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작들을 놓치기 시작한지가 6개월쯤 된 것 같습니다. 맘먹고 롯데시네마를 찾아갔는데
“터널“이 막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달달한 맛 팝콘, 콜라와 오렌지를 세트메뉴로 사들고
크로스 백, 팝콘, 그리고 두개의 컵을 들고 서커스를 하다가 결국 콜라를 바닥에 쏟고
말았습니다. 낙상거리가 1m 쯤 됐는데 콜라 한 컵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오롯이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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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물청소를 하고 만 것입니다. 암흑 속에서도 민망하고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급하게 수습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와장창 터널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어, 어,
차타고 강원도 길을 수없이 달리면서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라도 나면 어쩔 것인가?
내 차가 터널 속에 있을 때 지진이라도 나면 꼼짝 없이 죽겠지 하고서 종종 걱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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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본능적으로 엑-셀을 밟은 적이 있는데 주인공에게 올 것이 온 것입니다.
제가 아니고 하정우이어서 천만 다행입니다. 기아자동차 딜러인 정수가 계약 건을
앞두고 딸내미에게 줄 생크림 케이크를 사들고 컴백 홈을 하던 차에 졸지에 이 난리를
당했습니다. 사고란 졸지에 당하는 것이지만 과속한 것도 아니고, 눈길에 미끄러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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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번개를 맞은 것도 아니데 갑자기 청천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인재도 아닌 것이 천재도 아니고, 천재도 아닌 것이 인재라면, 뭐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약 감독이 뭔가 메시지를 주고자 했다면 이것은 명백한 인재입니다. 개인이 잘못한
인재가 아니고 터널이 잘못한 우라질 놈의 인재 말입니다. 터널이야 가만히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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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이 따위로 만든 인간들을 잡아서 족쳐야겠지요. 영장 신청해서 피의자를 잡아와야
할 텐데 한 두 놈이라야 잡지요. 공소시효는 어떡하고요? 빠르게 성수대교, 삼 풍 참사가
오버랩 되었는데 이 때까지 세월 호 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고란
어쩔 수 없이 나와의 연관성만큼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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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입니다. 2년 전 세월 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비탄에 빠졌었고 지금도 인양문제나 수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영화 “터널”이 어느 정도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세월 호는 피의자가 배가 아니고, 세월 호의 몹쓸 관계자
들이 나쁜 놈들입니다. 만약에 극중 오 달수 같은 구조대원이 있었다면 참사는 면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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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습니다. 사고 후의 리-액션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김 용건 아들놈 하 정우는 이 시대의 히어로입니다. 얼마 전에 지 아버지 2억5 천
짜리 차도 사주고 감독에 배우 생활이 얼마나 신날까요? 그렇다고 이 나이에 배우 데뷔할
수도 없고 솔직히 배가 좀 아픕니다. 우리 에스더가 저한테 차를 사줄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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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에 갇히게 된 주인공, 다행히 핸드폰 배터리도 있었고, 다친 데도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다가 만난 사고 때, 119에 상황을 알린 후에 구조를 기다린
것처럼 “터널“의 주인공 정우도 그렇게 했어요. 제가 교통사고를 당해봐서 아는데 위기
상황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지능력이 있는 야문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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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생존자가 한명 더 있네요. 우리 에스더만한 여자아이였는데 떨어진 돌 때문에 깔려
운전석 시트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외부에서 구조해 주지 않으면 꼼짝 딸 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졸지에 만난 사고에, 졸지에 목숨 같은 내 물을 나누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정우는 물도 나누고 휴대폰도 빌려줍니다. 후문에 들으니까 저 살자고 도망간 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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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지만 구명보트를 내준 고마운 사람도 있었습니다. 영화 보는 내내 소피가 어찌나
마려운지 두 다리를 오그리면서 봤습니다. 이 대목에서 참아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한편 아내 베두나를 보니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저는 졸지에 뉴스를 접하고 꽃다운
딸내미들 때문에 울었고 생떼 같은 자식을 난파선에 놓고 발만 동동 구르는 부모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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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열하였습니다. 치와와가 유일한 식량인 케이크를 다 쳐 먹은 것을 모면서 감독이 생존
앞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도-그를 메타포로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물도 없고 식량도 없으니 큰일입니다. 두 명의 생존자 중에 한 명이 죽는 순간
맨-탈도 밑바닥입니다. 배고픔과 외로움의 공포가 곱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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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딸내미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아내, 구조 대장과 통화 것은 다 희망을 잃지
말라는 포석입니다. 암흑 속에서 24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공포입니다.
밖에서 환풍기 대 수로 예측한 구출 작업이 엉터리 도면 때문에 도로아비타불이 되면서
극장을 뛰쳐나올 번했습니다. 제발 건설 하시는 분들 공사 좀 제대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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뺀질이 기자, 터널 관계자, 개 쌍놈 세끼들 천불이 나서 도저히 못 봐주겠습니다.
아마도 국민들이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동의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장으로 나오는 김 혜숙 아줌마 이미지가 완전 누구 오마주입니다. 대사가 별로 없는데도
“해바라기” 때만큼 존재감이 있습니다. 저는 박 근혜 후보를 찍지도 않았고 그 분의 부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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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레임덕이 오르내리는 이 시점에서 한마디 한다면 그분은
누구보다 준비된 대통령이었고 정치, 외교, 리더십까지 역대 대통령 중에 그 만한 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세월 호는 그 분의 재임 기간 때 생긴 가슴 아픈 인재입니다.
사람은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그 분도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대북 문제,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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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연설, 인사 정책까지 눈 하나 끄덕하지 않고 밀어붙였어도 세월 호 사건은 다릅니다.
아마도 우리가 아이들을 가슴에 묻었듯이 그 분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대가 센 것하고 인정이 없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니까요.
17일 동안 파서 만들어놓은 희망이 부실 도면 때문에 허탕을 치자 안에 있는 놈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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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놈도 그리고 영화보고 있는 놈도 에브리바디 망연자실입니다. 차라리 죽을 랍니다.
베두나가 마지막 남은 배터리를 죽으라는 악담으로 다 써버리고 이제 죽을 일만 남았습니다.
터널 외부에서는 구조가 지지부진해지며, 여러 갈등들이 생기고, 여론이 분열되고, 언론의
태도는 시시각각 변합니다. 32일 째 되는 날 엔딩에서 극적으로 구조되는 하 정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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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승리입니다. 앤딩을 해피앤딩으로 끝내는 감독을 어용으로 보면 죄받습니다.
원작이야 따로 있겠지만 영화“터널”은 우리들의 염원을 담아 만든 우리들의 슬픈 이야기
입니다. "신학자들은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은 가능한가?"라는 근원적인 위기의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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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씨름이 시작된 이후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에 근원적인 인식론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요청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교회·신앙인은
홀로코스트 이전의 신학적 사유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은 여전이 전지전능한 '영웅적 신'이며, 성공과 안녕을 빌면 들어주는 '요술방망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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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니다. 이러한 "신은 죽었다"고 절규하던 니체는 그의 시, '미지의 신에게' 에서
"나의 존재 가장 깊이에 있는 당신, 나의 영혼 속에 들어온 당신" 을 그리워하고 알고
싶다는 절절한 갈망을 담아냅니다. 니체에게 단순히 "무신론자"라는 표지를 붙이는 것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에서 사실상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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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바로 신이 "죽었다"는 부분이 아니라, 죽었다고 선언
되는 신,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이 "죽였다"고 하는 그 신은 '어떠한 신'인가 하는 부분
입니다.'세월 호' 사건을 접하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사건'입니다. 그 배에 탄 475명의 사람들은 단지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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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모두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그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
에게는 이 우주에서 유일한 '대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 한 명 한 명의 소중
함과 그 유일함에 대하여 예수는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에서 분명히 드러내신 바 있습니다.
인간 존재 그 누구도 '통계' 속에서 '처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존재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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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숫자로 가늠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깊은 진리를 예수는 99마리를 뒤로하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통계적 수치로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의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생명 하나하나에 깃든 존귀함을 지켜 내기
위하여 치열하게 함께 하는 삶, 이것이 '예수 따름'의 의미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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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세월 호에서 구조된 사람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은
신의 '심판'을 받았다는 식의 교리적 언어를 동원하여, 신을 왜곡시키고 상실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의 무게를 더욱 가중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위해 만든 가스실로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가던 아이가 "신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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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있나요?"라고 던진 물음에, "신은 지금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 단 다." 라고 답했다는
엄마의 이야기가 전해 주는 심오한 신학적·종교적·신앙적 의미를 다시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이나 알 수 없는 죽음으로 인간을 심판하고 '선한 자'의 생명만 구해 주는 '심판의 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단번에 벌하고 선의 승리를 가져오는 '영웅적인 신', 자신만의 성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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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과 안녕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 속의 '소원의 리스트'를 기적처럼 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신', 그러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 그러한 신을 믿는 것이 '예수 따름'의
길이 아니라는 것은 십자가 선상의 예수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제 기도하고 절절히 염원해야 할 신은 고통과 절망의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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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를 나누는 "연대의 신"이며, 그 누구도, 그 어떠한 근거에서도 억압하고 차별하거나,
저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포용의 신'이며, 보다 정의롭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계를
향해 책임적으로 헌신할 것을 촉구하는 '책임의 신'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성을 인정
하고, 끌어안고, 그들에게 환대의 손을 내미는 '생명과 연민과 환대의 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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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호에서 구조된 사람들, 죽음으로 사라진 사람들, 사랑하는 이의 상실로 고통 받고
절망하는 사람들, 인간에게 내려지는 고통과 악의 현실 한가운데에서 그들 곁에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신. 이러한 '침묵의 신', '연민과 연대의 신'과 조우하는 것, 이것이 살아남은
자들인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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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휘장을 찢고 은혜의 보좌를 여신 부활의 주님,
엄청난 충격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자식을 잃고 비둘기처럼
구구 우는 어머니들에게 찾아가 주옵소서.
2016.9.6.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