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천국에서/ 권혁웅
김밥들이 가는 천국이란 어떤 곳일까,
멍석말이를 당한 몸으로
콩나물시루도 아닌데 꼭 조여져서
육시를 당한 몸으로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닌데 잘게 토막이 나서
나란히 누운
치즈복자, 참치복자, 누드복자들
순교의 뒤끝에서 식어가는 밥알은
김밥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 버려야 하는
헐거운 육신이다
김밥들이 가지 않는 불신지옥도 있을까
버려진 몸들답게 김밥들은 금방 쉰다
시금치는 시큼해지고 맛살은 맛이 살짝 갔지
계란은 처음부터 중국산이야
마음이 가난해도 천오백원은 있어야
천국이 저희 것이다
천국에 대한 약속은
단무지처럼 아무 데서나 달고
썰기 전의 김밥처럼 크고 두툼하고 음란하지
나는 태평천국의 난이
김밥에 질린 세월에 대한 반란이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참 태평도 하다
여전히 천국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복장 터진다는 말은 김밥의 옆구리에서 배웠을 것이다
소풍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속담도
쉰 김밥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깨소금이 데커레이션을 감당하는 그 나라,
김밥천국
자기들끼리만 고소한 그 나라 바깥의
불신지옥
- 시집『애인은 토막난 순대처럼 운다』(창비, 2013)
손쉽게 먹히는 한 ‘끼니’가 되기 위해 ‘멍석말이’에, ‘잘게 토막난’ 채 ‘육시당한 몸’으로 누군가의 깜깜한 뱃속에 들어가 허기를 채워주는 김밥들의 소명의식은 얼마나 거룩한 순교주의인가. 원조, 야채, 김치, 계란말이, 치즈, 참치, 소고기, 샐러드, 누드, ‘모듬’…. 김밥들의 순교 메뉴가 빼곡하다. 이런 곳을 어찌 ‘천국’이라 이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축제에 정성이 곁들여졌던 특별식 엄마 김밥이 자본화되어 ‘나라’와 ‘천국’을 지향하면서 역설적으로 허기를 때우는 가장 손쉬운 일용잡식이 되었다. 자신을 키운 건 팔할이 ‘김밥천국’이었다는, ‘김밥천국’에서 엄마 손맛을 익혔다는 ‘천오백원’짜리 “김밥에 질린” 사람들에게 하루하루는 “깨소금이 데커레이션을 감당하는 나라”를 향한 고군분투의 날들이자 “자기들끼리만 고소한 그 나라 바깥의/ 불신지옥”을 통과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쉬고’ ‘시큼해지고’ ‘맛이 살짝 간’ ‘복장 터진’ ‘질린 세월’들이었을 것이다.
‘김가네’와는 별 인연 없이 살았고, ‘압구정김밥’이나 ‘마약김밥’은 아직 먹어보지를 못했고, ‘김밥나라’나 ‘김밥천국’은 이름에 담긴 거대담론 때문에 부담스러웠던 내게는 어릴 적 놀던 동네 이름이 들어간 ‘종로김밥’이 정겹다. 사천원짜리 ‘모듬’김밥 하나면 든든하기까지 하다! (정끝별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