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특이한 망주석
우리가 아는 망주석의 원래 이름이 石望柱이다 .
석망주는 중국식 표현으로 보이나 조선초기에는 망주석과 石望柱라는 이름이 동시에 쓰이고 있었는데, 石望柱는 쓰이지 않고 망주석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으며, 다른 명칭은 전죽석이라는 표현도 있다.
우리나라의 묘제는 중국 주나라 묘제를 받아들여 한반도化 되었는데, 망주석의 용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는데, 이름 그대로 바라본다는 의미만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망주석의 細虎의 처음 명칭은 귀(耳)라 불렀고 그 이유는 망주석의 윗부분에 가늘게 구멍이 있어 실(絲)을 넣으면 통과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망주석의 기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세종실록의 망주석 기록
【석난간으로 부터 석호에 이르는 상거(相去)가 4척 5촌이요, 석양과 석호의 상거는 11척이다.】 남쪽에 세 뜰을 만드는데, 윗 뜰에는 동서에 먼저 지대석 각각 하나씩을 놓고, 망주석(望柱石) 각각 하나씩을 지대석 위에 세운다.【석호에서부터 망주석에 이르기의 상거가 9척 5촌이요, 동서 망주석의 상거는 37척이다.】 또 망주석의 서쪽에 땅을 파고 잡석을 넣어 다지고, 소전(燒錢)하는 대석(臺石) 하나를 잡석 위에 설치한다.]
위의 설명대로 망주석은 묘역을 구성하는 요소로 되어 있어 대부분의 묘에는 망주석이 있는데, 東西나 아니면 좌우에 배치에 되어 있으며, 2좌가 보통이지만, 가평의 어느 무덤에는 4좌의 망주석이 있었으며, 그 곳의 안내문에는 망주석이 4좌가 기본적으로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2좌의 망주석 체계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고 되어 있었다.
전국의 많은 묘역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많고 많은 망주석 중에 필자가 보기에 특이한 것이 몇 좌 보여서 여기에 나열 한다.
우리나라 망주석 기원은 고려 공민 왕릉부터 이고, 공민왕릉의 망주석 모양은 명나라 주원장의 묘인 효릉 망주석과 닮았다는 것으로 알려 졌으며, 이러한 공민왕릉의 망주석을 비롯한 왕릉의 석물 등이 조선 왕릉으로 이어져 왔고, 그 와 비슷하게 사대부의 무덤체계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망주석의 용도를 검색하여 보면 여러 가지 설이 난무 하고 있지만. 모두가 답이 아니라는 것이 현재 學界의 설명이었다.
먼저 경상도 어디에 있는 망주석인데 아주 대형에 속하는 것이다.
위의 망주석의 원래의 것은 도난당하여 복원 하였지만 圓首에 보주가 연화문에 둘러싸여 있고, 雲頭와 簾衣(염의)는 조식되지 않았고, 柱身에는 꽃과 연주문이 망주석의 길이에 따라 아래로 길게 장식을 하였는데, 마치 보살의 장식을 한 瓔珞과 같았다. 이 묘소에 답사를 갔을 때 후손을 뵈었는데, 망주석을 도난당했다는 말씀을 하셔서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망주석의 臺石은 팔각에 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렇게 장식성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망주석은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평가되며, 一石으로 조성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라 당대의 솜씨 있는 匠人이 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왕릉을 보면 망주석이 화려하고 대형이 많은데 한반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유형의 망주석이어서 보존을 잘 하여야 될 것이지만 원래의 망주석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묘역에는 도난당한 망주석과 비슷한 것이 남아 있지만 좌대에는 連板紋을 하고 있어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