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조사한 신라 시대의 복식(2)여성유물및회화자료/ 우리옷[韓服]
2006/08/17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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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옷[表衣]
우리나라에서 당나라 복식을 받아들일 때에 제일 먼저 궁중과 귀족의 남성들, 그리고 승려들이 당나라 옷을 먼저 입었고 그것이 진덕여왕 3년(649), 여성들에게까지 당나라 옷을 입게 한 것이 문무왕 4년(664)의 일로 당나라 의복이 수용된지 10년은 지난 뒤의 일이다.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이 혼인식 때 입는 원삼 등은 아마도 당나라에서 들여온 의복이 지금까지 남아 전해진 흔적으로 보이는데, 고려 때에 송나라에서 온 사신이 축하연에서 춤추던 기녀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삼대의 복식이 아직 여기 있었다니 하고 놀랐다는데, 조선조의 연암 박지원은 기녀가 입는 옷, 그러니까 소매가 질질 끌릴 정도로 넓고 길며, 허리에 띠를 두르는 기녀들의 원삼이 오히려 옛 제도와 비슷하다고 하셨을 정도다.
(사진: 경주 용강동고분에서 나온 여성의 모습을 한 토우. 왼쪽은 토우를 토대로 재현한 것.)
그때 기녀가 입고 있었던 옷이 넓은 소매옷[闊袖衣]과 색실 허리띠[色絲帶], 그리고 넓은 치마[大裙]. 《삼국사》에서 적은 이 옷의 모습과 가장 닮은 옷이 원삼이라는 말이지 원삼 자체가 신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치만 지금 옷고름 붙이는 거라던지, 옷깃 모양이라던지 하는 것만 좀 다듬고 보면 옛날에 입던 그때 그 옷하고 제법 닮은 옷이 되지 않을까.(흐음.)
진골 여자는 종실 여성만이 사용할수 있는 계수금라 이외의 것을 모두 쓸수 있었고, 6두품 여자는 중소문릉(中小文綾) · 시 · 견만 쓰고, 5두품은 무늬없는 독직[無文獨織]만, 4두품에서 평인까지는 명주 이하만 허락되었다.
속옷[內衣]
복식금제령에서 6두품 여성과 5두품 여성은 소문릉(小文綾) · 시 · 견 · 베만 쓰고, 4두품은 시 · 견 · 명주 · 베만, 평인은 견 · 베만 썼다.
벽화에 그려진 여성의 옷과 지금 한복을 비교해보면 저고리 길이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 당나라의 옷과는 달리 우리나라 옷은 저고리를 치마 밖으로 내서 허리띠를 두르고 겉옷을 그 위에 입는다. 문무왕 때 여자들에게까지 당나라풍 의복을 입히기 전에는 다 그런 방식으로 옷을 입었을 것이다.
왜 저고리 길이가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짧아졌는지는 확실하게 모르겠다. 조선조 학자들은 몽골풍 때문이라고 했다. 굳이 몽골풍 때문에 우리나라 저고리 길이가 짧아졌나 하고 단정짓진 못하지만, 확실히 고려조를 전후해서 저고리의 길이가 현저하게 짧아지기 시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그래도 16세기까진 허리 바로 위까지는 왔었는데 18세기가 넘어가니까 거의 가슴 위에까지 올라가더라.)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허리띠를 매지 않게 되고, 대신 '옷고름'을 매서 옷을 여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옷고름'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끼인 우리나라의 옷을 그들의 옷과 구별지어주는 가장 큰 '특징'이자 우리만의 '고유성'이 되었다. 참 우습지. 몽골이라는 외세에게 지배당해서 옷이 기묘하게 바뀌었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우리옷을 중국과 일본의 옷 사이에서 돋보이게 하는 요소를 만들어냈으니.
반비[半臂]
신라에서 반비는 목에 두르는 표와 함께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상징이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작자(綽子)라고도 했으며, 지금의 답호 · 쾌자 · 괘자 등은 모두 반비와 같은 형태의 옷이다. 우리 나라의 고유 복식에도 갖옷 등에 반비 형식의 옷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기록에 처음 보인 것은 《삼국사》신라 흥덕왕 9년의 복식금제(服飾禁制) 에서의 반비다.
진골 여자는 계수라(罽繡羅)만 제외하면 제한은 없었고(왕족만이 계수라를 사용할수 있었음)
* 6두품은 계수라 · 세라를 금하고,
* 5두품은 계수금 · 세라에 야초라를 금하였다.
* 4두품 여자는 바지와 함께 소문릉 · 시 · 견 이하만 쓰도록 제한했다.
마찬가지로 평인은 반비를 입지 못했다.
※ 진골 여성들만이 쓸수 있었던 최고급 비단인 야초라는 야초 즉 들풀무늬를 수놓은 라(羅)를 말하는데, 인동무늬나 당초무늬 같은 것을 수놓았을 것으로 보인다. '라'의 종류로는 '야초라'이외에도 '포방라'라고 해서, 여러 빛깔의 실을 교대로 층층이 짠 색동 비단이 있는데, 그 화려함 때문에 신라에서는 6두품 여성까지만 사용하도록 허락되었다. 승천라(乘天羅)라는 것도 있는데 아마도 여기에는 성덕대왕신종이나 상원사동종 표면에 새겨진 것과 같은 비천상을 무늬 제재로 삼았던 것 같다.
바지[袴]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치마의 속에 받쳐입는 용도로 바지를 입었다. 이것은 오늘날 한복에서 여자들의 한복 치마 속에 받쳐 입는 고쟁이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진골 여자는 속옷 · 반비 · 바지 · 버선 · 신발과 함께 계수라(罽繡羅)를 금지하였고, 6두품 여자는 계수금라와 함께 세라 · 금니(金泥)를 금지하였다. 5두품 여자는 계수금라 · 세라 · 금니에 야초라를 금지하였다. 4두품은 소문릉 · 시 · 견 이하만 쓸수 있었고, 평인 여자는 시 이하만 썼다.
신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상고대에서는 남녀 모두 바지를 입었는데, 이여성의 《조선복식고》에는 이것이 북방 기마민족들이 말을 쉽게 탈수 입도록 만들어 입었던 옷에서 유래한 것이라 했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여자주인공이 치마를 입고 그 아래에 바지를 받쳐입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 구분없이 입던 것이 중국으로부터 '치마[裳]'가 도입이 되면서, 점차 남자-바지, 여자-치마로 구별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듯 하다.
목도리[祓]
여자 복식의 맨 겉에 어깨에 걸치는 긴 천. 표(祓)는 중국의 복식에서는 영포(領布)라고 하며 지금의 숄(shawl)과 같은 것이다. 진골 여자는 계(罽), 수(繡)로 만든 것에 금은실[金銀絲] · 공작의 꼬리털[孔雀尾] · 비취털[翡翠毛]을 쓴 것을 금하였다. 6두품은 계수금라 · 금은니(金銀泥)를 사용할수 없었고, 5두품은 능 · 견 이하를, 4두품은 견 이하를 썼다. 평인은 반비와 함께 사용이 금지되었다.
※ 표의 재료 가운데 하나인 능(綾)은 무늬있는 비단의 일종, 옷감의 결이 마치 얼음이나 거울처럼 곱고 빛나면서 풀 · 꽃 등의 여러 가지 모양의 무늬가 바탕에 수놓인 비단이다. 신라에서 대체로 4두품 여자 이상에게 허용된 고급 직물로서, 남녀의 속옷 · 반비 · 버선과 여자의 겉옷 · 바지 · 배자 · 허리띠 · 버선 등에 사용되었다.
공작의 꼬리털이나 비취털은 모두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사치품이었다. 특히 비취털은 동남아시아에서 나는 비취새라는 새의 털을 가지고 짠 것으로, 이 새는 매우 사치스럽고 잡기 어려운 진귀한 새라 하여 진골 여성들에게는 특히 엄금을 시켰던 듯. 오직 왕족에게만 최고급의 공작털과 비취새털의 표를 허락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금박 또는 은박가루를 아교풀에 개서 옷감에 바른 것을 말하는 금은니가 6두품 여성에게까지만 허락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한복에다가 금색이나 은색으로 소매 끝부분하고 치마 밑단에다 금박처럼 붙이는 것과 비슷한 형태인 듯 싶다.
옷감을 장식하는 공법 가운데는 '협힐(笇經)'이라는 것이 있는데, '판체' 혹은 '판염'이라고도 부르며, 두 장의 얇은 판자를 원하는 모양대로 오리고 도려내서, 두 장 사이에 천을 집어넣어 단단히 물리고, 그 오려낸 부분에만 염료나 발염제를 칠해서 무늬를 올리는 방법이다. 당나라 때 이미 행해진 방법으로 염색기법 가운데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발달한 염색방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구려 벽화에서 염색의 흔적이 보이는데, 신라에서는 여자의 겉치마 이외에는 대체로 6두품 여자까지 협힐로 문양을 만든 비단으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배자[褙孜]
신라 시대에 여자의 저고리 위에 덧입었던 소매 없는 배자. 소매가 없고 양쪽 옆구리의 귀가 겨드랑이까지 되어 있으며, 흔히 오늘날의 풍속에서 짧은 조끼같이 생긴 지금의 배자처럼, 양쪽 단의 천속에 토끼털 등을 넣어서 겨울철에 여자가 주로 입는 것과는 달리, 신라 당시의 배자의 형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형태에서 조금의 차이는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배자에 대해 진골 여성은 특별한 제한은 없으며, 6두품 여자는 저고리와 함께 계수금라 · 포방라(布紡羅) · 야초라 · 금은니를 사용할 수 없었고, 5두품 여자는 계수금 · 야초라 · 포방라 · 금은니 · 협힐을 금했고, 4두품 여자는 능 이하만 썼다. 평인 여자는 배자를 입는 것을 금했다.(사진 설명: 조선시대 배자)
저고리[短衣]
글자 그대로 윗몸에 입는 짧은 옷을 가리켜 '단의'라고 하고 저고리라고도 부른다('저고리'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좀더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음). 중국의 역사책인 《양서》 신라조에 나오는 '위해(尉解)'라는 단어는 오늘날 '우치', '우태', '우티' 등의 우리말의 뿌리가 되었다. 《삼국사》에 나오는 '단의'라는 단어는 중국의 《설문해자(設文解字)》라는 책에서 저고리 유(襦)자에 대해서 설명해놓은 풀이와도 일치한다.
신라 시대의 저고리는 좁고 긴 소매가 있고 옷고름이 달렸고 길이가 허리까지 내려오지 않은 여자의 저고리를 말하는 듯하나, 요즘의 저고리처럼 겨우 가슴을 가릴 정도로 짧은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나라 옷의 발전 경향을 보면 저고리는 고려조를 기점으로 점차 짧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허리에 끈을 두르는 방식에서 옷고름을 달아서 여미는 방식으로 변한 것도 저고리가 짧아지던 우리 옷의 변화경향과 관련이 있다.
《신당서》에서 신라의 여자가 '장유(長襦)'를 입는다고 적은 것은 이 시기 신라의 저고리 길이, 허리를 지나 엉덩이까지 덮던 우리나라 저고리의 원래 길이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여성의 《조선복식고》를 보니, 상의 즉 웃옷이라는 의미로 그냥 간단하게 '의(衣)'라고 표시하고 두루마기[袍]와 비슷한 긴 저고리라는 말일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신라의 여자 저고리에 대한 금제를 보면 6두품 여자는 계수금라 · 포방라(布紡羅) · 야초라 · 금은니를 금하고, 5두품 여자는 계수금 · 야초라 · 포방라 · 세라 · 금은니 · 협힐을 금하고, 4두품 여자는 견 이하만 썼다.
허리끈[䙅]
신라 시대에 여자의 겉치마의 허리부분을 묶는 끈인 듯. 윗옷의 옷자락 위에 장식하는 색동있는 띠인 허리띠와 구별된다.
신라 시대의 규정으로 6두품과 5두품의 여자는 허리띠에 계수(繡)를 사용할수 없었고 금은실·공작꼬리·비취털로 허리띠를 만들수 없었으며, 4두품은 허리끈은 치마와 같이 시, 견만 쓰고 혁대는 수놓은 끈과 야초라 · 승천라(乘天羅) · 활라를 금하고 면주(綿紬) 이하만 썼으며, 평인 여자는 허리띠만 능·견 이하를 쓰고 허리끈은 쓰지 않았다. 평인 여자에게 허리끈이 없는 것은 그 겉치마의 길이가 짧고 통이 그리 넓지 않은 탓이 아닐까 한다. (사진 설명: 조선시대 유아용 배자 저고리의 옷고름. 아마 저것과 비슷한 모양이 아니었을까 추정함) 활라(越羅)라는 건 'ぷぷ'와 비슷하게 생긴 부들자리무늬가 있는 얇은 비단이다.
치마[裳]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치마(겉치마)의 형태는 길이가 길어서 땅에 끌릴 정도이고 허리 부근까지 잔 주름이 많으며, 끝 단에는 장식띠 즉 가선을 붙였으니, 신라의 것도 이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한다. 6두품과 5두품의 여자는 계수금 · 야초라 · 세라 · 금은니 · 협힐을 쓸수 없었고, 4두품은 시·견 이하만 쓰고, 평인은 견 이하만 썼다.
※복식금제령에는 옷고름에 대한 규정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보통 '옷고름'이라고 하면 남녀 한복의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앞에 달아서 양편 옷자락을 여며 매는 끈을 말하지만, 흥덕왕 시대의 복식금제령에는 여자옷의 겉치마[表裳] 다음에만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신라시대에는 겉치마 윗부분을 여미어 묶는 끈을 가리켜서 '옷고름'이라 불렀던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6두품과 5두품 여자는 옷고름에 계수(繡)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4두품 여자는 활라(越羅)를 쓰도록 했고, 평인 여자는 능 이하만 썼다.
신라의 여성복식 가운데 특히 유난히 발달한 기술 가운데 하나로 옥충식(玉蟲飾)이라고, 딱정벌레의 일종인 비단벌레(학명은 Chrysochroa Fulgidissima Schoenherr)의 날개를 가지고 옷이나 마구(馬具)에 장식하는 것이 있다. 일제시대 경주 금관총(5세기말~6세기초) 발굴조사 과정에서 마구 및 그 부속품들과 매장자가 착용한 의복의 조각으로 보이는 능라 위에 옥충의 날개가 장식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비단벌레의 날개를 열 십(十)자로 붙이고 그 둘레의 가장자리에 금박으로 선을 두른 다음, 십자 모양의 한가운데를 금실로 금의 작은 원판을 꽃술처럼 발랐다. 배열 상태도 밑부분만 끊고 다른 부분은 자연 그대로 쓴 것, 혹은 대나무잎 모양으로 딱지날개 밑부분을 중심으로 모은 것을 기준으로 해서 배열한 것도 있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 보관된 스이코 덴노(593~628) 시대의 옥충주자(사진)도 이러한 옥충식이 보이기는 하지만, 옥충주자와는 달리 금관총의 것은 딱지날개를 표면에 깔 때에 그 밑에 견직물을 깔았으며, 일본 학자 하마다(濱田)는 <경주의 금관총>에서 쇼소인에 소장된 옥충주자의 제작자는 한인(韓人) 즉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더욱이 금관총 유물처럼 능라 위에 딱지날개를 꽃 모양처럼 배열한 것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양식이며, 이여성은 《조선복식고》에서 금관총 능라 위의 옥충식은 신라에서 발생하고 신라에서 발전해 일본에 역수입된 신라만의 독자적인 양식이라고까지 단언한 바 있다. 물론 고구려 진파리 7호분의 금동투조금구에서도 옥충의 딱지날개를 가지고 장식한 공예품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정작 옥충식의 원료가 되는 비단벌레는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 많이 서식하는 편이지만, 《조선복식고》에서 이여성 본인이 조복성이라는 곤충학자로부터 금관총의 그것과 똑같은 비단벌레를 목포에서 채집한 것을 직접 보았다고 했으며, 1940년 경주분관의 최남주로부터 충북 제천소학교 부근에서 비단벌레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으니, 그 무렵까지만 해도 절멸되지 않고 드문드문 남아있던 것으로 신라 때만 해도 그것보다는 훨씬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겉에는 겉치마, 그리고 그 아래에 받쳐입는 것이 속치마[內裳]이다. 이여성은 《조선복식고》에서 한민족과 중국 한족 사이의 복식계통의 차이는 치마에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 한족의 의복은 상의하상(上衣下裳)이라 해서 위[衣]와 아래[裳]가 서로 붙어있어 치마처럼 생긴 옷을 남자도 일반적으로 입었기에 '의상(衣裳)'이라는 단어가 여성복만 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를 봐도 남자가 치마를 입은 그림은 무용총의 주실 아랫목 벽에 보이는 승려인 듯한 두 사람이 두루마기 아래에 치마 모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 이외에 우리 나라에서 일반 남자가 치마를 입은 흔적은 보이지 없다. 치마는 우리 나라에서 주로 여자들만이 입는 전유물이었고, 점차 여자만의 옷으로 '치마'의 속성이 굳어지게 되었다. 신라 시대에 여자의 아랫도리속 겉치마 안에 입는 치마에 대한 규정에 보면, 6두품 여자는 계수금라 · 야초라를 금하였고, 5두품 여자는 계수금 · 야초라에 금은니 · 협힐을 쓸수 없었다. 4두품 이하는 속치마를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버선[襪]
천으로 만들어 발에 신는 물건. 남녀 모두 버선이 있으나, 남자의 버선은 한 가지 천으로 만든 것에 비하여, 여자의 버선은 버선목[襪汔]을 달리 취급하는 것으로 봐서는 복사뼈 부분을 기준으로 발목의 위아래를 구분해 두 가지 천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
버선에 대한 신라의 금령제도는 남자보다도 여자 쪽이 훨씬 고급이다. 우선 6두품 여자에게 버선목[襪]은 오로지 왕족과 진골 귀척에게만 허락된 계라(罽羅) · 세라를 쓰는 것을 금했고, 버선은 계수금라 · 세라 · 야초라를 금했다. 5두품 여자는 계수금라 · 세라 · 야초라 버선과, 계수금라 · 세라로 만든 버선목을 금했고, 4두품 여자는 소문릉 이하의 버선목에, 버선은 소문릉 · 시 · 면주 · 포만 쓰고, 평인 여자는 무늬없는 버선목에, 버선은 시 · 면주 이하만 썼다. (사진설명: 조선시대 타래버선. 신라의 것과 가장 유사한 형태로 추정)
이[履]
남녀의 발에 신는, 발등을 덮지 않는 일반적인 신발. 이(履)는 전통적인 갓신으로서 앞코가 조금 올라간 모양이고 보통은 바닥과 거죽을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신라 시대에 여자의 5두품 이하나 남자의 4두품 이상은 가죽신을 그대로 신었고, 진골 여자와 6두품 여자의 신발은 그 겉에 여러 가지 비단을 붙여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6두품 여자는 계수금라 · 세라로 만든 것을 금하였고, 5두품 이하 평인은 가죽 이하만 썼다.
(사진 설명: 조선시대 꽃신)
빗[梳]
신라 시대에 부인의 머리 뒷부분에 꽂았던 둥근 얼레빗 모양의 장식. 당나라 제도에서 빗은 양쪽 살쩍머리나 머리 뒷부분 등에 꽂으며, 그 재료로는 나무 외에 무소뿔[犀] · 옥 · 수정 · 상아 등이 있다. 진골 여자는 슬슬전(瑟瑟鈿: 에메랄드) · 대모(玳瑁) 이외의 임의로, 6두품 여자는 슬슬전 이외의 것을, 5두품 여자는 소대모(素玳瑁) 이하, 4두품에서 평인까지는 소아(素牙)와 뿔 · 나무 등의 재료로 만든 빗을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사진설명: 통일신라 장식용 빗)
요즘은 상아의 채취를 목적으로 코끼리를 잡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아서, 고대 중국 은나라에서는 주왕의 애첩이었던 달기가 상아 젓가락을 좋아한 바람에 결국 중국 땅의 코끼리가 멸종하고 말았다는 속설도 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들이 화려하고 귀한 사치품(소위 '신상'이니 '명품'이니 하는)에 끌리는 것은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필리핀 군도, 자바 등지에서만 포획되는 바다거북의 등껍질인 '대모'도, 당시에는 최고급에 속하던 재료였다. 표면에 무늬를 새기느냐, 새기지 않느냐에 따라 앞에다 '소(素)' 자를 붙여서 구별했다. 에메랄드를 가리키는 슬슬(瑟瑟)은 《당서(唐書)》 고선지전에 보이는 타슈켄트의 특산물인 벽석(碧石)인데, 이는 이란어 세세(SeSe)의 차음을 한자로 써서 '슬슬'이라고 적은 것으로 이 에메랄드를 다닥다닥 붙여서 여기에 꽃 모양으로 만든 금이나 광채나는 자개 조각을 박아서 장식한 것이 슬슬전(瑟瑟鈿)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빗을 머리에 꽂지 않는데, 그 이유는 '빗'이 여자의 순결과 같은 의미로 번져서 남자에게 빗을 주면 곧 순결을 허락한다는 의미가 되는 바람에 조선조에 이르러서 머리에 빗을 꽂지 않게 되었다나.
비녀[釵]
신라 시대 부인의 쪽진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두 갈래로 된 비녀의 형태에 대해서, 옥편에 '부인기암(婦人岐喦)'이라 해서 두 가닥으로 된 비녀를 말하니 이는 당나라 제도와 비슷한 것인 듯 한데,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 중에도 이 비녀가 몇 개 있다. 당나라 제도로는 '금채십이행(金釵十二行)'이란 한시 구절처럼 많은 비녀를 꽂았음을 알 수 있고, 그 재료로는 금은 · 구슬옥 · 산호 · 호박 · 수정 · 유리 등이 있었으며, 그 조식[雕飾]에도 봉황 · 난새 · 원앙 · 제비 ·참새 · 앵무새 · 매미 · 나비 · 물고기 등이 있었다고 한다. 복식금제령에서 진골 여자는 무늬 새긴 것과 구슬 꿴 것을 금하고, 6두품 여자는 순금에 은으로 아로새긴 것과 구슬로 꿴 것을 금하며, 5두품 여자는 백은(白銀) 이하를, 4두품 여자는 아로새긴 것과 구슬 꿴 것 및 순금으로 만든 것을 쓸수 없었고, 평인 여자는 유석(鍮石) 이하만 썼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왕비에서 6두품 여자까지는 모두 순금비녀를 쓸 수 있지만 새긴 무늬[刻鏤]의 제재 및 무늬 유무의 차이가 있고, 5두품과 4두품 여자는 모두 백은으로 만든 것을 쓸 수 있지만 진골이나 6두품과는 비녀에 새긴 무늬[刻鏤]의 유무의 차이가 있으며, 평인 여자는 그 재료 자체가 유석 이하로 한정되었던 것이다. 유석(鍮石)은 자연동의 결정체로 황금빛을 띠는, 신라에서는 금은 버금가는 귀금속으로 중시되어 거의 종실만의 전유물이었는데, 평인 여자가 유석 '이하'의 비녀를 썼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유석보다 한 단계 급수가 낮은 것이 놋이다.
관[冠]
부인의 머리에 덮어쓰는 헝겊으로 만든 쓰개를 가리키는 듯. 신라 방언으로는 남녀의 머리에 쓰는 관을 모두 '견자례(遣子禮: 견계례 즉 고깔)'라고 불렀다.
《구당서(舊唐書)》여복지(輿服志)에 의하면, 당나라 정관(貞觀 : 619∼649) 때에는 머리부터 상체(上體)까지 덮는 멱리(冪籬)를 쓰고, 영휘(永徽 : 650∼655) 이후로는 머리부터 목 부분까지를 덮는 '유모'라는 것을 쓰고, 개원(開元 : 713∼741) 이후로는 머리 부분만 덮는 호모(胡帽)를 썼다고 한다.
또한 멱리 밑에는 평원형(平圓形)의 축자(竺子)라는 것을 썼다고 하는데, 여기서 '관'이 멱리, 유모, 호모 중의 하나인지, 또는 축자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조의 '너울'과 비슷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신라에서는 진골여자가 관으로 슬슬전(瑟瑟鈿)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고, 6두품 여자는 세라 · 사(紗) · 견(絹)을 쓰도록 하였으며, 5두품 이하 평인까지는 관을 쓰지 않았다.(사진설명: 조선시대 너울)
※신라 여성들의 머리 모양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고 대부분 고구려 고분에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북사》신라조에 보면 신라 사람들의 머리모양에 대해서 "부인들은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에 둘리고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장식한다"고 적었는데, 이는 백제에서 "여자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우고 이미 시집갔으면 나누어 두 가닥으로 만들어 머리 위에 얹었다"(《북사》백제전)라고 적은 기록과 같다. 머리를 땋아 뒤로 늘어뜨린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혼인하지 않은 여성들의 머리 모양으로 조선조까지도 이어진 전통이다.
《동경지(東京志)》권제1 풍속조에 "여자의 북계는 신라 때 도읍의 북쪽이 텅 비어서 여자들이 뒤통수에 쪽을 쪄서 북계라고 이름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라고 적은 것은 '북계', 즉 '쪽찐머리'라는 것으로 도시, 시골 구별 없이 보편적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혼인한 여성들이 하던 머리모양이다.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운다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머리 매만지는 법으로, 기혼녀가 머리를 트는 것은 머리를 땋아 드리웠던 미혼녀의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의미인데, 《예기》에서 시집가고 장가들어 비로소 비녀 꽂고 갓 쓴다는 관념과 통하는 것으로 중국의 영향도 어느 정도 가미된 것 같다고 이여성은 주장했다.
"부인들은 머리털로 머리를 두르고 비단과 구슬로 장식했는데 머리털이 썩 아름답고 길었다"(《구당서》신라전)거나 "아름다운 머리털을 거두어 머리를 둘리고 구슬이나 비단으로 꾸몄다"(《신당서》신라전)고 한 것이 그것으로 진한 시대에 구슬을 귀하게 여기던 전통이 남은 것이다. 머리 만지고 장식하는 것을 즐기다보니 가체, 즉 얹은머리를 만들어 쓰고 그걸 중국에 수출하기까지 했다. 《삼국사》에 보면 성덕왕 22년(723)에 얹은머리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경문왕 9년(869)에도 넉 자 다섯 치 되는 머리털 150냥과 3자 5치 되는 두발 3백냥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무렵부터 외국 수출품 물목으로 신라의 가체머리가 각광을 받고 있었다. 《당서》에서 "남자들은 머리털을 깎아 팔아서 흑건을 쓴다"라고 한 것은 어쩌면 신라 내에서 머리털의 수요가 많았던 하나의 반증이 아닐까 한다. 《태평어람》에서는 신라에 대해서 "아름다운 머리털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데 그 길이가 10척 남짓했다"라고 했고, 《구당서》신라전에도 신라 여인들의 머리숱이 많고 검으며 아름다웠다고 했으니, '장발(長髮)미녀'란 이미 1300년 전부터 전세계적 미적 트렌드였던 듯.
※신라의 악사들이 입었던 악사복에 대하여
신라의 악공들이 입었던 옷에 대해서는 《삼국사》에 기록된바, 머리에는 꼭대기 부분이 세모꼴로 뾰족한 형태의 방각복두(放角幞頭)를 쓰고, 소매가 넓고 아랫자락이 긴 자주색 공란(公襴)을 입고, 붉은 가죽에 도금한 띠고리를 달아 장식한 허리띠, 검은가죽으로 만든 목신발을 신었다고 했다. 두 사람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데, 옷의 색깔에 대해서는 꼭 한 가지로 정해진 색깔은 없었던 것 같다.
신라에서는 어떤 직업능력을 지닌 기술자를 가리킬 때 '○○척(尺)'이라 불렀다. 악공의 경우에는 노래하는 사람은 '가척(歌尺)'이고 춤추는 사람은 '무척(舞尺)', 가야금 연주하는 사람은 '금척(琴尺)'이라 부른 것이 그 실례다. 애장왕 8년(807) 2월에 월성 숭례전(崇禮殿)에서 열린 연회에서, 사내금(思內琴)을 연주하는 무척(무용수) 네 사람은 푸른옷을 입고, 금척(가야금 연주자) 한 사람은 붉은옷, 가척(가수) 다섯 사람은 채색옷에 금실로 수를 놓은 허리띠[金鏤帶]를 두르고 수놓은 부채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사내금 다음으로 향연된 대금무(碓琴舞)에서는 무척은 붉은 옷이고, 금척은 푸른옷이었다.
방각복두나 공란의 모습에 대해서 신라 당시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오늘날 신라의 무용이라 전해지는 처용무나 사선무 같은 곳에서, 무용수가 쓰는 가면 및 입고 있는 옷의 모양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신라 악공들의 모습을 짐작해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