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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방과 성전의 사면 담
참고말씀: 레6:16; 10:12,13; 시29:2; 110:3; 겔40:5; 마5;13-16; 22:11-13; 요17:15,16; 롬13:14; 고전14:33,40; 갈3:27; 엡4:31; 골3:8,9; 살후3:6,7; 계19:8
읽을말씀: 겔42:1-20
주제말씀: 겔42:13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앞 곧 북쪽과 남쪽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에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니 이는 거룩한 곳이라.”
첫째, 지정하신 곳에서만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쪽과 남쪽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에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니 이는 거룩한 곳이라.”(겔42:13)
본문에는 무엇이 소개되고 있습니까? 북쪽 뜰에 있는 두 방(1-9절)과 남쪽 뜰에 있는 두 방(10-13절)입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북쪽 뜰로 가서 두 방에 이르니 그 두 방의 하나는 곧 방 앞뜰을 향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쪽 건물을 향하였는데.”(1절) / “남쪽 골방 뜰 맞은쪽과 남쪽 건물 맞은쪽에도 방 둘이 있는데.”(10절)
이 방들 역시 몇 층 구조로 지어졌습니까? 3층 구조입니다. “그 방 삼층에 회랑들이 있는데...”(3절) 다만 상층으로 갈수록 그 크기가 어떠했습니까? 줄어들었습니다. “그 위층의 방은 가장 좁으니 이는 회랑들로 말미암아 아래층과 가운데층보다 위층이 더 줄어짐이라 그 방은 삼층인데도 뜰의 기둥 같은 기둥이 없으므로 그 위층이 아래층과 가운데층보다 더욱 좁아짐이더라.”(5,6절)
북쪽 뜰에 있는 두 방은 어디에 있는 것과 똑같았습니까? 맞은편 남쪽 뜰에 있는 두 방입니다. “남쪽 골방 뜰 맞은쪽과 남쪽 건물 맞은쪽에도 방 둘이 있는데 그 두 방 사이에 길이 있고 그 방들의 모양은 북쪽 방 같고 그 길이와 너비도 같으며 그 출입구와 문도 그와 같으며.”(10,11절)
이 곳은 어떤 이들이 사용하는 방이었습니까? 제사장들입니다. 즉 성전에 나아와 봉사하는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방이었습니다.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13절 중)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습니까?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먹고 또 보관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에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니...”(13절 중)
한 마디로 어떤 성격의 방이었습니까? 거룩한 곳, 거룩한 방이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쪽과 남쪽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13절 상) / “...이는 거룩한 곳이라.”(13절 하)
원래 제사장들은 지성물을 어디서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까? 회막 뜰, 곧 제단 곁입니다.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레6:16) / “모세가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레10:12,13)
그런데 여기서는 어디에서 먹도록 배려해주셨습니까? 성전 좌우편 뜰에 있는 거룩한 방들입니다. 물론 이 방들 역시 성전 뜰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당신의 수고하는 종들을 위해 따로 방들을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아울러 무엇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지성물은 반드시 거룩한 곳에서만 먹어야 했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만’ 받아먹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레10:13 하)
만일 지정하시지 않은 곳에서 먹으면 됩니까?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에서’ 부지런히 봉사하고 또 ‘그 교회에서’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들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엉뚱한 곳에 가서 받으려 하고 있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 곧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들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둘째, 거룩한 옷을 입고 나아와서 헌신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 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겔42:14)
제사장의 방들에서는 또 무엇을 했습니까? 환복(換服)입니다. 즉 평상복을 입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반드시 이곳에서 수종드는 의복, 곧 제사장의 의복으로 환복하고 들어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무슨 방이었던 셈입니까? 환복실(換服室)입니다.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 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14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 헌신할 때는 반드시 거룩한 옷을 입고서 그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110:3) /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29:2)
왜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까? 세상의 옷을 입고서는 도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골3:8,9) /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4:31) /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마22:11-13)
참고로, ‘거룩한 옷’을 무엇을 가리킵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시132:9) 또한 성도들의 옳은 행실(行實)입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8)
그런데 이 옷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그 분 안에 있기에 언제나 우리는 누구로 옷 입기를 힘써야 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13:14 상)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배로 나아갈 때마다 ‘거룩한 옷’을 입고 나아가며, 헌신(섬김)의 자리로 나아갈 때마다 ‘의와 옳은 행실로’ 옷 입고서 그리하고 있습니까?
셋째, 일상생활에서도 늘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겔42:20)
성전 측량을 다 마친 천사는 에스겔을 데리고 어디로 갔습니까? 성전의 사방 담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성전의 사방 담을 측량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안에 있는 성전 측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쪽을 향한 문의 길로 나가서 사방 담을 측량하는데.”(15절)
측량했더니 각각의 길이가 어떠했습니까? 모두 500척으로 동일했습니다. 정방형(正方形)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측량하는 장대 곧 그 장대로 동쪽을 측량하니 오백 척이요 그 장대로 북쪽을 측량하니 오백 척이요 그 장대로 남쪽을 측량하니 오백 척이요 서쪽으로 돌이켜 그 장대로 측량하니 오백 척이라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16-20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일상생활에서도 네모반듯하게, 즉 규모 있게 살아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 참고로, 규모 없이(헬, 에탁테사멘)의 기본형은 ‘아탁테오’는 ‘대오를 이탈하다’, ‘무질서하게 행하다’는 뜻으로, 복음에 합당치 못한 삶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 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살후3:7)
왜 우리는 이처럼 규모 있게(질서 있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 상) /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
담의 높이와 두께는 각각 어떠했습니까? 두께와 높이 모두 한 장대, 곧 여섯 척이었습니다. 미터 단위로 계산하면 3미터가 조금 넘었던 것입니다(53.2cm☓6=3m192cm).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 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겔40:5)
헌데 이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벽으로서는 너무 낮았습니다. 따라서 이는 처음부터 방벽보다는 무엇에 더 가깝게 지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까? 성역의 구분입니다.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20절 하)
이는 우리에게 또 무엇을 시사해줍니까? 일상생활에서도 늘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17:16) 세상에서 살아가되 그 속에 완전히 섞이거나 파묻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고로, 담(히, 키르)는 ‘금지하다’, ‘파괴하다’는 뜻인 동사 ‘쿠르’에서 유래했으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결코 섞일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세상과의 완전한 분리(分離)가 아니란 점입니다. 즉 분리가 아니라 구별인 것입니다. 만일 처음부터 분리가 목적이었다면 성전의 사방 담도 훨씬 더 높게 지어져야 했고, 우리도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그리고 그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질서 있고 규모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언제 어디서든지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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