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교회가 인본사상으로 물든지가 오래되었다 는 것은 이젠 쉽게 들을수 있는 얘기들이다. 주일날 여행을 가고. 기도가 삶의 변화를 줄수 없다는 생각과. 자신의 삶은 노력으로 변화할뿐이라는 기본적인 바탕이 깔려있는 설교와 가르침이 주를 이루고 있다.
쉽게 말해 우선순위를 "나" 중심이고. 예수님은 "후순위"로 밀린것이다
근데 이것이 우리교회안에도 침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개혁주의요. 건전사상이며. 정통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진정 복음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수 없다
난 칼뱅을 부정하는 자도 아니고. 웨스트 민스터 교로문답을 비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자칭 "정통"이라는 자들이 이들의 사상을 거짓으로 말하고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
자칭 보수라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칼빈대 나온 목회자가 청빙되어 어느교회 단상에서 "난 왜 청년들이 이번 여름성경학교에서 밤마다 눈물흘리며. 찬양하고. 기도하는지 이해할수 없다"
이 설교를 들은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이 목회자 방향성에 의심을 할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나 또한 중학교 여름성경학교때.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어떤 기독교 카페 스탭운영자는 "진정한 신도 일수록 더욱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라고 말하는 글을 보며. 답답하기도 했다
십일조와 각종헌금또한 첫머리가 "목회자의 급여와 교회재정"이 주목적이라고 가르치는 목회자들은 이젠 너무도 쉽게 볼수있는것도 염려된다
성경은 진정 이성적으로 모든것을 판단하고. 보고. 느끼고. 듣는것만 가르치라고 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일까? 그 주체는 무엇일까?
내 삶을 주관하는것이 하나님이라는것.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삶속에서 일하고 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누구나 삶이 곤고하고. 힘들고. 좌절하고. 시련을 맞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인생의 여정이다. 하나님의 자녀든. 아니든. 누구나 피해갈수 없다. 기쁨이 오듯 슬픔은 항상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의 삶의 구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믿는 우리는 그 힘든 고난의 여정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성숙되며. 인내가 소망이되고 마침내. 기쁨으로. 축복된 삶을 살수 있으며. 하나님이 역사하여. 함께 하신다면 어떤것도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것을 기대하며 믿어야 하는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과 축복이다.
하지만 믿지 않는자들은. 그 어려운 고난에서 좌절하고. 쓰러져 더 이상 소망을 두지 못하고 일어서지 못한다 더 나가 죽음으로 끝맺음을 짓는 자들도 많다. 이것이 예수님이 없는 삶의 방향이기도 하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것은 요즘 자칭 정통신학이라는 곳과 목회자들이 이 소망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들은 형통과 축복에 대해 오히려 부정적인 언변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번영이고. 기복이라며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헌금을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결같이 대부분 목회자와 교회재정을 위해 드린다는 답변이 온다.
얼마나 그들마음에 참 복음이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것이다. 그만큼 인본사상이 그들에게 정통보수. 건전으로 변질되서 가르치고 있다는것을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우선적인 부분을 그나라와 그의(하나님)가 아닌 개인적인 눈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들어내는 예중 하나뿐이지만. 다른 여러가지 설정으로 문의해 봐도. 한결같이 인본적인 믿지 않는 자들과 동일한 답변으로 돌아온다
여담으로 어떤 목사님이 이런말을 하셨다. 난 모태신앙으로 어머님이 독실한 크리스챤이였고. 그것을 보고 자란 나는 올바르게 교육받고 자랐다. 청년이 되어 목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신대원을 갔는데. 그곳에서 은사를 말하는자. 감동과 감화를 말하는자. 성령님에 대해 말하는 내 주변 친구들 때문에 함께 다니는것이 불편했다.
어느날 그 친구들과 논쟁이 되었다. 난 그들보다 학교에서도 학점이 높았고.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이론적인 것을 주장하며 그들을 반박했다. 그렇게 몇시간동안 토론은 끝이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런 얘기를 했다. 교리적 이론적. 실질적 학문은 좋지만. 이것이 다가 아닌 성령님의 내주교통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것을 진정으로 알때. 믿음. 소망. 사랑. 기쁨. 감동. 감화 등 표현할수 없는 참복음을 알수 있다는것이였다
솔직히 말해 오래전 부터 교회설교때와 어머님께서. 항상 말하는 성령님..... 인격적 만남. 내주교통.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이런것들에 대해 내 스스로 판단하고 결론낸것은. 성령님은 하나님 의미. 대속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 죽음. 이런 이론적인 배움으로 알았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후 집에서 몇일동안 그들과 토론할때. 유달리 답답하게 생각하며. 안타깝다며 날 위해 기도해 주겠다는 친구 생각이 잠잘때마다 들었다. 너무도 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몇일후 교회에서 일년마다 주기적으로 하는 대각성 새벽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모르는것을 알게 되었다. 기도하는데. 갑자기 감동이 밀려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나를 위해 희생한 그 죽음에 대해 함없이 울었다". 아니 그 울음은 기쁨 이였다.
목매여 얼마나 끝없이 소리높에 울었던지. 내가 그동안 자만했고. 지식으로 알았던 그것들이 얼마나 교만했던 것이였는지. 감사하고. 미안하고. 기뻐서. 끝없이 울었다. 내 모태신앙때부터 지금까지 느끼지못했던 예수님을 진정 영접했고. 알았으며. 인격적으로 만나봤다.
성령님이 무엇인지. 임재가 무엇인지. 기름부음이 무엇인지. 은사가 무엇인지. 지식으로 이해하려하고. 결정내렸던 내 스스로가 이젠 진정 알게 되었다. 성경의 말씀이 무엇인지 내가 체험하니. 얼마나 감사하지 몰랐다
이 목사님의 일화에서 나오듯. 지금 이땅에 인본사상이 정통신학으로 탈바뀜하여. 가르치고 그것이 건전이며 참 복음이라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는자들이 많아 걱정 됩니다
기적과 변화에 대해 말못하는 목회자들. "낮은자를 세우시고. 없는자를 있게 하시며. 아픈자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목회자들.. 2000천년전 성경책만 가르치고. 그것은 우리 삶속에 적용이 될수 없다고 보는 그들..예배의 기쁨이 없고 교리설교만 가르치려는 목회자들. 또는 2000천이후 예수님이 재림때만 볼것이라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운행하며. "받은줄로 알고 믿고 구하면. 그대로 된다"라는 기대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첫댓글 캘뱅이 성경과 성어거스틴의 신학에 정통했지만 그가 성령세례를 받은 고백은 전혀 없습니다.
또 기독교강요등 많은 저술에서 성어거스틴을 인용했지만 성어거스틴의 성령체험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개혁주의 캘뱅신학을 공부해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성령세례를 못받으면 엉뚱한 소리하는 것이 당연한것입니다.
신학를 하시는 분들이 할일은 신학과 자신의 성령체험을 결합하여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