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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말씀
| 율법은 오게 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입니다.—히브리 10:1. 1세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큰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한때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예루살렘은 여호와를 대표하는 왕이 다스리는 곳이었으며, 성전은 순결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모든 충실한 유대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모세 율법을 따랐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유대인이 먹는 음식, 할례, 심지어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문제를 규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여호와께서는 더 이상 유대인들의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변화는 율법을 지키는 데 익숙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히브리 10:1, 4, 10) 사도 베드로와 같은 장성한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도 10:9-14; 갈라디아 2:11-14) 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게 된 새로운 신앙 때문에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파24.09」 9면 4항 |
| 율법은 오게 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입니다.—히브리 10:1. For the law having a shadow of good things to come, and not the very image of the things, can never with those sacrifices which they offered year by year continually make the comers thereunto perfect. 반즈의 성경 노트 율법은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을 뿐, 그 실체의 형상 자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드리는 동일한 제사들로 그 제사에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할 수 없다. 율법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 즉, 모세의 제도 전체가 하나의 그림자였다. “율법”이라는 말은 종종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그림자”라는 말은 어떤 것의 대략적인 윤곽, 단순한 밑그림을 가리킨다. 목수가 분필로 그리는 것과 같은 윤곽이나,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려 놓는 밑그림과 같은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그리려는 대상의 윤곽을 그리는데, 그것은 그 대상과 어느 정도 닮아 있지만 “실체의 형상 자체”는 아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체의 형상”으로 번역된 말은 완성된 그림이나 조각상을 가리킨다. 즉 모든 부분이 원본을 정확하게 본떠 완성된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장차 올 좋은 것들”은 복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질 미래의 축복들을 가리킨다. 그 의미는 고대의 제사 제도 안에는 복음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축복을 불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 축복들의 모형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타내는 실체 자체를 대신할 수 있고, 그것을 드리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있다고 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그처럼 거친 윤곽이나 단순한 밑그림은 영혼을 구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건축가가 그려 놓은 대략적인 집의 설계도가 실제 집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고, 화가가 처음 그려 놓은 윤곽선이 완성된 초상화를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느 경우든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집이나 그림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멀고 희미한 생각을 전달하는 것뿐이다. 모세의 율법이 한 일도 바로 그 정도였다. 해마다 계속해서 드렸던 그 제사들로는 결코 — 여기서 특별히 언급하는 제사들은 대속죄일에 드려졌던 제사들이다. 이것들은 모든 제사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효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사도는 바로 그 제사들이 해마다 반복해서 드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 제사들에 어떤 부족함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만일 그것들이 완전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더 이상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제사에 나아오는 자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었다 — 그 제사들은 사람들을 죄의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 괴로운 양심에 평안을 줄 수도 없었다. 죄를 제거할 수 있는 효력이 그 제사들 자체에는 없었다. 히브리서 7:11과 9:9의 주석을 참조하라. |
| 정확한 인식과 추측에 의한 믿음 시계탑 법인에서는 정확한 지식을 많이 강조하면서, 성경의 문구들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정확한 지식이라고 자랑삼아 말한다. 그런데 지식이란 우리의 지성이 외부 사물과 접촉하여 이루어진 감각적인 것들을 매개로 분석하고, 그것들의 개념을 파악하며, 그 개념을 중심으로 판단을 내리고, 나아가 추론한 것들을 이른다. 이 과정에서 추론은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개념을 파악하여 판단하는 데에 따르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외부에서 우리의 감각을 자극시켜야 한다. 즉,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통하여 무언가의 내용물이 먼저 들어와야 한다. 이 내용물이 있어야만 현상이 성립되고 우리의 지성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비유로 말하자면 고추가루 빻는 방아간의 기계에 고추를 넣어줘야 기계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재료도 없이 기계가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할 수는 없다. 이때, 고추는 현상에, 기계는 지성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천국에 대한 감각이 현상화되었을 때만 우리의 지성이 작동하여 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계탑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계에서는, 정확한 인식을 하기 위한 중간 과정에 필수 요소인 재료가 우리의 신체가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고 가상적인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우리의 지성이 작동하여 개념을 파악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이란 지성에 의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고 가상적인 것에 대한 '추측과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을 현상계와 분리된 가상계의 개체적 존재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현상계 자체인 자연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신체는 자연 현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지성은 자기 기능을 발휘하여 개념을 정확히 형성시키며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이 판단을 우리는 '정확한 지식' 또는 '정확한 인식'이라 부를 수 있다. 가상계에 대한 신의 믿음은 추측과 상상에 의한 믿음이고 따라서 그것은 맹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의 사람들은 종교적 체험을 강조한다.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은 절대적 확신을 줄 수 없다. 10번의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다음에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체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이 강한 것처럼 보이나 내심 일말의 의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에 의한 정확한 인식은 그 자체가 정확하기 때문에 행동의 의지와 직결된다. 예를 들어 통장에 1억 원이 들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아 인식한 사람과 추측으로 들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돈을 사용할 때 다르게 행동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댓글 참조)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추측이나 상상에 의한 것으로부터 지식에 의한 믿음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신을 가상의 영역의 전능자가 아니라, 현실의 영역인 자연 자체라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야만 우리의 지성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며 단순한 경험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를 가져올 '정확한 지식'에 따르는 믿음이 가능한 것이다. 성서에도 이를 지지하는 말씀을 종종 찾을 수 있는데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정확한 지식(추측이 아님)"이라는 표현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평생을 시계탑을 위해 봉사하다가 돌아가신 한국 J.W.의 대부인 박종일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솔직하게 "하느님이 정말 계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시계탑의 모든 교리들은 자체에서 상상과 추측으로 일괸된 해석이거나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를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것을 '정확한 지식'으로 주장한다. 오류 투성이와 모순 덩어리를 그래도 진심으로 '참'이라고 믿고 타자의 인생을 허비하도록 만들고, 자기 자신도 비참해지는 삶을 사는 것은, 그들이 기존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한 회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지식"은 하느님은 곧 자연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자연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는지 자연의 속성과 작용을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사물과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되었으며 우리의 미래에 대한 필연성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 확신은 경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연역적으로 정확한 지식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성립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질문
1. 추측과 상상에 의한 믿음과 정확한 지식에 의한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2. 사람들이 미래의 희망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댓글 도마가 예수의 부활된 몸을 보고서야 비로소 믿게 되자, "보지 않고 믿는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부활에 대한 도마의 이야기는 각색된 내러티브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용에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의미를 무조건 믿는 맹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람이 경험을 하고 인정하는 것은, 원리를 파악하여 인식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 정리 같은 수학의 원리를 알고 빗 변의 길이를 맞히는 것과 여러 번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두 변의 길이의 제곱의 합이 빗 변의 길이의 제곱과 같다를 아는 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을 원리적으로 아는 사람은 보지 않아도 이미 확신한다는 뜻이다. 원리를 모르는 도마는 보고서야 믿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