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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ṃyutta Nikāya, nidānavaggo n, 1. nidānasaṃyuttaṃ, 7. mahāvaggo n,
1. assutavāsuttaṃ n (SN 12.61)
7. 큰 법문의 품(Mahāvagga)
12: 61(7-1) 배움이 없는 자의 경 ① [Paṭhamâssutavāsutta]2558)
2558) SN. II. 94 : 잡아함 12권 7(大正 2. 81c, 잡289) 참조
♦ 61.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 pe ...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바나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assutavā, bhikkhave, puthujjano
imasmiṃ cātumahābhūtikasmiṃ kāyasmiṃ
nibbindeyyapi virajjeyyapi vimucceyyapi.
3. [세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2559)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에서
싫어하여 떠날 수 있을지 모르고, 그것이 사라지면, 해탈할 수 있을지 모른다.2560)
2959) assutavā puthujjano : 배우지 못한 범부를 말하는데,
이들은 아직 '호름의 길에 들어선 님[豫流向 : sotāpattimaggal'이 아직 아닌 자를 말한다.
범부의 어원에 관해서는 '많은(ved. pṛthu)'과 '개별적, 별개의 (ved. pṛthak)'라는
두 어원이 있으므로
Srp. II. 97에서는 '많은 번뇌를 지닌 존재 또는 고귀한 자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규정 하고 있다.
Pps. I. 21에 따르면, ① 가르침에 대한 앎이나 수행이 없는 배우지 못한 범부(assutavā puthujjana)와
② 진리의 흐름에 들지 못했으나 착하고 건전한 범부(kalyāṇa puthujjana)가 있다.
2560) nibbideyya, virajjeyya, vimucceyya : 경험된 것에서 철수하여 해탈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taṃ kissa hetu?
dissati, bhikkhave ,
imassa cātumahābhūtikassa kāyassa
ācayopi apacayopi ādānampi nikkhepanampi.
4.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그는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에서
늘어나고 줄어들고 받아들이고 내버리는 것을2561) 보기 때문이다.
2561) ācaya, apacaya, ādāna, nikkhepana : 한역에서는
'유증유멸유취유사(有增有滅有取有捨)'로 번역한다.
tasmā tatrāssutavā puthujjano nibbindeyyapi virajjeyyapi vimucceyyapi”.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을
싫어하여 떠날 수 있을지 모르고, 그것이 사라지면, 해탈할 수 있을지 모른다.
♦ “yañca kho etaṃ, bhikkhave, vuccati
cittaṃ itipi, mano itipi, viññāṇaṃ itipi,
tatrāssutavā puthujjano nālaṃ nibbindituṃ nālaṃ virajjituṃ nālaṃ vimuccituṃ.
5.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2562)
하는 것에서는 싫어하여 떠날 수 없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해탈할 수 없다.
2562) attaṁ iti pi mano iti pi viññāṇaṁ iti pi :
심·의·식[心·意·識]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아비달마불교의 경향처럼,
Srp. II. 98에서는 이 모두는 동일한 것으로 정신의 영역[manāyatana]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역자는 각각 마음 · 정신 · 의식으로 엄밀히 구분하여 번역한다.
경전에서 마음은 느낌이나 지각과 관련되어 주로 쓰이고
정신은 사유나 숙고와 관련하여 주로 쓰이고 의식은 감각적 인식과 관련하여 주로 쓰인다.
taṃ kissa hetu?
dīgharattañhetaṃ, bhikkhave, assutavato puthujjanassa
ajjhositaṃ mamāyitaṃ parāmaṭṭhaṃ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6.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것을 오랜 세월 동안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2563) 라고
애착하고 탐착하고 집착해왔다.
2563)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 ti : Srp. II. 98에 따르면
1 '이것은 나의 것이고'는 갈애에 대한 집착(taṇhāgāha)
2 '이것은 나이며'는 자만에 대한 집착(mānagāha)
3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igāha)이다.
tasmā tatrāssutavā puthujjano nālaṃ nibbindituṃ nālaṃ virajjituṃ nālaṃ vimuccituṃ.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그것에서 싫어하여 떠날 수 없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해탈할 수 없다.
♦ “varaṃ,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imaṃ cātumahābhūtikaṃ kāyaṃ attato upagaccheyya, na tveva cittaṃ.
7.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을 자기 자신이라고 간주하는 것이2564) 차라리 좋을 것이다.
2564) attato upagaccheya : 여기서 'attato'의 'to'는 서술탈격(abl. predicative)으로 쓰인 것이다.
해당 잡아함 289와 290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영어사대신 계아아소(寧於四大身 繫我我所)' 또는
'영어사대색신 계아아소寧於四大色身 繫我我所)'라고 다소 다르게 표현한다.
붓다고싸는 Srp. II. 99에서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장황하게 부연설명하면서
무상하지만 계기적인 육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taṃ kissa hetu? dissatāyaṃ, bhikkhave, cātumahābhūtiko kāyo
ekampi vassaṃ tiṭṭhamāno dvepi vassāni tiṭṭhamāno tīṇipi vassāni tiṭṭhamāno
cattāripi vassāni tiṭṭhamāno pañcapi vassāni tiṭṭhamāno dasapi vassāni tiṭṭhamāno
vīsatipi vassāni tiṭṭhamāno tiṃsampi vassāni tiṭṭhamāno cattārīsampi vassāni tiṭṭhamāno
paññāsampi vassāni tiṭṭhamāno vassasatampi tiṭṭhamāno, bhiyyopi tiṭṭhamāno.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이
일 년을 살고 이 년을 살고 삼 년을 살고 사 년을 살고 오 년을 살고
십 년을 살고 이십 년을 살고 삼십 년을 살고 사십 년을 살고 오십 년을 살고
백 년을 살고 또 그 이상 사는지를 그는 보고 있다.
♦ “yañca kho etaṃ, bhikkhave, vuccati cittaṃ itipi, mano itipi, viññāṇaṃ itipi,
taṃ rattiyā ca divasassa ca aññadeva uppajjati aññaṃ nirujjhati.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 한다.2565)
2565) taṁ rattiyā ca divasassa ca aññadeva uppajjati aññaṁ nirujjhati :
칼루파하나 (D. J. Kalupahana)에 의하면,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은
근본불교가 찰나멸론(刹那滅論)에 입각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신체적 몸이 마음보다 좀 더 안정적이라고 한다면 순간주의의 이념을 반박하는 것이다.
신체적인 몸은 비록 변화하고 파괴되지만 매 순간마다의 생성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므로
어느 정도 지속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마음이 순간적 변화에 종속된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이 경은 오직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그 상대적 변화의 속도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D, J. Kalupahana, Causality. p. 83)'
seyyathāpi, bhikkhave, makkaṭo araññe pavane caramāno sākhaṃ gaṇhati,
taṃ muñcitvā aññaṃ gaṇhati, taṃ muñcitvā aññaṃ gaṇhati;
9.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 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2566)
2566) seyyathāpi, bhikkhave, makkaṭo araññe pavane caramāno sākhaṁ gaṇhati,
taṁ muñcitvā aññaṁ gaṇhati, taṁ muñcitvā aññaṁ gaṇhati :
Srp. II. 100에 따르면, 숲은 대상의 숲으로 대상의 숲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원숭이이다.
대상을 붙잡는 마음이 나뭇가지를 붙잡는 원숭이이다.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가듯이 마음은 대상의 숲에서 옮겨 다니며
시각적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고 때로는 청각적인 대상 등이나
과거, 현재, 미래의 때로는 외적 내적의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킨다.
원숭이가 새로운 나뭇가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땅바닥으로 내려와서 앉는 것이 아니라
한 나뭇가지를 붙잡고 그 위에 앉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대상의 숲을 옮겨 다니다가 대상을 새로운 발견하지 못하면,
한 종류의 대상에 정착한다.
이 비유는 닦여지지 않은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항상 대상과 함께한다는 속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evameva kho, bhikkhave, yamidaṃ vuccati cittaṃ itipi, mano itipi, viññāṇaṃ itipi,
taṃ rattiyā ca divasassa ca aññadeva uppajjati aññaṃ nirujjha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
♦ “tatra,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paṭiccasamuppādaṃyeva
sādhukaṃ yoniso manasi karoti —
‘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
yadidaṃ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10.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에 대해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킨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난다.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 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 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
♦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11.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이와 같이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2567) 해탈한다.
그가 해탈할 때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앞이 생겨나,2568)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2567) virajjati, virāgā : 원래 '사라지고, 사라져서'라는 뜻인데,
사라짐은 어원적으로 색이 바래서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주어는 해탈하는 사람이다.
한역에서 이탐(離貪)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므로
'욕망을 떠나고, 욕망을 떠나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이거(W. Geiger)나 비구 보디(Bhikkhu Bodhi)를 비롯해서 소양의 학자들은
'무관심해져서, 평정해져서, 자극이 없어져서' 등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한역의 이탐과 유사한 번역으로 그 의미가 너무 박약하다.
여기서는 해탈하는 자가 존재의 다발과 더불어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의 주체나 객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사라져서 해탈한다는 의미이다.
2568) vimuttasmin vimmutt'amhīti ñāṇaṁ hoti : 경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
(SN, III. 21과 50, AN. IV. 17, Vin. I. 14 등)이다.
여기서는 '해탈되었을 때 '나는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났다.'로 되어 있으나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해탈되었을 때에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앞이 생겨난다.
(vimuttasmin vimuttaṁ iti ñāṇaṁ hoti)'가 있는데 문맥의 통일을 위해 역자는 후자를 택한다.
한역경전에서는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 번역한다.
paṭhamaṃ. ∴
12 : 62(7-2) 배움이 없는 자의 경 ② [Dutiyâssutavāsutta]2569)
2569) SN. II. 95 : 잡아함 12권 8(大正 2. 82a, 잡200) 참조
한역 잡아함에서의 설법장소는 왕사성(王舍城) 가란다죽림원(迦蘭多竹林園)이다.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을 싫어하여 떠나서 해탈하여야 한다.
2.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그는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에서
늘어나고 줄어들고 받아들이고 내버리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을
싫어하여 떠나서 해탈하여야 한다.
3.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싫어할 수 없으며 떠날 수 없으며 해탈할 수 없다.
4.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것을 오랜 세월 동안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애착하고 탐착하고 집착해왔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싫어할 수 없으며 떠날 수 없으며 해탈할 수 없다.
5. 그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을 자기 자신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차라리 좋을 것이다.
6.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이 네 가지 광대 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이
일 년을 살고 이 년을 살고 삼 년을 살고 사 년을 살고 오 년을 살고
십 년을 살고 이십 년을 살고 삼십 년을 살고 사십 년을 살고 오십 년을 살고
백 년을 살고 또 그 이상 사는지를 그는 보고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 한다.2570)
2570) 여기서 이 경은 앞의 경과 일치한다. 그러나 원숭이의 비유가 빠져 있다.
7.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에 대해 이치에 맞게 정신 활동을 일으킨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 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이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
sukhavedaniyaṃ, bhikkhave, phassaṃ paṭicca uppajjati sukhavedanā.
tasseva sukhavedaniyassa phassassa nirodhā
yaṃ tajjaṃ vedayitaṃ sukhavedaniyaṃ phassaṃ paṭicca uppannā sukhavedanā
sā nirujjhati sā vūpasammati.
dukkhavedaniyaṃ, bhikkhave, phassaṃ paṭicca uppajjati dukkhavedanā.
tasseva dukkhavedaniyassa phassassa nirodhā
yaṃ tajjaṃ vedayitaṃ dukkhavedaniyaṃ phassaṃ paṭicca uppannā dukkhavedanā
sā nirujjhati sā vūpasammati.
adukkhamasukhavedaniyaṃ, bhikkhave, phassaṃ paṭicca uppajjati adukkhamasukhavedanā.
tasseva adukkhamasukhavedaniyassa phassassa nirodhā
yaṃ tajjaṃ vedayitaṃ adukkhamasukhavedaniyaṃ phassaṃ paṭicca
uppannā adukkhamasukhavedanā sā nirujjhati sā vūpasammati.
8. 수행승들이여,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즐거움의 느낌이 생겨난다.
그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이 소멸하면 그것에 의해 발생되고 경험된,
즉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거움의 느낌은 소멸하여 그쳐 버린다.2571)
2571) 이 경의 10~13까지는 MN. 140(III. 242)과 일치한다.
9.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괴로움의 느낌이 생겨난다.
그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이 소멸하면 그것에 의해 발생되고 경험된,
즉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괴로움의 느낌은 소멸하여 그쳐 버린다.
10. 수행승들이여,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난다.
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느끼게 하는 접촉이 소멸하면 그것에 의해 발생되고 경험된,
곧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소멸하여 그쳐 버린다.
♦ “seyyathāpi, bhikkhave, dvinnaṃ kaṭṭhānaṃ
saṅghaṭṭanasamodhānā usmā jāyati tejo abhinibbattati.
tesaṃyeva dvinnaṃ kaṭṭhānaṃ nānākatavinibbhogā yā tajjā usmā sā nirujjhati sā vūpasammati;
11.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두 개의 부싯나무를 서로 마찰하여 화합시키면2572)
연기가 나며 열기가 생겨나 불이 나타나고,
그 두 개의 부싯나무를 분리하여 떨어뜨리면 거기서 생겨난 열기가 소멸 하고 종식되는 것과 같다.
2572) dvinnaṁ kaṭṭhanaṁ saṁghaṭṭasamodhānā : MN 140의 일치하는 문맥에는
'saṁghaṭṭa' 대신에 'saṁghassa'가 놓여 있다.
여기서 나무 (kaṭṭha)는 Srp. II. 101에 의하면 찬목(鑽木 araṇi)을 의미한다.
Srp. II. 101에 따르면, 감관[六入]은 밑불 나무이고 대상은 윗불 나무이다.
접촉은 마찰이고 느낌은 불이다.
12.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즐거움의 느낌이 생겨난다.
그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이 소멸하면 그것에 의해 발생되고 경험된,
즉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거움의 느낌은 소멸하여 그쳐 버린다.
13.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괴로움의 느낌이 생겨난다.
그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이 소멸하면 그것에 의해 발생되고 경험된,
즉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괴로움의 느낌은 소멸하여 그쳐 버린다.
14. 수행승들이여,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난다.
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느끼게 하는 접촉이 소멸하면 그것에 의해 발생되고 경험된,
곧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느끼게 하는 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소멸하여 그쳐 버린다.
15.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면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그가 해탈할 때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