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70]1백년 전, 전주땅의 ‘거리의 성자’ 이거두리
어제는 정년퇴직한 지 20년이 넘은 원로교수를 만나 뵈었다. 우리나라 설화와 구전문학을 전공하신 한양대 최래옥(崔來沃. 87) 명예교수가 그분이다. ‘참(진짜) 원로’들을 만나뵈면 놀라운 게 있고 배울 점이 참 많다. 학문에 대한 끝없는 열정에도 감동하지만, 미래에 대한 세계관이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고작 이제 칠십인 나는 앞으로 전개될 AI, 기후 위기, 생태, 죽음 등 미래의 세계에 대하여 때때로 자주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지만 ‘나도 저 연세가 되면 그렇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돌아가신 이어령 박사도 그렇고, 백낙청 선생님과 도올 김용옥 선생도 그렇다.
그분은 남한의 의견설화를 수집하면서, 오수의견 설화가 원조라며 전국에 22건이 산재하다는 표를 만든 업적이 있다. 북한지역을 조사하지 못한 게 아쉽단다. 그분을 만나뵌 까닭은, 어느 논문에서 “오수 의견설화가 담긴 최자의 보한집이 1254년에 나왔으니 설화가 아닌 실화가 확실하고, 그 사건(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견이야기)이 설화로 기록되려면 그 연대에서 200-300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썼는데, 그 연대를 무슨 근거로 추론했냐는 것을 여쭙고자 한 것이다. “그래. 분명히 내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을 것인데 생각이 안나네. 장담은 못하지만 최대한 찾아보겠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천 년 전에 세워졌다고 구전돼온 오수 의견비를 탁본한 결과, 건립 간지(干支)가 ‘임술년 3월중’으로 밝혀진 바, 그 임술년이 서기로 몇 년인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1973년 문공부에서 발행한 <한국문화유적총람>에 그 사건이 973년에 발생했다고 명기돼 있으나, 필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안다해도 돌아가셨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출처가 미궁에 빠진 것이다. 구비-구전문학의 대가였던 서울대 임석재 교수가 그분의 스승이다.
수확 하나는, 개의 주인 김개인이 무덤에 꽂은 지팡이가 느티나무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물푸레나무가 확실한다는 것. 의견비 발견을 목격한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에 물푸레나무가 많았다는데, 최교수도 물푸레나무로 지팡이와 지게작대기 등을 만들었다며 어릴 때 ‘물푸레 지팡이’를 많이 봤는데 ‘몰미’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푸레나무가 잘 자란다는 것.
그건 그렇거니와, 최교수의 ‘특별당부’가 유별나서 귀가후 AI에게 물었다. 교수님이 이야기 말미에 임실에서 ‘학자’(學者)가 먼걸음을 했다고 치하한 후 일제강점기 전주에 ‘거두리’라는 거지대장이 있었다고 했다. 설화수집하려 다닐 때 들은 얘기라며 그분을 추적하여 책으로 낼 수 있겠냐?고도 했다. 이름 이보한(李普漢), 양반집 서자로 애꾸눈이어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호남지역 첫 교회인 서문교회의 독실한 신자인데 평생 수많은 거지들을 돌보며 살다 죽었으며, 거지 200여명이 돈을 모아 ‘걸인장’을 치려드렸는데, 만장만도 수백 개였다고 했다. 묘지와 비석이 임실 관촌지역에 있었다한다. 그분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 정도였다.
AI로 검색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이보한은 1872년생으로 1931년에 60세로 죽은 ‘전주 거리의 살아있는 성자’였다. 1996년 전북문화원에서 펴낸 <이거두리 이야기>라는 책도 있는데, 그와 관련한 미담(美談) 구전이 어머어마했다. 수많은 거지들과 숙식을 같이 할 정도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한평생 돌봤으며, 3.1만세운동 때도 거지들과 비밀리에 활동했고, (일본 경찰을 속이려) 어린 손자와 함께 상해의 임시정부에 독립자금도 지원했다고 한다. 찬송가 후렴 중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를 항상 부르고 다녀 ‘거두리’는 별명인데, 구한말 참봉을 했다고도 한다. 그가 주로 활동한 ‘남부시장-싸전다리-매곡교-전주천 둑방길’를 전주시청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정도였으니, 실존인물로 큰 화제가 됐던 것같다. 오죽하면 그가 죽은 후 동아일보 1931년 10월 3일자에 장례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을까? 또한 조선일보에도 1929년 10월2일자에 그가 춤추는 사진이 실렸다하니 조속히 찾아볼 생각이다.
생각지도 못한 전주의 의인(義人) 이야기를 들었고, 찾다보니, 거두리선생과 동시대에 전주 기전여고 교사를 몇 년 하며 살다 간 방애인(方愛人.1909-1933.황해도 황주 출신)라는 ‘거리의 성녀(聖女)’도 알게 됐다. 그녀는 교육자이자 개신교인(역시 서문교회)인 여성운동가로 고아원 설립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0년 전에 전주라는 땅에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고도 이름없이 살다가신 성자-성녀가 짜란히 계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문교회 역사자료에 두 분의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고스란히 남겨 있다고도 했다. 관련 책들이 있다니 어떻게든 구해볼 생각이다. 기회가 되면 ‘거두리 선생’ 사진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거두리 선생의 비(관촌 죽림마을 입구)가 해방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없어졌다는데,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平生性質 溫厚且慈(평생 성질이 온후하고 자비로웠으며)
見人飢寒 解衣給食(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밥을 주었다)
묘소는 색장리 이씨 선산으로 옮겼다 한다. 진정한 거지왕이었던 것같다. 누군가 추적하여 만세운동을 어떻게 지원했고, 독립운동 자금을 몇 번이나 얼마나 댔는지, 그 실상도 밝혀지면 좋겠다. 불과 1백 년전에 살다간 성자의 이야기가 입으로, 입으로만 전해져서야 될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