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승현은 중얼거리며 이복형의 재산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김수산의 사망 후 유산 관련 소송에서 승소한 이후 1년째 매달리고 있는 작업인데도 이놈의 등기부와 재산 목록 작성은 정말 끝이 없었다. 아무래도 약간 기간을 연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작해서 이런 저런 등기부 서류들과 거래 명세서등을 살피다 보면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회사에서 연결해 주는 여러 일들도 지금은 거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핏 시계를 보았다. 아침 8시에 시작한 일이 1984년의 김수산의 등기부를 뒤지다 보니 어느새 오전 11시에 가까워 오고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 왔다. 이번 장만 정리하고 뭐든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승현은 다시 등기부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등기부 이전 목록이었다.
"음?"
흥미로운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경상남도 울산시 XX면 대지 5000평...
"이게 말이 되나..."
승현은 잠시동안 등기부를 살펴보았다. 1980년대의 울산이라면 공업 단지 조성으로 개발 열풍이 한창일 때였다. 대지 5000평이라면 상당한 값이 나갔을 터였다. 한마디로 노른자위 땅...그런데 등기부 목록상의 거래 기록은 승현의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능이었다.
"울산시 대지 5000평이 단돈 300만원?"
이 토지의 현재 시가는 공인중개사에 의뢰해야겠지만 최소 평당 몇백만원은 될 터였다. 수억의 가치를 가진 토지가 아무리 20년 가까이 이전이라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가격에 인수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어떻게 된 과정인지는 뻔했지만 승현은 혀를 찼다.
"참...그 인간은...정말..."
김수산은 부동산 투기업과 동시에 고리 대금업을 겸하고 있었다. 아마 이 땅 소유자와 어떤 사업을 경쟁적으로 하던지 아니면 그에게 어떤 일을 시키든지 해서 그를 금전적으로 그로기 상태까지 몰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땅 소유자에게 고이율로 돈을 빌려주면서 땅을 저당잡은 뒤 주변의 측근을 시켜 경매하게 했겠지.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토지를 낙찰받은 뒤 주위 사람들한테 수고급을 나눠 주고 토지 소유권을 이전받는다. 망해버린 토지 소유자야 어떻게 되든 말든 또다시 축하파티를 했을 것이다.
뻔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만큼 불공평한 계약은 그가 5년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승현은 지금까지 재산을 정리하면서 본 김수산의 범죄행각 중에서도 가장 악독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예술적인 이 솜씨의 희생자가 대체 누구인지 등기부상 매도인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유재훈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어디서 들었더라...어디서....
1984년이면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이다. 이복형과는 절교하고 있을 때였으니 그를 통해 이름을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 세 글자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승현은 배가 고프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따르르르릉~~
"네. 김승현입니다."
"승현이냐?"
"누구시죠?"
"나다 수혁이..."
전화를 건 사람은 승현의 대학 동기 정수혁이었다. 대학 졸업 후 8년간 형사일을 하다가 이상한 사건을 겪고 나서 지금은 형사복을 벗고 대학원에 다닌다고 들었다. 몇년만에 전화가 온 건지 모른다.
"아...웬일이냐? 오랜만이다!"
"오랜만이고 뭐고...지금 뭐하냐?"
"아...바쁜 일이 있어서...일하는 중이야."
"오늘 저녁엔 뭐하냐?"
"아마 오늘 저녁에도 일할 거 같은데..왜?"
"너 오늘 영석이 장례식 있는거 몰랐냐?"
"엇....오늘이었어?"
승현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수혁에게 다시 질문했다. 대학 동기이자 연수원을 지나 같은 로펌에까지 취직했던 친한 친구, 그러나 이복형 김수산과 함께 바다 건너 어떤 곳에서 비명횡사한 불쌍한 녀석....영석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지 근방에서 유해를 찾던 작업이 종료되었고 끝내 영석의 흔적을 찾지 못해 그가 평소에 아끼던 것들을 태워 간소한 화장식을 치른다고 들었다.
"바쁘면 어쩔 수 없지. 화장식은 오후 3시야. 이따 전화나 해라."
"잠깐...3시면 몇시간 안남았잖아...어디서 하는데?"
"경기도 벽제 화장터...올 수 있냐?"
"간이 화장도 그런 데서 하냐?"
"거기서 한데니까 뭐..나야 몰라. 올 수 있냐니까.."
"알았어. 갈께..."
"그래. 간만에 얼굴이나 보자..."
승현은 등기부 서류를 놓고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다소 외롭고 독불장군식인 승현의 인생 속에서 그래도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 중 하나였던 영석에 대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연수원 나가면 뭐할거냐?'
'글쎄...별 생각은 없어. 배운 걸로 먹고살아야겠지...'
'난 딱 15년만 일할거다.'
'무슨 말이냐?'
'난 돈벌려고 이 일에 뛰어들었어. 애초부터 법 같은 거엔 전혀 흥미가 없었단 말이야. 어떤 로펌이든 들어가서 파트너되고 5년만 더 일한 다음에 돈벌어서 내 사업할거야. '
'후후...맘대로 되냐...'
'뭐든 말이야..돈이야 돈...인생은 돈이면 다되고 돈없으면 하나도 안돼...편협하다고 욕먹어도 좋아. 최소한 그런 생각 갖고 있으면 손해는 안보잖아? 나한테 법은 밥일 뿐이야. '
'크크...넌 왜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게다가 말하는 것도 이상하냐?'
영석은 자신의 공부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 하는 말이나 행동, 성격 등은 아주 괜찮은 녀석이었다.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그렇지만 영석도 사람을 깊게 사귀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가난하게 자라 자수성가한 면에서 영석은 승현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와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는지도...
영석과 불철주야 붙어 다니던 승현에게는 종종 영석의 이상한 면들이 눈에 띄곤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피해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붙어 다닐 사람이 필요했던 승현에게는 영석의 그런 면은 중요하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와서 첫사랑에게 차인 이후로 영석은 거의 승현의 유일한 벗이었기 때문이다.
영석의 삶은 영화같았다. 영화의 장르를 따진다면 스파이 영화였다. 그만큼 그의 삶은 비밀에 싸여 있었고 많은 것을 숨기려 들었다. 말이나 이야기에서가 아니라 그의 생활에서 그랬다. 그것은 친한 친구였던 승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번은 깜박 잊고 필통을 가져오지 않은 승현이 무심코 영석의 필통을 뒤지다 필통 아래에서 어떤 긴 머리카락 뭉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적이 있었다. 영석은 그런 승현에게 무섭게 화를 냈다. 그뒤로 승현은 영석의 가방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가끔 영석이 뭔가에 홀린 듯 멍한 눈으로 걸어다닐 때가 있었다. 공중에 손을 휘젓거나 바닥으로 직선으로 엎어지고 난 뒤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며 '여기가 어디지?' 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그런 모습에 당황했던 승현은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져서 아무 말없이 영석을 화장실로 데려가 세수를 시키곤 했다. 그럴 때의 영석의 모습은 뭔가에 홀린, 아니 뭔가에 씌인 것 같았다고 승현은 기억한다.
영석은 부자들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이 당한 사기가 그런 돈많은 사채업자에게 당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변호사가 된 뒤 그는 국내 유수의 재력가들의 변호를 맡길 좋아했다. 물론 거물급들은 아니었고 피래미급들이었다. 자신의 이복형 김수산과 같은 대부호의 변호를 맡기에는 아직 그는 경력이 모자랐다. 그렇지만 그는 타고난 머리와 재치로 많은 소송을 승리로 이끌어냈고 점차 지명도도 높아져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도중 괌에서 비행기로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영석의 지명도를 낮추게 할 수 있는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 영석이 변호를 맡았던 부자들이 예외없이 사고로 죽어나간다는 상당히 흉흉한 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이었을 뿐 사실로 밝혀진 것은 없었다. 영석은 김수산이 자신의 이복형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니 전담 고객을 내가 꼭 뺏어 줄께..후후..'
라고 중얼거리곤 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가끔 승현은 제발 니가 변호를 맡아서 그 인간좀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생각 때문에 이복형과 친구가 한 비행기에서 같이 비명횡사한 것일까?
옛날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승현의 자동차는 벽제 화장터 앞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2시였다. 한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아직 화장터 앞은 한산했다. 영석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그것은 승현과 비슷했다. 오래 전 실종된 아버지와 집을 나간 어머니를 제외하면 외아들이었던 영석만이 남을 뿐이었다. 외톨이 근성인 그녀석은 친구라면 대학 동기인 수혁과 몇 명, 그리고 자신이 있을 뿐이다. 좀 기다리면 아마 대학 시절 친했던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인 수혁을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승현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옷매무새를 잠시 매만진 뒤 화장터로 향했다. 그런 그의 등뒤에서 익숙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김승현!"
"엇. 정수혁!"
뒤를 돌아본 승현의 뒤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보였다. 대학 동기 정수혁이었다.
한참동안 그들은 옛 이야기를 나눴다. 형사를 왜 그만뒀냐는 승현의 말에 수혁은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다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잠시동안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 수혁이 침묵을 깨며 승현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영석이가 가족이 없잖냐..."
"그렇지..."
"간이 화장이라도 하려면 죽은 사람이 평소에 아끼던 물건이나 죽은 사람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물건을 태워야 하는데 이놈한텐 그런 걸 챙겨 줄만한 사람도 없더라구..."
"그래서?"
"내가 영석이가 살던 집에 가서 문좀 따주시고 몇몇 물건을 갖고왔거든...아직 장례식 시작하려면 좀 멀었으니까 잠깐 그거나 보고 있자고..."
"무단 가택 침입죄 아니냐?"
"형사복 벗은지 3년돼서 그런거 몰라 이놈아..후후.."
수혁이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 뒷트렁크에서 좀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하나 꺼내 왔다.
죽은 영석이 대학 시절 썼던 파일과 6년동안 한번도 잃어버리지 않은 샤프, 그리고 여자친구들에게 받았던 많은 선물들이 있었다. 승현은 낡아빠진 제도 3000 샤프를 집어들었다.
'그놈에 샤프 좀 바꿔라...그 심나오는 부분 휜거 안보이냐?'
'돈많네! 너같이 사는 인간들이 많으니까 아직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만달러 시대를 뛰어넘질 못하고 있는거야 인간아. 정신좀 차려! 나같으면 한달에 한번씩 샤프 잃어버리는 돈으로 소법전을 열 개는 샀겠다.'
'1년 내 모아도 소법전 하나 산다. 구라는 병이야. 쯧쯧...'
영석의 방에서 들고 온 앨범을 넘기던 수혁이 피식 웃었다. 샤프를 들고 옛날 추억을 생각하던 승현이 수혁을 바라보았다.
"왜웃냐?"
"이거봐라. 영석이 아버지다. 어떻게 좀생이같이 생긴게 영석이랑 꼭닮았냐...크크.."
"호오..그래?"
승현은 수혁이 앨범에서 꺼내주는 빛바랜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영석의 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 찍은 사진인 듯 했다. 영석과 닮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분위기가 다른 그 얼굴의 짧게 깎은 머리가 꽤 인상적이었다. 흑백사진은 대체 언제 찍은 사진인지 빛이 바래다 못해 뒷부분은 누래져 있었다. 희미한 글씨로 사진 뒷편에 사진을 찍은 날짜와 제목, 그리고
주인공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웬지 모르게 궁금해진 승현은 시력을 집중해서 사진을 살펴보았다.
"영석이가 유씨였냐...허허..."
사진의 이름 중 그나마 선명하게 쓰여 있는 것이 성씨였다.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성씨를 읽은 다음 희미한 글자를 알아보기 위해 승현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글자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1972. 8. 28 - 연병장에서.........이등병 유...... 재 .......훈 .........
잠시동안 그 이름이 승현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오늘의 하루와 영석의 아버지의 이름..유재훈과의 강한 연관성...그것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데는 채 5초가 걸리지 않았다.
승현은 다시한번 사진의 얼굴을 확인했다. 영석과 닮은 얼굴...그러나 어딘가 다른 분위기..그것은 그의 차가운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꿈 속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아니 꿈속에서 보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얼굴 윗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엔 커다란 사마귀가 있었다.
승현은 순간 손이 떨려 사진을 놓치고 말았다.
첫댓글 음... 잼써여^__________^
너무 재밌어요!!궁금궁금!!!
너무너무 재밌어요...궁금궁금...!!!!!
좋군요..!
어헛..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군요+ㅁ+!
오 법에 관한 리얼리티가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럼..유재훈이란 사람이.미라가 된건가.-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