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F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똑 부러진 X세대가 트렌드를 리드하던 시절에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카피가, IMF 이후 온 국민이 시름에 빠졌을 땐 “부자 되세요~”라는 카피가 유행했다.
최근 CF 트렌드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런 변화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아낸 광고는 2019년 겨울 경동나비엔이 선보인 CF ‘콘덴싱이 옳았다’ 편이다. 배우 오정세가 아빠로 등장해 유치원생 딸아이의 머리를 묶어주고, 엄마는 가구를 조립하며 대화를 나누는 에피소드. 보일러를 바꾼다는 소식을 뒤늦게 안 아빠가 소심하게 ‘그런 법이 어딨어?’ 하고 따지지만, 엄마는 조립하던 가구를 나무망치로 ‘땅땅땅’ 내리치며 의사 결정을 선언한다.
일반적으로 아이의 머리를 묶어주는 사람을 엄마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사람을 아빠로 인식하는 고정관념과는 정반대의 연출이다.
롯데백화점이 온라인(유튜브)에 공개한 2019년 연말 광고 ‘선물 같은 사람에게 선물하세요’ 역시 사회적인 변화의 기운을 보여준다.
“우리 집 분리수거 당번, 주말에도 강철 체력, 장모님에겐 든든한 아들. 이 정도는 당연하지 라는 그에게 이번 연말에는 꼭 말해주세요. 당연한 일이 아니고 고마운 일이었다고”라는 내레이션이 깔리는 동안,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분리수거와 육아, 요리를 척척 해낸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아내 역의 배우는 늦은 밤, 눈 오는 길을 걸어 퇴근하는 워킹맘이다.
남성 모델이 등장했던 광고에 여성 모델이 등장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온에어 이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더 뉴 그랜저’ 론칭 캠페인 ‘동창회’ 편이 대표적인 예다.
반가움과 함께 은근한 긴장감이 감도는 동창회, 치열한 신경전 끝에 임원이 된 동창이 시원하게 승진 턱을 내는 장면에서 클로즈업으로 비춰지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여성.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조명한 이 CF를 진행한 이노션의 경주영 부장은 “기업체 신임 임원이나 정부 고위직 발표 기사에서 여성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면서, 고위직 여성이 점차 늘어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여전히 정량적으로 남성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조직 내의 견고한 유리 천장이 조금씩 깨져가는 긍정적인 시그널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더 뉴 그랜저 ‘아들의 걱정’ 편은 성공의 기준으로 유치원 공개수업에 가는 아빠의 모습을 제시한다. “아빠… 회사 잘렸어?”라며 걱정하는 아들에게 아빠는 “아빠 승진했는데”라며 웃어 보인다. 이에 아들은 “오, 이제 시간 관리 좀 되나”라고 재치 있게 응수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열매는 한발 더 나아간 파격적인 연중광고를 진행했다. 검정 벽과 붉은 조명, 전형적인 누아르 영화 속 풍경에 배우 전혜진이 블랙 슈트를 입고 등장한다. “10원 한 장 틀린 거 없다 이거지? 손봐줄 곳이 어디 있을까? 섬 애들은? 확실하게 처리했지?” 조폭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대사를 무게감 있게 읊은 그녀는 이내 “잘 모아서 잘 나눠줍니다. 모두 돕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라고 외치면서 반전을 이끌어낸다. 그녀의 정체는 사회복지단체의 팀장이었던 것.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측은 “사회복지계 전반에 성금을 배분한 성과를 신뢰감 있게 전달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요소가 신뢰와 재미다. 이 과정에서 걸크러시 트렌드에 맞추어 전혜진 씨에게 보스 역할을 맡겼는데, 이런 역발상이 트렌드와 맞아떨어지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잡화점 기사제보 dla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