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정거사 북방여행기-춘원(春園)의 소설,『유정』의 무대, 바이칼 1
정말로 떠나기 싫은 알혼섬을 뒤로 하고 뒤돌아보면서 몇 시간을 달려 다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도미토리에 배낭만 두고 길을 나섰다. 길을 떠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일박을 각오하면서까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값싼 도미토리를 이용해야하는 배낭족들에겐 “일찍 떠나서 일찍 잠자리를 확보한다” 는 것이 ‘불문율 제1조’이지만, 그걸 어기면서까지 숙박비를 미리 계산한 숙소를 오후 늦게 떠난 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물론 알혼섬이 이번 북방기행의 최종 목적지이긴 해도 이대로 바이칼을 떠나긴 너무나 아쉽기도 하고 더구나 이번 여행의 또 다른 목적을 아직도 ‘마음껏’ 이루지 못한 찜찜한 기분도 작용했다. 바로 자작나무 원시림을 마음껏 걸어보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시베리아에 들어와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매일 자작나무 숲을 진물나게 바라보긴 했지만, 차에서 내려 내 두발로 그 원시림을 마음껏 밟아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하루를 더 투자하기로 한 것이었다.
자작나무는 북방계 나무라 우리나라에서는 자생림이 흔치 않으나 자작나무의 줄기는 나무 중에는 드문, 하얀 빛깔이라 마치 달 아래 여인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단아한 자태의 나무이다. 또한 가을철에는 잎사귀가 온통 노란빛으로 변하기에 특히 오후 늦게 햇살다발이 뚫고 들어오는 자작나무 숲을 걸어보면 환상적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 나올 정도로 이색적이다. 더구나 자작나무에서는 건강에 좋은 특유의 향기가 품어져 나오기에 그래서 이래저래 자작나무는 적지 않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중요경유지이며 바이칼의 입구인, 이르쿠츠크 역사에 내린 필자




▼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부랴트공화국의 수도인 우란우데에서 이르쿠츠크 사이, 바이칼호수의 남단을 끼고 거의 반나절이나 달린다.



자작나무는 학명으로는 베툴라(Betula) 또는 자뽀니까(japonica라고 부른다지만, 어떤 시인은 비르체스(Birches)라고 즐겨 불렀다. 왜 여기서 생뚱맞게 왠 시인이 튀어나오느냐고 반문이 나올 법도 하지만, ‘자작나무’하면 이 시인이 연상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노란 단풍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죠.”로 시작되는 <가지 않은 길>이란 유명한 시의 저자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이다. 나는 가끔은 그와 마르셀 프루스트와 헷갈릴 적도 있었지만, 여기서 후자는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사랑이요, 또 하나는 여행이다.” 라는 명구를 나에게 각인시킨 작가로 엄연히 구별되는 작가이다.
물론 자작나무 이야기에서의 주인공은 물론 로버트 프로스트이다. 그는 ‘두 갈레길’이란 간단명료한 구절로 젊은 날의 나를 사로잡았던 작가였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 <자작나무>라는 것도 있다기에 이번 길 떠나기 전에 부리나케 검색을 해 보았다. 역시 프로스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서는 나의 눈길을 자꾸 먼 하늘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 시베리아의 원시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 로버트 프로스트(1913년작)
(중략) 지구는 사랑하기 알맞은 곳,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가 타듯 살고 싶다.
천국을 향해, 설백의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에 올라 나무가 견디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 끝을 늘어뜨려 다시 땅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다 좋은 일이다.
학명이야 어찌되었던 자작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백화목(白樺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나무가 탈 때 ‘자작자작’ 하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 소리를 따라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도대체 그 사실을 어찌 알고 “자작나무 타듯 살고 싶다” 라고 했을까?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에도 인제군 초입 원대리에 인공조림 된 자작나무 숲길이 있어서 웰빙걷기 열풍에 빠진 마니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거리상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나도 자주 찾았던 곳이지만, 수령이나 전체 규모면에서나 뭔가 아쉬움이 있었던 것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마다 언젠가 시베리아의 원시 자작나무 숲을 원 없이 걸어보는 바람을 품게 되었다.
시쳇말로 내 ‘버켓 리스트(Bucket list)’에 ‘원시자작나무 숲길걷기’가 추가된 것이다. 누군들 평생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이 없을 것이며 누군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여 나도 언제부터인가 그 리스트를 새로 작성하고 정정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니까 이번 북방여행길은 그 리스트 중에 무려 3개를 단칼에 성취하게 되는 셈이다. 그 3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타기, 바이칼 알혼섬에서 삼매에 빠지기, 그리고 자작나무 숲길걷기였다.
그래서 어렵게 예약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표를 연기하고 자작나무 숲을 찾아 나선 것이다. 물론 자작나무는 시베리아 수천, 수만리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타이거 숲의 주인공이지만, 이르쿠츠크에서 제일 가까운 바이칼 호수가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리스트비앙카(Listviangka)로 가는 길은 특히 ‘바이칼스카야’란 이름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안내책자의 글을 본 순간 즉흥적으로 결정한 일이지만….
▼ 바이칼호숫가의 아름다운 항구 리스트비앙카 항구. 예부터 ‘오물’이란 명물 물고기를 잡는 어항으로 유명하다가, 요즘은 관광도시로 탈 바꿈하고 있다.

▼ 바이칼스키이 공원으로 는 이정표


첫댓글 요즘 시베리아횡단열차와 바이칼호수 TV에서 선전 많이
하던데요ᆞ역시 앞서가시는
쎔님 부럽습니다~
자작나무 숲 사진 보고싶네요ᆞ
근데 애써 붙여논 멋진 자작나무 숲 사진이 다 날라가버렸으니~~ 우씨~
딴 방법을 찾아보지요
@다정/김규현 사진이 붙었네요ᆞ아이고 수고
많으셨어요ᆞ
맛진 사진이 몇장 있는데여
초판본 소설 유정
아이고 귀한 자료~~
제가 이 자료를 좀 써도 되겠는지요?
아직은 유정이 없군
덕분에 앉아서 즐감합니다~감사합니다 ^^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