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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희] 내시의 딸ㅡ 오 공화국 시대 22
보통 물김치는 빨갛게 담그는데 밤 그리고 잣 재 등과 실고추가 들어 간 그 김치는 익지도 않았고 간장으로 담근 김치였다.
김치 안에는 통통한 잣이 둥둥 떠있고 배 조각도 들어가 있고 날 밤도 씹히고 석이버섯도 있고 별 희한한 재료가 다 들어가,
그럴 듯한 맛이었다.
그런데 그 김치가 아마 이 집안의 내 놓아라 하는 메인 김치인 모양이었다.
내가 국물을 간신히 몇 번 떠먹자 이내 백발의 노인들이 밖을 향해 외쳤다.
"순이야. 손님이 장김치를 잘 드신다.
새루 한 그릇 퍼 오거라."
얼굴이 뽀얗게 핀 어느 처녀가 장김치를 한 보시기 더 떠 왔고,
나는 그 백발의 노인들의 성원에 힙 입어 장김치 두 그릇으로 밥 한 그릇을 비워냈다.
그 중 몸집이 호리호리한 백발의 노인이 어느 새 수고했다는 듯 나의 등을 고요하게 쓸어주고 있었다.
상이 나가고 나자 곧 수정과와 식혜 그리고 다식과 유자단자 등이 화려한 빛깔을 담고 예쁘게 빚어져 들어왔다.
모양은 아름답지만 별로 맛은 없는 그 다식도 나는 결국 다 한 개씩은 맛보아야 했다.
송화다식은 좀 입맛에 안 맞고 그 중 깨 다식이 나았다.
내가 만일에 우리 시향에 안 갔었더라면 아마 그것이 다식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장김치 빼 놓고는 거기 놓인 음식을 대충은 다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식혜를 마시는 동안에도 연거푸 질문이 들어 왔다.
집이 어디냐 그리고 부모님은 무엇을 하느냐.
그리고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본관을 묻고 엄마의 본관과 고향까지 묻는 데엔 질색이었다.
나는 엄마가 이북 사람인 것과 원산이 고향인 것은 언뜻 알지만 사실 외가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왜 이런 질문에 땀 흘려 가면서 고역을 겪어야 하는지 의문이 났다.
나의 등을 쓸어내던 백발의 할머니가 어느 새 내 손을 꼭꼭 쥐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럴까.
생전 처음 보는 처자가 이렇게 낯 익을 수가 없어.
내 잃어버린 친정 조카딸 같기도 하고..."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가식이 아닌 듯이 다정하기만 한 그 노인의 시선을 간신히 피해 내는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다 내 사람이다.
하고 보니 그렇지 뭐."
"곱게 자란 티가 역력하네.
어떤 어마님 밑에서 컸는지는 몰라도 배운 티가 쏙 나네요."
그리고는 노인들의 덕담이었다.
그 중에서 단 한마디를 하지 않던 희익의 어머니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버님이 무슨 일을 하신다고?"
"조그만 인형공장을 하십니다. 조그만 거예요."
희익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리고 미소도 보여주지 않았다.
"왜 형제가 달랑 하나일까?
형제가 하나라면 외로웠을 텐데..."
나는 희수오빠와 승태, 그리고 영윤이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다하려면 내 집안의 내력을 다 이야기해야 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이들에게 그 많은 이야기를 담기는 내게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숨긴 다는 뜻은 추호도 없었고 다만 이야기를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굳이 영윤이란 사촌이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영윤이 때문에 덜 외로운 적도 없었고 또 내 집안 내력을 내 입으로 설명할 자신은 이미 없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간간이 고개를 숙여 대꾸를 하면서 문득문득 영윤이가 궁금했다.
영윤이는 오늘 노진오빠를 만난 것일까?
만나서 두 사람은 손이라도 부여잡을 수 있었을까?
내가 지금 앉은 곳에서의 정체성에 더욱 더 노진 오빠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졌다.
나는 지금 이 자리보다는 노진오빠와 면회실 의자에서 마주하는 영윤이가 훨씬 행복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공주라는 시골. 말로만 들었던 대 소가가 그들먹한 이런 집.
이런 집에서 희익이가 자라났다는 것은 내게는 생경하기 만한 일이었다.
신문로에 살고 있는 희익이는 늘 도시적인 아이였다.
이런 고옥과는 연결이 안 되어서 나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내가 난처해하는 빛을 알아차린 희익이가 벌떡 일어났다.
"낮에 산에 오르느라고 좀 피곤했어요.
저희들은 사랑채로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사랑채로 색시를 데려 가려구?"
"네."
"아니다. 어떻게 색시를 사랑채에?"
"그럼요?"
"별채로 안내해라.
우리는 대대로 여자 손님은 별채였다."
백발의 노인들은 나를 어디에 재울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했다.
나를 아마 희익이의 점찍어둔 색시 감으로 생각 한 것은 틀림이 없는 일 같았다.
"안채에서 큰 조카가 건넌방에 거느리고 자지."
내 손을 꼭꼭 쥐던 백발의 할머니가 중재에 나섰다.
"대모님, 잠은 그렇게 자더라도 일단은 사랑채에 가서 형님하고 같이 이야기나 하다가 올려 보낼게요.
여긴 좀 어렵잖아요."
"하긴 젊은 사람들이니.
그러는 것도 괜찮겠네."
그 할머니는 희익이의 천주교 대모라는 것을 알았다.
대모면서 또 작은 할머니였다.
신유박해라거나 하는 천주교 박해 사건 때 여지없이 집안이 풍비박산되었던 그런 전통으로
성인을 낸 희익이의 집안은 천주교 집안인 것도 그 날 알았다.
우리는 간신히 그 안채의 안방을 빠져 나왔다.
내가 구두를 간신히 발에 끼우고 사랑채로 나오는 길은 길기만 했다.
한 집안에서 다른 방을 가는 길이 이렇게 먼 줄 나는 또 처음 알았다.
안채의 높은 댓돌을 몇 개나 지나고 안채 큰 대문을 열고 담을 한참 걸으니 조그만 일각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깜깜한 계단이었다.
전등도 없는 그 계단을 발이 아파하면서 간신히 희익이의 손을 잡고 내려서자 어둠 속에서 아이들의 키득이는 소리가 났다.
"야, 너 이리 와 봐."
희익이가 부른 것은 아마 조카인 모양이었다.
초등학생은 되었을까 한 그 아이는 희익이를 보자 성큼 와서 안겼다.
"대부님."
"내 아들이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주교에서 내 대자란 말이야."
평소 천주교 신자인 줄도 몰랐던 희익이가 천주교의 대자까지 둔 처지라는 것부터
나는 그 날의 모든 현실이 하룻밤의 꿈같기만 했다.
우리는 겨우 사랑채로 들어섰다.
사랑 대청도 넓고 넓었다. 쪽마루 같이 놓였으나 보통 여염집의 대청보다도 넓은 마루에는 방문마다 현판이 붙어 있었다.
나는 한문의 뜻은 모르지만 그 생경한 방문 앞에서 희익이가 깔아주는 방석 위에 앉자 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집에 연락해야 하는데..."
희익이가 방문을 열었다.
"리차드."
아까 그 아이가 쏜살같이 뛰어왔다.
"안에 가서 전화기 좀 갖구 와."
잠시 후 아이의 타박타박하는 발소리와 함께 우리 앞으로 온 전화기는 놀랍게도 무선전화기였다.
이런 고옥과 무선전화기가 너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여기 재미있네."
내가 그나마 긴장이 풀려서 웃자 희익이가 말했다.
"너 그거 휴대폰이다.
일반전화하고 거는 게 또 틀려."
아닌 게 아니라 그 전화는 잘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하고 안테나를 확인한 후에야 우리는 겨우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엄마, 나 희익이네 집에 왔는데 돌아가기가 힘들 거 같아.
어쩌지?"
"늦게라도 집으로 와라.
어른들이 계실 텐데 거기서 자면 흉이 돼."
엄마가 그렇게 말했지만 희익이와 내가 번갈아 가면서 통화를 하고 아버지하고 통화를 끝낸 후에는 다시 평온해 졌다.
내가 다리를 뻗고 채 앉기도 전에 희익이 형 철수와 조카라는 여학생과 더 보태진 둘째 조카라는 고등학생이
다과상을 앞세우고 사랑채로 왔다.
나는 다시 자세를 고치고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과의 이야기 속에 희익이네가 공주에서는 문중이 가장 번창한 집안 중에 하나라는 것과 여기의 막내아들이란 것도 알아내었다.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하나같이 한의사이며 또한 그들이 모두 작은댁을 갖고 있으며
부인이 하나인 분은 희익이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는 것도 그 집의 내력이었다.
나는 고단했지만 생전 처음 낯선 곳에서 보낸 밤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늦은 밤에 다시 안채로 가서 건넌방에 들어갔다.
윤이 나게 닦아 놓은 가구는 하나같이 번쩍거렸고 그 아랫목에는 두껍기가 일반 이불의 배나 되는 이부자리가 이미 깔려 있었다.
나는 옷을 벗지도 못하고 겨우 이부자리에 들어 불을 껐다. 그리고는 곧 잠에 빠져 들어갔다.
깔린 두껍고 무거운 목화솜이불을 덮고 그 날 밤 편한 잠을 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고 나서 바깥 표정을 살폈다.
이불은 어디에 두어야 하고 세수는 어디서 하고 간단한 화장이라도 할 곳이 있을까?
그런 기우는 곧 풀렸다.
순이라는 처녀가 곧 나에게 왔고 뒤 곁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장독대가 즐비한 뒤 후원은 후원대로 아름다웠다.
밤이라 몰랐던 것이지만 집안에는 온통 화초뿐이었다.
후원에는 부엌 곁에 펌프가 있었지만 수건과 비누를 든 순이는 나를 일각문 밖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무조건 하라는 대로만 했다.
거기 일각문 밖은 바로 개울이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그런 개울이 아니었다.
집 뒤는 산이었고 그 산에서 발원한 시내가 거기서 내려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개울 입구는 울타리로 막아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 개울은 희익이네 집에서만 쓸 수 있는 천혜의 개울인 셈이었다.
풀숲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맑고도 차가왔다.
나는 산을 보았다.
군데군데 잣나무가 우뚝 서 있는 숲이 보이고 울창한 녹음 속에서는 간간이 원추리 꽃도 보이고
산나리 꽃도 보이고 도라지꽃도 보였다.
순이가 수건을 내게 주었다.
시골 수건이라고 해서 시골답지가 않았다.
우리 집에서 보던 수건보다도 더 예쁘게 수가 놓이고 천이 통통한 큰 수건은 새 것이라 뜯지도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비누와 칫솔 치약까지도 모두 새것이었다.
"어쩌면 손님에 대한 배려가 이렇게 특별할까?"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곳 생전 처음 와 보는 이 집이 단숨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자꾸 불안해졌다.
희익이는 이 집에서 이렇게 살아 온 걸까?
보통 대갓집이라고 하는 게 이런 집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퍼뜩 내 머리를 스쳐갔다.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과 이 집이 기막히게 마음에 든다는 것이 나를 자꾸 울적하게 했다.
평소에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보지 않았던 희익이지만 오늘 여기에서 나는 희익이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나는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물에 담가 세수를 했다. 순이가 말했다.
"여기는 아무도 오지 않거든요.
낮에 여기서 목간을 해도 괜찮아요."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다 하였을까?
우물에서 물을 길어내어 쓰는 것보다도 이런 개울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물은 양도 아주 많았다.
이 바윗돌에서 세수도 하고 김칫거리며 푸성귀를 씻는 일도 좋을 것 같았다.
내 가까운 곳으로 까만 색 무당 잠자리가 날아왔다.
날개는 검은색이고 꼬리는 신비하게 보라색을 띤 청색 잠자리였다.
잠자리는 사람이 있는데도 내 바로 앞으로 와서 거기 풀숲에 앉아 있었다.
나는 세수를 하면서 물을 슬쩍 잠자리에게 던져보았다.
그제야 그 잠자리는 하늘하늘 일어서더니 별로 급하지도 않게 위 개울 쪽으로 올라갔다.
새도 울었다.
아주 예쁜 소리로 "또르르르 꾀꼴 또르르르 꾀꼴"
나는 그 소리에 취하여 저 멀리 산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새소리가 이렇게 가깝게 들린단 말인가?
나는 세수를 하는 게 아니라 희익이네 집 후원과 산에 그만 반해버렸다.
그때 희익이가 걸어왔다.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씻었다.
희익이가 반가웠다.
"형수님이 데려 오라네."
"희익아 어쩌면 여기가 이렇게 좋으니?"
"그렇지?"
"아니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기껏 서울 같은 곳으로 갔단 말이야?"
희익이가 입을 크게 벙긋했다.
"자식은 낳아서 서울로 보내라는 것이 우리네 가르침이었잖아.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하고 떨어져 혼자 밥 먹고 혼자 공부하고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근데 방학 때도 왜 자주 안 내려왔어?
이렇게 좋은데."
"너 그거 아니?"
"뭘?"
"나 어릴 때 처음 서울에 가서는 매일 여기 오는 꿈을 꾸었다.
혼자서는 갈 수 없고 누가 데려다 주어야 하는데... 갈 수 없는 그리움.
그런데 말이야 나는 매일 꿈을 꾸었다.
꿈을 꾸면 나는 걸어서 여기 올 수 있었던 거야.
나는 우리 살던 집 뒤로 한참을 걸으면 여기인걸. 꿈에서 알고 이렇게 올 수 있었구나.
감탄하고 꿈을 깨서는 정말 멍청해 지고 그랬다."
"그랬어?"
"근데 말이야 승화야. 언제부터인지 여기 오고 난 후 이틀을 넘길 수가 없더라.
답답한 거야. 여기가.
집에서는 나서기만 하면 교보문고를 갈 수 있고 친구들과 만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그게 안 되잖아.
나는 여기가 답답하더라.
언제부터인지..."
"답답할 수도 있구나. 여기가..."
"너 여기 좋으면 평생 살게 해줄 수도 있다."
"진짜?"
"그럼 나한테 시집오면..."
나는 희익이를 흘겨보았다.
"야, 그러지마.
지금 대모님하고 당숙모들이 다 너를 내 색싯감으로 여기시는 눈친데.
넌 이제 꼼짝없이 여기서 코가 꿰는 거야."
빙글빙글 웃으면서 희익이가 나를 데려 간 곳은 별채의 안방이었다.
거실 같은 방이 나타나고 그 안쪽에 신혼부부인 듯한 침실이 나타나고 나는 그 안쪽의 어느 방으로 안내되었다.
거기는 고색 찬연한 고택과는 어울리지 않게 모든 가구가 크랙가구였다.
내가 딛고 올라선 마루에는 우아한 크랙 소파가 놓여 있고 파리가 낙상을 할 만큼 윤기있게 닦아놓은 마루 한 편에는
크랙의 장식장이 있고 문을 열고 들어선 방안에는 또 하얀 크랙의 장롱이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어울림으로 단장된 이 방은 누구의 방일까 하는데 희익이가 이번에는 그 방안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우아한 궁전의 왕비가 사용했을 법한 중후한 느낌의 또 하얀 크랙 화장대가 있었다.
게다가 드라이어를 비롯한 일체의 화장도구가 있었다.
"형수님이 편하게 사용하래네."
"형수님?"
"어제 우리랑 산에 갔던 조카 어머니 말이야."
"무슨 방이 이렇게 좋아?"
희익이가 대답 대신 또 벙글벙글 웃었다.
"취향이야 각자 다르니까..."
거기 또 가족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보니 나랑 산에 올라갔던 그 여학생의 어머니인 모양이었다.
"그럼 여기 있는 거 써.
다 써도 좋다는 형수님의 말씀이 있으셨어."
그 여학생의 어머니 방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조심스럽게 거기에서 간단한 화장을 끝냈다.
머리카락이라도 떨어졌을까봐 조심스럽게 줍는 나에게 희익이가 웃었다.
"무척 색시 같으네. 정말 평소와 좀 다른데?"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나는 다시 방바닥을 돌아보았다.
종이 장판을 바르고 거기에 니스 칠을 하고 윤을 낸 바닥은 결빙된 호수 바닥처럼 반들거렸다.
얼마나 일찍 일어났기에 이렇게 일찍 방을 치우고 걸레질까지 한 것일까?
나는 새삼 이 방 주인의 청결함에 감탄하였다.
다시 우리는 안채로 왔다.
어제의 상이 잔치 음식 같았다면 아침의 식사음식은 아주 단조로웠다.
고기도 간이 강한 것은 없고 국도 맑은 국이었고 떡은 없었다.
도대체 몇 간인지 모를 정도로 길이가 긴 안방에는 마치 잔칫상처럼 줄을 지어 상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윗목에서 희익이와 조카들과 식사를 했다. 아랫목에는 희익이 부모님과 어른들이 앉았다.
어제의 그 백발 인들은 자리에 없었다.
나는 윗목에서의 식사가 비교적 편했지만 밥의 양이 워낙에 많아서 눈치껏 안 남기려고 희익이에게 덜어 주었고
부담을 느끼면서도 희익이가 덜어 간 탓에 식사를 남기지는 않았다.
밖에서는 매미 울음소리가 한창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백발의 노인들이 또 우르르 나타났다.
그리고 수박을 비롯한 과일을 먹으면서 어제 밤보다도 더 다정한 눈길을 내게 보내주었다.
"이 수박은 우리가 울안에서 키운 수박이구려.
어서 들어 보시구랴."
백발노인이 말하자 이번엔 "이게 노마네 집 수박이지, 뭐가 울안 수박이랴?"
"그러우?"
백발의 노인들은 수박을 앞에 놓고는 껄껄 웃었다.
한 노인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그래 미옥이는 어제 부리나케 또 어디를 갔다온댜? 또 그눔한테 갔었우?"
백발노인이 그 노인의 팔을 툭 치면서 "형님은 내 속 곪아터지는 걸 알면서 또 왜 그러우?"
"그러니 애를 잡아야지.
그렇게 쉬쉬할 게 아니라니깐"
"미옥이 년, 델구 왔슈. 암 소리 말아유."
노인들이 어색하게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그래 수박이 달우?"
"네."
내가 어색하게 대꾸하는데 희익이가 나를 또 구해내었다.
"저희는 이만 나가 볼게요.
집도 구경시켜주고 뒷산에도 한 번 올라가고..."
"암, 암 그래야지."
나는 희익이를 따라서 집안 구경을 한다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집은 크게 행랑채와 안채 그리고 사랑채와 별채 사당채로 분류되어 있었다.
대문마다에는 모두 현판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집안치고는 관리가 잘된 집이라는 인상이었다. 그
러나 별채의 담이 허물어지고 거기를 벽돌로 담을 쌓아 놓았듯이 더러는 균형이 깨지는 곳도 있었다.
별채의 반들거리는 대청에 깔린 카펫과 응접세트 같은 것들이었다.
희익이는 형제가 일곱이고 그 중 막내였다.
그러나 보니 지금 이 집안에 며느리만 넷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집안에서 한의원을 하잖아.
형제들이 모두 의사고 그러다 보니 같은 집에 살면서 도움을 받는 것이 편하대.
더구나 약 다리는 일을 친척들이 맡고 있거든. 우리 집은 아무튼 큰 조직사회야."
그러고 보니 집안엔 유난히 작약나무가 많았다.
그리고 처마 끝 마다에는 약재인 듯한 약초를 말리는 뭉치들이 걸려있고 멍석에 널어 말리는 것들도 곡식이 아니라 약초 같았다.
내가 심중에 있던 말을 하였다.
"나를 왜 여기로 데려왔어?"
내 말속에는 이렇게 집안 식구들에게 다 알려 놓고 그 뒷감당을 어찌 할 것이냐는 그런 마음이 들어있었다.
겉으로는 그것이 나는 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하는 것이었고
내시의 딸,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이런 대단한 집에서 며느리로 생각하기나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희익이는 대답대신 나의 손을 끌고 후원으로 갔다.
희익이의 집은 후원이 바로 산과 맞닿아 있었다.
건물이 있는 뒤 후원은 감나무 천지였고 그 산에다 담을 둘러 집의 경계를 표시한 셈이었다.
"저기 문이 있네.
저리로 나가도 되는 거야?"
나는 그 담장 사이로 조그맣게 서있는 일각문을 보았던 것이다.
"나갈 수 있지."
"참 신기하다.
저기 왜 저렇게 문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산에 담을 치고 경계를 만들고는 거기 지붕을 달아 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저 문을 우리 감나무 집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다 흐트러져 흔적조차 없고 우리 푸성귀 밭이 되어버린 감나무 집에도 거기 그런 문이 있었다.
나는 그 문을 한번 나가보고 싶어 희익이에게 말하였다.
"희익아, 나는 우리 고 건축에서 가장 불가사의 한 점의 하나가 저렇게 담장 밑에 어디론가
나갈 수 있는 작은 숨구멍 같은 문을 상징적으로 달아 놓은 일 같아."
희익이가 나의 말에 관심 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저 문은 그냥 언제나 잠겨있더라.
어느 집에서고 말이야. 그냥 저 문을 달아 놓은 것은 안에서 그냥 밖으로 나간다는 외에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니?"
"그럴 테지."
희익이는 언덕을 향하여 올라갔다.
푸르른 이파리를 담은 감나무에는 푸릇푸릇한 청색의 감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여기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길이 없어."
나는 거기를 그렇게 따라 올라가는데 희익이가 그 담장에 붙은 문의 빗장을 열었다.
"삐거덕" 하는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빗장이 열려지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여기부터는 전부 조릿대 숲이야.
산에는 정말 모두가 조릿대 천지였다.
대나무도 같고 그냥 나무도 같지만 대나무보다 굵기가 얇은 조릿대 숲은 정말 장관이었다.
"설 명절을 얼마 앞두고는 언제나 집안 어른들이 모여 조리를 만들었다.
대개는 큰 조리를 만들어 부엌에서 쓰지만 작은 조리를 만들어 복조리로 집안에 걸어두기도 했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가지고 놀게 나눠주기도 했다."
"저 나무는 뭐야? 소나무는 아니지?"
키가 큰 소나무가 보기도 좋게 자라있었다.
"잣나무다."
"참 푸르기도 하다."
나는 감탄하면서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키 큰 잣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자 여기서는 우리 마을이 다 내려다보인다."
희익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지금 높은 언덕에 서 있는 것이었다.
바로 아래 희익의 집 울안이 다 보이고 그 건너로는 개울이며 산이며 마을의 집들이 다 내려다 보였다.
순간 희익이가 나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와 결혼해 줘."
그는 나에게 프로포즈를 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한적한 공주의 어느 시골 고옥에서 희익이가 한 프로포즈에 달콤함이 잔뜩 들었다.
약간 더운 기를 담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우리의 코끝으로는 풀 냄새가 났다.
잣나무의 향일까? 아니면 조릿대 숲의 향기일까?
나는 희익의 말뜻과는 상관없이 출처 없는 바람의 냄새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의혹의 눈길로 희익이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잘될 거야.
우리는 그리고 결혼할 거구.
내 말을 믿어 줘, 응?"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만나 나는 십 년 이상을 희익이와 알았다.
정말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교가 같은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몇 개월 이상 안 만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희익이가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난 이제부터는 군인의 신분이다.
장교라 하니까 일반 사병보다는 한결 자유롭겠지만 너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오늘 나는 너의 대답을 듣고 싶다.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지?"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희익이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가슴에 안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내 시야에 들어왔고 탄탄한 가슴이 나의 가슴을 죄여왔다.
앞으로의 일에 대하여 나는 판단이 서질 않았지만 지금 내 가슴으로 들어 온 희익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눈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떼의 처녀들이 밝은 음성으로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희익이가 말하였다.
"어서 들어가자.
아주 시끄러운 아이들이야."
처녀들은 그 아래서 우리를 이미 보았는지 "오빠, 거기 있어." 큰소리를 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