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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으로 오늘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춘원(春園)이광수(1892~1950)의『유정(有情)』은 바이칼에서 시작해서 바이칼에서 끝나는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인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작품인데 그 시절에 만주벌판과 시베리아를 무대로 했다는 것이 당시에는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부록버스터였다.
춘원이 소설속이 아닌 실제로, 시베리아를 여행한 것은 1914년 그의 나이 23세였던 때였다. 그는 그 한 해 전에 세계여행을 하겠다며 재직 중이던 오산학교를 때려치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기 위해 시베리아 대륙횡단열차에 무조건 올라탔다. 어찌 보면 춘원의 이런 역마살이 그의 창작혼의 원천이었을 것이겠지만, 하여간 그는 시발점인 우라디보스톡에서 횡단열차를 탄지 며칠 만에 바이칼호수의 입구인 이르쿠츠크에 구경 차 내렸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구나 여비마저 간당간당하여 춘원의 미국행은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이에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 춘원은 바이칼의 어느 어촌 자작나무 숲속의 허름한 통나무집에 상당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이런 ’올라체카‘ 라는 부르는 통나무집은 가장 흔한 러시아식 전원주택이다. 소설 속의 통나무집이나 자작나무 숲에 대한 춘원의 묘사가 사실적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또한 필자 자신이 그런 통나무집을 볼 때마다 춘원이 묘사가 그대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물론 작가 자신의 천부적 역량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 보다 춘원 자신의 경험이 더 큰 부분을 차지했을 거라 생각된다. 결국 빈손으로 귀국한 춘원이었지만,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작 한 편은 건진 셈이다.
『유정』은 1933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스토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명망을 갖춘 지식인이며 여학교 교장인 주인공 최석은 독립운동을 하던 친구가 죽어가면서 맡긴 여자아이를 중국에서 데려와 키웠다. 그녀가 아름답게 성장하자 둘 사이에는 야릇한 감정이 싹트게 되었지만, 둘은 가정이나 사회에 대한 윤리적 굴레를 벗어버릴 정도로 용감하지는 못했기에 그저 정신적인 선을 넘을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수양딸 같은 여자와의 로맨스 아니 스캔들을 다룬 흔한 애정물로 분류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당시 장안에 상당한 파문을 몰고 왔지만, 대신 신문연재 자체는, 신문사의 의도대로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이루지 못하는 사랑은 당시나 지금이나 더 애틋하게 느껴지게 마련이었을 터이니까. 그것은 당시 춘원의 상황과 상당히 닮아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당시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준비로 시국은 어수선했고 춘원은 아내와는 불화를 겪었으며 제자뻘 되는 여성과의 스캔들까지 실제로 불거졌을 때였다
결국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최석의 부인은 둘 사이를 오해하여 질투의 화신이 되어 남편을 매도하여 사회에서 매장을 당하게 만든다. 이에 최석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조선을 떠나 시베리아로 향한다. 그리고 바이칼호수 통나무집에서 절망과 비통 속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으면서 한 통의 해명 편지를 절친 N에게 보낸다. 이 편지를 통해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최석의 친딸 최순임은 증발해버린 최석 걱정에 병이 든 남정임과 함께 최석을 찾아 시베리아로 떠나지만 최석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정임이 도착하기 직전에 세상을 뜬다. 주인공의 죽음처럼 감동적인 클라이맥스가 또 있을까?
소설『유정』은 마치 내레이터처럼 등장하는, 최석의 절친 N의 편지 형식으로 시작되고, 전개되고 그리고 마감되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구조로 짜여 있다. 이는 1930년대의 소설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걸작으로 한국 최초의 대 문호로서의 춘원의 역량을 보여주는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춘원이 후일 친일행적으로 지탄을 받는 문제와는 선을 그어야할 일이라 여겨진다.
▼ 이르쿠츠크에서 리스트비앙카로 가는 바이칼스카야의 양쪽에 있는 원시자작나무 숲길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서두는 다음과 같은 N의 편지로 시작된다.
최석 군으로 부터 최후의 편지가 온 지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는 바이칼 호수에 몸을 던져 버렸는가. 또는 시베리아 어느 으슥한 곳에 숨어서 세상을 잊고 있는가. 또 최석의 뒤를 따라 간다고 북으로 한정 없이 가 버린 남정임도 어찌 되었는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할 이때까지에는 아직 소식이 없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일을 알아보려고 하얼빈, 치치하얼, 치타, 이르쿠츠크에 있는 친구들한테 편지를 부쳐 탐문도 해 보았으나 그 회답은 “다 모른다” 라는 것뿐이었다. 모스크바에도 두어 번 편지를 띄워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로 모른다는 회답뿐이었다.
그리고는 N은 친구 최석과 남정임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망서임 끝에 최석으로 부터 온 편지를 공개하게 된다.
믿는 벗 N형!
나는 바이칼 호의 가을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쓰오. 나의 고국 조선은 아직도 처서 더위로 땀을 흘리리라고 생각하지마는 고국서 칠천 리 떨어진 이 바이칼 호 서편 언덕에는 벌써 가을이 온 지 오래요.
이 지방의 유일한 과일인 ‘야그드’의 핏빛조차 벌써 서리를 맞아 검붉은 빛을 띠게 되었소. 호숫가의 나불나불한 풀들은 벌써 누렇게 생명을 잃었고 그 속에 울던 벌레, 웃던 가을꽃까지도 이제는 다 죽어 버려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오직 성내어 날뛰는 바이칼 호의 물과 광막한 메마른 풀판뿐이오. 아니 어떻게나 쓸쓸한 광경인고.
이러한 곳에 나는 지금 잠시 생명을 붙이고 있소. 연일 풍랑이 높은 바이칼 호를 바라보면서 고국에 남긴 오직 하나의 벗인 형에게 나의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소.
지금은 밤중. 부랴트 족인 주인 노파는 벌써 잠이 들고 석유등잔의 불이 가끔 창틈으로 들이쏘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소. 우루루 탕하고 달빛을 실은 바이칼의 물결이 바로 이 어촌 앞의 바위를 때리고 있소. 어떻게나 처참한 광경이오······.
그렇게 시작되는 최석의 편지는 중간에는 최석이 바이칼까지 오게 된 경로에 대해서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서울을 떠난 최석은 러시아로 들어가기 위해 하얼빈의 R을 찾아간다. 그런데 하얼빈에서 조선 사람들이 조선 사람인 것을 숨기는 모습을 보고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조선민족의 비참한 처지에 새삼 비통함을 느낀다는 대목도 있다,
내가 하얼빈에 내린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었소. 나는 안중근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쏜 곳이 어딘가 하고 벌판과 같이 넓은 플랫폼에 내렸소. 과연 국제도시라 서양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이 각기 제 말로 지껄이오. (중략)
아마 허름하게 차리고 기운 없이, 비창한 빛을 띠고 사람의 눈을 슬슬 피하는 저 순하게 생긴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겠지요. 언제나 한 번 가는 곳마다 동양이든지 서양이든지 ‘나는 조선 사람이오!’ 하고 뽐내고 다닐 날이 있을까 하면 눈물이 나오. 더구나 하얼빈과 같은 각색 인종이 모여서 생존 경쟁을 하는 마당에 서서 이런 비감이 간절하오. 아아, 이 불쌍한 유랑의 무리 중에 나도 하나를 더 보태는가 하면 눈물을 씻지 아니할 수 없었소.
그리고 최석은 R에게는 바이칼로 가려는 목적을 ‘요양’으로 설명하면서 도움을 청한다.
“나는 피곤한 몸을 좀 정양하고 싶소. 나는 내가 평소에 동경했던 바이칼 호반에서 눈과 얼음과 한겨울을 지내고 싶소.”
R는 나의 초췌한 모양을 짐작하고 내 핑계를 그럴듯하게 아는 모양이었소. 그리고 나더러, “이왕 정양하려거든 카프카 지방으로 가시오. 거기는 기후 풍경도 좋고 또 요양원의 설비도 있소”고 말하였소.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과 기타의 여행기 속에서 이 지방에 관한 말을 못 들은 것이 아니나 지금 내 처지에는 그런 따뜻하고 경치 좋은 지방을 가릴 여유도 없고 또 그러한 지방보다도 눈과 얼음과 바람의 시베리아의 겨울이 합당한 듯 하오.
N의 입과 최석의 편지를 빌려, 작가인 춘원의 붓끝으로 묘사되는 시베리아의 풍경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가도 가도 벌판. 서리 맞은 마른 풀 바다. 실개천 하나도 없는 메마른 사막. 어디를 보아도 산 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 만도 그 큰 태양 가지고도 미처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 호를 그린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
이 속으로 내가 몸을 담은 열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해가 가는 걸음을 따라서 달리고 있소. 열차가 달리는 바퀴 소리도 반향할 곳이 없어 힘없는 한숨같이 스러지고 마오.
기쁨 가진 사람이 지루해서 못 견딜 이 풍경은 나같이 수심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공상의 말을 달리기에 합당한 곳이오.
R의 도움과 안배에 따라 최석은 마침내 바이칼 호숫가에 도착하여 어느 부랴트 족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최석은 N에게 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이 편지를 쓰기 처음 시작할 때에는 바이칼에 물결이 흉용하더니, 이 편지를 끝내는 지금에는 가의 가까운 물에는 얼음이 얼었소. 그리고 저 멀리 푸른 물이 늠실늠실 하얗게 눈 덮인 산 빛과 어울리게 되었소. 사흘이나 이어서 오던 눈이 밤새에 개고 오늘 아침에는 칼날 같은 바람이 눈을 날리고 있소.
나는 이 얼음 위로 걸어서 저 푸른 물 있는 곳까지 가고 싶은 유혹을 금할 수 없소. 더구나 이 편지도 다 쓰고 나니, 인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할 마지막 일까지 다한 것 같소.
내가 이 앞에 어디로 가서 어찌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희미한 소원을 말하면 눈 덮인 시베리아의 인적없는 삼림 지대로 한정없이 헤매다가 기운 진하는 곳에서 이 목숨을 마치고 싶소.
그리고는 최석은 드디어 꿈 이야기를 꺼내며 남정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처음으로 솔직하게 드러낸다.
꿈속에서 사슴 떼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뒤에 흰 옷을 입은 정임이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것 같더니 나를 잠깐 보고는 미끄러지듯 그냥 멀어져갔소. 나는 정임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녀는 시베리아의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버렸소.
나는 꿈을 깨어서 창밖을 바라보니 얼음과 눈에 덮인 바이칼 위에는 새벽의 겨울 달이 비치어 있었소. 저 멀리 검푸르게 보이는 것이 채 얼어붙지 아니한 물이겠지요. 오늘밤에 바람이 없고 기온이 내리면 그것마저 얼어붙을는지 모르지요. 벌써 살얼음이 잡혔는지도 모르지요. 아아. 그 속은 얼마나 깊을까. 나는 바이칼의 물속이 관심이 되어서 못 견디겠소.
그리고는 엔딩. 최석은 ‘아듀’를 두 번 되풀이 한다.
이제 바이칼의 석양이 비치었소. 눈을 인 나지막한 산들이 지는 햇빛에 자줏빛을 발하고 있소. 극히 깨끗하고 싸늘한 광경이요. 아듀!
이 편지를 우편에 부치고는 나는 최후의 방랑의 길을 떠나오. 찾을 수도 없고, 편지 받을 수도 없는 곳으로, 부디 평안히 계시오. 일 많이 하시오. 부인께 문안드리오. 내 가족과 정임의 일을 맡기오, 아듀!
최석의 편지를 공개한 역할을 다한 N도 마무리 멘트를 날린다.
“이것으로 최석 군의 편지는 끝났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울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오해가 풀리자 최석의 친딸 순임과 남정임은 어머니와 가족들 그리고 N에게도 말하지 않고 최석을 찾아 시베리아로 떠난다. 그들은 대흥안령 산맥을 지나 시베리아로 가면서 N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오늘 새벽에 흥안령을 지났습니다. 플랫폼의 한란계는 영하 이십삼 도를 가리켰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솜털에 성에가 슬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얗게 분을 바른 것 같습니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도 그와 같이 흰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에는 코털이 얼어서 숨이 끊기고 바람결이 지나가면 눈물이 얼어서 눈썹이 마주 붙습니다. 사람들은 털과 가죽에 싸여서 곰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남정임의 마지막 편지도 들어 있었다.
선생님. 저는 지금 최 선생께서 계시던 바이칼 호반의 그 집에 와서 홀로 누웠습니다. 순임 형은 주인 노파와 함께 F역으로 최 선생을 찾아서 오늘 아침에 떠나고 병든 저만 혼자 누워서 얼음에 싸인 바이칼 호의 눈보라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열은 삼십팔로부터 구도 사이를 오르내리고 기침은 나고 몸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선생님. 저는 하느님을 불러서 축원합니다, 이 실낱같은 생명이 다 타버리기 전에 최 선생의 낯을 다만 일 초 동안이라도 보여지이라고.
그 십여 일 후 최순임으로부터 “아버지의 병이 급하니 돈을 가지고 곧 오기를 바람” 이라는 편지를 받고 N은 그들을 찾아 나섰다.
나는 최석 군의 부인에게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하고 곧 수속을 하였다. 절망으로 알았던 여행권은 사정이 사정인 만큼 곧 발부되었다.
나는 비행기로 여의도를 떠났다. 백설에 개개한 땅을, 남빛으로 푸른 바다를 굽어보는 동안에 대련을 들러 거기서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봉천, 신경, 하얼빈을 거쳐 치치하얼에 들렀다가 만주리로 급행하였다.
웅대한 대륙의 설경도 나에게 아무러한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다만 푸른 하늘과 희고 평평한 땅과의 사이로 한량없이 허공을 날아간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두 친구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생각할 때에 마음에 아무 여유도 없는 까닭이었다.
▼ 중국령 만주와 러시아령 시베리아의 분계점인 만주리 역사 푸레트홈
만주리에서는 비행기를 타려 하였으나 소비에트 관헌이 허락을 아니하여 열차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초조한 몇 밤을 지나고 이르쿠츠크에 내린 것이 오전 두 시. 나는 B 호텔로 이스보스치카라는 마차를 몰았다.
그리고는 B호텔에서 만난 서양 노파와 함께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시베리아 설경 사이로 최석을 찾아간다. 영락없이 <닥터지바고>가 연상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라라의 테마>음악도 들려올 것 같고….
우리는 썰매 하나를 얻어 타고 어디가 길인지 분명치도 아니한 눈속으로 말을 몰았다. 바람은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눈발을 한편으로 비끼는 모양이어서 아름드리 나무들의 한쪽은 하얗게 눈으로 쌓이고 한쪽은 검은 빛이 더욱 돋보였다. 백 척은 넘을 듯한 꼿꼿한 침엽수-전나무 따윈가-들이 어디까지든지, 하늘에서 곧 내리박은 못 모양으로 수없이 서 있는 사이로 우리 썰매는 간다.
땅에 덮인 눈은 새로 피워 놓은 솜같이 희지마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구름 빛과 공기 빛과 어울려서 밥 잦힐 때에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같이 연회색이다. 바람도 불지 아니하고 새도 날지 아니하건마는 나무 높은 가지에 쌓인 눈이 이따금 덩치로 떨어져서는 고요한 수풀 속에 작은 동요를 일으킨다. 우리 썰매가 가는 길이 자연스러운 복잡한 커브를 도는 것을 보면 필시 얼음 언 개천 위로 달리는 모양이었다. 한 시간이나 달린 뒤에 우리 썰매는 늦은 경사지를 올랐다.
말을 아껴는 아라사 사람은 “쭈쭈쭈쭈, 후르르” 하고 주문을 외우듯이 입으로 말을 재촉하고 고삐를 이리 들고 저리 들어 말에게 방향을 가리킬 뿐이요, 채찍은 보이기만 하고 한 번도 쓰지 아니하였다. 그와 말과는 완전히 뜻과 정이 맞는 동지인 듯하였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차차 추워짐을 깨달았다. 발과 무르팍이 시렸다.
N이 마침내 최석의 집에 도착하지만, 최석의 병세는 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N은 먹을 것도 사고 우체국에도 들를 겸하여 이르쿠츠크에 갔다가 우연히 남정임을 극적으로 만난다. 그렇지 않아도 정임을 찾아 최석에게 데리고 가려고 했던 차였기에 N은 급히 남정임을 마차에 태우고 최석에게 달려가지만, 그가 누워있는 어두운 방에 들어섰을 때는 최석은 이미 막 숨을 거둔 뒤였다.
정임은 그 후에도 N을 따라 귀국하지 않고 바이칼 촌에 남았다. 정임이 그 뒤에 어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N이 돌아와서 병을 치료하고 돈이 필요하거든 청구하라는 편지를 해도 답장이 없었다.
N에 의해 후일담이 이어지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만일 정임이 죽었다는 기별이 오면 나는 한 번 더 시베리아에 가서 둘을 가지런히 묻고 ‘두 별 무덤’이라는 비를 세워 줄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정임이 조선으로 오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최석과 정임에게 대한 이 기록을 믿고 그 두 사람에 대한 오해를 풀라.
▼ 영화 <유정>의 제1, 제2, 제3대 포스터들
필자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또 한사람의 해설자로 나섰다. 그래서 극중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이른바 N이란 이니셜로 등장하는 인물을 도와 때로는 문맥을 살리기 위해 각주로 달기도 하면서 사족도 부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감을 하고 보니 가슴 한편이 비어 옴을 감출 수가 없다. 명작이 주는 감동이었으리라….
소설『유정』은 1966년에 처음 영화화 되었는데, 당시 메가폰은 김수영감독이 잡았다. 최석 역은 중후한 연기력의 김진규가 맡았고 여자 히로인 남정임 역은 역시 같은 남정임이 맡아서 열연을 했다. 이게 뭔 소린가하면, 원래 영화 <유정>은 제작단계에서 부록버스터였기에 여주인공 역을 거금을 걸고 공개 캐스팅을 했다. 그래서 1천3백 명의 경쟁자를 뚫고 한 신인이 뽑혔고 영화 한 편으로 일약 대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에 그녀는 본명을 팽겨 치고 평생을 ‘남정임’이란 예명으로 살게 되었다.
또한 당시는 해외촬영은 흔치 않던 시절이라, 당시 러시아와는 외교관계가 없었던 때였으므로, 한 겨울 일본 혹가이도에서 찍었다. 그래서 포스터에도 대문짝만하게 <일본 북해도 올 로케이션> 이라고 선전을 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그 자체로서도 화제거리였다.
영화 <유정>은 그후 폭발적인 인기에 힙 입어 10년 주기로 2편 더 제작되었다. 특히 제2편은 한유경이란 신인을 캐스팅 했는데, 그녀가 극중에서 연주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F장조 <봄>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이르쿠츠크로 돌아갈 막차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갑자기 목이 말랐다. 눈물을 훔쳐가며 명작영화를 보고나서 대낮의 햇살이 비치는 거리로 나왔을 때 느꼈던 그런 갈증이었다. 그래서 전망 좋은 바닷가 카페에 들아가 바이칼의 명물인 훈제오물을 안주로 하여 러시아 흑맥주를 시켜 놓고 바다같은 바이칼의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 수평선 속으로 최석과 남정임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간간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하였다. “아듀 아듀“
나는 최석과 남정임의 애틋한 로맨스가 서려 있는, 명작의 실제 무대인 리스트비앙카를 떠나기 전에, 자작나무 숲속 어딘가에 한글로 쓰여진, <두 별 무덤>이라는 나무묘비명도 있을 것 같아 찾아보고도 싶었다. 그리고 그 숲속에서 자작나무의 요정으로 환생한 남정임이 연주하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F장조도 듣고 싶었다.
첫댓글 한편의 명작영화를 다시보는듯~
바이칼호수 노을과 흑맥주~
자작나무 숲~
멋진 글과 소나타 5번이 멋을
한층 더해주는군요ᆞ
어떻게 해서러도 사진을 한 번~
와우 감동의 도가니~~~~~~~~~~~~~~~~~~~~
내 바구니에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바이칼 , 자적나무 ㅠㅠㅠ
바이칼에서 이광수~~~자작나무-자이리톨껌(추가)~~~ㅎㅎ~~~다정쌤 박학다식쟁이~~~
자작나무는 왜 넣지 않은게요?
자이리틀검이 이 나무로 만든라든가 같은 것도 아는데~ㅋㅋ
여행에서 문학을 거쳐 음악으로... 아 Fruehlingssonaten
...감사합니다...
유정도 읽어봐야겠지만 바이칼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