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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한 목자 에벤에셀 원문보기 글쓴이: 호산나
신사참배 강요에 따른 기독교학교의 폐쇄
1936년 8월 한국에는 군부 파쇼의 국체를 명백하게 밀고 나가는 미나미 대장이 새로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막강한 일본 관동군의 사령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취임하자 곧 천황 국체의 명징화를 철저히 기하기로 하고 아울러 그 방법의 하나로 신사참배 강요를 체계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제 신사참배문제는 한국민족 전체의 황실 종속화를 완성시키는 일대 국책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이것은 우선 교육기관에서 착수되고, 따라서 선교사나 한국교회 경영의 기독교 학교에 대한 모진 탄압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이 지출하던 교육비용은 그들 선교예산의 반 이상에 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교기관에서 학교 폐쇄의 원칙을 실천할 수밖에 없는 시책이 강요된 것이다. 1936년 7월에 이미 강력한 교육기관을 장악해오던 북장로교 현지 선교부가 '학교 설립 목적과 이념을 보존하기가 지난하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교육 인퇴를 결정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1938년 10월에는 평양내의 학교들을 폐쇄하고, 그해 3월에 폐교한 대구 계성, 서울 경신의 뒤를 따랐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정신여학교가 인퇴 결정을 한 것도 이때다. 미국 장로교 총회가 1940년 로체스터에서 소집되었을 때 '어떤 상황에서나 어떤 형태로도 신사참배는 결코 참여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이 교육에서의 인퇴는 민족사적 비극이었다. 한 선교사는 탄식으로 울먹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것을 보존하고, 일본화의 끝없는 공작에도 버티어 나간 유리한 매개체 구실을 한 것이 기독교 학교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 해방의 마지막 소망의 터전이 사라져가는 듯한 눈으로 이 교육에서의 인퇴를 바라보고 있다.
미일전쟁을 아직 저 멀리에 있어서 미국 배경의 학교가 그래도 이만한 민족정신 구현에 임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이제 종국에 다다랐다는 비탄이었다. 남장로교나 호주 장로계 학교들도 곧 같은 길을 택하였다. 감리교의 경우는 남, 북감리교 선교회의 차이도 있고, 또 교육선교에 전통적으로 주력해 오던 내력도 있어서, 현실적인 해결방법에서 교육에 대한 정서적 집착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는 스코트의 해석에 따라 현지 결정에 일임하였다. 스코트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받아들이고 교육을 계속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해서 가톨릭과 캐나다 연합교회, 감리교 일부가 가능한 한 교육을 계속하는 쪽으로 결정을 한 이외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계가 대개 폐쇄하여 그들 신앙의 고수를 다짐하였다.
한국 안의 교회 일부, 그리고 언론들이 이 폐교 단행에 섭섭한 마음을 가졌다. "동아일보"는 1938년 6월 말, 사학 태반의 폐교가 '조선인 전반의 수치'라 지적하고 '모름지기 분발하여 붕괴 직전에 있는 교육탑을 사수해야 할 것'이라 호소하였다. 도처에서 교회나 유지가 절하된 값으로 인계를 서둘렀다. "조선사람 오묘하오, 알 수 없소"하고 한 선교사가 탄식하였을 때, 교회는 진리와 정의의 파수꾼이란 사명보다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총독부가 인계하지 아니한 것은 고등정책이다. 한국인이 다 맡겠다고 하는 판국에 나서서 관권개입이니 빈축을 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산정현의 김동원도 숭실전문학교 인계에 나서고 있었다. 이 학교의 인계가 무엇을 의미하였는지 곧 나타났다. 그 인계조건에 접수자 '협약' 제1조가 분명히 밝힌 것이 있다.
인계 후의 학교경영은 종교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와 동일히 하기로 함.
그 시대에 일반학교와 같이한다는 뜻이 무엇인가. 신사참배가 아니던가. 폐교의 조건이 신사참배 반대였으니 계속의 조건은 그 참배라는 연속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 이 교육인계 문제가 한국교회의 역사적 인식이나 그 신앙의 고귀한 전수에서 차지했던 의미를 이렇게 밖에는 달리 계속 못했던가 하는 것, 차라리 왜 포기로 저항 못했던가 하는 것이 주기철의 뼈아픈 슬픔이었다. 그러나 주기철이 교인의 한 사람으로 정말 단장의 비애를 느꼈던 것은 시세에 따라가는 한국교회의 전향이요 정결치 못한 모습이었다. 그때 "기독신보"의 사설을 보자.
오늘날 우리 조선의 교회들이 얼마나 선교회의 하는 일을 알며, 얼마나 선교사의 하는 일들을 알고 있는지, 혹시 어느 일단을 아는데, 그것이 우리의 생각에 아니 진리에 부합되지 아니함을 발견할 때에 얼마나 충고하였으며 교정한 바 있는가. 거의가 예예 하여 왔을 뿐이다. 그것은 선교회는, 선교사는 으레 다 잘 하리라는 어리석은 미신에 근거한 것이다... 금번 우리 교회가 성장하여 오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비상시기를 당하여 우리 교회들은 어찌 선교사들이 하는 태도에 맹종할 것인가. 또는 수수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전자의 행동은 야만을 면할 수 없는 어리석은 되거니와 후자의 태도는 그야말로 은혜를 모르는 무성의한 야비의 행동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피눈물나는 선교, 그들의 희생, 병사, 고독으로 인한 자살, 정신이상, 병고, 구타, 이밖에 수없는 고생을 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지켜오고 가꾸어 왔으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마지막 용기로 서러운 폐교를 단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 방자한 말로 대하는 한국 일부 교회는 이제 정통사에서는 떠난, 친일협력 추행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정통신앙에 근거한 결단을 미신과 야비로 매도하고, 신사참배 가담에 교회의 성숙을 자랑하던 교회에 우리 민족사의 고귀한
정통계승은 눈 밖의 일이었을 뿐이다. 이 '계승'은 이제 주기철과 그에 따라 동행한, 손으로 헤일 만한 소수의 순교자들, 옥중 성도들에 따라 영광스럽게 수행될 수 있었다.
제5장 마침내 순교하기까지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되어지이다., 주기철, 1940년
1938년. 이 해는 한국의 민족사에서나 교회사에서 일제 말기의 가혹한 시련기에 접어드는 전환기가 된 해이다.
그해 2월에는 '조선 육군 특별지원병제'의 실시로 한국청년들이 전쟁수행의 자원으로 동원되기 시작하였고, 3월에는 '조선교육령'일 개정되면서 철저한 황민화 정책이 강요되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전폐된 것이 이때의 일이다.
이른바 일본어의 국어 상용이 강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4월에 가서는 국가총동원령이 실시되어 전시 총력체제로 모든 생활이 구석구석 노출되기도 하고, 신념과 재산과 제도 모두가 국가 주도의 목표에 공출되도록 강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험난한 통제체제 아래에서 그해 이른봄에 흥업구락부 사건이란 것이 터져, 기독교와 연결된 모든 민족사회운동의 명맥이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전해인 1937년 6월에 검거된 동우회 사건과 더불어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양대 계보가
사실상 거세된 것을 의미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는 한국교회들
그러나 문제는 희생과 해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후세에 영광과 청송의 기억으로 추앙되기도 한다. 이런 시련 속에서 전향하고 변절하는 데 역사의 아픔이 있었다.
가령 괴산에서는 그해 5월 기독교 황도선양연맹을 결성하여 충성을 황실에 바친다고 선언하였다. 보은의 교회에서는 자진 신사참배한 보도가 크게 이용되고 있었다. 그해 5월에는 그런 일들이 많았다. 청주의 기독교인들은 강요에 못이긴 것이었지만 이런 선언을 천하에 공개하였다.
우리도 황국신민의 본분을 자각하고 전투체제, 거국일치를 완성키 위하여 종래 고집하던 신사 불참배 및 신사 경내에서 시행하는 무운장구 기원 및 기타 보국제에 불참가한 불상사를 자각하고... 자에 인구단련하여 황도를 선양하며 국가를 위하여 황실을 위하여, 기원 보국하기로 결의함.
그런데 이 사실을 보도한 "매일신보"는 이런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는 글을 한 실었다. 곧 청주의 경찰서가 '군내에 있는 80여개소의 예배당을 문을 두드리고...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 결과' 이런 국가 행사 참가를 서약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그 경찰의 협박 속에서 신앙의 확신이 없었거나 가정과 주변의 불가피한 인연으로 희생을 당해야 했던 신앙인들의 비통은 너무나 컸다. 당시 뉴욕에서 발간되던 "인터내셔널 리뷰 오브 미션"이란 정기 간행물에 이러한 실정이 포착되고 이에 대한 동정적인 언급이 실렸다. 가중되는 압박과 박해로, 판단은 그렇지 않다손치더라도, 그 행위에서는 분명히 일반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 한국교회가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나 하는 것에 대한 동정적 자세가 엿보이지만, 역시 그 변절의 사실은 냉정하게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결국 외부의 영향과는 관계 없이 그가 한 일에 대해서 마지막 책임을 지는 도리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는 그 공공성과 조직성 때문에 행정적 조치의 대상으로 처리되기가 쉬웠고, 따라서 교회들과 교회관계 기관들의 전향이 크게 한 흐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38년 5월8일, 일제는 조선기독교연합회란 것을 전국적 조직의 인상을 주면서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 실상은 다만 경성시(서울)에 있는 일본기독자 및 한국기독자들 몇이 회동하여 결성한 유지들 간친회 정도의 어용집단에 불과하였다. 그때 일본인 중에도 몇몇 기독교인이 있었다. 니와라는 사람은 서울의 일본계 기독청년회에서 일하던 사람이고 추월치라는 사람은 일본기독교 경성교회의 목사였다. 이들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인 의식이 훨씬 앞섰던 인물들이다. 한국인을 위해서 식민지 지배의 아픔을 알고, 한국기독교에 자신을 일치시켰던 노리마쓰라든가 오다라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조직 배경이 없는 개인 전도자들로서 공교회와의 관계형성이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노리마쓰는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오다는 해방 이후가지 살아, 이름을 한국식으로 전영복이라 고쳐 가면서까지 우리와 신앙의식을 일치시키려 하였던 기독자였다.
'서양화' 벗고 '동양화'하자는 몰기독교적 인사들
어쨌든 일부 일본 및 한국기독자 일단은 그날 (5월8일) 서울 부민관에서 결단식을 갖고 기독교의 중심을 이미 매몰시킨 변절의 황도종교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국시를 체'하고 '황도시민으로 보국의 성'을 다한 맹서였다. 기독교의 교리나 윤리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한계 안에 머문 기독교는 이미 그 생명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가속화되는 전향의 기운은 그것을 촉진하는 힘에 의해서 추진된다. 하나는 물론 일제의 강력한 파쇼체제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전향지도군이다. 전향을 지도하는 몇몇 인사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홍병선이었다. 그의 일본에 대한 의식은 그가 황도기독교의 본체인 일본 조합교회와 관계를 가질 때부터 뚜렷이 나타나고 있어서 한때 동경에서 애국청년들에게 봉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동천의 서광과 같이 뛰어난 신흥제국의 발발한 운동은 대일본제국이었다.
문장 구성력이 좀 부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그의 일본 인식이 어떤 것인지는 이 한 문장 속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일본 제국에 대한 황홀한 선망이다. 그런 정신의 부패가 그의 기독교 인식에도 그대로 전염되고 있었다.
조선기독교는 황국신민으로 국체명징, 국민정신총동원, 총후후원, 정신작흥 제행사를 충성으로써 행하여야 할 것이오, 행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 동양인은 조상숭배하는 풍속은 미풍이요, 또 도덕의 토양이다. 혹 그 방법 수단에 폐해가 있으면 그 점만 개량할 것이다. 그러므로 황국신민으로서 국가의 원조를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재선 선교사 제씨는 반도의 사정을 재인식하여 50년 전 조선이 아닌 것을 각오하야, 그대들은 교도들의 시국에 대한 행사를 후원할지언정 무용한 태도를 가지지 말 것이오...
우리 기독교들은 국가가 있은 연후에 종교가 있고, 종교만으로는 생을 완전히 못할 것을 깨닫고 황국 비상시에 내버린 돌멩이가 되지 말고, 집 짓는데 모퉁이 주춧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몰민족과 몰기독교의 극치에 이른 모반의 글이었다. 기독교는 일제가 없는 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요, 선교사들은 그런 것을 '깨닫게 된'한국교회를 무시하지 말라는 어투였다. 기독교인이야말로 일제 국시에 가장 높은 충성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보았다면, 그것이 기독교란 이름으로 하필 동원할 것까지 없지 아니하였을까.
이런 일이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진행되고 있을 때, 서북교회의 중심지인 평양에서도 이런 변절의 행동군이 있었다. 오문환과 김채엽이 그 일단이었다. 이들은 평양기독교친목회라는 비교적 정직한 이름을 붙인 어용기관을 하나 만들어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민족교회로서의 역사를 조소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이 복음 진리의 수행에 앞선다고 강변하는 행동강령을 좇고 있었다.
그 신학적인 대변인이 채필근이었다. 그는 함경도 출신으로 캐나다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한국교회 유일의 제대 출신 목사였다. 그는 기독교의 소위 '조선화'나 '동양화'를 외치면서 요새 말로 토착화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서양 기독교는 식민 제국주의의 주구요, 그것은 기독교의 진수에서 벗어난 것이고, 자신이 강변하는 기독교가 참된 것이라며 교회의 사도적 전승이란 명분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글은 도처에 일제에 의해 대서특필되었다.
현하에 우리 동양인은 과거 몇십 년간을 너무 지나치게 서양문명에 도취하야 동양문화를 등한히 한 것을 회오하지 않으면 안될 때에 당하였다... 가장 신성한 교육과 선교도 오늘에 와서는 서양인 자기네 명예와 이익을 안중에 두는 것이 얼마가지는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직접 간접, 유형 무형의 압박과 오만이 우리에게 쏟아져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숭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기독교는 동양에서 진정한 성공을 하려면 동양정신에 합치하도록 국민화한 연후에야 위대한 발전을 볼 것이다.
그의 어려운 처지가 이해되기도 한다. 제대 출신이라면 침묵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강요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딱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순교의
각오가 아니면 남들처럼 시골에가 농사를 지으면서 기도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이 그에게 허락될 리가 없었다. 난세에는 그러니까 한
길밖에 택할 길이 없다. 순교냐 전향이냐.
이 이른바 토착화작업 조선화의 발상이 결국 동양화를 거쳐 일본화로 가다가
황민화에까지 가서 기독교의 중추를 분해시키고, 기독교를 서양화의 표본으로
매도하여 반국가로 유도하는 논리의 간악성을 그 자신이 벌려 놓았을 때,
한국교회의 질고가 얼마나 컸겠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양심 때문에 괴로워한
사람들도 결구 이 나라 일제 말기 수난사의 피해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의식'으로서의 신사참배 강요
1938년 일제가 한국 공교회에 대하여 그 국가적 충성을 결정적으로 요구하였던 때이다. 그해 6월에 전북노회가 정기노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을 한 것을 필두로 그 내친 걸음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노회의 공적 기록에는 이의가 그대로 반영되었을 리가 없고, 다만 참배 동의의 형식만이 전체 분위기인 양 도도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교역자 150여명이 참석하였던 이 전북노회는 김세열 노회장의 사회로 개회 벽두에 이를 가결하고, 이어서 모두 일어나 줄을 지어 전주신사에 가서 손뼉을 치며 참배, 머리를 최경례로 숙였다. 그러고나서 총회에 낸 노회보고서에 '난국을 극복하고 신앙의 단련을 믿으며 무사히 지낸 것을 감사'하였다. 무사히 지냈다는 말에 역사의식의 무디어진 골이 보이지만 그런 글을 안써도 되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을 준다.
그런데 노회 중에서 정식으로 총회에 신사참배 결의사실을 보고 한 곳을 전남노회뿐이었다. 금춘 정기노회에서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참배는 국민정신통일을 위한 국가의식임을 인식하고, 본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인 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
그때 노회장은 박연세였다. 하지만 그는 이 가결이 경찰의 지시에 의하였다는 대담한 표현을 불사하여, 오히려 용기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당시의 어려웠던 시세로서는 써놓기 힘든 공개적 자세의 담대성이었다.그러나 전남노회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가 당국의 지시에 동조할 수 있는 묘한 틈이 여기 보였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명분이다. 신사참배는 마치 국가를 부르듯, 국기계양 때에 존경을 표하듯, 하나의 국민의례라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는 한국교회를 분해시킬 수 있는 길이 한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사 국민의례설이다. 그래서 일제는 일본본토의 일본 기독교대회 의장 도미타를 한국기독교의 중심지인 평양에 보낸 것이다. 한국교회 중심지에서 결전을 한다는 심산이었다. 한데 그때는 일단 구속되었다. 주기철이 석방되어 앞날을 준비하려고, 이유택, 김화식 목사들과 함께 입산, 금식기도를 하고 막 돌아왔을 때였다.
도미타는 평야에 1938년 6월30일, 더운 날 도착하였다. 그리고 평양 장대현교회의 목사 김영준의 환영을 받았다. 김목사는 프린스톤 신학 출신으로 3.1독립운동 때에는 그가 시무하던 비석리교회가 전소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5시에는 교외 파취각에서 평양, 평서, 황해 안주네 노회 주최의 환영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는 100여명의 목사가 참석하여 이 일제의 대사를 맞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이 도미타가 주기철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들어온 것이다. 주기철과 맞대면하겠다는 것이었다. 대결은 일종의 간담회 형식으로 열렸으나 주기철이 직접 논쟁자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좌장은 이승길목사로 한때 독립운동의 거장으로 국외를 편력하였나 이 무렵에는 이미 친일로 기울던 목사였다. 통역은 일본 내각에까지 손이 닿았다던 오문환이었다. 주기철은 금식기도에서 갓 돌아와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던 때라 창백한 얼굴로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한 일본 기자의 주기철 평에는 주목사가 '전일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석방된 형편'이라 기록에 남기 고 있다. 이 글에 묘한 냉소의 기미가 담겨져 있다. 주목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당교회 목사'라 썼기 때문이다. 그 교회 담임목사의 성함을 내객이 모르고 찾아왔을 리가 없다. 그것을 짐짓 무시하고 '유치장' '석방' '형편'등의 표현만 쓴 것은 주기철을 은연중에 무시할 뿐 아니라 그를 죄인 취급한 것이 확실하다. 이 '형편'이란 글은 그 문맥에서 '꼴'이라 해도 될 표현이다.
이 자리에서 도미타는 신사가 종교가 아니라고 국가에서 설명하였음에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경멸 섞인 어조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특정한 종교에 참배하라는 것이 아닌 이상 한국교회의 반응은 몰지각 아니면 과잉반응이라고 냉소한 것이다.
좌중이 열기에 차고 분노에 차기 시작한 것을 동반한 기자 히다카가 눈치챘다. 그의 반응은 이러했다.
가장 곤혹을 당한 것은 내지(일본)에 있어서 신도와 기독교와를 묶어선 종교와 일치시킨 저작물들이 이 국어(일본어)를 해독하는 목사들에 의해서 습득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자는 그것은 적어도 일본 기독교회의 신학자가 결코 숭인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 답변하였다. 국어(일본어)는 우리들에게 영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는 없어도 읽기에는 불편이 없는 것 같아서, 주목사와 같은 자는 통역을 중개로 지긋지긋하게 논구해 왔다.
일본교회가 한국교회를 얼마나 경멸하여 왔는가 하는 사실이 여기에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한국 목사들이 일본에서 간행되는 종교서적들을 못 읽거나 안 읽었다고 생각한 흔적이 뚜렷하다. 따라서 한국교회에 대한 안목이 얼마나 자만으로 폐쇄되어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도미타는 당황하여 격한 어조로 돌변하였다.
제군의 순교정신은 훌륭하다. 그러나 언제 우리 일본정부가 기독교를 버리고 신도에 개종하라고 윽박지르던가. 그 실례를 보이라. 국가는 구가의 제사를 국민으로서의 제군에 요구한 데 불과하다. 경관이 개인의 종교사상을 가지고 제군을 윽박질렀다고 하지만 국가는 그런 일을 승인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금압되었을 때에만 순교하란 말이다. 명치대제는 만대에 미칠 대어심을 가지고 세계에 유례없는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을 만흘히 차단하는 것은 모독에 속한다. 민간학자는 제 마음대로 글을 쓴다. 거기에 일일이 마음을 쓰다가는 제군의 방향을 잘못 잡기가 쉽다.
도미타는 흥분하였고, 더구나 주기철의 조용하고도 차분한 논리에 당황하였다.
주기철은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자들의 저작을 가지고 논란하자고 하였다. 주기철의 방대한 독서량이 이런 때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기독교측의 저서들을 지명하면서 그 소론을 인용하여 재삼재사 논박하여 왔다'는 것이 수행한 기자의 기록이다.
주기철의 신앙에 감격과 찬송, 그리고 결단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처럼 방대한 저서들을 섭렵한 신학적 무장이 되어 있었다. 그의 순교가 남달랐던 점이 따로 있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그의 순교가 무서운 인내와 함께 명쾌한 신학적 판단에 의해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