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학 연구소
이용헌
이념이 물러가자 이놈이 나타났다
이놈은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념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였다
관념의 제국에서 자란 이념은 본디
잡념과 상념 사이에서 자라난 통념의 제왕이었지만
통념의 치하에서 탈주해 독립한 이놈은
좌우는 물론 위아래도 몰라보는 무개념의 숭배자였다
한순간 눈물을 무기 삼아 주변을 평정하다가도
때로는 분노의 불길로 오랫동안 쌓아왔던
신뢰의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것은 사심 없고 진심 어린 충고에도
심복의 옆구리를 비수로 찌르는가 하면
계절과 환경에 민감해 사소한 기후변화에도
근거지를 옮겨가며 태워버리기도 한다
백 년을 지배했던 이념도 이놈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천 년을 새김질한 문자의 위력도
반만년을 받들어온 신화의 위업도
이놈 앞에서는 한때의 과거일 뿐
이념의 관성에 길들어진 이놈은 주술보다 강한 심술을 지녔다
너를 믿느니 차라리 내 목을 쳐라
나를 믿지 않는 자는 모두 지옥에 빠지리니
세상에 믿을 건 오직 나의 감정뿐
이념이 무너지자 솟아난 이놈을 다스리기 위해
어떤 이는 푸념를 하고 어떤 이는 체념을 하고
또 어떤 이는 밤마다 술을 저어 망념의 제단에 분노를 뿌렸다
오리의 날들
오리가 우는 날까지 우리는 함께하기로 했다
오리는 오래 울지 못하고 오리는 오래 살지 못하므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오래도록 울어줄지도 모르므로
오리가 뒤뚱거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현실은 슬프다
오리가 오리를 물고 물 위에서 퍼덕거리는 꿈은 슬프다
오리는 어떤 연유로 천상의 길보다 물속의 하늘을 좋아하여
유유자적 무자맥질을 즐기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까
오리도 아닌 우리가 오리가 노니는 호수에서
오리털 옷을 입고 오리배를 타고 곽곽 소리를 지르다가
마치 우리도 오리인 것처럼 오래도록 물장구질을 하다가
밤이 되면 각각 오리발을 내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요행인지 오리는 울지 않고 다행인지 우리 또한 울지는 않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오리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는 동안
우리에겐 어떤 우리가 있기에 외따로이 하늘을 날지 못하고
뒤뚱뒤뚱 제 갈 길을 마저 가지 못하고
오로지 비장의 무기인 양 차가운 물 속에서 갈퀴질을 하며
부질없는 흰 구름만 가두어 놓았을까
오래도록 기다려도 오리가 울지 않는 저녁
오리가 우는 날까지 우리는 함께하기로 했지만
오리는 오래 살지 못하고 우리도 오래 머물지 못하므로
우리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리가 우는 날을 우리가 모르듯이
오리도 우리가 아주 멀리 떠날 날을 모르긴 할 것이다
감정에 전복된 이성, 그리고 시
시가 사라진 적 없듯 이념이 사라진 적은 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념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이념의 일반적 개념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혹은 가장 이성적인 생각이나 견해이다. 이념의 철학적 개념인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와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 이데아는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사고이며 이성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추구하는 이념이 집단으로 총화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받들어질 때 인류는 불행해지고 가장 이상적인 혹은 가장 이성적인 세상은 무너진다. 수 세기 동안 지배자들은 생존 영역을 확보하거나 침탈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을 앞세웠다. 그 이전부터 인간은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두 부류로 구분해왔다지만 그렇다고 언어와 종교와 관습의 격차까지 뛰어넘어 타자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인류사에서 가장 무서운 이념대립은 전체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였다.
그러나 냉전 시대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와 정보통신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집단 이데올로기의 위력은 약화되었고 반면에 개인의 철학적 빈곤과 이성의 부재는 감정의 존재를 증대시켰다. 감정은 깊은 사고에서 나오지 않는다, 감정은 순간의 존재감을 우선한다. 감정은 논리와 실재를 따지지 않는다. 감정은 격정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감정은 때때로 진리와 정의도 부정하며 실체적 진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며 타자의 의사를 무시한다. 오늘날 이념 대신 나타난 감정에 의해 개인 간 계층 간 정파 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정체성을 잃은 시인들도 덩달아 감정의 배설에 아까운 문장을 바친다. 마치 이념이 하던 짓을 모방하고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