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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아비는 마귀니라
요 8:39-47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1)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 8:39 [너희의 아비는 악마다] 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너희 아버지였다면 너희는 그의 믿음을 본받았을 것이다.
요 :41-47 / 그런데 너희는 그와 반대로 내가 아버지께 들은 진리를 말하였다 해서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런 짓을 한 적이 없다. 41) 너희는 지금 너희의 아비가 행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서자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4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고 그분이 보내셔서 온 것이다. 43) 그런데도 너희가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방해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므로 악마가 하는 악한 일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며 진리를 미워한다. 그 속에 진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45) 그러므로 내가 진리를 말해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46)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에게 진리를 가르쳐 온 나를 믿지 않느냐? 47) 누구든지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건하게 듣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일을 하지 않는 마귀의 자녀라고 반박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39-40) 예수께서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말씀하시는데,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육신적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족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하지만 마음으로는 사단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요 13:2),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입으로는 아브라함을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아브라함과 정반대되는 마귀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손님 대접하기를 힘썼다면 하나님의 아들 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창 18:1-8).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라(41-43)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된 것을 부인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요 8:44)라 할 수 있는 귀신의 왕 마귀(마 9:34)의 욕심을 본받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난 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또 그를 사랑하는 자(요일 5: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완악함과 미련함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44-47) ‘너희 아비 마귀’는 마귀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유대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마귀의 자녀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 거짓말 장이요”라는 것은 마귀의 소행으로, 마귀의 자녀된 죄인들은 마귀를 따라서 같은 일을 저지르는데 곧 살인과 거짓말입니다(요일 3:12, 15). 이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법을 어기거나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통으로 여기며, 거짓말이나 악을 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귀의 종으로서 마음이 강퍅하여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고 교회를 핍박하며 믿음의 사람들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입니다.
적용: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살아왔지만, 그들의 삶은 마귀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어 구원받은 것은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에 따라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실한 삶을 살지 못하였을 때 찾아오는 책망이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돌이켜야하며 예수님의 책망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과 감사로 받아드릴 은혜입니다.
< 설 교 >
참 아브라함의 자손
지난 주일에 생각한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 주리라”고 말씀하셨더니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진리를 알아야 자유롭게 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이냐”고 유대인들이 따지는 장면에서부터 오늘 말씀이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들은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이 옛날 아브라함과는 영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12:2-3) 라고 약속해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 하나만 믿고 말씀만 따른 사람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그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일수가 있느냐고 주님이 지적하십니다.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결정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누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사람입니까? 누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성경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정통적인 교회에 오래 출석한 사람일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진심으로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판단과 힘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만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께 복을 받을 참 신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족보책으로 증명하면서 그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은 인정하셨습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37)
그러나 예수님께서 문제를 삼으신 것은 그들의 혈통이 아니라, 정신이고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특별한 핏줄을 타고 나서가 아니라, 마른 땅이 비를 흡수하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명령을 조금도 의심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순종하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고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외우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말씀이 그들 마음속에 남아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아스팔트로 덧씌운 도로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한 방울도 스며들지 않고 모두 흘러가버려서 땅을 파보면 먼지만 나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진리를 가르쳐 주셔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손’ 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자기들의 혈통적, 혹은 역사적 정통성만 믿고 실제로는 믿음 없이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정통교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 네 생활 속에는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흔적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지금 네가 사는 모습을 봐라. 네가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 불신자와 다른 것이 뭐냐, 그렇게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겠다고 기대하고 있느냐.”라고 오늘 우리에게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의 신앙은 보수적이고 정통적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 한마디 한 마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보살피고 양육하기 위해서 세우신 영적 가정이라고 믿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복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초들은 너무나 소중한 정통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생활은 불신자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살다가 만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 말씀대로 했다, 믿음으로 했다는 것이 전혀 안 보입니다. 불신자가 문제를 처리하듯이, 걱정하고 고민하다가 돈으로 문제를 무마하려 하거나, 사람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뜻대로 잘 안되면 분노하고 보복하려 하고, 낙심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했다거나 믿음으로 문제를 푼 흔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고도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듣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많은 말씀을 들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을 보니까 말씀을 조금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의 교적부는 정통적인 교회인 한가람교회 교인으로 등록되어 있고, 집사이거나 권사이거나 장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출석부에도 결석이 별로 없어서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는 교인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생활은 말씀과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우리는 교회에 등록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요즘은 등록하지 않고 출석만 하려는 사람들도 많은 시대입니다. “교회가 나의 사생활은 간섭하지 말아다오. 내버려둬도 나는 내 판단에 따라 교회에 출석할 것이고 내가 필요한 영의 양식은 내 스스로 먹으러 나가고 헌금도 알아서 드릴테니까 간섭할 생각은 말아다오.”라는 뜻으로 강남의 유명 교회에는 등록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많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교회는 거의 모두가 등록하고 목사의 지도와 권면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등록을 한다는 것은 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니까 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등록이 대수입니까? 아무리 훌륭한 교회에 등록한다고 해도 등록한 것만으로는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구원이나 축복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 말씀대로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자녀이고, 약속하신 축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 (37)
너희 마음속에 내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아예 없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이해되지도 않고 간직되지도 않으며, 반감만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라디오는 주파수를 맞추는 대로 KBS도 들을 수 있고 MBC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주파수를 주님의 말씀에 맞추면, 주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오고 마음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그 사상이 내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안에 있던 더럽고 추잡한 생각들을 몰아냅니다. 그런 상황을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주파수를 세상 쪽으로 맞추어 놓으면, 세상의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것들이 마음 안에 들어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욕과 욕심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앉아있어도, 말씀이 내 마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 앞에서 밀어내 버립니다. 내 마음의 귀를 어느 쪽으로 돌려놓느냐, 마음의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미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생각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것이 이미 유대인들의 마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들어봐야 그들의 마음을 혼란케 할 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마음은 이미 세상 쪽에 서 있는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동안 안정되어 있는 마음에 새로운 갈등이 생겼습니다. 돈만 생각하고 출세만 생각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처럼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불의한 방법을 생각 없이 사용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주님의 말씀을 한번 듣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때마다 갈등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 소리를 듣지 않는 방법은 예수를 죽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저 사람을 누가 죽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에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37) 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왜 주님의 말씀이 항상 머물러 있지 못하고 금방 사라져버리고 말까요? 우리 마음이 이미 세상에 빼앗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고방식, 습관, 가치관이 이미 내 마음을 점령하고 앉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담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 세상의 통계와 경험은 믿을 만 하다고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뭔가 불분명하고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이 가득 찬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귀로는 말씀을 듣지만 내 안에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사상이 주님의 말씀을 밀어내기 때문에, 말씀이 내 안에 들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을 살펴봅니다. 누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누가 거부하는지, 눈에 보입니다. 누가 믿음이 자라고 누가 자라지 않는지도 대충은 보입니다. 한번은 제가 설교를 하는데, 한 사람이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말씀에 설복당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말씀을 몰아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믿음이 자랄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자신을 바꾸어 놓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말씀대로 살려면 또 다른 모험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까?
39-40절을 보면 주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 보신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그것 참 이상하다. 내가 만난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이 아니던데, 너희가 그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가 있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사실일까요? 56절 이하에 보면, 그것이 사실입니다.
56절을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하셨고, 57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반문하자, 58절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창세기 19장과 20장을 보면, 아들 하나님은 두 천사와 함께 지나가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습니다. 한번은 일 년 후에는 아브라함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하러 가셨고, 한번은 소돔과 그 주변의 사람들의 죄악이 넘쳐서 멸망시킨다는 사실을 알려주러 가셨습니다.
성자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방문하시던 때는 정오였는데, 중동지방에서 정오쯤은 모든 사람이 자는 시간입니다. 특히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활동하기 때문에 이 시간은 손끝하나 움직이기도 싫은 지치고 피곤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천사의 모습도 아니고 지친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가셨는데도, 달려 나와서 공손하게 자기 집으로 모시고 들어가서, 마치 종이 주인을 대우하듯이 그렇게 주님 일행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는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25년이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지만 아직도 주시지 않은 아들을 내년에는 주신다고 하는데도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번창하고 있는 소돔과 그 주위의 성들이 멸망한다고 하는 말씀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에 사는 조카를 구원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간청했는지 모릅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주님께서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셔도 달려 나가서 맞을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대로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저런 생각도 해 보기는 하였지만 아무것도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만 하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이 열려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을 담으려고 마음 안에 자리를 비워놓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유익하고 자기의 판단에 그럴 것 같은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어렵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후손이라는 사람들은 혈통적으로는 자기들이 틀림없이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자랑하면서도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마음에 철문을 달았는지, 마음속에 다른 생각들과 판단들로 이미 꽉 채워놓고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들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예 듣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좌우로 내젓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아브라함 같은 겸손함과 사모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아브라함의 자손만 누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혈통으로 이루어진 아브라함의 후손은 별것도 아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롬4: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은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눅 3:8에 보면,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내세우는 혈통을 하나님은 중시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갈3:29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하셨고, 갈3:7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사실은 신앙적인 후손이 받게 되어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막3:33-35 예수님께서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당신의 가족으로 삼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1:12에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확인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 있어서, 주님이 언제 어떤 말씀을 하셔도 그대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주님께서 이미 여러 번 나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어도 보잘것없는 설교자를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들은 척 하지도 않았을 수 있고, 내가 듣기 원하는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들었다고 해도 말씀을 마음의 문간에서 쫓아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순종하려면 내 생활을 바꾸어야하고 가치관도 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지는 않는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방법으로 찾아가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다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생각을 담으려고 마음을 비워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라도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면 대환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를 살리는 것이요, 자기를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덥고 가장 피곤한 시간에 주님이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져오신 아들을 낳으리라는 복된 소식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누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누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동행하시며, 나의 모든 삶을 책임지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만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 주변의 환경과 되어가는 상황을 보면 약속과는 정 반대로 가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한다고 하셨는데, 이끄시는 방향을 보니 홍해가 가로막아서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상황만 보면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진짜라고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전혀 낯선 땅으로 이사했습니다. 익숙하던 고향, 친척, 친구, 삶의 기반, 직장 다 버리고 떠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가능성이나 보이는 징조를 보고 간 것이 아니라, 단지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한번 말씀하셨으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가 유대인은 아니지만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영원한 축복을 상속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한가람 성도 모두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물려받아서 진짜 하나님의 자녀로 삽시다. 날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살고, 약속하신 축복을 오늘과 영원히 누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이재철 목사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거나 혹은 마귀에게 쓰임받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마귀에게 쓰임받다가 하나님께서 건지셔서 하나님께 쓰임받게 됩니다.
베드로도 마귀에게 순간순간 쓰임 받았습니다.
◈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마귀가 우리를 속이는 전략을 알면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
마귀의 속이는 전략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① 마귀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든 다음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 다음에 소중하게 쓰십니다.
41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마귀가 너희의 영적 아비다. 그래서 나를 죽이려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전자전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안 좋은 점을 닮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며 “너는 음란한 데서 나오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와의 범죄함이 나옵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하였습니다.
이처럼 교만하게 만든 다음에 넘어뜨립니다.
교만하면 가까운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5-8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 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내가 교만한 사람인지 겸손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내 옆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당신 왜 이렇게 교만해졌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울분이 나면 내 교만함이 극치를 달리는 것입니다.
반면 “어머!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주 겸손한 사람입니다.
▶
㉡ 내 눈에 교만한 사람이 많이 보이면 교만한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이 많이 보이면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더 교만한 사람입니다.
② 마귀는 우리 속에 미워하는 마음을 심어준 후에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주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44절 말씀에 보면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살인은 미워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구약의 사울왕은 처음에 겸손했다가 왕이 된 후에 겸손함이 사라졌습니다.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려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령이 그를 사로잡아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사울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겸손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미움과 증오를 잘 다듬어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든 다음에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사도요한도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생이 다할때까지 사용하셨습니다.
③ 마귀는 우리를 거짓으로 속이는 자로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속이게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자를 진실되게 만들어서 사용하십니다.
44절 말씀에 보면 마귀는 속이는 자로 만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룟유다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속이는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은 30에 예수님을 팔고 결국은 자살했습니다.
요한복음 13:2절에 보면 마귀가 가룟유다에게 예수 팔려는 생각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계속 거짓으로 속였습니다.
요한복음 13:27절에 보면 “마귀가 가룟유다 속에 들어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할 수 있는,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 사람은 속였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은 눈물로 하나님께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정하게 하신 후에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교만, 미움, 거짓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훈련과 연단이 필요합니다.
★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어떤 일을 보아도 좋은 편으로 생각하십시오.
어떤 사람, 어떤 일이든지 양면성이 있습니다.
이 양면 중 내가 좋은 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② 내가 어느 부분에서 미운 마음이 들 때는 그 당사자를 만나서 직접 얘기하십시오.
이러면 마귀가 우리를 속이지 못합니다.
③ 직접 만나서 얘기한 것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속이는 것 같은 마음이 있을 때에도 믿으십시오.
그 이후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변화 받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충성스런 종으로 믿어주시고 영혼을 주십니다.
누구의 자녀인가?
요 8:42-45 / 이규왕 목사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인류의 조상 아담을 창조하실 때처럼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사람이 아니라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 얼굴 모습, 말씨, 식성, 걸음걸이, 음성 심지어 성격까지도 그 부모를 빼어 닮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창조의 신비가 오묘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람은 육신의 모습만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모습을 닮는 것만이 아니라 그 영혼의 모습도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인간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잘 찾아보기 어려운 대신 오히려 마귀를 닮은 모습만 발견되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질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
예수께서 태어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생각되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데도 정작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듣지 않고 사사건건 반대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를 닮은 자녀임을 유대인 자신들이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폭탄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요 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여기서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도 그 영혼 속에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새조차 없는 완악한 상태가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하나님 말씀인 성경 여러 곳에 말씀하였습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과장이 아니라 참된 사실임을 그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여러 번 입증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버지의 말씀이요 참된 진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 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요 8:42)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 8:49)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여기서 “내 아버지에게서” 라는 말은 아비의 곁에, 가까이에서, 아버지와 함께 라는 매우 친근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처럼 누구에게서 배우거나 추상적으로 생각하여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받은 말씀임을 뜻하는 것이며, 그와 같은 분은 지금까지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였으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볼 때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비해 초라하게 보이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무런 권세를 가지지 아니하셨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귀신이 벌벌 떠는 권세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의 형제 자매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다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심에도 불구하고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셨습니까?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누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며,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을 듣는데서 머물지 않고 예수님처럼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과연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오늘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인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2. 마귀가 아버지인 사람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통해 보고, 들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증거 하실 때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귀기울여 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많이 배척하고, 그 말씀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가장 심하게 배척한 사람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요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요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물론 그들은 예수께서도 인정하신 것처럼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예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도 아브라함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요 8: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자처하는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직 메시아가 오시지도 않았는데도 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대망하며 살았던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되 독자 이삭까지 제물로 바치려고 할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이 믿고 기다리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불신하고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보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랑하였어야만 합니다.
(요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까?
물론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지만 실상 영적으로는 그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정반대로 마귀에게서 들은 마귀의 말이라고까지 예수님이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요 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 사랑을 구현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죽는 것이 마땅한 죄인들을 어떻게 하든지 살리시려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도 똑같은 죄인이면서 마치 의인인체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변조시켜 그물을 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 약점을 이용하여 등을 치고 자기 배를 불리는 자들로 영락없이 마귀를 닮았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입술로 신앙고백도 하고, 예배도 드리며, 성경을 가르치고, 입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며,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사랑과 용서대신 남의 약점과 허물을 찾아 정죄하고, 죽이려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면 예수님은 과연 그러한 사람을 누구의 자녀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3. 예수님의 판단 기준
예수님을 정죄하는 유대인들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지 못하고 마귀의 자녀가 되어 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만심을 악한 마귀가 이용하여 그들의 영적인 눈과 귀를 멀게 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제일 먼저 예수님을 영접했어야 할 좋은 조건 속에서 누구보다 제일 악하게 예수님을 배척하는 마귀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 사는 것, 많이 배운 것, 높은 지위에 있는 것, 잘 믿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거나 자만하게되면 그 사람은 즉시 마귀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판단 기준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의 겸손입니다. 마치 익은 곡식처럼 높아지고, 많아질 수 록 겸손히 머리를 숙이는 사람을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마치 가출하여 조폭의 졸개가 된 탕자처럼 마귀의 자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믿거나, 겸손해 지거나, 마음 중심으로 남을 사랑하며,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인간 내면에는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 속에 시기, 질투, 욕심, 미움의 씨가 가득한 채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식을 가지고, 물질을 가지고, 권세를 가진다는 것은 마치 불씨가 남아있는 화로에 휘발유를 붓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이 아니라 그러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높고, 많고, 강하신 분이지만 그러한 죄인을 멸시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죄임을 가르쳐 주셨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겸손하고 온유한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 말씀에 비취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 새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듣는다고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행위로 구원함을 받는 것이 아니지만 들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한다면 그 들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보다 잘 믿을 수 있는 좋은 조건 속에서도 유대인들처럼 듣지 않으려고 하고,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믿지 않으려고 하고, 무시하려고 하는 모습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중증환자의 공통된 현상입니다.
(요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요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 8: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결국 하나님을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에서 태어난 마귀의 자식의 차이는 무엇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까? 그 행실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에서 그 행위도 결정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신앙고백 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 그것은 자기 확신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누가 마귀의 자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이라면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지켜서 아버지를 닮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도 마귀의 자녀인 가룟 유다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돌이켜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마귀에게도 국경과 담장과 대문이 필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나라, 누구네 집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 자녀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1) 자신의 행위가 얼마만큼 선한가? 선하지 못한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내가 선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2)아무리 많은 지식과 물질과 신앙 연조를 가지고 있어도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4)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려야 할 만큰 허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5)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음을 깨닫고, 나의 전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결국 내가 잘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임을 깨닫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공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 속한 자는
요 8:42-59 / 신성종 목사
제가 이민목회를 만 6년간 했습니다. 이민 교회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소속감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소속감이 전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무리 은혜가 풍성해도 다 남의 일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다 그림의 떡이 됩니다.
게다가 소속감이 없기 때문에 교회 옮기는 것을 마치 셋집을 옮기듯이, 이사 가듯이 쉽게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항상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교인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 교회는 좀 나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현상이 없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무관심 때문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떠돌이 사람들은 그 영혼이 고향이 없는 것과 같아서 마음의 뿌리가 전혀 내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떠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들까지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고 결국 문제아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이란 제목으로 바른 소속감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세 가지 종류의 교인들
첫째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요 둘째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요, 셋째는 사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사탄에게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교회적으로 분류해보면
(1)내 교회라는 소속감을 가지고 섬기며 참여하는 이상적인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2)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식의 구경꾼 같은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은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빨리 하나님께 속해야 안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가 밭에 뿌리 운 씨앗처럼 새들이 날아와서 믿음의 씨, 복음의 씨를 먹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3)얼마동안은 내 교회처럼 열심히 하다가 기분이 상하면 떠나는 잠정적인 교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사이에 속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성장하지 않아서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입만 무성한 나무로 끝나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빨리 뿌리를 내려서 마음의 고향을 가져야 합니다.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불행한 것은 대전에는 둘째와 셋째 유형의 교인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이요 성공이요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2. 왜 우리는 영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가?
(1)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데]서 소속감을 잃고 있습니다.
(2)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적성이 맞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주어진 직업을 억지로 가지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애착도 없고, 소속감도 없습니다.
(3)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기의 건물이 없고, 임시로 빌려 쓰고 있고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까지도 마음을 한 곳에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4) 교인들이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교회중심의 생활이 아니라 개인중심으로 살면서 교회를 단순히 필요에 의해서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깊이 교회에 참여하면 손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작은 희생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소속감 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6)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소외감을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속감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 속한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1)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교회는 성도들 간의 교제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러나 첫째는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는 관심 없고, 그저 모여서 교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체험도 중요하고, 교제도 중요하고, 봉사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을 보면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안가서 시험에 들고 맙니다. 말씀공부에 정성을 쏟는 분들치고 믿음이 자라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롬10:17절에서 말씀했습니다.“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2)[열매 맺는 생활]을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그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맺어도 얼마 안가서 금방 말라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하나님께 속해야, 줄기 되신 주님께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때 찾아오는 기쁨은 농부들이 맞보는 기쁨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셋집으로 살고 있었던 집에 작은 복숭아나무가 하나있습니다. 조금 적과를 해주었는데도 열매를 아주 잘, 그리고 많이 맺어서 오는 분들에게 조금씩 따서 줄 수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모릅니다.
(3)섬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지체요 우리는 바로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 교인들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손이요 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섬길 때입니다. 물론 사랑이 없는 섬김은 종노릇 하듯이 괴롭고 힘들고 고역이 되지만 그러나 사랑이 있는 섬김은 바로 행복입니다.
남편이 사랑으로 일터에서 일할 때에는 피곤을 모릅니다.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서 일할 때에는 피곤하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행복합니다. 문제는 소속감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소속감,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믿음이 있어야 교회 일에 기쁨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보면 목회하기에 얼마나 힘 드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제 일생에 가장 행복한 때가 바로 지금의 생활입니다.
물론 고달픈 것도 있고 괴로운 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를 인정해주고, 성도들과 저 사이에 같은 소속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소속감을 통한 기쁨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4)하늘나라의 상급이 있습니다.
경에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 대접해도 상급을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 주의 일을 했을 때 어떻게 상급이 없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인정받고 보수를 받고 상급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입니다. 이 상급을 다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려면?
세상에서는 소속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꼭 같은 색상의 운동복을 입힌다든지 유니폼을 입혀서 그 회사의 소속감을 갖게 합니다. 교회에서도 청소년들의 훈련에서는 유니폼이 갖는 효과는 대단히 큽니다. 또 대학에 들어가면 신입생들을 위한 MT를 가져서 동아리 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비결은 전혀 다릅니다. 이 시간에는 그 비결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무엇보다도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속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영적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지난 죄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의 왕으로 섬겨야 합니다.
(2)다음에는 믿음이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grow란 말속에 다 있습니다. 먼저 gospel(복음), regular prayer(정규적인 기도생활), obedience(말씀에 순종), witness(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생활)입니다. 복음은 영적인 음식과 같아서 우리들에게 성장케 하는 영양가가 됩니다.
다음에는 영적인 호흡인 정규적인 기도생활입니다. 호흡은 가만히 있을 때보다 일할 때 바쁠 때 더 자주 쉬듯이 기도도 바쁠 때 더 거칠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영적인 운동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병중에서 비만증이란 병은 약 3분의 1정도가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규적인 운동을 하지 않은데서 비롯됩니다. 끝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간증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성장하기를 원합니까? 영어의 성장이란 단어인 grow란 말대로 복음과 기도와 순종과 증거 하는 삶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산을 옮기는 그런 살아있는 능력의 믿음을 소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태 신자를 잉태하고 영적 해산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얼마동안은 한 가족의 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비록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 해도 시집식구들과는 딴 남 같은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애기를 낳게 되면 그 때에는 정말 그 집안의 한 식구가 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신자를 잉태할 뿐 아니라 해산하게 될 때에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생겨지고, 보람을 느끼게 되고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한 번 따라 합시다. [나도 한 사람, 너도 한 사람, 우리 모두 한 사람씩]. 이번에는 몸을 움직이면서 함께 해보겠습니다.
(4)항상 [주님께서 나와 같은 입장에 있다면] 어떻게 하셨을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 해답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주 간단한 표준이지만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깨닫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있는 입장에 주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자신을 객관화해보면 우리는 금방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표준이요 방법입니다.
맺는 말
지금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서 날마다 섬기며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