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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25일
차범석 원작 ‘산불’ 초연
극작가 차범석의 대표작 ‘산불’.차범석
(1924~1960)은 전후 문학의 1세대로
전통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희곡을 발표해
한국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 데 공헌한 당대 최고의 극작가
이자 현대 연극의 파수꾼이었다.
평단이 그를 가리켜 “리얼리즘 희곡의 최고봉”
이라고 극찬한 이유는 1930년대 유치진이
시작한 우리나라 리얼리즘 연극
이 그에게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차범석은 전남 목포의 부잣집에서 태어
나 풍요로운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막연하나마 그에게 예술에 대한 영감을
처음 불어넣어준 것은 세계적인 무용수
최승희의 무대였다.
13세 때인 1937년 목포 평화극장에서 본
최승희의 춤사위는 그의 예술 의지를 자극했다.
1942년 광주고보 졸업 후 일본의 명문
고교 입학시험에 낙방하자 2년 동안
도쿄에서 백수로 생활하며 연극과 영화
에 심취하고 각종 문학작품을 탐독했다.
그 2년은 이후 차범석의
끊임없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1946년 22살의 늦은 나이에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해 교내에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1949년 10월 제1회 전국대학
연극 경연대회에서 그가 번역·연출한
‘오이디푸스왕’으로 연출상을 차지하는 등
해방공간에서 연극에 심취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고향 목포로 낙향해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고
1951년 봄에는 목포의 한 예술제에
그가 각본·연출·주연한 ‘별은 밤마다’로
비공식 데뷔했다.
그의 이름이 중앙무대에 알려진 것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하고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귀향’이
당선되면서였다.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매달린 그는 1956년 김경옥, 최창봉 등과
함께 직업 극단인 ‘제작극회’를 창단해
흥행주의와 상업주의를 배척하는
소극장운동의 선봉에 섰다.
당시 그는 6·25전쟁을 겪은 전후문학
세대로서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식이 강한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특히 전쟁의 상처로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린 ‘불모지’(1957)와 이념의
허구성과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사실적
으로 그려낸 ‘산불’(1962)은 6·25의 비극을
부각시키고 반전 의식을 일깨운 전후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았다.
‘산불’은 이진순의 연출로 1962년
12월 25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져 대호평을 받았다.
‘산불’은 6·25전쟁 중 남자들이 다 전쟁터
로 나가고 여자들만 남은 한 과부마을에
빨치산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인간 본연의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으로,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실주의 희곡의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다.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답게 영화, TV드라마,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총 90여 편의 희곡을 남긴 차범석은 20
05년에도 신작 ‘연오랑 세오녀’를 발표하
며 영원한 현역임을 과시했다. 2006년
세상과 작별한 그의 죽음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마감이었으며 한국 정통 연극의
종언이었다.
▶ 2008년기니 쿠데타 성공
기니 쿠데타의 주역 무사 다디스 카마라 대위.
▶2002년시베리아 철도, 전철화 완공
▶1995년‘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별세
외과의사, 의학자, 종교인, ‘한국의 슈바이처’ 자선가
장 기 려 (張 起 呂 )박사 서울에서 사망(1909년 평안북도 용천(龍 川)에서 출생~) 1951년에 피난민들을 위해 영도에 복음병원을, 1958년에는 행려병자를 위해 토성동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 무료진료를 하는 한편 1959년에는 기독의사회를 조직해 인술의 전파에 노력했다.
1968년에는 국내 최초의 민간주도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운동'을 창시하여 가난한 환자들을 구제했다. 1975년에는 부산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해 직접 환자들을 진료했으며, 1976년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1985년 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를 창설해 영세민과 장애인의 복지향상에 힘썼다.
간질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생명의전화 등 사회봉사단체를 창설·운영하는 등 평생 사회봉사와 의료사업 발전에 헌신했다.1995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주는 제4회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을 받았다.
▶1994년자일 싱 전 인도대통령 사망
▶1991년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연방 대통령 활동 중단 선언
대통령으로의 권력 이동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르바초프가 개혁파와 보수파의 협공 속에 보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음을 살폈다. 이 과정에서 발트 3국의 독립 요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발트 3국의 독립을 허용하는 경우, 그 영향은 다른 구성공화국들에게 미쳐 그들 또한 독립을 요구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소련이라는 연방이 유지될 수 있겠느냐의 근원적인 문제가 뒤따를 것이 예상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11월 15일에 '신(新)연방 조약안'이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소련이라는 연방은 유지하되, 소련이라는 국호 곧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그리고 15개 구성공화국 국호 모두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각 구성공화국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삼았다.
그러나 이미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한 발트 3국을 비롯해 몰다비아와 아르메니아 및 그루지아는 이 안을 거부했으며,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옐친은 이 안에 대한 대폭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이 때만 해도 고르바초프와 옐친 사이에는 힘의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그래서 두 지도자의 타협 아래 9개 구성공화국이 참가해 '신연방 조약'을 체결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시점인 1991년 8월 19일에 소련공산당의 보수파 지도자들은 이 조약의 체결을 막기 위해 국가공안위원회의 보수파 지도자들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구성함과 아울러 모스크바의 주요 지점들을 무력으로 장악한 뒤 고르바초프에게 하야를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하야를 거부했다. 동시에 러시아연방공화국의 옐친 대통령은 모스크바 중심가에 자리잡은 러시아연방공화국 국회 의사당을 거점으로 삼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국민운동을 용기 있게 이끌었다. 2개월 전에 러시아연방공화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마련된 대통령직에 압도적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기에 정치적 위상이 크게 높아진 옐친의 반쿠데타운동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도, 그리고 막 탈(脫)공산화의 길에 들어선 동유럽 국가들도 쿠데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국내외의 반대에 직면해 쿠데타 세력은 사흘만에 무너졌다. 동시에 소련공산당의 위신 역시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쿠데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8월 29일에 열린 소련의 최고소비에트는 소련공산당의 활동을 정지시키기로 결의했으며, 이로써 소련공산당은 마침내 종언을 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하여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입지가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의 권위는 약화되었으며, 반면에 옐친의 영향력이 커졌다.
옐친은 곧바로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발트 3국의 독립을 허용하도록 압박했으며, 그 결과 발트 3국의 독립이 현실화되었다. 이것은 러시아연방공화국에 이어 소련에서 둘째로 큰 공화국인 우크라이나공화국으로 하여금 독립의 길을 걷게 만들었으며, 러시아연방공화국과 우크라이나공화국은 같은 슬라브 계통 공화국인 벨라루시(백러시아)공화국을 끌어들여 1991년 12월 8일에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 CIS)'의 결성을 선언했다. 여기에 다른 공화국들도 찬성의 뜻을 밝혔고, 마침내 11개국이 12월 21일에 카자흐스탄공화국의 수도 알마티에서 '독립국가연합'의 창설을 선언했다. 이로써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고르바초프는 1991년 12월 25일에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핵무기 통제권을 소련의 계승자로 공인된 러시아연방공화국의 대통령 옐친에게 인계했다. 미국은 12월 26일에 러시아연방공화국을 소련의 계승자로 인정했다.
▶1989년타임지,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80년대의 인물`로 선정
▶1989년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 총살형
▶1983년스페인 화가 후안 미로 사망
▶1977년베긴-사다트 2차 평화회담
▶1977년찰리 채플린 사망1976년중국 예술인 창작활동 재개
ㆍ탁월한 문명비평가
2006년 베네수엘라에서는 1936년 개봉된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모던 타임스>가 흥행영화로 떠올랐다.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우고 차베스 정부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홍보에 이 영화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모던 타임스>에서 공장 노동자로 등장하는 채플린은 하루 종일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나사를 죄는 일을 한다. 지독한 노동강도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실려간다. 공장 강당에서 영화를 단체 관람한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채플린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구조에 묶여 있는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재인식했다. 베네수엘라 사용자단체연합은 이 영화가 자본가를 착취자로 묘사하고 있다며 정부에 상영 금지를 요청했다.
대공황 이후 70여년 만에 전 지구적 경제위기가 찾아든 2008년에 <모던 타임스>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하는 일관작업 방식을 가리키는 ‘포드주의(Fordism)’를 풍자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포드주의는 위기에 빠진 미국 자동차업체 ‘빅3’ 중 하나인 포드에서 일관작업 방식을 처음 도입해 붙여진 이름이다.
<모던 타임스>는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는 ‘모던(현대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감독·제작·각본·주연을 도맡은 채플린도 마찬가지다. 그는 영화인을 넘어 자본주의와 전체주의에 메스를 들이댄 탁월한 문명 비평가였다.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채플린은 <위대한 독재자>(1940)에서 독일의 히틀러를 닮은 독재자 역을 소화하며 파시즘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살인광 시대>(1947)에서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공격하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대량 살인이 공인되는 현실을 묘파했다. 채플린은 그러나 이 작품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이미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채플린 파일’을 만들고 있던 터였다. 결국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52년 스위스로 떠난 그는 20년 뒤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하러 올 때까지 미국 땅을 밟지 못했다.
77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날, 채플린은 스위스 브베 인근의 코르시에에서 88년간의 생을 마쳤다. 54세 때 결혼한 네번째 아내 우나 오닐(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1974년국문학자 이재수 사망
▶1971년서울 대연각호텔 화재
대연각 호텔 화재 현장
1971년 12월 25일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소재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는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사고와 함께 1970년대를 대표하는 대규모의 재난이었다. 사망자만 163명이었고 다친 사람은 63명이었다. 재산 피해는 당시 소방서 추정으로 약 8억 3,820만 원이었다.
발화 원인은 1층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 있는 프로판 가스통이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1층에서 시작된 불은 가연성 소재로 마감된 호텔 내부였기에 곧바로 호텔 전체로 확대되었다.
화재 진압을 위해 가용 가능한 거의 모든 소방차가 출동했고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되었는가 하면 주한미군의 소방차와 헬리콥터까지 투입되었지만 인명구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옥상에는 헬리포트가 없어 헬기 구조가 어려웠고 설상가상으로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잠겨있어 많은 투숙객이 희생당하였다. 고가 사다리차는 8층 높이까지만 도달할 수 있어 그 이상 고층 투숙객들의 구조는 방법이 없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까지 현장에 나와 화재진압을 독려했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수많은 투숙객이 유독가스와 열기를 이기지 못해 창밖으로 뛰어내리는가 하면 이 광경이 TV 생중계로 보도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대연각 호텔 화재사고가 발생할 무렵 서울의 인구는 500만을 넘어섰고 고층빌딩은 90여개에 이를 정도로 급팽창중이었다. 급속한 도시 팽창에 맞추어 고층빌딩이 우후죽순격으로 늘어갔지만 그에 걸맞는 안전대책과 시설은 태부족인 상황이었다. 대연각 호텔도 지은지 1년 6개월 밖에 안되는 신축건물이었지만 화재시 안전을 보장할 시설과 대책은 극히 미비한 상황이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로 기록되고 있다.
▶ 1969년 오늘,
한남대교 개통
한남대교(漢南大橋)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한강다리입니다.
현재는 교량 길이 919미터, 너비 52m의 규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울 도심 및 강남 지역과 한국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다리입니다.
본격적인 경제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 들어 건설 공사가 본격화되는 분위기에서
1966년 1월 19일에 착공된 한남대교는 만 4년이 되어가던 1969년 12월 25일에 완공되었습니다.
이후 1968년 2월부터 건설이 시작된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에 완공되고 강남 영동 지구 개발과 맞물려
서울 도심과 고속도로 및 강남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일일생활권'이 현실화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1968년 2월부터 건설이 시작된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에 완공되고 강남 영동 지구 개발과 맞물려
서울 도심과 고속도로 및 강남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일일생활권'이 현실화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강남대교의 시작 “ 한남대교”
https://youtu.be/5iMd-XJ8PvA
▶1968년10.5구락부와 무소속 정우회 발족
▶1963년키프러스내 그리스 터키 양군, 4일간 전투후 휴전협정
▶1960년부산 국제시장 화재, 234개 점포 손실
▶1949년맥아더 장군, 일본전범에 특사
▶1949년북한, 소련과 영사협정 체결
▶1941년일본군 홍콩을 점령
▶1938년체코의 극작가 겸 소설가 카렐 차페크 사망
▶1932년한중연합 토일(討日)군 (한국측 이청천 황학수, 중국측 채세영)
▶1926년히로히토(裕仁) 제124대 일왕으로 즉위
▶1926년일본의 제123대 왕 대정(大正) 사망
▶1918년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출생
▶1915년중국 진남에 제정반대의 혁명군 봉기. 제3혁명 개시
▶1906년전자현미경 발명한 독일의 전기공학자 루스카 출생
▶1899년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 출생
▶ 1898년 오늘,
조선 고종 35년 서울에 처음으로 전차 등장(서대문-동대문 간)
▶1898년독립협회 강제 해산
독립협회 활동을 한 지도자들.
▶1878년독일 소설가 한스 카로사 출생
▶1861년프랑스 조각가 마이욜 탄생
▶1642년만유인력 발견한 영국 물리학자 뉴턴 출생
▶336년크리스마스 행사 시작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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