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화요일 강론>(2024. 10. 1. 화)(루카 9,51-56)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신앙인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1)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상황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한 상황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고, 그 길로 가면 도보로 사흘이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부름꾼들을 당신에 앞서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고, 일행이 많았기 때문에
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이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면서
예루살렘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축제 기간 중에는 그 적대감과 반감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전반적인 실제 상황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도 야훼 하느님을 믿고 있었고,
모세오경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와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고, 배척하고 학대하고 박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박해에 맞서 싸울 힘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있는 입장에 있는 사마리아인이
박해를 하는 위치에 있는 유대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는
‘이웃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 보여줍니다.>
2)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모욕하면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적인 폭행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심부름꾼들이 먼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면서,
오만한 태도로 음식과 숙소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모욕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부름꾼들이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다면, 그들은
모욕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둘 다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3,17).
<겉으로만 보면, 두 사도는 자기들이 당한 일은 곧
예수님이 거부당하고 모욕당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모욕당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몹시 화가 난 두 사도는 엘리야 예언자가 했던 일을,
사마리아인들에게 똑같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2열왕 1장).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
또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려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일은,
다음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우리도 살다보면 두 사도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인들의 횡포를 참기가
힘들 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보일 때......
그럴 때에 하느님께 ‘정의의 심판’을 간청하기도 하는데,
그 간청이 선을 넘어서,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빌거나 악인들이 큰 불행을 당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저주’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다른 사람을 저주할 권리와 권한이 없습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천벌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청할 수는 없습니다.
저주 자체가 죄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멸망당하기를 바라지 말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 3,9-11)”
[출처]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