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천관 칼럼]
회령진포와 회령진성 랜드마크 문제
-콘크리트 사각건물 면사무소를 세워놓기보다는
이제 10년은 지났을까? 해산토굴 한승원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먼저 와있던 장흥의 유지들(당시 부군수와 몇 간부도 있었다)과 합석하였는데, 아마 ‘장흥문학관’ 추진에 관한 이야기 끝에 “기왕에 상징성과 실용성을 살리면서 그 자체로 ‘건축미’가 있어야 함에도 늘 사각 콘크리트 건물 달랑 지어놓고 말아 늘 아쉽다.”고 조심스럽게 발언하였는데, 다음날 서울로 걸려온 전화는 “어제 고향 험담을 하고 갔느냐?”는 것이었다. 황당했지만, 그때 그 생각은 변함없다. 지금도 그저 사납게 서 있거나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월간천관 1월호(이제석 기고문)>의 언급처럼, 필자가 ‘회령포 축제’ 강연에서 회령진포 역사성을 살리는 회령진성 복원작업을 추진한다면, 회진면사무소를 새로 짓더라도 예컨대 ‘판옥선 모형’으로 지을 수 있어야한다고 말했었다. 총체적 시너지 효과를 위하여 면사무소 외부 모습부터 회령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되, 그 내부에 ‘이충무공 자료관, 이청준 문학자료관, 회령포 역사관, 회진(대덕) 김 산업역사관’을 설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도였다.(그 무렵 장흥의병들,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 참석자명단, 회령포 만호명단 등은 ‘회령포 역사관’으로 재조명할 수 있겠다.) 그날 청중이던 회진의 이제석씨가 ‘재기(再起)의 장소 회령포를, 윤수옥 전 장흥문화원장님은 ‘판소리 회령진포’를 제안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좋은 의견으로 판단된다.
무릇 장흥뿐만 아니다. 여러 지자체가 역사적 복원을 관광수익 창출에 연계한다고 장담하지만, 의도대로 성공한 경우는 퍽 드물다. 그렇다면 장흥 회진포(회령진성)의 장점과 경쟁력은 어디에 있는가?
장차 지역경쟁력은 ‘군 단위’가 아니라 ‘마을(거점)단위’로 이루어질 것인데, 장흥군 인구감소의 심화 속에서도 ‘회진’ 마을은 역사적, 산업적 경쟁력을 나름 유지할 것으로 예견한다.
서울에서 너무 멀고 이른바 GTX 교통권에서 소외된 사정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다만 몇 조건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저 ‘이순신 공원화사업, 회령진성 복원’으로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복합적 메시지의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
한쪽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중심으로 ‘회령포 결의’와 ‘난중일기의 회령포 3일 기록’, 장흥향선 10척 참여, 장흥사람 ‘조선감 김세호’의 장작귀선(粧作龜船)과 덕도 황씨집안 목수들의 조선수군 재건참여 등을 그 주제와 소재로 삼을 수 있겠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는 ‘회진의 이청준과 한승원 문학의 현장, 일제기에 한때 전국 1위를 했던 대덕 김과 여타 매생이의 생산현장’ 등을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회령포’는 어제와 오늘을 위한 양수겸장의 기회가 되어야 하며, 미래를 잇는 총체적 시너지 효과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순신’을 내세우는 회령포 역사사업에 더불어 ‘눈길을 떠나는 이청준’과 ‘선학동으로 돌아온 이청준’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회령포 축제’ 안에 예컨대 이순신 책자에 관한 출판사와 서점들의 ‘작은 축제’를 해볼 만하겠다.
또한 그때 이순신 장군처럼 고뇌 속에 재기를 다짐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회령포 치유장소’를 만들어 볼 만하다(남도바다를 내려다보며, ‘청태전’과 ‘치유 커피’를 마시는 ‘회령포 재기타워’를 세워볼 수도 있겠다). 이런 여러 일들에는 ‘전시공간, 도서공간, 무대공간, 회의공간, 휴식공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으니, 한정된 예산 속에서나마 회진면사무소의 복합적 기능과 역할이 한결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더 멀리 바라보고 차분하게 정비하자. 상투적인 모습의 이순신 동상을 세워놓고, 몇 그림 사진과 판넬 지도를 붙여놓고, 몇 비디오 화면시설을 해놓고 역사적 복원이라 운운하지는 말자.
먹고 마시며 예산을 까먹기만 하는 소모성 축제라면 당장 그만둘 일이다. 회령진 성터의 석성석물(石城石物)의 복원 완공으로 그 성공이 보장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복원되어질 옛 성곽 옆에 콘크리트 사각건물 면사무소를 세워놓기보다는 예컨대 ‘판옥선형, 성곽성채형’ 건물을 세우든지, 하다못해 ‘한옥형’ 외관 건물로 지어봄이 낫지 않을까?
이런 부분은 당장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돌이켜 절차적으로 장기적인 숙고와 논의가 필요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여본다. ‘삼도수군통제사 회령포 취임식 연극제’를 시도한다면, 대덕중과 회진중을 비롯하여 장흥관내 학생들에게 좋은 체험이 될 수 있겠다, 터무니없는 파직 및 고문, 모친의 갑작스런 타계를 당하고서 백의종군을 거쳐 다시 삼도통제사가 된 ‘이순신’에게 충(忠)과 효(孝)는 무엇인가? 왕의 지시대로 조선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쳐야만 하는가? 칠천량 패전에도 불구하고 왕의 교서에 숙배를 하지 아니하고, 이순신에게 불손한 ‘배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쪽 피난길을 마다하고 이순신을 되찾은 장흥향선 십선가(十船家)의 의(義)는 어떠한가? 회령포에 먼저 도착하여 군선정비를 하던 중에 어떤 장흥선비의 상처(喪妻) 운구에 배를 빌려준 일로 곤장을 맞은 ‘회령포 만호’를 어찌 보아야 하는가?
이순신을 내내 추종하며 임진 정유년에 목숨을 바친 장흥의 초계변씨 자질(子姪)들의 충훈을 회령포에서 함께 기릴 수는 없는가?
요컨대 ‘장흥 회령포’는 지금도 기회와 재기의 장소가 될 수 있다. ‘한달 전, 칠천량 패전’에서 ‘한달 후, 울돌목 명량대첩’으로 가는 길목 중간에 ‘장흥 회령포’라는 징검다리 디딤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