 종일토록 바깥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글을 배우는 아이들 몇 명과 함께 짝지어 밤마다 몇 덩이의 숯을 태우며 각자 자신의 수준에 따라 강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머물렀던 그 조용한 서원도 너무 시끄러웠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만 이러한 정취를 오래 누리기가 어렵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上伯父 丁丑
猶子來棲山房. 已有一旬. 處地高迥. 兼以氷雪塞路. 終日不見外人. 只有數學子相伴. 每夜擁數塊熟炭. 隨分講說. 覺向來書院亦太鬧熱. 但恐此味不易久餉耳. (기존 번역 전재)
이때 쓴 시 한 편도 읽고 가자.
수종사에 머물며 往棲水鍾寺
세상 피한다는 것이 별로였기에 遯世猶嫌淺
발길 끊긴 곳 찾아 암처에 드네 棲巖欲絶蹤
수종사가 먼 절은 아니지마는 水鐘非遠寺
운길산은 제 절로 높은 봉일세 雲吉自高峯
해질녘 돌아오는 새들도 보고 落景看歸鳥
세모라 용들도 칩거를 했네 窮陰有蟄龍
아마도 내 집에는 두세 학동이 心知二三子
문전 소나무에 기대 기다리겠지 候我倚門松
농암은 세상과 떨어진다고 석실서원 넘어 미호나루 변에 삼주삼산각을 마련하고 은거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글 배우는 애들과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석실서원이 전국 유생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삼주삼산각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농암은 그 겨울 학동 몇몇 데리고 또 다른 은거처 수종사로 둔세(遯世)하였다.
수종사를 찾아 글을 남긴 사람들
수종사를 찾아 글을 남긴 이들은 많다. 얼추 보아도 서거정, 김창협, 이병연, 초의, 다산…. 대둔산의 다승(茶僧) 초의선사는 세 번 서울에 올라왔는데 조선시대에 승려는 도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서울에 오면 수종사와 수락산 학림암에 머물렀다. 초의와 수종사에 대해서는 졸고 ‘옛절터 가는 길’에 쓴 글을 다시 소개드린다.
초의는 스승 다산의 권유로 서울 상경에 오르기 시작했고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丁學淵 ), 정학유(丁學遊)를 비롯한 당대의 문사들과 교류한 그가 수종사에 머물 때 남긴 시(詩)가 전해진다. ‘수종사에서 석옥화상시에 차운하다(水鐘寺次石屋和尙韻)’ 12수가 그것이다.
석옥청공화상(石屋淸珙和尙)은 중국 임제종의 법을 이은 고승으로 태고보우 대사에게 법을 전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법통(法統)은 한반도로 넘어왔다. 이 말은 달마를 통해 중국으로 넘어온 석가모니불의 법통이 석옥청공에게서 태고보우로 넘어옴으로써 불교의 법통이 한반도에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석옥청공 대사의 시에서 운(韻)을 빌려 수종사에서 지낸 겨울 12수의 시를 지은 것이다. 그중 한 수를 읽는다.
꿈 깨면 누가 앙산의 차를 내놓을까(夢回誰進仰山茶)
게을러 경전 보며 어두운 눈을 씻는다(懶把殘經洗眼花)
뜻 맞는 친구들 산 아래에 있으나(賴有知音山下在)
인연 따라 올라와 흰구름 집(수종사)에 머무네(家隨緣往來白雲家)
이제 초의선사가 머문 흔적은 수종사에 없다. 다만 아쉬움을 달랠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선불장(選佛場)에는 초의선사의 시가 주련(柱聯)으로 걸려 있다. 안타깝게도 주련은 원래 시대로가 아니고 뒤죽박죽 얽혀서 걸려 있다. 또 시간만 나면 이곳에 올라 놀던 다산의 시도 한 편은 읽는 게 도리일 듯싶다. 긴 시이니 한 꼭지만 읽는다.
운길산에 올라 上雲吉山
산을 바라보면 뛰어 오르고 싶어 望山欣欲奔
찬바람 겨드랑에 이네 冷風生肘腋
들녘 나무 따스히 더욱 곱구나 野樹暄更姸
산길은 드높고 바위도 많군 山逕高多石
한편 수종사는 때때로 어전회의에 오르기도 했다. 무슨 일일까? 수종사는 한양에서 가깝고 수려하다 보니 종친, 양반가의 내실(內室)이나 니승(尼僧)들의 발원처(發願處)가 되었고 당일로 돌아갈 길이 아니었기에 절에서 머무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이리 되니 불교를 사시안(斜視眼)으로 바라보던 유학자 신료(臣僚)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 중에 하나만 살펴보자.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조선이 성리학의 가치로 무장하기 시작하는 성종 때의 일이다. 왕 4년 1473년 7월 경연을 마치고 사헌부 집의(執義) 현석규(玄碩圭)가 절에서 중과 여승이 풍기문란을 일으킨다고 문제를 꺼냈다.
고하건대, ‘중[僧]과 여승[尼]이 교통(交通)하고 서로 왕래하는 자는 과죄(科罪)하여 정역(定役)하라’고 일찍이 수교(受敎)한 바가 있으니, 죄를 다스리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듣건대, 여승이 수종사(水鍾寺)에 가서 삼재(三齋)를 설치하고 삼재가 지난 후에 다른 여승들은 모두 돌아갔는데, 오로지 정관(井觀)과 혜사당(惠社堂)만이 그대로 머물러 사재(四齋)를 기다렸으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중략) 지금 부녀(婦女)와 여승과 더불어 안연(安然)히 마주 앉아서 그들로 하여금 경숙(經宿)하게 하였고, 승도(僧徒)들로 하여금 문(門)을 지키게 하여서 그 수종(隨從)한 노복(奴僕)들을 물리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정적(情跡)을 비밀스럽고 괴이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더욱 엄하게 다스려서 후래(後來)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고려 말엽에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중과 여승과 부녀자가 교통하고 서로 왕래하여 음욕(淫慾)을 마음대로 행하였으니….(후략)
今不治尼僧上寺之罪, 臣等考 ‘僧尼交通相往來者, 科罪定役’, 曾有受敎, 不可不治罪也. 臣等聞尼僧往水鍾寺, 設三齋, 過後他尼皆還, 獨井觀, 惠社堂留待四齋, 必有以也. (중략) 今與婦女尼僧, 安然對坐, 使之經宿, 令僧徒把門, 斥其隨從奴僕不納, 情跡秘詭, 宜加痛懲, 以戒後來. 前朝末, 婦女上寺無禁, 故僧尼婦女, 交相往來, 恣行淫欲.(후략)
태종태후는 과연 누구일까?
이렇게 유학자들의 음험한 눈초리가 절을 향하고 있었으니 니승(尼僧, 비구니)과 부녀자는 절에 다니기도 편치 않았다. 그런데 일찍이 이 절에 시주한 왕가의 여인이 있었다. 대웅전 옆 보물 1808호 곁에 서 있는 부도(浮屠)는 왕가의 여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탁본을 떠야 확인되는 희미한 명문에는 왕가 여인들 이름이 등장한다. 그 명문은,
太宗太后貞懿(또는 惠)翁主舍利(造)塔施主□□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立 [태종태후정의(혜)옹주사리(조)탑시주□□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립]이라는 글이다.
이해를 위해 글씨를 띄어쓰기해 보자.
太宗太后 貞懿(惠)翁主 舍利(造)塔 施主 □□柳氏 錦城大君 正統四年 己未 十月 日 立
정통 4년은 세종 21년(1439)이다.
우선 이 명문을 읽는 통설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권씨는 태종이 승하한 후 비구니가 되었는데 외동딸 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불교장례법에 따라 화장을 하고 이 탑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왕가의 옹주를 화장해서 사리탑에 모셨다? 이러한 전례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 태종과 의빈 권씨 사이에 태어난 정혜옹주는 운성부원군 박종우와 혼인하여 그 묘소는 지금도 연천 창남면 반정리 산55에 남편 박종우와 합장묘로 모셔져 있다. 따라서 정혜옹주 설은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이제 해석하기 전, 각 항목을 살펴보자.
太宗太后: 태종태후는 과연 누구일까? 태종대왕 헌릉신도비명을 보면 원경왕 후 민씨(元敬王后 閔氏)를 태종왕태후(太宗王太后) 또는 줄여서 태후(太后)라 표현하였다. 한편, 貞懿宮主 → 懿嬪은 ‘懿嬪 權氏’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태종태후는 ‘원경왕후 민씨’를 지칭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사리탑이 세워진 해는 1439년(세종 21년)이고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해는 1420년이니 19년 전 죽은 사람이 사리탑을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리탑에서의 태종태후는 다른 사람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마도 이때 홀아비로 사는 태종에게 원경왕후를 대신하여 국모 역할을 한 사람을 공식적은 아니지만 예우하여 사적으로는 태종태후라 부른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은 의빈 권씨(정의궁주)였다.
貞懿翁主: 아쉽게도 정의옹주로 불린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실록 (1402년 4월)에는 ‘권 씨를 봉하여 정의궁주(貞懿宮主)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실록(1422년 2월)에는 정의궁주 권 씨를 봉하여 의빈(懿嬪)을 삼았다 한다. 이때 함께 봉작을 받은 이가 신녕옹주(信寧翁主) 신씨(辛氏)였는데 그녀는 이날 신녕궁주(信寧宮主)가 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옹주 → 궁주 → 빈’의 순서로 서열이 올랐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사리탑의 정의옹주는 ‘정의옹주 → 정의궁주 → 의빈’의 순서를 거쳤을 것이며 정의옹주는 ‘의빈 권씨’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세조 14년(1468년)에 졸(卒)하여 딸(정혜옹주)이 묻혀 있는 연천 창남면 반정리에 묻혔다.
OO유씨: 사리탑 銘文에 금성대군보다 앞에 기록한 점으로 보아 금성대군보다 항렬(行列)이 높거나 직위가 높은 사람일 것이다. 유(柳)씨 성을 가진 윗항렬 왕실 여인은 3명이 있다.
*정경궁주(貞慶宮主) 유씨; 태조의 후궁으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는데 가능성은 희박하다. 금성대군보다 3대(代)가 앞선다.
*가의궁주(嘉懿宮主) 유씨; 미망인의 몸으로 정종의 후궁이 되어 아들 하나(佛奴)를 낳았는데 정종이 선양한 후 삶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의빈 권씨나 금성대군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사리탑에 기록된 유씨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빈(賢嬪) 유씨; 현빈 유씨는 태조의 8째 아들 세자 방석(의안대군)의 빈이었다. 입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 2년(1393년) 폐출되어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때 의안대군은 우리 나이로 12살, 세자빈은 아마도 10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이때 내시(內侍, 內豎) 이만(李萬)이 처형되었다. 신하들이 이유를 물었으나 태조는 집안일이라 하고 끝내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세자빈이 내시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수군대었고, 우리 시대 극작가들은 탕녀로 그녀를 난도질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과연 그랬을까? 시집온 지 1년도 안 된 10대 수줍은 처녀가 그 눈 많은 대궐에서 무슨 남자 경험이 많다고 몸이 타올랐겠는가? 아마도 동궁전 내시 이만은 어린애에게 시집온 세자빈을 애틋한 눈으로 보며 정성을 다하지 않았을까? 이 일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 큰 아들들의 음모일 것이라는 썰(說)도 있다. 이렇게 사가(私家)로 돌아온 그녀의 기록은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는다. 만일 불륜이 사실이었다면 자결했을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비구니(比丘尼)가 되었을 것이다. 이 당시 왕실 여인들은 혼자가 되면 비구니가 되는 일이 흔했다. 만일 비구니가 되었다면 정업원(淨業院)에는 갈 수 없고 일반 사찰로 갔을 것이다. 수종사 앞쪽 기슭에는 암자 터가 남아 있는데 니사(尼舍: 비구니 거처) 터였다. 한편, 현빈 유씨는 후에 머리를 깎은 의빈 권씨의 손아래 동서가 되며, 금성대군이 의안대군(방석)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으므로 비록 폐출은 되었으나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한 번쯤 염두에 두어볼 대상이다. 누군가 이 현빈유씨에 대해 소설 한 편 써보면 좋을 것 같다. OO유씨에 대해서는 계속 조사가 필요하다.
錦城大君: 세종의 6째 아들로, 왕자의 난 때 비명횡사한 의안대군 방석이 후손이 없으므로 세종께서 금성을 의안대군의 봉사손이 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의빈 권씨가 키웠기에 지극히 의빈을 따랐고 의빈도 금성대군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형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1457년).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명문을 풀어 보자.
太宗太后인 貞懿翁主(의빈 권씨)가 舍利塔을 조성하다.
施主는 □□柳氏와 錦城大君이 하다.
正統四年(세종 21년,1439년) 己未년 十月 日 세우다.
그런데 누구의 사리를 넣은 사리탑일까? 의빈 권씨(정의옹주)는 1468년 사망하여 반정리에 묻혔으므로 1439년에 세운 사리탑에 그녀의 사리를 봉안할 수 없다. 즉 정의옹주 사리탑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옹주 사리탑이 아니라 정의옹주가 화주(化主)가 되고 유씨와 금성대군이 시주(施主)해서 세운 사리탑이다. 그 속에 봉안한 사리는 부처님 사리(佛舍利)일 것이다. 부처님의 사리는 3층, 5층, 7층… 탑에만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부도형 탑에도 모셨음은 여러 사례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리탑을 ‘승탑(僧塔)’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하며, 더욱이 ‘정의(혜)옹주 사리탑’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2019년에 보물 2013호로 지정되었으니 전문가의 연구가 있으면 좋겠다.
이제 수종사 종각 뒤쪽 길로 하산이다. 아랫마을은 사제(莎堤)마을이다. 운길산에 등을 기대고 형성된 마을인데 언제나 양지바르고 따듯한 마을이다. 한음 이덕형 선생의 별서(別墅)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선생은 은퇴 후 이곳에 와서 여생을 보냈다. 이때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는 가사 사제곡(莎堤曲)을 남겼다.
漢水東흐로訪水尋山야龍津江디내올나莎堤안도라드니第一江山이임업시려다 (漢水東땅으로 訪水尋山하여 龍津江 지나 올라 莎堤 안 돌아드니 第一江山이 임자 없이 버렸는데).
한음과 노계 사이는 정승과 종6품 무관으로 정을 나누기 어려운 처지였으나 서로의 학문을 알아보았기에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노계는 이곳에 은둔한 한음의 마음을 가사로 읊은 것이었다.
별서 터에는 지금도 두 그루 은행나무가 옛터를 지키고 있고 하마석이라 부르는 받침돌도 남아 있다. 그런데 하마석(下馬石)을 자세히 보니 성혈(星穴)이 완연한 고인돌이다.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 오류가 생겼으리라.
마을을 벗어나 강가로 간다. 강가 습지와 버려진 땅에 ‘물의 정원’이라는 공원을 조성하였다. 넓고 넓은 데다가 자연을 살린 공원이 마음에 든다.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머지않아 수도권에 좋은 공원으로 소문이 날 것 같다. 공원에는 다산의 시(詩)도, 한음의 시도 새겨 세운 시석(詩石)이 서 있다. 공원길을 걸어나오면 운길산역이다. 이 앞 강이 옛날 용진(龍津)나루였다. 이제는 나루는 없고 다리 위로 차들이 쌩쌩 오간다. 아, 가을 바람에 날려간 시간이여.
[예봉산&적갑산&운길산] 종주 산행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