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82
4월3일[사순 제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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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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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드디어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내란 사태가 종식될 순간이 다가옵니다. 한 사람의 기상천외한 돌발행동으로 인해 국민 대다수가 내란성 증후군으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내란성 위염, 내란성 두통, 내란성 불안증, 내란성 불면증, 내란성 수면 부족!
엊그제 안국동 시국미사 때 자주 희자되던 표현이 “잠 좀 자자!”였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그 어떤 집회보다 평화롭고 성숙한, 그러나 시대를 역행하는 반국가, 반민주 세력을 향한 우리 가톨릭 교회의 단호하고 결연한 의지를 잘 보여준 축제 한마당이었습니다.
전국각지에서 운집한 수많은 사제, 수도자, 교우들은 한목소리로 백척간두에 놓인 우리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오셨던지, 주최 측에서 준비한 제병이 많이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으니, 참가자 모두가 입을 모아 헌법재판소를 향해 재판관 한분 한분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음속으로 정말이지 간절히 그분들께 부탁드렸습니다.
‘뭘 그리 망설이냐고? 뭐가 그리 두렵냐고? 그가 저지른 위헌·위법적 증거들은 이미 차고 넘치는데, 초등학생들조차 정답을 알고 있는데, 대체 왜 이리도 뜸을 들이냐고? 한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주시라고! 국민의 명령이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선고 날자가 발표되고 나니 시민들 얼굴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사실 저 같은 소시민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는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상식이 통용되는 나라, 나랏일은 국민이 뽑은 심부름꾼들이 그럭저럭 알아서 하는 나라, 그래서 큰 걱정 없이 발 뻗고 잠들 수 있는 나라...
집회 현장에서 크게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 우리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이 갈등은 진영 간의 갈등이나 지역 간의 갈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상식과 몰상식의 갈등입니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대립입니다. 집단 지성과 막무가내·파렴치 집단 사이의 충돌입니다.
어제오늘,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혼란의 시간 안에서 헌법재판관님들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고가 늦어진 배경에 대해서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극한 갈등과 대립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한 냉각기를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올바르고 현명한 선택을 해주시리라 백 퍼센트 확신하지만, 최근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기상천외한 일들을 많이 겪은 우리이기에 일말의 걱정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힘겹게 쌓아 올린 우리나라의 국격이고, 민주주의요, 시민의식인데, 이렇게 초단기간에 와르르 허물어져 내리다니,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선택을 앞둔 재판관님들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두려워하실 것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상식과 양심에 따라, 가장 기본적인 선택만 하시면 됩니다. 성경의 단순한 원칙만 따르셔도 충분합니다.
“너희는 말할 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재판관님들,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뒤에 성숙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서 있습니다. 그 옆에 원칙과 상식, 진리와 정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애국 시민들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뒤에는 우리나라와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뒤를 받쳐주고 계십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이제 그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탈출 3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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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스튜디오 창립 6주년 기념 안성성당 사순피정 2강의 I 희년의 정신으로 회개하고 감사하며 선교하는 삶 I https://youtu.be/9FnfIam-7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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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Skl9rouJ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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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못하는 건 증거가 없어서 가 아니다>
어제 심판이나 판단, 평가는 생존과 관계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사적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평가를 하려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평가를 위한 ‘증거’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무언가를 평가하려면 증거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젊을 때는 판단해야 하는 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이나, 직장, 혹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단은 인생을 좌우할 수 있기에 신중하게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 신중한 만큼 만족스럽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를 선택하기를 정말 잘하셨습니까? 고해성사 때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 증거를 꼼꼼히 살펴보고 판단을 했을 텐데 왜 결국엔 배우자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분명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무시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 개츠비는 데이지 부캐넌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삶을 그녀를 다시 얻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런데 정말 위대할까요? 그는 믿지 말아야 하는 증거들을 무시했기에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이 개츠비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 군인이었을 때 데이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신분 차이로 인해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고, 전쟁 후 돌아왔을 때 데이지는 이미 부유한 톰 부캐넌과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개츠비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막대한 부를 쌓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밤마다 파티를 엽니다.
개츠비의 이웃이자 이야기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데이지가 톰을 떠날 거라고. 오로지 사랑만으로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고.”
마침내 개츠비는 닉의 도움으로 데이지와 다시 재회하게 됩니다. 데이지는 처음엔 개츠비를 잘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결국 처음의 어색함을 지나, 두 사람은 다시 감정을 나누게 되지만, 개츠비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데이지”를 되돌리려 합니다.
그는 닉에게 단호히 말합니다. “그녀는 톰을 사랑한 적 없어. 단 한 번도.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녀는 언제나 나만을 사랑했어.” 그러나 데이지는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나는… 나는 그땐 톰도 사랑했어.”
개츠비는 돈 때문에 자신을 떠났던 것, 자신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톰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다는 것 등의 증거들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사랑만 완전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데이지가 몰던 차로 인해 마틀드 윌슨이라는 여자가 죽게 되고, 그 사건의 책임을 개츠비가 대신 지게 되면서 벌어집니다.
그는 데이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데이지는 아무 말도 없이 톰과 함께 집을 떠나버리고, 개츠비는 그녀의 전화만을 기다립니다. 닉은 그런 개츠비를 보며 말합니다. “그는 아직도 전화가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여자가 그를 구해줄 거라고.”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고, 대신 마틀드의 남편인 조지 윌슨이 찾아와 개츠비를 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이 납니다.
개츠비는 끝까지 데이지를 믿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사랑에 감동하고, 자신과 함께 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데이지는 자신의 안위와 사회적 지위, 안정된 가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개츠비가 모든 것을 걸고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게 그저 ‘잠시의 기억’에 불과했습니다.
닉은 결국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친구가 되었고, 그를 이렇게 평합니다. “개츠비는 위대했다. 그가 그토록 순수하게 꿈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꿈이 현실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실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뿐’입니다. 데이지를 사랑하는 것도 결국 그 마음의 심연에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증언과 증거에도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마치 나폴레옹처럼 자기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옳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해가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 자신은 ‘뱀’으로 표현됩니다. 뱀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다니 될 말입니까? 겸손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뱀이 하는 수많은 잘못된 판단을 통해 배워나가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옳을 수 없다는 것을.
증거를 통해 올바로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까? 아이에게 진리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옳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시키는 일은 잘 따라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쉽게 믿습니다. 그리고 올바로 믿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을 잠깐 보고 판단할 때 그 판단은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굳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교만해지니 문제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자기 자신이 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린이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게 되는 과정입니다.
앤터니 플루(Antony Flew, 1923–2010)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무신론 철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있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주장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일찍이 1950년대에 발표한 논문 「신학과 반증(Theology and Falsification)」은 “신은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증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주장이라고 말하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무신론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은 과학과 이성에 반한다”는 확신 속에서, 신앙을 가진 철학자들과 수차례 공개토론을 하며 신의 존재를 반박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플루는 단순한 이론적 무신론자가 아니라, 매우 고집스럽고 철저한 논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나는 항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신의 존재를 부정해왔다”라고 말하며, 철저하게 ‘증거에 따라 사고하라’는 과학적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가 수많은 철학자, 신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공공연하게 무신론을 전파했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삶이 후반부에 보여준 변화를 세상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004년, 이미 81세의 고령이 된 플루는 전 세계 철학계를 놀라게 할 선언을 합니다. 그는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의 증거를 보며, 우주의 기원과 생명체의 복잡성을 단순한 우연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발표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하느님(personal God)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첫 원인(First Cause)” 혹은 “우주의 지성(intelligent mind)”에 가까운 존재로 보았고, 이를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신론적 신앙(deism)”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플루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 진보와 철학적 성찰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DNA의 구조와 복잡성, 우주의 미세 조정(fine-tuning), 생명 현상의 통합성과 목적성 등을 살펴보며 “이런 정교한 구조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증거를 따르는 철학자다. 그리고 지금, 그 증거는 나를 신의 존재로 이끌고 있다.” 이 말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의 입장 변화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원칙 ― ‘이성에 따른 판단’ ― 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온 결과였음을 보여줍니다.
2007년에는 그의 사상적 전환 과정을 담은 책 『There Is a God: How the World's Most Notorious Atheist Changed His Mind』가 출간되었고, 이 책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내 고집으로 세상을 보았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고, 내 방식이 가장 이성적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것이 나를 진실에 가까이 데려다주었다.”
앤터니 플루의 사례는 한 인간이 자기 신념을 얼마나 고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신념이 참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는 지적 겸손의 위대함을 증명합니다. 그는 살아오면서 자기가 평생 주장해 온 것을 바꿀 줄 알았습니다. 자기 영광을 더는 추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이와 함께 익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증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겸손의 문제입니다. 겸손해지면 증거가 보이고, 교만하면 증거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자기 머리에 왕관을 씌우지 않고 부모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렇게 증거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믿음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증거가 많아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는다는 것은 증거를 주는 이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믿지 못합니다. 내가 뱀임을 믿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증거들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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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3월 8일 토요일입니다. 자매님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응급실에 있는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전화였습니다. 구역장 회의가 있었지만, 병자성사가 더 급하기에 총구역장에게 먼저 다녀온다고 이야기하고 응급실로 가기로 했습니다. 병원으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다시 자매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선종하였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도 보고, 가족들을 만나려고 응급실로 갔습니다. 응급실에는 고인의 가족들이 와 있었고,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고인을 위해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고인께서는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자매님은 저와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자매님의 전화가 있었기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고인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누군가 싸우려고 하면 말려야 하고, 반대로 서로 협상하려고 하면 잘 연결해 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말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중요한 정신과도 연결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자, 하느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느님,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 간절히 간청하며, 백성을 대신해 용서를 빌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싸움을 말리는" 리더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를 모세가 중재하며 막아낸 것입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누군가 갈등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모세처럼 중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싸움을 부추기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라!"라고 외쳤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엄격하고 강한 사람이지만, 사실 그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너희는 끝났다!"라고 단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길을 닦고,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라!"라고 외쳤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느님과 백성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돕는 다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누군가에게 새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절망할 때,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바로 중재자의 역할입니다. 역사 속에도 중요한 중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헨리 키신저입니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를 보면,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위협 속에서 서로 으르렁거렸고, 중국과 미국은 철저한 적대 관계였습니다. 그때 키신저가 한 역할이 무엇이었을까요?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대화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를 핑퐁 외교라고 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긴장을 완화했습니다. 이를 데탕트 정책이라고 합니다. 중동에서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평화 협정을 맺도록 도왔습니다. 정치는 물론, 우리 신앙과 삶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중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여전히 많은 싸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싸우고, 친구 사이에서도 오해가 생기고, 직장에서도 경쟁과 갈등이 끊이질 않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 간에도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싸움을 말리는 사람", 그리고 "화해를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싸움의 불길을 더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모세처럼 중재하고, 요한처럼 길을 닦고, 키신저처럼 대화의 장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분쟁과 갈등을 십자가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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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요한 5,3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지혜롭다는 자들” 또는 “슬기롭다는 자들”(마태 11,25)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연구하며 깨달은 지식은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대신 그저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탐닉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11,25) 까닭은, 교만한 지식이 아니라 겸손한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따라오는 사람들의 칭송에 우쭐해진 나머지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 없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에 그들이 듣는 수많은 소리 가운데 무엇이 하느님의 음성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그들이 보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연구하던 성경의 말씀,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마주하고도 알아 뵙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그 안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가장 바른 자세는 바로 하느님을 향한 겸손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지닐 때 성경은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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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31-47: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모세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36절)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37절)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이 그분에 관한 아버지의 증언이다. 그분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39절) 그들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분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40절) 그들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신다.(42절) 믿음 없이 단지 성경을 읽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의 열매는 거두지 못한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을 그들은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3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이다.”(45절)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 감히 모세가 기록해 놓은 그분을 거스르고 있다. 그들은 모세를 잘못 믿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소할 이는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이다. 그들이 모세를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에”(46절)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다 이루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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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를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33-40)
1)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라.”, 또는 “나를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인데, 겉으로만 보면,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증거와 증언들을 제시하시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당신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증거와 증언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지만, 안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들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떤 증거를 보아도, 또 어떤 증언을 들어도, 그 증거와 증언 자체를 부정합니다.
2) 믿음은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신앙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아직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고, 또 영원한 생명을 증명할 방법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증명을 못한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천지창조에 대한 믿음이 좋은 예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인간을 마지막 날에 만드셨기 때문에, 천지창조를 본 사람이 없고, 본 사람이 없으니 증언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나는 믿는다.”는 말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면 ‘그날’ 부활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신앙에 대해서, “나는 믿는다.” 라는 말 외에는 더 할 말도 없고, 다른 말을 더 할 필요도 없습니다.
3) 33절의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하였다.”라는 뜻입니다. 34절의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당신의 구원사업에 반드시 필요했던 일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요한을 미리 보내신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메시아다.” 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세례자 요한이 “이분이 바로 메시아시다.” 라고 증언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36절의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한다.”입니다. 여기서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활동을 가리킵니다.
설교와 병자 치유와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 일들과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들...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를 생각하면, 수난, 죽음, 부활, 승천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4) 37절의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는, “하느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지만, 너희는 나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입니다. 뒤의 14장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9절의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너희는 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믿음 없이 성경을 읽는 것은, 구원과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옛날이야기’를 읽는 것이 될 뿐입니다. 언제나 항상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는 사람은(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고 구원과 생명에 도달하게 되지만,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공부만 하는 사람, 또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도만 닦고, 수행만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하기만 할 것입니다. 물론 평생 수행을 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지가 구원은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는 구원도 생명도 없습니다.(요한 14,6)
신앙생활은 공부하는 생활도 아니고, 도를 닦는 생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믿는 대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 뭔가 큰 업적을 남기고,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고 해도,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한 채로 끝난다면, 그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 허무한 인생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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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에게>
요한 5,31-47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서로에게>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요한 5,38)
빛이 깃드니
빛납니다
빛나니
빛이 머무십니다
참이 깃드니
참됩니다
참되니
참이 머무십니다
선이 깃드니
선합니다
선하니
선이 머무십니다
고움이 깃드니
곱습니다
고우니
고움이 머무십니다
믿음이 깃드니
믿습니다
믿으니
믿음이 머무십니다
희망이 깃드니
희망합니다
희망하니
희망이 머무십니다
사랑이 깃드니
사랑합니다
사랑하니
사랑이 머무십니다
함께가 깃드니
함께합니다
함께하니
함께가 머무십니다
섬김이 깃드니
섬깁니다
섬기니
섬김이 머무십니다
살림이 깃드니
살립니다
살리니
살림이 머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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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 먼 열심>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으로 쉽게 지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정성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도 살리려고 무던히 애쓰셨습니다. 그러한 큰마음으로 갈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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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시험 성적표가 나왔다면서 성적표를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1등부터 10등까지는 우수한 성적이라면서 이름을 부르며 칭찬해 주셨고, 아이들은 축하의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저의 등수는 10등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반은 70명이었기에 그중에서 10등 한 것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뛰어갔습니다. 집에 계신 어머니께 자랑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 친구가 와 계셨고, 저는 그 앞에 성적표를 내놓으며 10등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친구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공부를 잘 하지는 않는구나?”
제 위의 형, 누나 성적을 잘 아시는 어머니 친구였기에 10등은 못 하는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때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 뒤에 60명이나 있는데도 못한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리고 1등이 아니면 못 한 것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갖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그때의 성적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임을 많은 경험을 통해 깨닫습니다. 또 이를 위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잘했어. 정말 고생 많았어. 너는 대단해. 오늘도 해낼 거야.”
이런 힘이 되어주는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힘을 빼는 말이 참으로 많아 보입니다. 더욱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과연 예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까요? 당시 1등의 삶을 사는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하시지 않고,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과 함께하시면서 힘이 되어주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당신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했고, 그리고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삶은 전혀 실천하지 못하고, 그저 율법의 글자에만 얽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힘이 되어주는 말과 행동, 사랑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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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오늘의 제1 독서에서는 목이 뻣뻣해진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하늘 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 주님 꺼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려고 할 때, 하늘의 별만큼 많은 후손을 주시기로 아브라함에게 한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시며 주님은 재앙을 거두십니다.
주님은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시지만 우리는 약속을 잊어버리고 깹니다. 주님과 한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면 생명을 부르지만 약속을 잊고 깨면 죽음을 부릅니다.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면 축복을 부르지만, 약속을 잊고 깨면 재앙을 부릅니다. 잊고 깬 약속만큼 우리는 재앙을 부릅니다. 사람과 세상에게 재앙을 부르고 뿌리는 일은 익숙하지만 ‘재앙’을 거두고 축복하는 일에는 어색합니다.
우리를 억울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분노하고 미워하며 ‘재앙’을 부릅니다. 불완전하고 미숙한 자신과 사람과 세상을 비난하면서 우리는 ‘재앙’을 부릅니다. 진노가 하늘까지 올라도 주님은 축복하시지만, 작은 일에도 우리는 분노하며 재앙을 부릅니다.
사람과 세상에게 쏟아내는 분노와 미움과 비난의 ‘재앙’을 거두는 만큼 우리는 축복해 주시는 주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우리가 ‘재앙’을 거두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과 세상을 축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재앙’이라도 거두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사람과 세상을 향해 쏟으려는 ‘재앙’을 거두고 대신 축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을 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사순 시기는 특별히 우리가 ‘재앙’을 내리고 싶었던 사람에게 축복을 빌어주며 증언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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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복음 5장 31절-47절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을 4중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십니다. 곧 세례자 요한(33-35절)과 성부 하느님(30-32절)과 당신 자신의 활동(36절)과 성경(38-47절)이 당신을 증거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증거는 명확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거나 계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기 32장 9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완고함의 특성을 두 가지로 밝혀주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을 믿지 않았다.’라는 말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을 품지 않았다.’라는 말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이는 ‘완고함’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믿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주님이신 하느님을 거역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우상숭배를 두고, <예레미아 예언서>(5장 7절)에서는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제키엘 예언서>(23장 27절)에서도 야훼 하느님 외에 것을 찾는 것은 영적 간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정배이신 주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따르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완고함’이란 한편으로는 말씀을 거역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복음 5장 38절)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요한 복음 5장 42절)
결국, 완고함은 말씀을 품지 않고 있고,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품지 않으면 곧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4중의 증언의 말씀을 듣고도 품지 않은 까닭입니다.
결국, 완고함은 하느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말씀을 품고 있느냐,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한 마중의 시간인 이 사순절이 말씀을 품고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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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요한 복음 5장 36절)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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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 있는 일들과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5,36ㄷ.39ㄴ)
'예수님을 증언하자!'
오늘 복음(요한5,31-47)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증언이라는 단어가 열두 번 나옵니다. 증언(證言)의 사전적 정의는 '사실을 말로 증명함'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두 증언에 대한 말씀인데, 이 증언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과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당신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얼마나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서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삶의 자리인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계시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언(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뜻은 그들만의 구원과 잔치가 아닌, 모두의 구원이요 모두가 함께 하느님의 나라라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공정이요 정의이며 우리가 지금 실현해야 할 공동선'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큰 문제는 바로 '공정과 정의와 공동선의 문제'입니다. 권력과 힘과 재물이 있는 곳으로 기울어져 있는 '불공정과 불의와 양극화의 문제'입니다. 법이라는 가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금 직면해 있는 대통령 탄핵 문제는 대통령이 '헌법을 지켰는지 지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단순한 문제입니다. 그것에 따라 판결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공정한 판결이 내려지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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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요한 5, 45)
희망은
봄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삶에
희망이
중요합니다.
빛이 되시어
우리의 내면을
읽어 주시는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희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들 삶에
희망을
걸어야 할
주님이
빠져있습니다.
모세가 아니라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희망이 없다면
실행도 없습니다.
희망이
실행이
됩니다.
참된 희망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주님의
희망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희망이
희망을
치유합니다.
아픈
시간들까지
희망이
되게 하십니다.
살아있음의
이름이
오늘의
희망입니다.
상처받은
오늘을
치유하는
희망이신
주님께
희망을 둡니다.
십자가까지
희망이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희망을 진실로
믿습니다.
오늘도
희망으로
복음의 길을
여십니다.
희망의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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