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前 말갈농부가 사량도에 기대 살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농가가 산에 헌 나무를 주워다가 아궁이에 불때 밥짓고 방을 데웠읍니다.
산이 없는 농가는 없는 만큼 힘든 겨울을 보내야 했지요.
당시 형편이 형편이 나은 농가는 땔나무대신 석유를 태웠지요. 마치 기름보일러가 진보의 상징처럼 느꼈던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연료로써의 땔나무는 후진성을 나타내는 표징이었지요.
이제는 세월이 진보하여 거의 모든 농가가 석유를 태우고 있읍니다.
6.25 전쟁이 끝난 부산의 연료 사정은 더욱더 심각하였지요.
국민학교 들어가기 前 말갈농부가 살았던 부산 서대신동 새벽 산골동네에는 땔나무시장도 열려 "장작사소, 장작!"하는 나무장사꾼의 목청을 듣을 수 있었읍니다. 어린 말갈인은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나무장사의 흉내를 내어 "장작사소, 장작!"하면서 동네를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진보는 현재라고하는 기준을 필요로 합니다. 간혹 지금의 부자 농가는 추억의 땔나무를 소환하여 再採用(재채용)하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이제는 땔나무는 많이 있지만 나무하러갈 나무꾼이 없읍니다.
나무할 필요없이 집안에서 스위치만 눌리면 따신 물을 이용할 수 있는 석유가 내게 있다면 마지막 남은 인생을 쪼끔더 버틸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은과연 罪惡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