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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봉(明道峰)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산 61-5에 있는 운장산의 봉우리(높이 863m).
명도제(저수지, 지)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상계리
명동(明洞)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행정동(行政洞).
서울의 대표적 상업지구로 도·소매업과 금융업 등 서비스 산업의 밀집지역이다. 저동 1가·충무로 1·2가·명동 1·2가·남산동1·2가·3가·예장동 등 법정동 9개 동으로 구성되었다. 면적은 0.99㎢ 이며, 인구는 2,816명(2008)이다. 문화재로는 명동성당(사적 258)이 있다. 충무로·을지로·남대문로 사이에 있다. 동 이름은 남부 명례방의 ‘명’자를 딴 것이다.
조선 시대 한성부 5부 49방 중 남부(南部)의 명례방(明禮坊)에 속하였으며 명례방골 또는 종현(鍾峴)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명동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명치정 1·2정목(明治町一·二丁目)이 되었고, 1946년에 명동1가·명동2가로, 1955년에 이를 합하여 명동이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남부 명례방·훈도방 지역에 속했고, 일제강점기에 명치정1정목, 2정목정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명동1·2가동으로 바뀌어 명동1·2가와 충무로1·2가 일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주택지로 밀집을 이루었고, 일제 강점기 때 충무로 일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면서 명동도 점차 상업지구로변모하게 되었다. 1923년 이후부터 명동은 서울의 번화가가 되었고, 그 후 광복과 6·25사변을 전후한 시기에 여전히 서울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광복의 환희, 전후의 허무와 페이소스가 흐르던 이 거리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인들은 명동거리의 다방과 술집 등에 모여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불운하였던 시대의 한과 정을 풀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6·25전쟁 직후 정부가 전재복구재건을 위한 토지계획정리추가지구로 결정한 이후부터이다. 1956년 이후 도시재개발로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고급양잠점, 양화점, 귀금속, 대형 백화점, 각종 사무실, 금융기관의 본사, 쇼핑센터 및 소매전문점들이 밀집되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쇼핑 관광지로 애용되어 왔다. 당시에 국립극장과 명동성당·중국대사관·중앙우체국 등 근대건축물과 공공기관이 산재해 있었고 문인들의 집합소였던 여러 다방들은 음악·미술·문학·사진·연극 등 문화와 예술의 무대였다. 그 후 이곳은 점차적으로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소비문화의 중심지, 유흥의 거리로 바뀌어 갔다.
1970년대까지는 서울의 번화가로 대표적인 곳이었으며, 1976년에 3·1고가로의 건설로 저동 1가에서 충무로 2가에 이르는 도로가 5m에서 15m로 크게 확장되면서 현재와 같은 도시형태를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강남 개발과 함께 영동·반포·여의도 등 부도심의 성장으로 금융기관이 여의도로 이전해 가고 대형백화점과 상가 등이 새로이 조성됨에 따라 명동의 상권과 중심성은 상당히 위축되어 갔다. 특히 압구정동 일대가 새로운 패션 중심지로 등장함에 따라 최신 유행의 산실이라는 명동의 기능은 점차 퇴색되어 갔다.
탈근대 사회로 전환되고 있는 오늘날, 장소가 가지고 있는 문화와 전통을 장소의 정체성으로 인식하여 지역개발의 한 요소로서 작용하도록 하는 경향 속에서 이 지역의 전통과 역사성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서울시는 핵심 추진 프로젝트로서 도심재창조사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명동을 관광특구로 지정하여 인사동~삼각동~명동을 잇는 첨단 문화관광거리를 조성하여 이 축을 관광·쇼핑·문화의 국제적 명소로 육성하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개화기 이후 문화의 중심지였고, 그 중심역할을 구 국립극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히며 이 극장을 국가에서 매입, 복원하여 상실되었던 명동문화의 맥을 이어감은 물론, 이 건물의 가치를 보존하고 수준 높은 공연프로그램 제공으로 청소년과 관광객을 위한 문화 인프라로 적극 활용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34년에 건축된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문화예술사적·건축사적으로 의미있는 문화재이므로 안전진단 결과와 향후 공연장으로 활용계획을 수립한 후 이에 적합한 리모델링 설계로 공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급조된 것이 아닌 시간을 통해서 형성된 역사의 누층이 이 지역의 문화적 자본으로 인식되면서, 명동은 다시금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관광객에게 문화의 명소이자 쇼핑의 천국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55년 명동1가는 명동사무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고, 1970년 주민 감소로 인하여 남산동1~3가와 초동 관할의 저동1가가 명동사무소의 관할 구역으로 통합되었다. 1985년 예장동의 일부 지역도 명동사무소 관할로 통합되었고, 1998년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장교동, 무교동, 태평로1가, 을지로1·2가, 남대문로1·2가 일부, 삼각동, 수하동, 수표동을 통합하였다.
이 동은 장교동, 무교동, 다동, 태평로1가, 저동(苧洞) 1가, 을지로1·2가, 충무로 1 ·2가, 남산동 1∼3가, 예장동 일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특별시를 상징하는 번화가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本町)보다 낙후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주택가였으나 일제강점기 충무로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인접지역인 이곳도 그 영향을 받아 상가로 변하게 되었다.
중국대사관과 명동성당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상가지역이다. 한국의 금융 중심지이며 첨단 유행문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전국은행협회, YWCA, UNESCO회관, 로얄호텔 등과 다양한 종류의 소비재 상점들이 있다.
또한 종마루[鐘峴]에는 한국 가톨릭의 총본산인 명동성당이 있는데, 유신독재 등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인사들의 각종 집회와 농성, 피신 및 단식장소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시위가 잦아 낭만적인 모습을 잃었으나 해마다 명동축제를 개최하는 등 1990년대 후반 들어 옛모습 되찾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지구이다. 일제 때 명치정이었다가 해방 후 1946년 명동으로 개칭했다.
조선시대에는 주택지였으나 일제 때 충무로 1·2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면서 인접지역인 명동도 상업지구가 되었다. 그러나 명동이 현재의 모습으로 된 것은 6·25전쟁 직후 토지계획정리추가지구로 결정되면서부터이다. 1956년 이후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양잠점, 양화점, 귀금속, 대형백화점, 금융기관 등이 밀집되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쇼핑지로 애용되어왔다.
강남의 압구정동이 새로운 패션 중심지로 등장하면서 위축되었으나 상인들을 중심으로 명동의 위상을 되찾고자 1982년부터 명동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014년 관광특구로 지정되었으며, 중국과 일본 등 외국관광객들이 많이 찾으면서 쇼핑 관광지의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다.
법정동으로는 명동 1·2가, 정동 1가, 충무로 1·2가, 남산동 1·2·3가와 예장동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지구로 금융업, 도·소매업, 패션 관련업, 기타 서비스업 등이 집중·분포하고 있다.
명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 중의 하나인 명례방의 명자를 따서 지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명치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1946년에 밝은 마을, 밝은 고을이란 뜻의 명동이라 개칭했다.
조선시대의 명동은 주택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충무로 1·2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면서 그 인접지역인 명동도 점차 상업지구로 발전했다. 그러나 명동이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6·25전쟁 직후 정부가 전재복구재건을 위한 토지계획정리추가지구로 결정한 이후부터이다. 1956년 이후 도시재개발로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고급양잠점, 양화점, 귀금속, 대형 백화점, 각종 사무실, 금융기관의 본사, 쇼핑 센터 및 전문점들이 밀집되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쇼핑 관광지로 애용되어왔다.
한국 유행의 첨단지역으로서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금융기관이 여의도로 이전해가고, 영등포·청량리·미아리·상계·반포·여의도 등 서울의 부도심이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강남지역의 개발과 함께 대형 백화점과 상가 등이 새로이 조성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특히 압구정동 일대가 새로운 패션 중심지로 등장함에 따라 최신 유행의 산실이라는 명동의 기능은 점차 퇴색해가고 있다. 따라서 명동의 상인들은 보다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과거 명동의 위상을 되찾고자 1982년부터 상인과 시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명동축제를 봄·가을로 개최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쇼핑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1990년 현재 명동의 업종별 산업구성은 도·소매업이 전체 산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다음으로 제조업과 금융·보험·사회 서비스 등의 서비스업이 주류를 이룬다. 명동의 면적은 0.44㎢, 인구 3,208명, 인구밀도 7,291명/㎢이지만 이는 상주인구를 토대로 한 것이고 실제로는 하루 1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드나든다. 그러나 명동의 상주인구는 해마다 줄어들어 야간에는 인구공동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명동에는 명동성당, 서울 중앙우체국,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한국본부, 중국대사관 등의 주요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명동(明洞)
충청북도 제천시(堤川市) 시가지 중앙부에 있는 법정동. 행정동인 중앙·의림·명동(中央·義林·明洞) 관할이다.
제천시 도시지역의 중앙부에 있으며, 주위에 남천동(南泉洞)·하소동(下所洞)과 접한다. 동북쪽으로 의림동(義林洞)·중앙로 2가, 남쪽으로 화산동·영천동, 서쪽으로 서부동(西部洞)과 이웃한다.
원래 조선 말 제천군 현우면(縣右面) 읍부리의 공동묘지 지역인데 묘를 모두 옮겼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제천군 읍내면(邑內面) 읍부리(邑部里)가 되었다.
-1917년 제천면 관할이 되고, 명동은 제천 자리 잡고 있다.
-1940년 제천면이 제천읍으로 승격되면서 일본식 동명의 제천읍 소화정(昭和町)으로 개편되었다가
-1949년 제천읍 명동으로 개칭되었다. 양지에 터를 잡아 밝은 곳이므로 명동이라 하였다. 달리 저자거리, 돌서낭거리, 비석거리라고도 하였다.
-1980.4.1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명동과 서부동을 통합하여 제천시 명서동(明西洞) 관할의 법정동이 되었다.
-2003.7.7 행정동으로 신설된 중앙·의림·명동 관할이 되었다.
-2011년 1월 행정동인 인성동[현 중앙동] 관할 법정동이 되었다.
본디 공동묘지였던 곳으로 인구가 늘어나자 묘를 파내고 그 자리에 마을을 이루었다. 명동 어귀는 옛 관행 길로 선정을 베푼 현감들의 선정비(善政碑)가 여러 개 세워져 있어 비석거리라 불렀는데 지금은 도시화로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공공기관, 단체, 상가의 밀집지대이다. 주요 기관으로는 1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명초등학교, 명동치안센터, KT&G 제천지점, 농협중앙회 제천시지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충북지원 제천출장소, 신한은행 제천지점, 제천엽연초조합, 신제천새마을금고, 명락교회, 명락노인복지관 등이 있다.
활동인구 70% 이상이 타지역 거주자로서 상업,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여 유동인구가 많다. 면적은 0.24㎢이며 총 607가구에 1,316명[남자 675명, 여자 64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1.4.30 현재).시가지 변방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도시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마을 서쪽 하소동과의 사이에 하소천이 흐르며, 마을 주위에 충북선·5번국도·38번국도 및 82번지방도가 있다.
명동(椧洞)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법정동. 행정동인 서창동에 속한다.
본래 웅상읍에 속해 있던 리(里)로 2007년 4월 명곡리에서 명동으로 승격하였다. 용당동·삼호동과 함께 행정동인 서창동에 속한다. 대운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앞으로 회야강이 흐른다. 명곡소류지, 남낙소류지가 있는 배산임수형의 농촌 마을이며, 근처에 골프장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명곡(흠실), 소정, 외흠(외흠실,명동) 등이 있다. 명곡은 본래 흠실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된 것으로 후에 명곡리가 되었다. 소정은 명곡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채소밭과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외흠은 흠실 바깥쪽에 있는 마을로 명동이라고도 부른다.
명동(明洞)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법정동. 행정동인 웅천동이 관할한다.
원래 웅천군(熊川郡)에 속한 지역으로, 명동이라 하였다가
-1908년(융희 2) 창원군(昌原郡) 웅천읍에 편입되었다.
오늘날의 명동 관내의 땅 이름은 『호구 총수』에 삼포리(參浦里)와 동도리(童島里)로 나온다. 그러나 1912년에 간행된 『구한국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 명동리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포리나 동도리가 명동리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명동은 서쪽을 뜻하는 ‘~’의 변이 형태인 발과 마을로 된 발마을로 불리던 이름을 발은 밝다는 뜻의 명(明)을 훈차하고, 마을은 동(洞)을 훈차 하여 된 이름으로 서쪽에 있는 마을로 풀이하고 있다. 명동에 인구가 늘면서 중앙길 동쪽을 신명동이라 부르기도 한다.-1910년 마산부제 실시로 마산부(馬山府)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창원군 진해면 명동리가 되었다.
-1931년 진해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55년 진해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경상남도 진해시 명동리가 되었다.
-1973년 7월 명동리는 웅천면이 진해시로 편입되면서 리가 동으로 바뀌어 경상남도 진해시 명동으로 개칭되었다.
-2010년 진해시가 경상남도 창원시에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가 되었다. 명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웅천동 관할하에 있다. 웅천동에 속한 법정동으로는 원포동·성내동·남문동·북부동·서중동·제덕동·수도동·연도동·죽곡동·명동이 있다.
원포동(院浦洞)과 죽곡동(竹谷洞)을 포함하여 진해국가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명동은 죽곡천(900m)과 죽곡서천(500m)이 경유한다. 명동에는 일명 웅도(熊島)인 곰섬·굿지남찌거리섬·모자섬이라고도 불리는 메주섬을 비롯하여 우도(友島)인 벗섬·소구리섬(소쿠리섬)·음지도(陰地島)·지도리(地道里)·초리도(草理島) 등의 섬이 있다. 또한 맛방우·선바우·옷방우 등의 바위와 옛마을인 삼포(三浦), 야산인 봉오터, 곰고지고개 등이 있다. 굿지남찌거리섬은 굿을 하고 남은 찌꺼기를 버렸다는 데서, 옷방우는 선녀가 목욕하려고 옷을 벗어 놓은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데서, 봉오터는 봉화터가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명동에는 시장이 관리하는 명동 어촌 정주 어항 1개소가 운영 중이다. 또한 2010년 6월 22일 설립된 29명 정원의 명동 지역 아동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원포동(院浦洞)과 죽곡동(竹谷洞)을 포함하여 진해 국가 공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자연재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2005년 11월 명동 해안에 재해 영상 감시 시스템[CCTV]이 설치되어 있다.
2005년 3월 11일 개관한 해양 공원이 음지도에 자리하고 있으며 군함 전시관, 해전사 체험관, 해양 생물 테마 파크, 음지교 등이 주요 시설이다. 연 관람객이 2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웅천 명동 왜성이 있다. 웅천 명동 왜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으로 둘레 365m, 높이 1~2m로 80m 높이에 있고 무기도 생산한 것으로 추정한다. 노거수로는 95년 된 팽나무가 있는데 높이 9m, 둘레 64㎝이다. 문화재로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86호인 진해 사화랑산 봉수대가 있다.
명동역(明洞驛)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64번지에 있는 4호선 지하철역.
서울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과 회현역 사이에 있다. 1985.10.18 개업했다. 역명은 동명에서 유래했으며, 명동(明洞)은 조선초부터 이곳을 명례방(明禮坊)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갑오개혁 때 명동이 된 동명을 따라, 지하철을 개통하면서 역 이름을 붙였다.역 주변에 계성여자고등학교, 교통방송, 대한적십자사, 명동성당, 서울중앙우체국, 중부경찰서, 한국전력공사 경인건설처 등이 있다. 서울메트로 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지하 126번지(충무로2가 64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