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예수
요 8:48-59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 8:48-59 / [아브라함 이전에도 내가 있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며 귀신이 들려도 단단히 들린 사람이오!' 하고 소리 질렀다. 4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욕하고 있다. 50) 나는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영광을 구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시다. 5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52) 유대인 지도자들이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귀신 들렸다는 것을 똑똑히 알았소. 아브라함도, 능력 있던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는데 당신은 당신 말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니 53) 그래,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단 말이오? 그리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요?' 5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바로 너희가 주장하는 너희의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 주신다. 55) 너희는 내 아버지를 모르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만일 내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실로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 5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기를 기대하였고, 내가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대인 지도자들이 대들었다. `당신은 아직 나이 쉰 살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5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잘 들어 두어라.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내가 있었다.' 59)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무시하는 유대인들(48)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율법에 대한 해석을 부정하시고, 자신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를 향하여 사마리아 사람, 귀신들린 자라고 대꾸합니다. 이 말은 예수를 무시하는 폭언으로 당시 상스러운 욕으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던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입니다(수 16-17장). 그런데 주전 722년 앗수르 왕 사르곤 2세기 이곳을 점령한 후 이곳 백성들을 앗수르로, 앗수르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함께 살게 함으로서 혈통적이나 종교적 순수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의 상종을 금하였고(요 4:9)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스 4:1-6).
유대인을 책망하시는 예수(49-53)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하여 사마리아인이라는 비난에는 반박도 하지 않으시고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지만, 예수가 선포하는 진리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런 죄에서 해방되어 의롭다함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될 것(롬 6:22)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영생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로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선지자들이 다 죽었는데 영생의 이야기를 하는 예수를 귀신들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향하여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 너는 누구냐라고 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요 5:18) 예수의 정체성을 다시한번 확인합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54-59) 유대인들은 서로 자신들의 영광만을 구하지만(요 5:44), 예수께서는 당연히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 2:6-8).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현실적인 한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의 영원한 신성을 깨닫지 못하였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올 것을 보고 기뻐했던 것처럼 그들도 예수를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그 자리에서 피하십니다.
적용: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요 혈통적으로 이미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형식에 얽매여 있는 율법적인 삶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일은 없는지요?
우리가 속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사랑, 겸손, 지혜를 드러내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론 사람들의 오해, 무시, 공격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며 어떤 가치로 살아가고 있는지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 설 교 >
태초부터 존재하신 분
요한복음 8장 48~59절 / 하용조 목사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냥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이성보다 높은 단계입니다. 이성을 넘어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관한 모든 축복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구원의 축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육체에 한정된 인간의 이성으로 영원하신 하나님 이해할 수 없어
이성 넘어선 믿음 가질 때 구원의 축복 임하실 것
우리는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다거나 사랑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현대인의 정신병은 사랑의 결핍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해서 생긴 병입니다. 우리는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주고받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이 변치 않을 거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거짓말이라도 그런 고백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죽을 때가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큰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을 차치하고라도, 우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변명하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을 미워하고 있으며 법과 도덕적 기준으로 닦달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시간 40일
예수님께서 부활한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동행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매우 중요한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시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이후로 인간적 개념의 시간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때와 공간을 초원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나 누릴 수 있는 시간 개념으로 40일 동안 특별히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육체를 가졌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후에 부활의 몸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고 이 세상을 떠날 때 만날 수 있는 시차 초월의 경험을, 예수님께서 이미 2천년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 생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도 육신의 시간밖에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늘의 시간과 땅의 시간을 접목시킨 부활의 시간을 보여줍니다.
▶평강과 비전을 주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하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절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가난, 질병, 실패 등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미래를 포기해 버리게 만드는 것이 공포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실을 아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인생의 목적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은 삶의 목적을 상실해 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방황’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방황하는 사람들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인생에 대해 허무함만 가득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40일 인생의 목적과 희망을 주시는 일을 지속하셨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해 상당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사람이 죄책감을 가지게 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혼자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죄의식을 씻겨주셨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세 번이나 예수님을 인정케 함으로써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두려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강과 위로를 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 희망, 비전, 사명,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주제는 예수님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눈앞에 예수님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성, 경험, 지식 등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다”라는 말씀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상대방을 멸시하고 조롱할 때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감정에 다라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쓰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종교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을 따라다니게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미혹해 이단으로 몰고 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에 들렸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마음으로 먹는 것
49절과 5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님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유대인들은 귀신 들린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귀신 들린 것이 아님을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스스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5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진리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51절 말씀의 원문을 보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먹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고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갈등이 생기는 것은 작은 머리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무한하고 영원하신 창조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와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분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가 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만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것이 세상입니다. 내가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손바닥뿐입니다. 만지지 못하고 느낄 수 있는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자연 세계보다 더 넓은 것이 영적 세계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의 존재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간 육체의 한정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이성을 넘어선 믿음을 가져야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존재이지 창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주처럼 여깁니다. 인간의 이성, 논리, 경험, 사상 등으로 하나님이 잡히지 않는다고 그분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한다고 해서 태양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태양은 비추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먼저 계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지식의 잣대로 모든 사물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우리가 계산하고 평가한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과 본질에 대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정답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철학을 만들었고 철학으로 풀리지 않자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냥 믿어야 합니다. 성경의 논리가 인간의 상식이나 이성보다 높은 수준입니다. 이성의 끝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성보다 높은 단계입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선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영생’이라 합니다. 인간의 실존은 죽음에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불안해하고 공포에 떱니다. 사람은 건강하든 병들었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누구라도 죽음이라는 실재를 맛보게 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결코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52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들은 ‘죽음을 맛본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 그리고 조상들도 모두 죽었는데, 인간인 너의 말을 들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원리, 주장, 결론 등은 항상 똑같습니다. 54절부터 56절 말씀까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4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영광을 돌리는 것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분에게다’, ‘나는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확실히 아는 것만 말한다’, ‘너희가 말하는 조상 아브라함은 나를 보고 기뻐했다.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57절 말씀에서 유대인들은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인간이시지만,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8절과 5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혼돈을 느낍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는 누구인가? 왜 그는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분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을 가진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논리가 일사천리로 풀리게 됩니다.
▶축복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논리로 불가능한 부활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태초부터 계셨던 영원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사실이 되고,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내쫓으려 했고 죽이려 했습니다. 2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런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시대에 처해 있다고 말하지만 당시 로마의 압제 하에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큰 혼란에 있었던 환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칼과 창으로 전쟁하느냐, 미사일로 전쟁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인간의 죄,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관한 모든 축복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구원의 축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여 주셔서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존재하신 분임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브라함보다 크신 예수님
김영규 목사
당신은 사마리아인, 귀신들린 사람이오?
본문도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신분과 관련된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앞서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는 영원히 죄의 노예가 된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선언하신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감정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48) 유대인들의 공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마리아 사람이란 모욕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란 말은 당시 유대인에게는 모욕적인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이란 말은 잡종이요 이단자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이스라엘 10지파가 살던 지역인데 B.C.722년 앗시리아의 산헤립에게 멸망당했습니다.(왕하17:24-33)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앗시리아 왕국 여러 곳으로 끌어다 놓았고, 반대로 각처의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끌어다 이주시켰습니다. 그 결과 혈통이 흐려진 것은 물론 종교적으로도 우상과 여호와 종교가 혼합된 잡종교로 전락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이 모욕에 대해서 주님은 일체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는 귀신들렸다는 공격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귀신들렸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곧 미쳤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니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미쳤다고 대들었습니다. 주님은 이 말에 대해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49) 예수님은 귀신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리지 않은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을 공경한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들렸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결코 찬송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아멘”하지 않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마12:24,막3:22,마9:34,11:18) 하나님을 높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공경하는 예수님을 감히 귀신들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리지 않은 두 번째 증거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50)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이타적인 사람은 결코 귀신 들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 하고, 사람에게 영광을 구했습니다. 옷차림을 거창하게 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온갖 위엄을 갖추고, 형식과 의식을 지켰습니다. 귀신의 하수인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높아지거나 존경받기 위해서 애쓰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높이셨습니다. 최상급으로 높이셨습니다. 사람이 주는 영광은 사실상 별 것 아닙니다. 받아도 별 유익이 없습니다.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고 해서 죽을병이 낫습니까, 인생이 달라집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주시면 영혼이 살아납니다. 죽을병이 낫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기쁨을 얻습니다. 귀신을 쫓아냅니다. 죄를 이깁니다. 능력을 행합니다. 인생이 달라져요.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주실 때에 만물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누가 정말 귀신들렸는지? 누가 영광 받을 존재인지? 그 판단을 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 예수님이 구원자시며, 신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제압하신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헐뜯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다, 귀신 들렸다! 주님은 이들에게 반박하십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를 믿으면 죽음을 보지 않아! 나는 너희의 죽음을 해결하러 온 구세주야! 나는 너희를 죽음에서 구원할 메시아야! 51절을 보세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진실로 진실로’의 귀절입니다. 본문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구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내 말을 지키면’ 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지킨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킨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내 말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내 말’(τον εμον λογον)의 뜻은 ‘주님의 모든 말씀’ 곧, 구원 도리인 복음과 윤리적 교훈들을 총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주님이 전하신 말씀 전체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이 쓴 글에 보면 ‘지킨다’는 동사가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18번, 요한1서에 7번, 요한계시록에 11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이란, 곧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15,23)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종교 개혁자 죤 칼빈은 본문에 “지킨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당나귀처럼 목이나 꺼떡거려 찬성을 표시하거나, 혀로 공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물처럼 그 가르침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기는 것은 곧 주님을 믿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당연히 그의 말씀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 지킬 것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선전하는 사람이나, 주님의 말씀이 다 옳다고 찬성하는 사람이 참 신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참 신자입니다.
둘째로, 죽음을 보지 않는다(never see death)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 표현이 좀 색다릅니다. 죽는다는 말입니까?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죽음을 보지 않는다 하니까 당장 유대인들이 대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52) 유대인들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을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죽었고, 위대한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예수 당신이 누구기에 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가? 예수 자신이 죽지 않는 것도 이상한 데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 하니 무슨 말인가? 다른 사람들까지 죽지 않게 한다는 말이 아닌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영적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즉시 그 영혼은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모든 형벌을 면합니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적 신분의 회복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영혼 구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죽음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 된 질문을 합니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 주님은 영적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비록 육신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죽음에 집중하지 않고 생명에 집중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내다보고 안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never see death)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never taste of death)는 말로 오해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볼 필요도 없고,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장차 다시 사는 부활만 보고 기뻐하며,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만을 누리면서 삽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영생을 주신 분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 합니까?
이제 관심은 다시 예수님의 신분에 모아집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2-53) 당신은 아브라함보다 큰 사람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세 가지로 자기 신분을 밝히십니다. 즉, 자신이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 가지로 밝힙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 내게 영광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4) 영광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 영광을 받는 대상도 하나님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스스로 영광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취하는 영광은 가치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어깨에 훈장을 달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잘났다고 칭찬하고 사람들에게 존경하라고 하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유대인들은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자기들만이 인류의 머리요, 선민이요, 다른 민족들은 짐승 같은 종족들이요 무가치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식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첫째는 주님은 본성적으로 영광 받으실 분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하십니다. 흠이 없으십니다.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의로우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예수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사역 또한 영광 받으실만합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죄인들로 정죄를 면케 하셨습니다. 사망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죄로 죽은 사람들을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전지성 역시 신성의 증표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부만 알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는 분이 있다면 곧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55) 주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잘 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사실상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바가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르고 행동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무식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만 사실상 아브라함 자신이나, 그의 자손들, 이삭, 야곱, 유다, 다윗도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무지 속에서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선민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하나님을 모르고 원망과 불평 속에 헤맸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언제나 우상과 음란과 속에서 살았습니다. 포로기 이후에 유다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는데 열을 올렸으며, 탈무드란 거창한 유물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을 아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았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배척하고 죽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브라함 이후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하나님께 대한 무식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안다. 55절에 보면 ‘안다’는 말이 두 가지 단어로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안다고 할 때는 γινωσκω 란 말을 썼습니다. 배우고 익히고 경험해서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안다고 할때는 οιδα 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것은 배우거나 익히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에 대해서 배워서 알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다 보고 아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구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조건입니다.
참 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신앙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아는 길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서로 깊이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현직 대통령을 알지만 그분은 나를 모릅니다. 이것은 아는 게 아닙니다. 서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대화를 하고, 주고받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있어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이렇게 예수님을 아는 것! 결국은 영접, 믿음, 말씀을 지키는 것과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진정한 신자입니다. 오래 전에 모 교단에서 커다란 광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 교단에 속한 신학대학에 교수로 있는 어떤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한다는 성명서였습니다. 그들은 신학대학 교수였지만 예수를 유일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동정녀 탄생,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진리를 남들이 알기 어려운 철학적인 말로 바꿨습니다. 그들은 세계 종교를 통달한 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교학에 통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학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대상은 물질세계가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연구 자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啓示이지 인간의 論理나 물질적인 證據들이 아닙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아는가? 종교를 비교하고 힘든 말로 설명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밤낮 신학을 연구했지만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학문적으로 배워서 알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어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영접하고, 내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전부터, 영원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한성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신성의 증표입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계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뻐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여기서 두 가지 문구에 주목해야합니다. 첫째는 ‘나의 때’라는 말이고 둘째는 ‘보고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나의 때’란 어느 때일까요? 어떤 이들은 주님의 재림 때라고 주장합니다.(빌1:10,2:16) 또 어떤 이들은 주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까지의 모든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이 두 가지 견해를 다 포함하여 메시야의 시대를 일컫는 것으로 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난다는 사실을 듣고 소망하면서 살았습니다.(창15:5-6,22:18)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보고 기뻐했다’는 말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보았다는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현재 낙원에서 예수님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눅16장) 그러나 본문의 동사는 과거형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은, 아브라함 당시에 믿음으로 멀리서 바라보았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히11:1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후손 중 메시야가 날 것을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에 민족을 이루고 번영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아들을 낳아 ‘이삭’(웃음)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미래적 축복을 보고 기뻐했습니다.(창24:1)
유대인들은 이 말에 대하여 반문했습니다. “네가 아직 50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7)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시작할 때의 나이를 30세쯤이라고 했습니다.(눅3:23) 주님의 구원 사역은 약 3년 반가량 계속됐습니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주님은 30대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50대를 기준으로 얘기했습니다. 50이란 나이는 노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요, 인간으로서 가장 완숙한 나이요, 제사장들이 은퇴하는 나입니다.(민4:3) 이렇게 완숙한 나이도 못되는 사람이 어찌 수천 년 전의 아브라함과 관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확실히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다음 말씀이 이어집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 ‘진실로 진실로’로 시작되는 중요한 귀절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先在를 주장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기 이전부터 존재하셨습니다. 이점이 바로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합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태어났다’(γενεσθαι )고 했습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있다’(εγω ειμι)고 하셨습니다. ‘내가 있다’(εγω ειμι)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예수님은 초시간적 초역사적 존재시며 동시에 시간 세계 안에도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내가있다’는 말은 히브리 말로 “하야”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엄중한 존재를 백성들에게 나타내실 때 사용하신 귀절입니다.(신32:39, 사41:4, 43:10, 46:4)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의 명칭인 ‘여호와’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영원 자존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발언 중에 εγω ειμι 의 구절이 많습니다. 주님은 여호와처럼 영원히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1) 이것이 예수님이 자신에 관해서 선언하신 말씀의 결론입니다.
돌로 치려함 : 불행한 반응들
오늘 말씀의 결과 역시 불행한 반응들로 이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 이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칭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그때에 사람들이 집어 던지려고 하던 돌멩이는 헤롯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면서 놔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 성전의 주인이요 실체이신 주님을 쓸모없는 성전의 돌멩이로 치려고 했습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유대인의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시기 위해 애쓰시고, 거기서 밤낮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배척에 밀려서 그 성전을 떠나십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만의 성전이지 결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떠나가고 껍데기 성전만 남았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서 눈먼 사람에게로 가셨습니다.(9장) 눈 뜬 장님들인 유대인들을 떠나서 영의 눈을 뜨려고 하는 육신의 장님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구주로 인정하고 전적으로 믿고 신뢰할 것인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아무쪼록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잘난 척 하지 말고, 겸손히 모른다고 고백하세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내 인생 전부를 맡기세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을 얻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 된 삶을 시작하세요.
도전받는 진리
임덕순 목사 / 2011.01.07.
여러분, 6월 2일이 무엇하는 날인지 다 아시지요? 지방선거를 하는 날입니다. 그날 투표장에 가면 유권자 한 사람당 여덟 군데에 표를 찍어야 한답니다. 서울시민의 경우, 시장 한명을 찍어야 하고, 시의원한명을 찍어야 한답니다. 그리고 구청장 한명과 구의원 한명도 찍어야 한답니다. 그리고 비례대표 시의원 한명을 더 뽑기 위해 지지하는 정당 한당을 찍어야 하고, 비례대표 구의원을 한명 더 뽑기 위해 구의원을 낸 정당을 하나 더 찍어야 한답니다. 그러면 벌써 여섯 명입니다. 그 다음에는 서울시교육감 한명을 찍어야 하고, 교육의원 한명을 더 찍어야 하기 때문에 합계 여덟 번이나 붓 뚜껑을 찍고 나와야 한답니다. 매우 복잡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누구를 찍어야 할지가 더 문제입니다. 정치의 세계에는 언제나 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야는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어떤 것은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서로가 자기주장이 옳다고 하고 상대방의 주장은 나쁘다고 매도합니다. 그럴 때 똑똑한 유권자는 중간에 똑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주장과 비난을 일방적으로 편들지 말고, 두 사람의 주장과 비난에는 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중에서 누구의 말이 좀 더 타당성이 있고 정직한 말로 들리느냐를 따져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이 나라 주인인 유권자가 할 일입니다. 정직한 정치인이라면 자기 신념이 있어서 그것을 실현시켜 보려고 정치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감이나 신념은 하나도 없고 단지 욕심 때문에 정치판에 뛰어든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래서 유권자의 책임이 큰 것입니다. 아무나 그냥 찍으면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학문이나 정치적인 신념은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두가 상대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 반대 의견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습니다. 사람은 완전한 신이 아니라 생각이나 능력에 제한과 모순이 가득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는 다릅니다. 신앙이란 상대적인 신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절대 진리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종교를 믿으면서도 그것을 절대 진리라고 믿고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믿으면 자기에게 나쁠 것은 없으니까 믿는다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종교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명과 내세를 걸고 오늘의 자기의 삶을 헌신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인간에게 영생과 내세를 보장하는 진짜 종교가 둘 일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 종교가 옳다면 저 종교는 틀림없이 거짓입니다. 그래서 종교 간의 싸움은 양보가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교회를 이단이라고 했다면, - 그것이 단순한 시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상당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한 말이라면, - 이단이라는 지목을 받은 쪽은 완전히 위기에 빠집니다. 그들이 그동안 해왔던 모든 가르침은 거짓말이고, 그동안 드렸던 모든 예배가 헛고생이며, 그들이 해온 모든 봉사와 사업도 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 아니라 사단이 모임이 되고 말기 때문에, 이단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려듭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 싸움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갑자기 예수님을 향하여 “너는 귀신 들린 사람이 틀림없다”면서 정면으로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48)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너는 더러운 사마리아 사람이고, 미친 사람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앞을 다투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덤볐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상종할 수 없다며 욕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의 종파 중에서 바리새파는 가장 큰 종파이고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었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가르침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편인 줄 알고 예수님을 껴안으려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길과 자기들의 길이 다른 것이 점점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천국도 믿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믿고, 영생과 부활도 믿지만, 말로만 믿지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내세의 부활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오늘을 헌신하며 바르게 살 생각은 없었고, 적당하게 겉모양만 내서 남들에게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을 원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오늘을 힘들게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나 자신의 마음에 위안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하셨더니, 주님의 책망을 받자 예수님더러 귀신들려서 미친 사람이라고 대들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현대 종교인들의 특징은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신앙에 목숨 걸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벼운 도움이나 받아보려고 교회에 나오고 종교를 가지지, 종교에 생명이 걸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 길이고 무엇이 그른 길인지 구분하려는 생각도 없고, 아무런 부담 없이 교회에 다니려고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가 바른 진리로 인도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보다, 이 교회가 나를 인정해 주느냐 나를 소홀하기 여기느냐 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아무리 하늘의 보화를 꺼내다 준다 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으면 이 교회는 틀렸다고 고개를 돌리고 떠나가 버립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한번 뿐인 목숨을 가지고 세상을 잠깐 살다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집도 아니고 좋은 음식도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신앙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잠깐 사는 동안에 진리를 믿고 살면 구원과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지만,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잠깐의 가벼운 삶이 끝난 후에 무섭고 영원한 형벌의 날이 엄연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을 가는 존재이고, 어떤 길을 걸어갔느냐에 따라서 종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길이라고 표현하였고, 예수님 자신을 모든 인간이 가야 만 하는 구원의 그 길이요, 그 진리라고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만이 영생의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그 길이고, 다른 길은 세상에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믿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위대한 분으로 인정하고 가볍게 그 가르침을 가끔씩 듣겠다는 정도로 신앙생활해서는 안되고, 오직 그분의 말씀만을 진리로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라가는 길을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맞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의 가산을 삼키는 악을 행하면서도 밖으로 드러나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했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도 자주 했고, 옷소매에 성경구절도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며, 무 뿌리도 일일이 세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고 형식일 뿐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바리새인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하려는 사람이 적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심각한 결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어집니다. 목숨 걸고 진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적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려고 불구덩이에 스스로 들어가면서,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불에서 구원해 주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행동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장차 얻을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의 육체적인 생명도 내 놓을 수 있는 결단입니다.
신앙은 가벼운 문화상품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은 “나의 인생길을 어느 길로 걸어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가장 엄숙한 일입니다. 하늘아래서 생명을 가지고 공기를 마시며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신앙의 선택은 가벼운 문화상품 선택이 아니라 생명의 선택입니다.
신30:19-20에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라.”고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성도들은 세상 재미는 재미대로 누리면서, 신앙생활도 잘 해보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둘을 다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을 다 가지려고 하면, 결국은 신앙이 밀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신앙은 장식품이 될 뿐이지 자기의 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저 끝에는 영생이 있다고 확신하고,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꿋꿋하게 걸어가는 비상구이지, 구경나온 산책코스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산책코스에 함께 가자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진리의 길로 당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벼운 산책길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목숨 걸고 따라가야만 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 때문에 내 시간이나 건강이나 재물이나 지위나 그 어떤 것이라도 손해 보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신앙 때문에 그런 것을 손해 보아야 한다면, 차라리 신앙을 포기하려 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내가 예수님 때문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손해 보았느냐’로 나타납니다. 신앙 지키기 위해서 잃은 것이 있습니까? 직장을 잃었습니까? 자존심을 잃었습니까? 아무 것도 손해 본 것이 없다면, 그는 아직 예수님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넓은 길, 자기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막 10:29-30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진리를 위한 헌신은 결코 손해가 아니라고 보증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믿는 성경말씀, 성경이 약속한 내용, 내세의 천국과 영생이 만약 진짜가 아니라면, 나의 믿음과 수고와 헌신은 헛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맞다면, 진리를 소홀히 하면서도 얻으려고 했던 세상의 모든 가치는 헛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믿느냐는 문제는 자기 사활이 걸린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대부분의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아주 가벼운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없고 자기 자존심에 대한 열정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세상 종교들은 인간의 자존심을 부추기는 말만 합니다. “인간과 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곧 신이다. 네 안에 신이 있다. 네 마음을 다스려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일을 해라. 네 안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으니 네가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라.” 이것이 세상종교가 가르치는 속임수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도 인간의 위대함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하면 잘 믿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헌금을 하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 이 정도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냐, 5천명의 성가대가 찬양을 드렸으니 이 예배는 얼마나 대단한 예배이냐,” 그런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체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신들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그래서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안 받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오늘 이 시대 교인들은 성경대로 설교하는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자기들이 원하는 이야기, 자기들의 생각과 같은 말을 해주는 설교를 더 좋아합니다. “이만큼 바치면 이만큼 받는다. 이런 공을 세우면 이런 보상을 받는다. 이런 일을 하면 이런데 들어간다.” 라고 보상주의, 공로주의, 현실주의를 가르치면, 그것이 성경에 있던 없던,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런 말을 확신있게 할수록 더 따릅니다. 자기들의 생각에 잘 맞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교회에 나오기는 하였지만 자기의 삶을 즐기는 방법이나 자기 구미에 맞는 길을 찾는 사람이지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며, 진리를 찾지 않으면 진리를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꿈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인간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말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인기는 고사하고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 도다.”(49)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50)
가난한 자식이 부모를 정말로 공경한다면, 자기가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입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자기의 영광을 구할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변명을 하고 자기 선전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알아주시기 때문이고, 자기가 선전하지 않아도 그가 효자인 것을 남들이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지, 인기와 영광을 얻는 일에 관심조차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중대한 결정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을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막연히 ‘하나님은 계실 것이다’라고 생각만 하느냐, 아니면 실제로 살아계시고 내게 날마다 생명을 공급하시고 책임져 주시는 아버지로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분이고, 다만 계시다고만 믿자고 한다면, 모든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고, 스스로 장래의 길을 개척해야 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로 살아계셔서 날마다 나에게 삶을 주시는 분이고, 지켜보시는 분이고, 미래에 공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아등바등 남들을 비판하며 자기를 주장할 필요가 없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신입니까? 죽은 신입니까? 아니면 살아계셔서 나를 책임져 주시는 나의 아버지이십니까? 그것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거기에 따라서 그가 가는 인생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이 말씀의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은 세상에 떠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종교를 문화상품처럼 가볍게 취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평가만을 기다리며, 주님 말씀대로 네 인생길을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자기가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생명을 주시고 심판을 하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과 우리의 육체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영원하고 진실한 약속입니다.
이 우주에는 지구만 있지 않고 수 억 개의 별들이 있듯이, 여기 육체로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아주 짧아서 마치 한 순간과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과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믿고 산 사람들을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단지 기독교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앞서 가신 길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은 짧은 생명을 걸고 긴 생명을 얻는 과정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을 포기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헌신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비웃습니다. 한번 뿐인 세상을 자기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미래를 준비하고 인도하시는 분은,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의탁하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길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확인해 봅시다. 나도 예수님처럼 진리 때문에 욕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신앙 때문에 욕을 먹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신앙이 나에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내 미래를 준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나의 미래를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님 곁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못하게 막아내면서, 주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욕을 먹거나 손해를 보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하면서,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산 사람은 영원한 형벌의 처소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죄를 두려워하고 성경이 약속한 미래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형식을 꾸미려고 하지 말고,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르십시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미쳤다고 매도되었듯이 진리가 거짓에게 도전받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가람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오늘을 삽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생을 누리는 최후의 승리자들이 됩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요 8:51-59 / 임덕순 목사
우리는 생활하면서 몇 개의 모임에 가입합니다. 고향친구들의 모임도 있고, 학교 동창모임도 있고, 운동하는 모임도 있으며, 정치하는 정당도 있고, 돈을 굴리는 투자모임에도 소속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끈끈한 모임이 셋이 있다는데, 그게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대교우회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럴법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임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저에게는 충청협의회라는 모임에 나오라는 통지가 번번이 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충청도 사람이지만 목사이기 때문에, 목사는 총회나 노회에 소속되면 그만이지 충청도 목사의 모임을 따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소속한 작은 집단이 전부가 아닙니다. 잊어버리고 살아갈 지라도 현재 속한 집단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도 알아야 하지만 거시적으로 내가 어떤 거대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천안함사건의 가해자가 북한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사는 국민들 중에도 그것을 보는 시각이 하나가 아닙니다.
국제적인 조사를 통해서 범인이 명백하게 밝혀진 뒤에도 북한이 나쁘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하고, 조사가 잘 못된 것이 아니냐, 대통령이 안보를 잘못했으니 사과하고 내각은 총사퇴하고 군인들은 군법회의에 회부해서 벌을 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 당의 정책이 그렇다 할지라도 자기가 소속한 정당보다 대한민국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 안에서 정치하는 당이 중요합니까? 나라가 중요합니까? 나라가 망하면 정치를 할 틀도 없어진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라보다 큰 것도 있습니다. 이 지구가 멸망한다면 네 나라 내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소속한 작은 단체보다는 나라가 크고, 나라보다는 지구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소속되어 열심 내는 단체나 소속보다 더 큰 소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두개파, 바리새파, 그리고 열심당원으로 파벌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그보다 더 큰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거대한 그룹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자기네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모두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큰 그룹에 속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위기를 당하면 너나없이 똘똘 뭉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믿음을 요구하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일 뿐 아니라, 자부심이요 자랑이요 영원한 국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아브라함의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을 말씀하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51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펄쩍 뛰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네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2-53)
그들이 왜 이렇게 놀래고 예수님더러 미쳤다고 했는지 짐작이 가시지요?
그들은 아브라함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자기 말을 지키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의 모래만큼 번성케 하신다는 약속이었고, 그들이 모든 대적을 이기고 강대한 나라가 된다는 약속이었고, 가나안땅을 주어 주인이 되게 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약속 속에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된다는 약속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젊은 예수라는 이가 나타나서, 자기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지 않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믿어야 합니까?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은 유대인들이 인구가 더 많아지는 것이고, 로마제국을 비롯한 모든 대적들을 굴복시켜서 강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미처 생각해 보지도 못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의 말을 따르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 도대체 저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고,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와서 바라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고, 걱정근심 없이 평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요즘은 역대상 4장10절의 말씀인 소위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나를 도와주셔서 나를 부자가 되게 해주시고 근심걱정 없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세상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에 얼마나 신령한 복들이 많은데, 유독 야베스의 기도라는 구절을 찾아내어 그것을 나무판에 새겨 상품으로 팔고, 그것을 집이나 가게에 걸어두면 풍요와 평안의 복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영원한 생명이나 말씀의 인도 같은 것은 아예 입력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비슷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살리라고 하셨으니, 미쳤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영생을 믿지 못하고 미쳤다고 말했던 사람이, 회복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면 생각이 어떨까요? 그때는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그때는 영생을 얻을 길이 없을까, 나에게 영생을 줄 분은 없을까 하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영생을 찾을 것이면서, 결국 영생이 최종의 소망이 될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잊고 잠깐 뒤에 사라질 것만을 찾고, 진리를 알려주면 귀를 닫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한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육신이 죽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친구나 이웃들도 그를 아예 사람으로 취급을 해 주지 않으면, 살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는 것이 사회적인 죽음입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인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숨을 쉰다고 해서 지금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꽃병에 꽂아놓은 꽃은 그 꽃이 자라고 피어날 때 까지는 생명을 공급하는 뿌리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꽃병에 꼽기 위해서 가위로 잘라내는 순간부터 생명의 뿌리와 끊어져버렸습니다. 따라서 아직은 싱싱해 보이지만 그것은 죽은 꽃이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죽은 꽃이라는 증명으로 시들어지게 되어있으며, 절대로 열매가 맺히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숨을 쉬고 있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는 곧 시들어버리고, 다시는 싱싱해질 수 없으며, 결코 누구에게도 유익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단순히 하루하루 호흡을 연장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하나님의 생명과 지혜와 힘을 공급받는 상황을 영혼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루하루를 활력 있고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게 되며, 그 사람의 삶에는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삶의 열매들, 보람들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를 이미 용서받았고, 그동안 지은 죄의 형벌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으며, 오늘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과 힘을 공급 받으며, 그런 삶을 영원히 보장받았습니다. 그것을 풍성한 삶이라고도 말하고, 영생이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은 호흡을 얼마간 연장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삶을 함께하는 기쁨과 보람과 활력이 충만한 삶을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에게 그 삶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사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돈을 벌어서 집을 사고 차를 굴리며 살면서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겨우 호흡을 연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며, 용서받은 사람의 평안을 모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의 희망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래서 살아갈수록 피곤하고 앞이 막막해집니다. 집이 크다고 평안합니까? 연봉이 많다고 행복합니까? 그것만을 전부라고 알고 그것에 목매는 삶이 제대로 사는 삶이겠습니까? 돈을 벌어 봐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 봐도 별것도 아니고 더 외로워지고 더 허전해지는 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거기에만 목을 매는 사람이 정말로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닙니까?
물론 잘 믿는 그리스도인도 죽습니다. 그들도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육체적인 죽음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의 육체의 죽음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에게 지혜와 생명과 힘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제한 속에서 살던 삶을 벗어나서 더 완성된 하나님의 생명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성도가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은, 그동안 완성되지 못했던 지각과 인격이 완성되는 순간이며, 내일을 알 수 없었던 세상을 벗어나서 완전한 광명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죽음은 성도의 생명을 끝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던 완전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관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축복은 죽음을 제외한 세상의 풍요로움과 건강과 평안 이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죽음을 벗어나고 싶었고 영생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죽음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고, 영생은 더 이상 거론조차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한계는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죽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라도 죽음을 벗어날 길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이길 길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서 “네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네가 누구냐” 라고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이기지 못한 죽음을 당신만 홀로 이긴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사람에게도 영생을 주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저분이 누구냐, 예수가 대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54절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절초풍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신다는 말입니다. 기절할 만큼 충격적인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알기게 하나님은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신 다구요? 이 무슨 말입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십니다. 이 세 위는 본체와 영광과 권능이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입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우리들 사이의 말로 표현하자면, 칭찬한다, 격려한다. 알아준다, 높인다는 뜻인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가 알아주고 높이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뜻입니까?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신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55절에 보면,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라고 하셨는데, 한 몸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아주 놀라운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었고,
둘째는 성부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광을 돌리신다는 말씀이었고,
셋째는 아브라함이 나의 때를 사모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씀이고,
넷째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로 미루어 보면, 예수님은 다음 셋 중의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한 것처럼 정말로 귀신들려서 미치셨거나, 아니면 정신은 멀쩡하지만 사람들을 속이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는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실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신 성자 하나님이시거나 할 뿐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착한 일을 많이 하신 도덕가일 수는 있을까요?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이라고 했으면, 그것은 절대로 착한 사람이 아니고 사기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기 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말씀하신대로 행동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말씀하신대로 당신의 영을 믿는 사람들에게 보내어 주셔서 무능한 사람들을 힘 있고 지혜롭고 담대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미친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를 믿고 말씀을 따르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온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오래 전에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 커다란 결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으며 살아서 진노의 대상이 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멸망할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성자께서 인간이 되어 인간들의 죄를 대신 벌 받기로 하시고, 그 아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영생의 특혜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그 결정을 이루시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불러낼 심부름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 명령하시고,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천하 만민을 하나님께로 불러들이는 복된 심부름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그 일을 위해서 그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고, 강한 나라가 되게 하시며, 그를 복주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결정이 없었더라면 아브라함도, 아브라함과의 약속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부름 받은 목적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그분이 오시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자기 조상이 받은 축복이 전부라고 생각했고, 자기 조상 아브라함만 위대하다고 생각했지, 더 큰 복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당하시고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더 큰 약속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영생을 말씀 하셨을 때 미쳤다고 배척했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진정한 축복을 알지도 못하고 부스러기 은혜만 붙들고 살았던 것입니다.
막7: 28에 보면, 귀신들려 미친 딸을 둔 이방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할 때,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빼앗아 개들에게 주는 이가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하셨고, 그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을 당장에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알맹이 은혜를 요구하지 못하고 부스러기만을 달라고 애원합니다.
부스러기 은혜란 당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요구했던 것이나, 오늘 야베스의 기도문이나 적어놓고 달라고 하는 사람들처럼, 물질적인 풍요나 건강이나, 부강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부스러기나 주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부스러기가 아닌 진짜 은혜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내 몸이 좀 더 건강해 지는 것이나, 돈을 더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붙들려서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옳고 유익한 길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 따라서 살면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그는 하나님과 단절되는 외로움과 약함을 절대로 경험하지 않게 하십니다. 심지어 육체의 죽음도 하나님과의 그런 관계를 끊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립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고 그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그것이 오늘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힘으로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고 영생을 누리는 알맹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우리 모두가 하십시다.
시기심의 벽을 넘어서라
요 8:52-59 / 윤태성 목사(2009.05.28.)
지난 수요일 저녁에 월드컵 팀의 이란과의 축구 경기가 있었습니다. 보신 분들이 많았겠지만 잘 싸우고 아쉽게 1:1로 비겼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경기가 끝나고 운동장에서 기도하는 선수들이 보였는데 박주영, 이근호, 기성용였습니다. 무슬림이 가득 찬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한다. 참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줄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스포츠에 관한 질문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어느 권투경기에서 신인왕 결승전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결승에 오른 사람을 보니 둘 다 열심히 훈련을 하고 또 두 사람 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 결승전에 오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누가 이기기를 바라실까요?
하나님 참 곤란하시겠다? 그러면 좀 더 쉽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이길 거라고 보십니까? 우리는 이 대답을 통해서 그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이냐 혼에 속한 사람이냐 영에 속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답 가운데 목사님 선빵을 날리는 사람이 이기겠지요 먼저 공격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니면 급소를 먼저 치는 사람이 이기겠지요.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목사님 훈련을 더 많이 한 사람이 이기겠지요. 기술이 좋은 사람이 이길 겁니다. 운이 좋은 사람이 이기겠지요 이런 사람은 혼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는 대답합니다. 그러면 영의 속한 사람의 대답은 무엇인가하면 “하나님께서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길 겁니다” 이 말이 정답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지만 한사람의 승자와 패자를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둘 다 승리를 바라기에 하나님께서도 혹시 어려움이 있으시겠지만 이 경기를 통해서 그의 신앙 성장에 더 유익이 있는 사람을 이기게 하실 겁니다. 이에 반해서 패배를 통해서 더 겸손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때때로 원치 않는 사고가 하나님 뜻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늘 오토바이를 타는데 헬멧을 쓰지 않고 운전을 합니다. 그래서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헬맷도 안 쓰고 저렇게 다니니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냥 두시겠어” “하나님께서 치신거야” 물론 하나님께서 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시 잘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헬멧을 늘 쓰지 않고 운전을 하기에, 이렇게 경고가 없다면 다음에는 트럭에 치여서 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살리시고자 다리를 부러뜨렸다면 그 사건 가운데서도 그 사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상대에 대한 정죄보다도 그 상황 가운데 있는 그사람을 위로해야합니다. 또한 그 상황을 나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가운데 우리에게 늘 깨달음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이런 하나님의 뜻보다는 시기심으로 상대를 비난합니다. 시기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는 시기심을 살펴보고 우리의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세상에 속한 사람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과 바리새간의 영생에 관한 논쟁이 시작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52절 “유대인 들이 가뢰되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가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들도 모두 다 죽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영원히 살겠느냐. 예수님께서 귀신 들렸다.
그런데 그 말에 모순이 발견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미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입니다. 자 보시면 예수님께서 누구를 살리십니까?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 그리고 죽은지 사흘이 지난 나사로 살리셨습니다. 많음 병자와 이적을 베푸십니다. 이미 모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그들이 기다리고 믿는바 메시야임을 보여주시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라” 그 말에 “나이도 50이 안 되었는네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 자신의 편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들이 믿음이 없다’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내면에는 시기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에게 넘길 때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더라”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이 시기심은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죄된 속성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20장 10절에 보면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같자 하나이다” 나의 친한 벗도 나의 타락을 기다린다. 그가 혹시 유혹을 받지 않는가 인간의 뿌리 깊은 시기심을 이야기합니다.
시기심에 관한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제사 가운데서도 나타납니다. 형제 지간이였던 가인과 아벨이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양의 제물로 드리는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는데 가인의 제물은 열납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안색이 변하여 그 아우를 쳐서 죽입니다. 이 시기심이 결국 살인을 불러오게 됩니다. 이 시기심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시작되어서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기적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이자 그분을 미워하고 시기심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음에도 기회를 잃어버리는 사람들 입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라”(잠14:30)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5:2) 시기심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무서운 질환입니다. 나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유익하게 하는 길입니다.
2. 하늘에 속한 사람들
우리가 이러한 시기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같이 합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마음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성자 예수님이시지만 그 하늘의 자리를 벗고 내려오셔서 종의 형제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높이는 마음이 주님 닮은 마음입니다. 나보다 상대방을 높이는 마음에서는 시기심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을 보시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수 있지만 그는 다윗이 자신보다도 더 이스라엘을 위한 훌륭한 왕이라는 것일 알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고 그를 도와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맹약을 맺게 됩니다. 상대방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는 마음이 그에게 있습니다. 결국 이 언약은 후일에 다윗에 의해 지켜지게 되었고 자신의 절둑발이 아들 므미보셋이 다윗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을 도와 주려는 마음이 함께 상생하는 윈-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 요즘 방송가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삶은 개그맨 최양략이라는 분입니다. “괜찮아유” “됐시유”연륜이 뭍어나는, 공감할 수 있는 웃음으로 큰 화제를 일으킵니다. 이분이 한 말 가운데 기억이 남는 말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로 다른 사람은 웃길 수 있지만 공격을 당하는 사람은 상처를 입게 된다. 상처받지 않고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웃음이 진정한 웃음이다” 인신공격과 막말이 오고가는 이 시대 가운데 참 의미있는 말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높여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놀부 심보’가 때때로 우리의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죄가 가져다 주는 감정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분이 나보다 잘하는 점이 있습니다. 나보다 기도를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음식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봉사를 열심히 잘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점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모두는 사람인지라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발견하면 그것을 내가 채워주겠다고 생각할 때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상대가 잘하는 장점을 찾아보는 것, 그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마음,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시기심 에서 벗어나는 길은 “진리 앞에 순종하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모르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게 됩니다. 54절 “내게 영광을 돌리는 분이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에고 에이미” “내가 어떤 사람이다”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단순히 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그 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분 자신이 생명의 떡이다. 말씀하셨고 나는 세상의 빛이시다. 나는 목자이다. 우리에게 그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진리를 알고 있다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ex)우리가 때때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고민을 털어놓으신 일이 있습니다. 이분이 교회를 개척해서 잘하고 계시는데 교회가 성장하기시작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합니다. 예배에 출석도 잘하고 다른 사람이 안하는 십일조를 하고 그리고 헌금의 액수가 다릅니다. 참 반가운 일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서 은연중에 오래된 교인들이 새로온 사람을 질시하고 배척을 하더라는 겁니다. 심지어는 목사님을 가까이하는 교인들을 보면 “혼자서 잘 보일려고 한다” “너무 튄다.” 이렇게 분위기가 돌아가니까 나중에는 목사님이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그것조차도 질투심을 갖게 되더라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습니까?
그것조차도 목회자도 중심을 가져야하지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로 푸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풀고자하면 일을 풀리는 것 같지만 사람사이의 관계이기에 누군가는 반드시 서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무엇이 교회를 위하는 길인가. 어느 것이 진리인가에 비추어서 풀어가야 합니다.
모세를 보시기바랍니다. 모세의 시종이였던 여호수아는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때도 회막을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를 장막으로 부를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됩니다. 그 때에 부름을 받은 자들 가운데 엘닷과 메닷이 있었는데 그들은 기도하느라고 이 소식을 듣지 못해서 계속해서 회막에서 기도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신이 임하게 되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한 소년이 전하게 되는데 기도를 많이 하였던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말하여 그들을 금하게 하자고 합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말합니다. 모세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네가 나를 위해 시기하느냐” 나를 위해서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시기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 할 때에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서 이 상황 가운데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로 결정해야합니다. “진리를 먼저 이해하라” 이것이 시기심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나오는 말
명심보감에 보면 “자기의 뜻을 굽혀서 남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능히 중요한 지위에 있게 되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적을 만난다” 교회 안에서도 가장 심각한 중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정 받고 싶은 마음 상대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한 섭섭병이 듭니다. 이병은 약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심으로 인해 서운한 마음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성은 우리가 잘 조절하지 않으면 우리의 시기심이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먼데 있는 사람은 얼마든 사랑하지만 내 가장 가까이 있는 동료, 성도들의 나의 시기심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람이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다면 그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에 나의 감정보다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누구든 진리 안에서 노력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공동체가 함께 사는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시기심의 마음을 뛰어넘어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때때로 서운할 때가 있고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시기하고 있는 이유가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라면 나는 즉시로 돌이켜야합니다. 나는 지금 생명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의 감정보다 진리를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성숙의 요건 : 순종
요한복음 8:55 / 2003.09.08. / 박봉수 목사
이번 대구지하철 방화참사는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감당키 어려운 절망을 느끼게 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도하는 각종 언론 매체의 수많은 기사들 중에 두 가지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는 외신 보도들 중의 한 토막입니다. 외국의 유수 언론들이 이번 사태를 종합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평했습니다. "한국은 아직 멀었다!" 세계 무역 11대국이라, 월드컵 4강이라 들떠서 콧대를 치켜세웠지만 한국은 그래도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번 참사의 용의자 김대한씨에 대한 기사들 중의 한 토막입니다. 그가 왜 불을 질렀느냐고 경찰이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답니다. "나 혼자 죽기가 너무 억울해서, 다 같이 죽으려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불행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불특정 다수에 대해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보도 내용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단어 하나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바로 "미숙"입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수준이 고작 이것 밖에 안 되는가? 우리들의 의식 수준이 이것 밖에 안 되는가?" 깊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면 그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큰 고통을 느낍니다. 개개인이 성숙하지 못하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의 영적 수준이 성숙해 있지 못하면 하나님도 괴로우시고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힘이 듭니다. 우리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해 있지 못하면 역시 하나님도 괴로우시고 더불어 함께 신앙 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힘이 듭니다.
우리가 보다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도록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다 영적으로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를 보다 성숙한 교회 교회다운 교회로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 가운데 하나 순종에 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종이란 무엇인가?
먼저 순종은 굴종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순종이라는 뜻의 대표적인 말이 uJpotavssw(hupotasso)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즉 '아래'라는 뜻의 uJpo와 '두다' 또는 '배치하다'라는 뜻의 tavssw가 합성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라는 말은 '무엇 아래 배치해 두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목적 아래 자기를 위치시키면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굴종이란 자기보다 결코 높지 않은 사람 아래에서 그를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매우 자존심이 상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하라는 대로 하긴 하지만 너무 참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보다 높으신 하나님,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은 결코 굴종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순종은 맹종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순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또 다른 말이 uJpakohv(hupakoe)입니다. 이 말 역시 두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즉 '아래'라는 뜻의 uJpo와 '듣는다'는 뜻의 ak 가 합성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라는 말은 아래에서 잘 듣고 따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깨닫고 나서 따르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맹종이란 맹목적으로 무조건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명령이 무슨 뜻인지,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잘 모른 채 그냥 따라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열심히 따라 하기는 하지만 뭐가 뭔지 몰라서 정말 답답합니다.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그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은 맹종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히 11:8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종은 믿음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창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앞길을 복되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말씀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결혼 반지는 왜 왼손 넷째 손가락에만 낄까요?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넷째 손가락에는 심장으로 연결되는 신경이 흐른다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뜨거운 심장으로 흐르는 신경이 있는 이 넷째 손가락에 영원한 약속의 증표인 이 반지를 끼워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넷째 손가락은 제일 활동이 둔합니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이 손가락을 펴보면 제대로 다 펴지지 않습니다. 다른 손가락과 함께 펼 때만 다 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 손가락에 순종과 독립 포기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왼손은 옛날 그리스 시대에 사람들이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약하고 순종적인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결국 결혼 반지를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워주게 된 것은 사랑의 약속과 순종의 다짐을 주고받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즉 신랑은 영원토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으로 반지를 끼워주고, 신부는 믿고 따르겠다는 순종의 다짐으로 그 반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순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만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신학자 앤더슨(B. A. Anderson)이라는 분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 무엇을 위한 자유(freedom for ...)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복종으로부터 벗어날 때 누리는 자유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무엇을 위한 자유는 오히려 순종함으로 누리게 되는 자유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아직 덜 성숙했을 때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누려보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성숙하면 무엇을 위한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아직 철이 덜 들었을 때는 부모로부터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때로는 그래서 일탈행동까지 합니다. 이것이 부모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성숙해지면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고 부모의 말씀을 잘 들으려 하고 부모를 잘 모시기 위해 힘을 씁니다. 바로 이것이 부모를 위한 자유입니다.
사람들이 아직 영적으로 철이 덜 들었을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철이 들고나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씁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요 그 안에 기쁨이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유하고 싶어합니다.
니체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순종을 노예 의지라고 폄하했습니다. 신과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야말로 초인이요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인으로 살다가 자유를 만끽하다가 자살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 성숙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그러면 성숙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마 2:13-4을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찾고 있으니 애굽으로 피하라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14절을 보면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고 말씀했습니다.
요셉은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이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한 것일까? 자기가 지은 죄도 없는데 왜 헤롯을 피해서 도망을 쳐야 하는가? 피한다면 왜 애굽인가? 이제 막 해산한 아내와 갓난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그 머나먼 타국 애굽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따져보고 고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꾸자마자 바로 일어났습니다. 밤중인데 그 즉시로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저 머나먼 애굽으로 피난을 했습니다.
지하철을 타보면 역마다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이번 내리실 역은 숭실대역 숭실대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 그 방송이 나오면 즉시 짐을 챙겨서 내려야 합니다. "내가 왜 여기서 내려야 하나? 과연 여기가 숭실대 역인가?..." 고민함 머뭇거리면 내릴 역을 놓치게 됩니다.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숙해 지면 질수록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반응이 빨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즉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눅 5장을 보면 주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고기잡던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나 헛수고하고 이제 철수하려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한 쪽 배에 오르셔서는 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난데 없이 어부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시몬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분명히 지금은 고기 잡을 때가 아닙니다. 깊은 데에 고기가 없었습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시몬은 고기 잡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주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라시는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기를 잡았고,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인 워너메이커를 대통령이 체신청 장관으로 임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주일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자들이 따졌습니다. "당신은 백성들을 위한 일과 약속보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좀 무책임한 것 아닙니까?" 그때 워너메이커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셋째,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마 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명하셨습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인 것을 볼 텐데 풀어서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그 때 주인이 나타나서 뭐라고 하면 간단히 이렇게 말하라 하셨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하라"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나귀는 큰 재산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나귀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인데 갑자기 주님께서 내가 필요하니 나를 위해 내어 놓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소리 없이 기쁨으로 주님께 나귀를 내어놓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이 사람은 주님께 너무도 큰 은혜를 받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께 그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귀가 필요하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갚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 감사했습니다. 나귀로라도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귀 주인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게 나귀를 내어줄 것을 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이 기쁘게 순종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하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머슬로우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습니다. "요나 증후군"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서에 보면 요나라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명령을 지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매를 맞고서 할 수 없이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순종합니다. 이렇게 무엇인가 하긴 하면서도 억지로 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요나 증후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신앙이 성숙치 않은 사람들은 이 요나 증후군에 걸려있습니다. 주일을 지켜도 주일을 범하면 하나님께 매 맞을까봐서 억지로 지킵니다. 헌금을 드려도 마지못해 드립니다. 교회 봉사를 해도 맡은 직분 때문에 억지로 봉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쁘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우선 자꾸 머뭇거리게 만듭니다. 내일로 미루고 뒤로 미루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은 즉시 순종합니다.
다음으로 타협하게 만들고 협상하게 만듭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일부만 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불평과 원망이 일게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순종하더라고 억지로 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은 기쁘게 순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