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한 달이 갔다. 정말 지옥같은 한 달이었다. 매일매일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커다란 검을 둘러매고 대륙 내에서 제일 험준하다는 드래곤의 등에 올라야 했다. 아침나절 동안 내내 50그루의 나무를 베어야 했고, 그 다음에는 그 나무들을 땔감으로 만들기 위해 수 천번씩 검으로 찍어야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높이가 10미터나 되는 거대한 바위에 드래곤과 전사의 그림을 조각해야 했다. 해가 꼴딱 지면 냇가에 가서 목욕을 했다.
하지만 오늘로써 이 일도 끝이다!! 정말 잘 견뎠어 강권!! 역시 넌 대한 건아야.
아! 오늘은 드디어 여행을 떠나는 구나!! 용사가 되기 싫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여행을 떠나야지!! 매일 이런 생활을 한다면 곧 힘이 다 빠져서 가죽만 남을 거야 아마!!
침대에 누워 계속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이불보에 머리를 비벼댔다. 오늘은 드디어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수도로 가서 용사대전에 참석해야 하지만 일단은 그때까지 한 달이라는 여유가 있으니 그때까지는 여행이다.
아침햇살이 방안에까지 들어왔는데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오늘은 없다. 쿠헤헤. 역시 늦잠이란 것은 참 좋다니까. 온 몸에 긴장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다.
으이구!! 그래도 일어나서 준비는 해야겠지?
뿌뜨뜩!!
우엑!! 오랜만에 늦잠이라 몸도 따라오지 않는 구만!!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로 갔다. 한 달이나 여자의 몸으로 있다 보니 별의 별걸 다 배웠다. 일단 화장하는 법을 익혔다. 어!! 이거 오해하지 마쇼!! 일단 난 남자라구!! 하지만 예의란 게 있잖아? 화장이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예의로써 하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여자 몸이니까 예의상 화장을 하는 거지.
그리고 애교를 떠는 법. 뭐? 왜 애교를 떠났구? 그건 당연히 많이 잇점이 있어서지. 뭘 산다고 할 때 애교를 떨면 덤으로 더 준다니까 그러네. 이건 필수로 배워야 하는 거야. 암!!
룰루. 이제 다 끝났다. 흠. 어디, 오우 잘 됐는데. 오늘은 특히 화장발이 잘 받는데!!
"아이야, 이제 준비해야지. 이러다가 해가 중천에 뜨겠네! 오늘 출발은 해야 할 거 아니니?"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알아! 이건 꿈이잖아? 게다가 한 달동안이나 같이 있다보니 이제 엄마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 뭐! 아직 로이한테는 그게 잘 안되지만서도. 아니 하기가 싫어!! 그나저나 이 꿈은 정말 기네. 이거 깨어날 줄을 모르니 말이야.
"예, 준비 다 됐어요. 옷 입고 나갈께요."
아직 여름이 되지는 않았지만 낮에는 더우니까 간단하게 입고 가는 게 좋겠지. 옷장을 열어 어저께 골라놓은 옷을 꺼냈다.
소매가 없는 어깨가 끈으로 된 연두색 나시티에 허벅지에 꽉 붙는 짧은 쫄바지를 입었다. 좀 야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움직이기가 편해서 말이야.
흠. 다 좋은데 나시티 등 중앙에 있는 이 마을 상징인 골드 드래곤이 불을 뿜고 있는 그림은 정말 못 봐주겠다!! 누가 그렸는지 참 우스꽝스럽게 그려놨다. 삼등신의 드래곤의 모습이었는데 장난끼 많아 보이는 그 표정이 참 우스웠다. 하지만 우스워 보이잖아!!
어저께 난 심한 반발을 했지만 마을을 나가는 사람들은 이 마을의 상징인 이 골드 드래곤이 그려진 옷을 입어야 한다는 로이의 강경한 말에 눈물을 머금고 지금 입고 있다.
힝. 마을을 나가면 꼭 다른 걸 사 입어야겠다.
그리고 발목을 두껍게 덥는 양말을 신고 굽이 높은 단화를 신었다. 이게 제일 문제였는데 이 양말과 단화를 신으면 엄청나게 무겁다!! 로이의 말로는 평소에 단련하기에 좋다면서 꼭 신고 다니라고 하는데 어휴!! 게다가 이 단화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발등 부분이 무척 딱딱해서 걷기가 힘들다. 로이의 말로는 발차기할 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던데 하긴 그렇다면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겠지.
옷을 입고 그 위에다가 갑옷을 걸쳤다. 기사나 전사들이 입는 몸 전체를 갑싸는 갑옷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중요한 부분만 감싸는 갑옷이었다. 로이 말로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갑옷이라고 한다. 격투하기에 걸리적거리지 않는 갑옷이었다. 팔, 어깨, 왼쪽 가슴, 허리, 무릎, 그리고 머리를 보호하는 중요한 부분만 가리는 실용적인 갑옷이었다. 전체적으로 푸른색이 은은하게 감도는 갑옷이었는데, 햇볕에 이리저리 비쳐보면 이상한 무늬가 보였다. 무슨 문양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옷까지 다 입고 나오니 식탁에 로이와 엄마가 앉아있었다.
"자 앉아라."
로이가 어울리지도 않게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우엑!! 평소대로 해!! 평소대로!!
"흠. 이제 드디어 시작이구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전투들,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의 만남,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연인의 그림자,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몬스터의 울음소리. 그리고 배신. 캬!!"
차라리 당신이 여행을 떠나지 그래?.
"흠흠. 특별히 작별을 고하지는 않겠다. 꼭 진정한 용사가 되어서 세상을 구해라. 필! 승!"
참 별의 별걸 다하는 구만!
"참. 이건 선물이다."
로이는 커다란 장갑을 건네주었다. 로이 손만한 가죽 장갑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불타오르는 노을 빛깔이었다.
황당하다는 듯이 로이를 쳐다보자 로이는 한 번 껴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당신 손에나 맞을 듯한 장갑을 나한테 주면 어떻게 하냐?
하지만 일단 손에 널널한 감이 무척 많이 드는 장갑을 꼈다. 그래서 이젠 어쩌라고?
양 손으로 서로를 잡아서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주문을 외워야지. 자 따라해 봐. 헤이! 유! 멋쟁이 장갑님!! 나에게 너의 붉은 숨결을 뿜줘!! 오우!!"
.........
할 말을 잃었다. 저런 황당한 경우는 머리털 나고 두번째다. 오우라니?
"자 봤니? 마지막 동작이 중요해. 손으로 크게 하트를 그리며 싱글 웃는 모습으로. 그리고 이때 눈동작과 입동작도 주의를 기울여서 해! 마지막으로 다정하고 정감어린 목소리로 오우!!"
저렇게 해야 하나? 갑자기 인간이 싫어진다.
"자, 빨리 해."
알았다구! 강요하지마! 한다니까!!. 그러니까 에 또.
"헤이, 멋쟁이 장갑님. 나에게 너의 붉은 숨결을 뿜어줘. 오우."
우엑. 내가 말하고도 정내미 떨어진다.
순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갑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우아아!!
놀라서 떨쳐보려고 했지만 장갑은 손에 딱 달라붙었는지 요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파란 불길이 손을 다 덮었지만 이상하게도 뜨겁지가 않았다. 그래서 진정하고 손을 바라보니 장갑이 내 손만하게 작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손만이다. 얼굴은 뜨거워 죽겠다!!
헥헥!!
"어때 손에 딱 맞지 않니?"
어느덧 장갑이 손에 딱 맞는 크기로 줄어있었고, 불길도 씻은 듯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에! 그러니까 환상이었나?
"그 장갑은 불꽃의 숨결이란 장갑이야. 불을 연상시키는 말을 하면 방금 전처럼 불길이 일어. 엄청난 불의 기운이 담긴 장갑이야. 그래뵈도 꽤 유용하다고. 일단 모닥불 필 때나, 밤중에 길을 걸을 때, 그리고 어두운 동굴에 들어갔을 때 참 유용하지."
에, 그러니까 그런 곳에다만 써 봤다는 얘기군. 뭐, 하지만 유용한 물건은 많을수록 좋은 법. 다다익선이라고 하지 않더냐.
"그럼 다녀올께요."
오늘은 햇살도 좋구나. 간다. 모험의 세계로!!
"근데, 나는 가고 싶은데 마을에서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글쎄? 왜 그럴까?"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럼 모두 한 시간 전을 회상해 보자.
먼저 집을 나섰고, 마을에서 나가는 길로 다 왔을 때 마을의 입구에 라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는 함께 수도로 갔으면 했다 뭐, 그러라고 했다. 나 혼자 가는 것도 좀 그랬는데 같이 가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나야 좋지. 그리고 함께 마을을 나왔는데....
분명 마을 문을 나왔는데 어느새 다시 마을로 들어와 있는 거다. 그래서 뒤돌아보니 마을 밖이 눈 앞에 보였다. 내가 귀신에 홀렸나? 이건 괴기 꿈?
그래서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그래서 이번엔 라이와 따로 나가봤다. 그런데 라이가 나갔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더니, 내가 나갈 때는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거다.
엄마야!! 역시 귀신의 짓이야!!
"아이, 다른 길로 가 볼래? 드래곤의 등에 오르는 길 중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어."
라이의 말에 힘을 얻어 이번에는 산으로 오르는 길로 가봤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길로도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이 길은 매일 내가 오르던 길이었는데....
회상 끝!!
모를 땐 물어서 가라!!
"라이. 일단 집에 갔다 올께.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겠어."
제발 귀신이 장난이 아니었으면....
"그래,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께. 아! 그리고 나와 함께 간다는 말 하지마."
"응? 왜?"
"저, 그게.... 여자애가 남자애랑 같이 간다면 좀 걱정하실 거야."
하지만 곧 알게 될텐데, 지금 숨겨서 뭐하냐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뭐.
"응. 알았어. 곧 갔아올께."
그래서 집에 들어갔더니, 로이와 엄마는 내가 나갈 때와 똑같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엥? 한 시간 동안 저러고 있었나?
"저기요. 마을에서 나갈 수가 없는데요?"
흑. 설마 귀신의 장난은 아니겠지요?
"아이야. 미용실에 갔다왔니?"
"미용실이요?"
미용실이라니.?
"아아!! 밖에 나가려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가야지. 그건 기본이잖니. 빨랑 가렴."
에 또 이상한 마을이군. 왜 미용실에 안 가면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거지? 라이는 미용실에 갔다왔나? 호! 하지만 다행이군 귀신의 장난은 아니었어....
"예. 뭐. 그럼 다시 안녕히 계세요."
쩝!! 이거 초반부터 영 안좋은데!!
"어서오세.... 어? 아이구나. 머리하러 왔니?"
"예"
미용실은 마을 앞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그늘 아래에 있었다. 가운데 하나의 기둥에 모자처럼 생긴 지붕이 얹혀 있어서 커다란 버섯처럼 생겼는데, 사방이 다 트여서 누구나 지나가다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 주인이 무시무시하다는 거다. 인상이 나쁘다거나 범상치 못할 근육질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손이 문제다!! 오른손에 글쎄 가위가 달려있다니까!! 그것도 아담한 이발용 가위가 아니라 사람의 목도 자를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가위이다!! 뒤에서 누군가가 커다란 가위를 가지고 스윽스윽 가위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윽,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잠시만 기다려. 빌 부인 머리 좀 만지고 해 줄께."
"걱정마세요. 여기 앉아서 기다리죠."
쿠션에 몸을 푹 기대고 이발하는 것을 보았다. 일명 가위손으로 통하는 오를레이 아저씨는 한 때 잘 나가는 용병이었다고 한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온갖 모험을 했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그러다 전장에서 오른손을 잃었는데, 그 때 동료였던 마법사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가위손을 이식 받았다고 한다.
오를레이 아저씨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위손을 가지고 미용실을 열었는데 원래 자신은 미적 감각이 탁월하기 때문에(글쎄 이 부분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직업이 딱 맞는다고 항상 싱글벙글이었다.(하지만 오를레이 아저씨가 거대한 가위를 들고 싱글거리면 소름이 끼쳤다.)
가위는 분명히 사람의 팔에 부착되어 있고, 생명이 약동하는 살과 피로써 이루어진 것인데, 희한하게도 날이 번뜩 서 있었다. 그래서 저번에 얼마나 날카로운지 시험해보려고 머리카락을 살짝 갖다대었는데 용서도 없이 그냥 두동강이 났다. 에휴.
"어머! 아이가 머리를 하러 왔구나! 드디어 여자로써의 첫발걸음을 떼는 거야?"
무슨 말이야....
날카로운 송곳니가 인상인 레이꼬 아줌마가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난 아무리 봐도 트롤들은 성별을 구분하지 못하겠다. 모두가 잿빛 피부에 엄청난 키, 그리고 인상적인 송곳니.
"그래, 오늘이 떠나는 날이구나. 과연."
에구. 맛있어 보이는데 라는 표정이다.
"드디어 우리 마을에도 용사가 탄생하네. 그래, 그럼 내가 선물을 하나 줄께."
선물? 난 주는 선물은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라네∼ 빨랑 줘요!!
"자, 이거야. 요정의 가루란다. 그러니까 삼십 년 전이었을 거야. 그날도 오늘처럼 무척 화창한 날씨였지. 난 딸기잼을 만들려고 숲 속으로 들어갔어. 한창 딸기를 따고 있는데 카트가 주춤주춤 나한테 걸어왔어. 그 수줍은 모습이라니....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니까?"
그러니까 웃지 말아요. 소름이 돋는 다니까.
"그 때 카트는 요정의 가루를 나한테 내밀면서 청혼했지. 그때는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았는데...."
헤.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겠네요. 으르렁거리며 앙증맞은 딸기를 따는 커다란 손의 트롤과 수줍은 듯 송곳니를 으르렁거리며 주춤대는 트롤의 모습이라!!
우엑. 눈만 버리겠다!!
"....그래서 널 보면 예전에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고이 간직했던 거지만 이제 너한테 줄께. 아마 꽤 도움이 될거야."
레이꼬 아줌마는 나를 보며 다시금 씨익 멋들어진 공포의 미소를 지었다. 헉! 심자잉야.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다니까.
게다가 뭐!! 대체 아줌마하고 나하고 닮은 점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끔직한 말을 남발하는 거지? 하지만 준다는 것을 마다할 수는 없는 일. 일단 웃자!!
레이꼬 아줌마는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주었다. 주머니는 무늬가 없는 동물 가죽으로 된 갈색 주머니였는데 목 부분에 끈이 달려 허리춤에 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끈을 약간 풀어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얼래! 장난하나!!
내가 말없이 주머니 안을 가리키자 레이꼬 아줌마는 뒤집어질 듯 웃었다. 어어! 흔들지 말아요. 그 큰 몸집에 그러면 이 집 무너질거야!
"크워워, 요정의 가루는 그 안에 들어있지 않아. 하지만 그 속에 있지.?"
지금 수수께끼 놀이 하세요?
"요정의 가루는 다른 세계의 것이거든. 손가락을 안에다 넣어봐."
레이꼬 아줌마의 말대로 주머니 안에 두번째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겹쳐서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는데 점차 손가락 끝이 따뜻해지더니 주머니 안에서 빛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손가락을 주머니에서 빼서 눈앞으로 가져오자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빛나고 있는 가루가 보였다.
"이게 요정의 가룬가요?"
레이꼬 아줌마는 내 손가락 끝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갈망하는 눈동자로(내가 보기에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느낌에 그랬다.) 쳐다보았다.
"그래, 이 빛이야.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음. 오랜만이라?
"요정의 가루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게만 그 힘을 빌려준단다. 그 효능도 가지가지야. 원하는 데로 효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점이 있지만. 그래, 내가 그 빛을 보지 못한지 벌써 이십 년이 넘었구나. 역시 내가 제대로 찍었네. 난 네가 그 요정의 가루를 쓸 수 있을 줄 알았어. 요정의 가루를 쓸 때는 간절히 빌면서 공중에 뿌리면 돼. 그러면 어떻게든 이루어지지. 어떻게든...."
레이꼬 아줌마는 말 끝머리를 흐리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손가락 끝에서 빛나는 요정의 가루를 보면서 말끔이 잊어버렸다. 말끔이!!
그래, 간절히 빌면 된다고 했지? 어디. 뭐, 재미난 일 좀 없나?
손가락 끝을 입에 가져다 대고 살며시 불었다. 요정의 가루가 입김에 쓸려 표표히 하늘로 날아올라 담배연기 마냥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으악!"
순간 몸이 들썩이더니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지붕에 머리를 부딪히고 다시 떨어져 바닥에 엉덩이를 부딪히고, 그렇게 다섯 번을 왕복한 다음 바닥에 널부러졌다.
아이고, 하나님.
"케케케케케."
"취익익익익."
미용실에 있던 모든 종족들이, 그러니까 자세히 설명하자면 오크, 트롤, 미노타우루스 등등이 갖가지 목소리로 웃어제꼈다. 우. 쪽팔려.
"뭔가 재미있는 걸 빌었나 보구나. 케케. 요정의 가루는 워낙 장난이 심해서 소원을 자기 멋대로 들어주거든. 조심해서 다루념."
으으윽. 알았습니다. 몸소 느꼈습니다요.
"아이야, 이제 다 됐다. 와서 앉으렴."
.........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진다. 햇살에 반짝이는 날카로운 가위날, 그와 쌍벽으로 빛나는 오를레이 아저씨의 누런 금니, 그리고 끝이 올라간 입꼬리. 왜 오를레이 아저씨는 가위만 들면 저런 사악한 표정을 짓지? 미스테리다.
의자에 앉자 오를레이 아저씨가 왼손 하나로 멋들어지게 이발천을 내 목에 감쌌다. 역시 직업정신이 투철해.
"최대한 빨리 해줄께 잠시만 참아."
으아아!!
"아니요. 꽉차게 시간을 써서 천천히 해주셔도 돼요."
절대로 목을 자르시면 안돼요!!
사각사각!!
목덜미 근처에서 커다란 가위손이 왔다갔다했다. 목덜미에 차가운 가위날이 닿을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거 공포영화를 따로 볼 필요가 없겠군.
"어떻게 잘라줄까아아아."
왜 여기서 메아리가 치지. 꼭 내 몸을 자르겠다는 말 같잖아. 이래서 공포영화를 많이 보면 안된다니까!!
"그..냥.. 좀만.. 다. 다. 듬어 주세요.."
나 지금 떨고 있니?
사각사각!!
다시 가위가 목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왜 하필 목을 사이에 두고 그런담.
"그래. 그 다음 얘기야."
오를레이 아저씨는 동네 꼬마들한테(에? 난 꼬마가 아니지만 일단 얘기 듣는 걸 좋아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신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일단 들어두는 게 좋겠지?
"내 손이 잘리고 난 그때 내 동료였던 나라이의 소개로 한 마법사를 찾아갔단다. 그는 키메라를 연구하고 있던 마법사인데 내 손을 보더니 신경이 너무 많이 끊겨서 다시 옛날처럼 움직이는 사람 손을 붙이는 것은 힘들겠다고 하더라. 아! 키메라가 뭔지는 알고 있지? 모른다고?"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네 그려.
"키메라는 마법사가 만든 인공 생명체란다. 식물의 접붙이기는 알고 있지? 그것과 비슷해. 다른 종족끼리 붙여서 전혀 다른 생물을 만드는 거지. 키메라의 기술을 이용해서 그 마법사는 부분적으로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을 시험하고 있었어. 난 당연히 실험에 응했어. 솔직히 이대로는 무엇도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손이 안된다면 무엇을 붙여야 좋을까 생각 중에 가위 종류가 눈에 띄었어. 난 예전부터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것을 달아줄 수 있냐고 물었지. 그리고 가위를 붙였어. 이 가위는 사마귀처럼 생긴 몬스터인 맨체스터의 앞발을 이용해서 만든 거야. 무척 날카롭지. 그리고 전혀 갈지 않아도 녹슬지 않고 말이야. 정말 아름답지 않니"
그러니까, 다 깎았으면 이제 가도 되지 않나요?
오를레이 아저씨의 옛날 이야기 동안에 벌써 이발이 끝났다. 에휴. 다행히 목이 남아있군 그래. 솔직히 내 목 걱정하는 바람에 오를레이 아저씨의 얘기는 잘 듣지 못했다. 죄송해요..
"이건 서비스야."
오를레이 아저씨는 내 머리를 한데 모아서 푸른색 천으로 둘둘 말아 묶었다. 뒷머리가 뭉툭하게 묶여서 천 밑으로 말꼬랑지 마냥 살랑거렸다.
"옛날 용병 시절에 친구한테서 받았던 거야. 잘 어울리네. 이게 너의 앞길에 축복을 가져다 줄거야. 소중한 거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