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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관파천
오늘은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을 이야기해줄게.
지난번 2번에서는 1895년 10월에 있었던 을미사변까지 이야기를 했었지.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의 부제는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란다.
아관파천이라고 하니 1896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터이고,
하와이 이민은 아빠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지 모르니
3권의 이야기가 몇 년까지 이어질 지는 서서히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학창 시절의 역사를 싫어했던 아빠는
아관파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랐단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역사에 재미를 느끼고 여러 역사책들을 읽어보다가
‘아관’이라는 말이 ‘러시아 공사관’이라는 뜻이고
‘파천’이는 말이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이 거세지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갔단다.
고종이 여장을 하고 도망쳐 갔다고 하니
007 작전을 뺨 칠 정도라고 할 수 있으나,
자신의 나라에서 왕이 저리 도망갈 정도였으니
나라의 위신과 국력이 얼마나 엉망이었던 거니.
이 때 영친왕의 엄마이기도 했던 엄상궁이 이 작전을 주도했고,
당시 친러파였던 이범진, 이완용이 동참했다고 하는구나.
이완용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매국노 이완용 맞단다.
이 때만 해도 친일파가 아니고 친러파였구나.
이렇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한 것이 1896년 2월 이었단다.
….
을미사변이 있고 얼마 후 김구 선생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단다.
치하포라는 곳에서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일본인을 죽이게 되는데(1896년 3월)
얼마 못 가 김구는 체포되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단다.
그런데 사형 선고 직전에 고종이 전화를 걸어와 사형을 면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는구나.
전화 개통이 얼마 안 된 뒤였는데,
그 전화로 김구 사형 선고를 막았다고 하니
전화가 조금만 늦게 개통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김구 선생은 없을 뻔했구나.
고종이 잘못한 일은 많았지만 이 일은 잘했구나.
그렇게 사형을 면한 김구는 형살이를 2년 더 하다가 탈옥하여 도망쳤다고 하는구나.
<한국 근대사 산책> 10권까지 이야기하다 보면
김구 선생의 이야기를 계속 나올 테니 틈틈이 이야기 하도록 하마.
1. 독립협회
서재필이 1986년 4월 7일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되는데,
파격적으로 순한글로 간행하였고,
한글 띄어쓰기도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하는구나.
서재필이 미국 유학 생활에 영향을 많아
기독교 예찬 내용도 포함되어 있고,
청결을 중시하라면서 목욕을 2일에 한 번 하라는 기사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목욕을 2일에 한 번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리고 독립신문에는 광고도 싣는 등 오늘날 신문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어.
독립 신문을 창간한 지 3달 뒤인 1896년 7월에는
가른 개화파 사람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했단다.
그리고 파리에서 봤던 개선문을 본 따서 독립문도 건설했단다.
아빠는 독립문이 당연히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인지 알았는데,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아닌, 중국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하자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하는구나.
얼마 전에 <썬킴의 한국사>라는 팟캐스트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책에도 그 내용이 나와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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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영은문은 조선이 중국의 명청 양국을 상국으로 섬길 때에 생긴 것인데, 우리가 중국의 노예라는 표라고 볼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본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영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더러운 표, 부끄러운 이 문을 없애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내가 가진 화첩 중에 파리의 개선문이 생각나서 그 규모를 축소해 그 모양만은 똑같이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때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는 스위스 사람에게 설계도를 부탁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심(沈)모라는 목수가 시공하였는데 총공사비는 1500여 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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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 우리나라에 근대식 학교가 생겨났다고 했었잖아.
그 중에 배재학당이란 곳에 급성장했다고 하는구나.
이 곳에는 이승만도 입학하였고,
이승만이 영어를 습득하는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고 하는구나. 영어만 잘 하면 뭐 하나.
서재필이 매주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하고 했는데,
아무래도 미국에서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많이 알려주었겠지?
서재필은 토론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협성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토론을 정기적으로 했대.
…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특사로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일본에 맞설 군대를 만들기 위해
러시아에 군사교관 파견을 요청했다고 했어.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13명이라는 적은 수이지만 군사교관을 파견했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러시아가 조선과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뒤로는 일본과 암약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을 서로 반으로 나누자는 내용이었다는구나.
고종은 1897년 2월 1년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구나.
아관파천 1년 동안 느낀 것이 있었는지
나라는 거창하게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은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고종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리낌 없었어.
앞서 김구를 사형에서 면하게 한 전화도 1896년 10월에 처음 설치되어 계속 확대 설치를 했어.
철도 부설도 논의되어 여러 나라들이 참여하겠다고 했는데,
80~90%가 일본에서 철도부설권을 가져갔다고 하는구나.
1898년에 있었던 일들을 좀더 살펴보도록 할게.
1898년 2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대원군이 죽었단다.
죽기 전에 주상이 보고 싶다고 했다는데,
고종은 대원군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
1898년 5월에는 서울 명동성당이 완공되었어.
1898년 3월에는 독립협회에서 주관했던 만민공동회가 열렸단다.
이것은 여러 시민들이 모여 진행한 일종의 시위였는데
1차 만민공동회의 주요 주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자는 내용이었어.
러시아는 몰아내자는 내용이 있어서 일본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설이 있단다.
배재학당의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이야기했었잖아.
1898년 4월 이 협성회에서 일주일에 1번 협성회 회보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매일신문’로 바꿔 매일 신문을 발행했다고 하는구나.
독립신문이 주 3회 간행했었는데, 매일신문이 나온 이후로
독립신문도 일간지로 바꿨다고 하는구나.
경쟁 체계에 돌입한 거지.
대한제국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책임을 독립협회의 서재필에게 물어 출국하라고 했고
그렇게 서재필인 1898년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는구나.
서재필에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상존하는데,
우리나라를 개화화하는데 노력하긴 했는데
미국인 행세만 했다는 비판도 있다는구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나라 토착 문화와 잘 융합하여 조화롭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무조건 미국식 문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독립협회는 상원 중심의 의회 정치가 필요하다면서 고종에 상소를 했대.
독립협회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려고 하자,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황국협회라는 것을 급조했는데,
황국협회에서는 하원 의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대.
근대식 정당 정치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1898년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일간지도 또 창간을 하게 되었는데,
황성신문은 장지연, 유근, 남궁억이 만들었대
황성신문에는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 유명하신 분들이 활동했다는구나.
2. 고종의 반격
고종이 커피를 좋아했다는 것은 유명하단다.
그런 커피에 독약을 타서 고종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있었어.
고종은 커피 냄새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바로 뱉어내어 무사했는데,
같이 커피를 마셨던 황태자는 먹었다가 토를 했는데도 고생을 했다고 하는구나.
…
1898년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2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는데,
수구 친러 정부 퇴진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어.
시위가 거세지자 고종은 결국 친러파 대신 일곱 명을 파면 조치했다는구나.
음, 오늘날 촛불 시위를 연상케 하는구나.
1898년 10월 28일부터 29일까지 3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는데,
헌의6조라는 개혁안을 고종에게 건의를 했단다.
이렇게 만민공동회가 이어지면서 친러파 인사들도 반격을 준비했어.
익명의 조작 사건을 벌여서 독립협회 회원 20명을 체포해 버렸어.
그러자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어 항의했고,
체포되었던 사람들 중 간부들을 일부 석방시켰다고 하는구나.
만민공동회는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라고 평가되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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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244)
또 전인권은 “이 당시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단기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며 “만민공동회는 종로에 연단을 만들고 신분과 나이의 구별 없이 어린이조차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등 ‘한국의 직접적 민주주의’ 또는 ‘대중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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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만민공동회의 요구 사항을 시행하지 않자
박영효가 주도하여 만민공동회는 다시 시위를 했어.
그런데 독립협회 내에서도 이번 시위는 만류하는 온건파 인사도 있었단다.
이로 인해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생기기도 했단다.
이 시위로 인해 일단 고종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내각에 참여시키긴 했지만,
고종의 반격은 오래가지 않았단다.
1898년 12월 23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불법화했고,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단다.
그로 인해 독립신문과 매일신문도 폐간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얼마 전에 내각 중추원에 참여시켰던 독립협회 회원들도 모두 파면되었대.
그러자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가 있었고,
이 일로 이승만도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대.
이때 선교사와 이승만의 부인 박승선의 구명 상소를 올렸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사형은 면했다고 하는구나. 미래를 생각했을 때 다소 아쉬운 일이구나.
독립협회 해산되면서
온건파였던 윤치호도 피신 중이었는데,
독립협회를 배신하고 내각에 들어가게 되었대.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무대신으로 있었다고 하니 배신하기 쉬웠을 거야.
이완용은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변절하고 최악의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된단다.
….
다시 이 당시 사회 모습을 일부 이야기해줄게
고종은 미국 공사였던 알렌을 통해 전기, 전차를 추진했어.
그래서 한성전기공사라는 회사가 만들어져 1898년 1월 전기가 처음 들어왔고,
1899년 5월에는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단다.
전차를 처음 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겠니.
그런데 전차로 인해 불미스러운 안전사고와 교통사고가 연이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전차를 불에 태우는 사건도 일어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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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274)
1899년 5월 26일에 일어난 ‘전차 소각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종로 2가에서 전차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치어 죽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었다. 전차가 멈추지 않고 지나가려 하자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차장과 운전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도망가자 군중은 방치된 전차에 돌을 던져 파괴하고 그 위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또한 뒤에 달려오던 다른 전차도 전복시키고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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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1899년 9월 경인구간 일부구간이 개통되었고,
1900년 7월에 전구간 개통되었다고 하는구나.
자전거, 인력거 등도 이때 등장하였고,
은행도 설립되었다는구나.
….
1901년 제주도에서는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어.
천주교에서 교세를 확장하려고 했는데 이때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고,
정부에서는 세금을 높이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더 걷어가는 조세수탈에
백성들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이에 제주도 백성들이 항거하자 천주교도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일어났단다.
그래서 이재수를 중심으로 제주도민들이 봉기하여
천주교도 700여 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정부는 회유책으로 이들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하고,
이재수는 체포하여 처형시킴으로써 난은 종결되었단다.
1901년에서 1902년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이어졌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 와중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하와이 이민 광고가 붙기 시작했단다.
1902년 12월 처음으로 100여 명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고 하는구나.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것은 예상했듯이 거짓이었고,
심한 인종 차별을 당했고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는구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말이야.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의 이야기란다.
500년 동안 이어졌던 조선 왕조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이런 초라한 모습이 되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나라의 지도자가 나라의 미래를 보지 않고 백성들을 등한시하게 되면
얼마 못 가 나라꼴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일 년여 만에 부끄러운 나라로 돌변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안타깝구나.
….
3.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이번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에서도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의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는데,
재미있는 것 두어 개만 소개해줄게.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폭식을 많이 한다고 하고,
그것을 신기하게 보고 글로 남긴 사람이 있다고 하는구나.
음, 아빠가 가끔 폭식하고 나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구나. 조선의 DNA를 가지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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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로 일한 카를로 로제티도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꼬레아 꼬레아니>에서 한국인들의 폭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먹는 것이 큰 자랑거리의 하나이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누가 더 많이 먹는가를 내기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다. 이 경우 그들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체질로 인하여 상류층에서 가장 즐기는 오락이 바로 잔치라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혼령들을 위한 제사는 제쳐두더라도 결혼식 잔치에서부터 친척의 기일날에 이르기까지 즐거운 연회가 항상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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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장례문화에 관한 것인데,
우리나라 장례문화는 예전부터 축제처럼 하는데
그것이 서양 사람들에게 색다르게 비춰진 것 같구나.
마지막 가는 길을 즐겁게 가시라는 의미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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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에 주재한 이탈리아 총영사 카를로 로제티는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장례식의 주된 분위기는 분명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감정을 가장하려는 극동 아시아 모든 민족의 기질인 것이다. 상여꾼들은 종종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보조를 맞춰 행진하고, 가족을 둘러싼 친지들은 농담이나 웃음짓으로 가족을 흥겹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데,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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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첫 이민이 1902년 12월까지였구나.
그러면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은 1903년부터 이야기가 이어지겠네.
이것도 조만간 읽고 이야기해줄게.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단발령으로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상황을 틈타 러시아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으로부터 수병 100여 명을 서울로 이동시켰으며,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은 친러파 이범진 등과 공모하여 친위대 병력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돼 왕궁의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고종을 아관(俄館,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책의 끝 문장: 1903년 8월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하디(1865~1949)는 교인들 앞에서 바로 그 점을 고백함으로써 ‘원산부흥운동’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책제목 : 한국 근대사 산책 3
지은이 : 강준만
펴낸곳 : 인물과사상사
페이지 : 410 page
책무게 : 574 g
펴낸날 : 2007년 11월 19일
책정가 : 13,000원
읽은날 : 2023.07.21~2023.07.23
글쓴날 : 2023.0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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