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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키키다
정부 | 김대중정부 | 김영삼/노태우정부 | 전두환정권 | 박정희정권 |
실질경제성장률 |
6.8% |
4.3% 7.0% |
9.3% 1위 |
8.5% |
실질 성장률주변국대비 |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1위
(세계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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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국가 보다 1.3% 더 높았고 대만보다 -1.9 더 낮았다. 5위 |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았다.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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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다.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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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상승률 |
3.4% | . | . | 16.5% 1위 |
임기말실업률 |
3.1% |
김 7.0% 1위
노 2.5%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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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위 |
5.2%
(고려대총장 이필상 교수 주장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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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설비투자률 |
10.6% |
김 13.5%
노 14.3%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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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7% |
소득분배률 |
59.5% |
김 60.4% 1위
노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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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 |
43.7% 1위 빈부격차 확대 |
땅값 상승률 |
-0.2% |
김 -1.2%
노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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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
33.1% 1위 |
땅값불로소득 |
-18조원 |
김 -103조원
노 926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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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조원 |
326조원 |
임기후 다음해 성장률 |
3.1% |
김 - 6.9% 1위
노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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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1위 |
-1.2% |
외채 |
2000년 2/4부터 건국최초 순채권국 1위 |
노태우 1989년 30억 달러
플라자합의와 3저현상라는 행운을 실력이라고 착각한 한국경제는 또 다시 70년대처럼 만성적인 외채에 허덕이며 추락하다.결국 국가부도를 맞았다. 김영삼 1997년 110억 달러 외채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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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431억 달러 외채폭증
70년대부터한국경제는 만성적인 외채경제구조에 허덕이다.1985년 플라자합의와 3저현상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 현상이라는 행운을 만나 한국경제가 운좋게 살아난듯 보였다.
1986년 201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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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80억 달러 1위
(허화평 주장 외채규모 300억 달러)
1979년 멕시코.부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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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말외환보유고 |
1200억 달러 세계4대 외환보유국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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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28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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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억 달러 |
50억 달러 |
무역수지 |
+846억 달러 무역흑자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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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366억 달러 적자
노 -126억 달러 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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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억 달러 최초흑자 |
-233억 달러 적자 |
신용불량자 | 총 65만 증가 |
1997년 200만 1위 |
. | . |
국가 경쟁력 |
세계 28위 1위 |
세계41위 | . | . |
과학 기술 경쟁력 |
세계12위 1위 |
세계28위 | . |
통계청 기록에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절의 중요한경제 지표들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숨길게 뭐가 그리 많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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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전이후 61년까지 국내경제는 외국원조에 좌우되었습니다. 1953∼60년동안 UN한국부흥단의 1억 2,000만달러와 미국의 공식원조 17억 4,500만달러가 도입되었습니다.
이들 원조는 필요한 생필품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파괴된 사회간접자본시설과 산업시설의 복구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54∼61년에는 연평균 4.5%의 비교적 높은 성장을 기록하였습니다.
박정희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1960년 농업인구가58.3%였는데 박정희의 저곡가.공업화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떠났는데, 이는 한국전쟁동안의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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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충남대 박진도교수의 말)
결국 1971년 살기힘든 서민들에 의해 군사독재 기간임에도 성남폭동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1966년 외자도입법을 개정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재벌기업들한테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줬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무리하게 외채를 빌려다 썼고, 기업 부실로 인해 1970년대초에는 국가가 외채지급불능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국제통화기(IMF) 사태이전에 일어난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1979∼80년의 공황은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과잉·중복 투자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상위 10대 재벌의 평균 계열사 수는 1972년 7.5개에서1979년 25.4개로 대폭 늘었는데, 재벌의 팽창 속도만 봐도 당시 중화학공업 과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과열·중복 투자는 1979년부터 대규모 기업부실을 낳았다.
이 과정에서 중복 과잉투자, 경제력집중, 관치금융에서 비롯된 금융산업의 낙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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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금융산업의 낙후 인플레의 가속화와 그로 인한 수출경쟁력의 약화 및 부동산투기, 분배악화 등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대외채무 180억달(역대최고) 외환보유고의 잦은 고갈, 각종 특혜 비리로 한국중공업등 기업들 줄도산, 자동차회사 통폐합, 정경유착으로 기업체질의 부실초래
저임금저곡가정책,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노동에 최저생계비의 5분의 1만 받았으며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시달림(전태일자살로 결국 그 치부노출)
집권말기에 마이너스가까운 경제성장률, 해운통폐합으로 범양상선 회장이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촌극발생하고 물류산업은 쇠락했다.
(결국 85년 전두환정권에 의해 박정희시대 경제계발계획전부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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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70년부터 시행된 새마을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은 점점 피폐해진며 소득격차는 더욱커졌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이라는 민심 무마용 전시행정의 한계일 것이다.
이에 농민들은 대규모로 농촌을 탈출. 배진한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약 68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밀려들었고,
그중 가구유출이 68.2%인 468만명, 단신유출이 31.8%인 218만명이었다. 이러한 농촌 과잉인구의 도시 유입이 바로 저임금으로 연결되고 저임금이 구매력감소로이어져 내수는 기대촉진은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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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부 관료들이 생산요소 구입 보조를 하여 농민들을 과잉생산과 가격폭락, 부채 누적으로 몰아넣어 탈농촌화촉진시켰다.
1960-92년간 쌀 수매가는 한계생산비는 물론이고, 일반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칠 때가 많은 저위, 불안정상태. 농가구입가격지수로 디플레이트한 수매가의 인상률은 마이너스인 해가 15번이나 되었다. 66년 외자도입법을 개정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재벌기업들한테 정부 명의로 지급보증을 해줬다가 기업들이 무리하게 외채를 빌려다 썼다.
기업 부실로 인해 70년대 초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 정부와 은행의 무분별한 재벌기업 지급보증으로 인해 기업 부실이 골칫거리로 등장하자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72년 8·3 사채동결 긴급명령 조치를 취함.
1969년 83개 업체중 45%가 부실기업으로 분류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기업들은 사채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이에 금융부담의 가중되 부실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자 전경련은 박정권에게 사채를 동결시켜 달라는 웃긴 요청을 하게 된다. |
6)
이는 돈을 사실상 떼먹어도 되는 사유재산을 제한하는 반자본주의조치로 이에 대한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전체사채규모의 90%(신고건수)를 차지하던 일반 소시민들의 소액(300만원 미만) 사채에 대해 적용시켜 피해를 늘려 일반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했음에도 기업인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뭍지 않았다
당시 사채 신고액 중에서 약 3분의 1이 소위 위장사채 즉 자기 기업에 스스로 사채놀이를 하여 기업은 적자로 만들고 기업가만 살찌는 식의 사채였음에도 이에 대한 대책은 하나도 없었다
이 조치로 모든 기업의 사채 지급을 동결하고 월리 1.35%에 3년 거치 5 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전환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전환하도록 강요했다.
● 74·97년 두차례 국가부도 막은 '위기의 해결사' 김용환
74년 외환위기는 97년과는 다르다. 그 때는 산업구조 자체가 총체적 위기에 봉착했었다."
그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던 정인용씨는 훗날 "1차 오일쇼크 당시 외환보유액은 1,000만 달러 전후로 떨어졌다. 국가 부도 직전의 상황이었다. |
7)
가방 하나 들고 외국에 나가 매일 이 은행 저 은행을 구걸하다시피 찾아 다니면서 간신히 국가 부도를 면했다"고 회고했다.
74년 오일쇼크로 촉발된 외환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돈 빌리기에 나섰던 주역은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김용환, 차관인 정인용, 그리고 금융정책과장인 이헌재 씨 등 3인이었다.
74년 1차 외환위기를 한 중심에서 겪은 그는 97년에 다시 환란 극복이 최일선에 나서게 되는 기이한 인연의 주인공이 됐다
62년도 무역적자 5천 5백만불 이였는데 71년에는 5억8천2백만불, 74년에는 20억불, 79년에는 30억불로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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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만 77년도에만 중동건설붐으로 1200만불흑자)
차관으로 무역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돌려막기) 악순환이계속 반복된다.
그 결과 1974년 현재 한국차관 총액의 65.4%가 일본 차관이었는데, 결국 외국차관을 들여오는 것은 대기업체들이며,
일본의 큰 재벌이 한국대기업체에 막대한 차관을 해줌으로써 경영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국경제의 일본식민지화 가마우지 경제구조를 고착시킨다.
박정희 말기에 233억달러로 불어나 있던 외채는 급등하는 국제이자율 요인과 유가로 인한 엄청난 무역역조로 인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84년 말에 이미 500억달러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5년 550억 달러 세계1위 외채국이 되었다.
이런 경제모순과 실정이 쌓여 1979년 부산마산항쟁이 일어난다.
1980년은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거기에 흉작까지 겹쳐 경제성장률이 -5%로 곤두박질쳤다. 이것은 1962년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래 처음의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제2차 오일쇼크로 외채도 1979년 2백3억 달러에서 4백31억 달러로 되었다. 금융, 해운, 해외건설 등은 파산직전까지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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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전두환 정권은 방만한 경영에 허덕이는 재벌과 부실기업을 대수술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권과 재벌의 유착이 가속화되었다.
전두환정권은 구조조정을 시행하고서 국내 경제적 불안요인은 어느정도 잠재웠지만, 이 외채로 인해 무너지기 직전상태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거기다 한국경제응 이끌던 김재익씨는 랑구운에서 유명을 달리한 뒤였다.이때 미국에서 복음이 날아온다. 그게 바로 플라자합의다.
일본경제에 의한 추월을 두려워하던 레이건이 소련과의 체제대결을 끝까지 밀어 붙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일본에게 그 체제 대결의 비용을 전가시키는 동시에
일본의 추월 욕심을 꺾어 놓을 비장의 양수겸장수를 결정을 하게 되는데 바로 '플라자 합의'의 성격이다.
플라자합의가 85년에 체결된 후 1년만에 엔화환율이 250엔대 1불에서 120엔대 1불로 절반으로 꺾여 버린 것이다.
1986년 초부터 국제적으로 조상된 3저현상으로 한국 타이완등 신흥공업국들은 눈부신 경제성장과 짧은기간 상당한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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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러나 한국경제는 만성적인 차입경제와 기업. 금융 경쟁력 저하와
일본에 예속된 가마우지경제구조를 탈피하기보다 일시적인 성취에 도취되어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1987년 이후의 급속한 임금상승과 노사분규, 3저현상에 뒤이은 원화절상 등으로 우리 경제는 1990년을 전후하여 심각한 수출경쟁력의 약화를 경험한다.
이에 따라 1990년대에 들어서는 산업경쟁력의 강화가 중요한 과제가 부각되었으며, 이와 함께 규제완화, 경제정의, 세계화 등이 강조되었으나 실절적인 행동을 하기전에 위기가 한국경제를 덮치게 된다.
1990년대 말,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우리경제는 엄청난 시련을 겪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며 당시GDP기준으로 경제규모 세계 12위였던 우리 나라는 순식간에 국가부도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사태의 수습을 위해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200억달러에 달하는 긴급 금융지원을 받게 되고, 그 대가로IMF는 우리정부에 긴축재정 및 공기업민영화, 기업구조조정, 자본시장개방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여기서 한국경제는 양극화를 부르는 신자유주의경제 정책을 받아 들이게 된다.
이협정서로 인해 국내자본시장은 외국인에게 잠식당하게 되며,이후 극심한 양극화의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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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영삼 정부가
IMF와 1997년12월3일에 체결한 이면계약서 내용
◆종목당 한도 (현 26%ㅡ>97년말50%ㅡ>98년말 55%)
◆1인당 한도 (현 7%ㅡㅡ> 97년말 50%)
◆단기 고금리 적용
◆M&A에 대한 규제 대폭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 정리해고 제한 완화, 파견근로제 도입
이때 정부의 IMF의 고금리를 받아들인 것은 이후 우량기업의 대량부도사태를 몰고온다.
구제금융 협상 당시에는 향후 발생할 상황은 예상하지 못하고 단순히 금융시장 안정용 자금을 빌리는 차원이었다(강전부총리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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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당시 삼성전자 이건희회장의 지분이 1% 현재 외국인의 지분이 60%,주식시장에서 소유지분 50%가 넘어가면 경영권도 넘어간다.그런데 국가부도 맞아 가격이 폭락한 주식시장을 그냥 열어주었다.
급전이 필요했던 김영삼 정부는 준비도 없이 자본시장을 열어주었고 외국인들은 은행과 공기업 그리고 우량기업들의 주식을 싼값에 소유 할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헐값에 삼성전자주식이 외국인 손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가 10조원의 순이익을 내도 그 절반은 외국인 배당금으로 국외로 빠져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3000억 달러를 수출해도 서민들이 그 혜택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고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는 원인이다. 외국인 지분이 10% 이내인 기업의 평균 배당률은 9.0% 였으나 40%이상인 기업의 배당률은 41%에 달했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가져간 배당수입은 지난 98년 4억9천9백20만달러에서 ▲2003년 35억6천6백50만달러 등으로 급증추세를 이어가 외환위기 이후 10배 넘게 증가했다.
이것은 결국 박정희시대 이후 계속되어온 정경유착.재벌의 기형적인 지배구조왜곡.만성적인 차입경제 그리고 관치금융과 후진국형 금융대출관행이 낳은 예고된 비극이었으며,국가부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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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70대말.80년대.90년대말.반복되는 한국경제위기의 근본적인 원인
우리의 경제위기는 직접적으로는 기업과 금융기관 부실의 표출에 따른 한국 경제에 대한 대외 신인도의 급격한 하락, 금융 감독의 소홀과 국제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지난 30여 년 간 압축 성장을 통한 경제성장의 추진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누적되었다.
관치금융, 감독소홀, 도덕적 해이, 비정상적인 지배구조, 기업의 과다차입,기업의 경쟁력 상실, 과잉투자 등으로 금융기관이 부실화됨에 따른 금융위기로, 교역조건의 악화, 정경유착등 총체적인 부실로인하여 시장 경제 체제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후 정부와 기업에서는 금융구조조정과 기업간 빅딜을 통한 경제 전반적인 구조개선 노력을 벌이는 한편,
금 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IMF의 구제금융 체제를 4년이라는 빠른 기간 안에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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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용환은 DJ가 경제정책에 관해, 특히 초기에는 시장 친화적인 경제정책을 전개, 다른 나라에 비해 효과적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할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특히 DJ의 정부부문 구조조정이 미뤄지고 개혁의 고삐를 너무 빨리 놓아버린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성적표는 좋은데 갚을 달러가 없어 구제금융을 요청한 지 10년만에 외환 보유고는 2343억달러(2006년11월 말 현재)나 쌓여 외환 보유액 세계 5위(2002년보다 한단계 하락)에 올라 있다.
1998년 평균 1399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900원대 초반까지 떨어졌고, 외환위기 직후 10%를 훌쩍 뛰어넘던 시중금리는 4%대까지 내려왔다.
1998년 300선이 무너졌던 주가지수는 2000년 아이티(IT) 버블로 한 차례 출렁거렸지만, 2005년 1000돌파에 이어 2006년엔 1400 고지까지 내달렸다.
외환위기 당시 500%를 넘던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은 100%아래로 떨어졌고, 삼성전자·현대차·엘지전자 등 일부 수출 대기업들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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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외환보유 세계 5위 글로벌기업 승승장구
그러나
분배구조 악화 중산층 줄고 빈곤층 늘어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이후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말은 ‘양극화’이다.
외환위기라는 시련을 겪고 난 뒤 우리경제의 체질은 놀랄만큼 개선된 게 사실이다.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난 것도 위기가 안겨준 값진 선물이다.
위기가 한창이던 97년12월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사람들은 ‘한국이 더 잘 안다’는 학파의 사고"(the ‘Korea knows better’ school of thought)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
부실을 털어내고 경쟁력을 높인 기업들은 국제무대에서 통하는 글로벌기업들로 속속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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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97년말 28억달러 였던외환보유고는 올 11월 현재 2342억달러로 백배 불어났고, 한국의 지위는 그 사이 건국 최초 순채권국(2000년 2/4분기부터) 으로 바뀌었다.
300선으로 추락했던 주가는 1400선의 문턱을 가뿐히 넘어섰다.
하루아침에 국가신용등급을 여섯단계에서 열단계씩이나 끌어내렸던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잇단 북핵 위기에도 한국의 국가위험도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
세계 100대 은행 순위엔 다섯 개의 국내 은행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은 IMF 위기를 일러 “재앙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축복”이라고 까지 부르기도 했다.
한국경제는 1969년 외환위기, 1974년 국가부도, 1979~80년 외환위기(180억달러 세계4위 외채국),1985년 550억 달러 세계1위 외채국,1997년 국가부도, 이렇게 계속되는 경제위기에 노출되었다.
만약 우리가 69년,74년,79~80년,85년의 잘못된 국가부도,경제위기 역사를 국민들에게 숨기지 않고 그때 문제를 시정하고 교훈을 배웠다면 1997년 국가부도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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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 이제 잘못된 역사는 여기서 끝내자....FTA 협상내용 공개하고 결렬해라...
그러니까 음 이번년도는 어케된다는건가요?
국민을 속이는 협상이나 경제정책은 국가를 망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