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憧憬)
김광섭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나의 만상(萬象)에 깃들이다.
(『조광』, 1937. 6)
[어휘풀이]
-사화(詞華) : 아름답게 수식한 시문(詩文), 또는 뛰어난 시문
[작품해설]
이산(怡山)의 첫 시집 『동경』의 표제가 된 이 시는 앞의 「고독」과 같이 식민지 치하에서 괴로워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화자가 처해 있는 현실은 ‘이상’의 표상인 ‘별조차 떨어진 밤’으므로, 그는 ‘무거운 꿈’만 꾸게 될 뿐이다. 악몽(惡夢)처럼 괴롭기만 한 현실 속에서 화자는 ‘무엇이 나를 불러서 / 바람에 따라’ 간다고 하지만, 그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처럼 불분명하게 나타난 표현을 일제의 혹독한 겸열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을 감으로써 ‘하나의 뚜렷한 형상이 / 나의 만상에 깃들이’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길이야말로 일제 치하에서 부단히 자신을 지키려 했던 자기 확인에 대한 노력이며, 암울한 시대에 처한 자신의 끊임없는 성찰 태도임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별조차 떨어진 밤’의 시대에 ‘사화(詞華)’같은 뛰어난 문장으로 자신의 고뇌를 표현한다 해도 그것은 그저 ‘무언의 고아가 될’ 뿐이며,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로 미래를 표현한다 해도 그것은 이루지 못할‘꿈이 되고 슬픔이 될’뿐이다.
[작가소개]
김광섭(金珖燮)
이산(怡山)
1905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24년 중동학교 졸업
1932년 와세다대학 영문과 졸업, 극예술연구회 참가
1945년 중앙문화협회 창립
1950년 『문학』 발간
1952년 경희대학교 교수
1956년 『자유문학』 발간
1957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61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74년 예술원상 수상
1977년 사망
시집 : 『동경』(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이삭을 주을 때』(1965), 『성북동
비둘기』(1969), 『반응-사회시집』(1971), 『김광섭시전집』(1974), 『동경』(1974),
『겨울날』(1975), 『김광섭』(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