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이 빛으로 환해지는 사랑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감독 출연진 모두 낯설었지만
관객 수 1,000만을 넘겼다고 합니다. 음지인 교도소를 이보다 더 멋지게 보여줄 순 없을
것입니다. 이 용구역의 류 승룡 씨는 동생 승범 이만 잘 알고 이 예승역의 갈 소원양은
제가 첫 대면하는 배우입니다. 용구는 예승 이와 단 둘이 사는 지적장애인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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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구가 어떻게 아빠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해피마트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가장이고
예승 이는 8살 박이 살림꾼입니다. 세일러 문 가방을 사러 문구점에 갔을 때 다른 아이가
마지막 남은 세일러 문 가방을 골라 계산 중이었고, 장애우 용구는 예승 이 꺼 라면서
가방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당근, 바보 취급을 받아 얻어터졌고 어째 플롯이 불안 불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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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점에서 본 아이를 따라가는 용구는 역 낙 없는 성 추행 범이 아닙니까?
운명의 장난처럼 아이가 갑자기 의문사를 당하는데 사건현장에 용구가 서있었고 이제 마녀
사냥 식 바보사냥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paul은 큰 단락을 사용하여 자신을 어리석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리석은 길을 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스스로 용구가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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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paul은 고린도 교회가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버릴까봐서 염려했습니다.
영화로 치면 용구는 paul이고 고린도 교회는 예승이입니다. 나는 성도를 향한 거룩한
질투심이 있는가 생각해보니 나 말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가 한 중매한다는 것과 바지바람의 원조인 것을 아는 사람은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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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포켓몬스터 가방 사들고 쫓아가던 생각이 났습니다.
예주 교복위에 입는 바람막이를 못 사준 것이 걸렸습니다.
지난번 통화 때 목소리는 씩씩했는데 학교에 재미를 붙인 것인지...
용구가 수감되고 교도소 방 번호가 7번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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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번이 안 보이니 그냥1237로 쓰겠습니다.
교도소 신고식에서 강간이나 절도는 특정범죄 가중처벌입니다.
누범 방에 들어간 용구는 이제 죽었습니다.
웬걸, 곱징역을 살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용구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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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을 위해 칼침을 맞은 일로 징역이 풀린 용구가 예승이가 보고 싶답니다.
방장의 공권력으로 종교행사 때 예승이가 감방 상륙작전에 성공하는데
말은 안 되지만 영화니까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예승이의 유쾌 통쾌한 감옥 생활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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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못가서 들키게 된 용구는 독방을 쓰고 예승 이는 쫓겨났습니다.
교도소장 모가지 잘린 일을 했는데 추가도 아니고 독방이니 운수대통입니다.
보디발 교도소장이 등장하면서 예승 이와 용구의 좌충우돌은 폭소를 자아냅니다.
교도소장은 과거가 있는 아빠입니다. 자신이 믿었던 수감자로부터 아들이 죽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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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한 일로 수감자에 대한 피해의식이 많은 교도관입니다. 그래서 물론 용구도 처음엔 싫어
했습니다. 용구가 독방을 쓰던 중 한 수감자가 불을 질러 교도소에 화재 가 일어나면서
빤한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하여간 생명의 은인이 되었으니 이제 소장은 용구 편입니다.
다음 작업은 예승이의 출입을 돕고 용구의 무죄를 입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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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면 감천인가, 여기저기서 도움을 줍니다. 소장뿐 아니라 7번방 수감자들이 모두
나서 서 모의재판을 하고 용구 출애굽에 의기투합 하지만 바로의 핍박은 절정을 이룹니다.
용구는 그 날 밤 무자비한 고름을 받습니다. 장애인 용구에게 겉만 비장애인 권력이 권모
술수를 썼으니 용구는 추풍낙엽입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예승 이를 살리는 길을 선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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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구는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신 울 주님 생각이 나서 울가망해졌습니다.
누가 바보인가? 용구인가? 사지 멀쩡한 우리인가?
운명의 시간이 다가 오고 현대판 미워도 다시 한 번 똑 순 이가 부활을 했습니다.
철장 하나를 놓고 아빠 양과 아기 양이 슬픈 이별을 하는데 눈물 없이 못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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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장이 용구를 쳐다보지 못하는 것은 죽음을 알리는 복선입니다.
사형집행 수순 밟기는 십자가만 알고 부활을 모르는 감독의 한계가 아닙니까?
엉성한 시간설정이 리얼리티를 떨어트린 채, 예승 이가 변호사가 되어 아빠의 무죄를 입증
합니다. 더 이상의 반전이 없습니다. 멜깁슨의 “패션오브크라이스트”처럼 결말이 십자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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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습니다. 주님이 가신 그 답답한 상황같이 인간의 역사란 늘 왜곡이 있고 진실에 대하여
관심도 반전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 후서를 읽으면서 사단이 교회를 파괴하는 방법에는
핍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화책도 쓴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살을 말리는 것으로(서구교회)다른 한편으로는 살찌우는 방법(한국교회)을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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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빛난다고 모두 광명은 아니고 거짓은 진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더라도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가 역설을 살았고, 사도 바울이 이 역설을 살았으며,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역설을 살았으니 이제 우리가 이 역설을 살아낼 차례가 아닐까?
2013.4.17.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