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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한남동의 총소리
12·12는 관련자들의 주장이 극적으로 갈리는 사건입니다. 객관적 사실은 정리하고자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1차 자료로 전두환 회고록, 정승화 장태완 회고록 등 직접 관계자들이 남긴 자료와 인터뷰 등 증언. 2차 자료로 중앙일보 연재 ‘청와대 비서실’ 등 언론보도와 돈 오버더퍼의 ‘두 개의 한국’ 등 국내외 연구자료, 그리고 재판 관련 자료까지 챙겼습니다.
특히 미국의 역할과 관련해 1979년 당시 주한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과 그의 후임 제임스 릴리, 도널드 그레그의 회고록과 그 사이 비밀 해제된 국무성 자료도 참고했습니다.
1회. ‘세상에서 가장 긴 쿠데타’의 시작
12·12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날 있었던 객관적 사실은 한 가지다. 출발은 한남동의 총성이었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 서울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 응접실에 두 명의 대령이 들어섰다. 10·26 수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의 허삼수(육사17기) 조정통제국장과 우경윤(육사 13기) 수사 2국장이었다. 허삼수는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우경윤은 육군본부범죄수사단장인데 합수부에 파견근무 중이었다. 허삼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직속부하, 우경윤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직속부하인 셈이다.
참모총장 공관의 총격전
1979년 12월 12일 합동수사본부에 강제연행된 정승화 전 참모 총장이 수갑을 찬 채 헌병에 이끌려 재판을 받으러 가고 있다. 중앙포토
이들은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긴급보고할 사안이 있다며 찾아왔다. 응접실로 들어서는 두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무장한 병력을 대동해 공관 주변을 이미 장악했다.
연행 책임자 허삼수는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장태완) 소속으로 합수부에 파견돼 있던 33헌병대 소속 헌병 60명과 무장한 수사관 7명을 차출했다. 헌병대와 무장 수사관들은 공관 입구 초소 경비병을 제압하고, 공관 안쪽 본관 건물 입구를 에워쌌다. 수사관 2명은 건물 내 부관실에서 응접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승화는 두 대령이 “김재규로부터 돈 받은 것과 관련해 (정 총장의) 진술을 받아 녹음을 해야하니 같이 가야겠다”고 하자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대통령 재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두 대령은 “각하의 윤허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들이 총장공관에 도착하기 30분 전인 오후 6시 30분 삼청동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으러 갔다. (최규하는 유신헌법에 따라 12월 6일 대통령으로 뽑혔으나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었다. ) 30분이면 재가를 받아낼 것이라 예상해 오후 7시에 총장공관 방문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 시간까지 재가를 받지 못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국방장관 불러와라”며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승화는 미심쩍은 마음에 부관을 불러 “총리 공관에 전화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부관이 현관 쪽 부관실로 뛰어 들어간 직후 총성이 울렸다. 부관이 전화를 걸려는 순간 합수부 수사관이 총을 쏘았다. 부관과 함께 있던 총장 경호장교도 총에 맞았다. 수사관의 오인 사격으로 같은 편인 우경윤 대령도 총에 맞아 쓰러졌다.
총성이 나자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건물 앞에 있던 수사관이 대형 유리창을 깨고 응접실로 뛰어들었다. 공포를 쏜 다음 정승화 가슴에 총구를 겨눴다. 허삼수가 다른 수사관과 함께 정승화의 양쪽 팔을 끼고 나와 현관 대기중이던 승용차에 밀어 넣었다.
차는 10분 만에 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 도착했다. 허삼수는 보안사령부에서 정보 허브 역할을 하고 있던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에게 ‘연행 성공’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대한민국 군권을 장악했다. 아직 정권 장악은 아니었지만 그 시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쿠데타’가 시작된 셈이다.
전두환의 비장한 가족 만찬
5공 초기인 1981년 청와대가 공개한 전두환 대통령 공식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효선, 재국,재만,재용. 전두환은 1979년 12월 11일 밤 가족들을 모아 놓고 사실상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중앙포토
정승화 총장 연행은 전두환 입장에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의 비장한 심경은 12·12 하루 전인 11일 저녁 식탁에서 자녀들에게 당부한 말에서 확인된다.
시해범의 공모자로 밝혀진 사람이 너무 막강해 그를 수사하려다 자칫 나의 자리와 명예,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것까지 걸어야 할 수도 있다. 결코 너희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맡겨진 역사적 임무를 비겁하게 포기할 수가 없다. 어머님을 잘 모시도록 해라. (전두환 회고록)
전두환이 모험을 결심한 것은, 1차적으로 박정희 시신 앞에서 “진상을 기필코 밝히겠다”고 맹세한 충성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공범으로 간주했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으로 있는 한 10·26 수사를 제대로 못할 뿐 아니라, 김재규를 처벌(사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 김재규가 ‘민주화 영웅’으로 둔갑해 풀려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더 주목할 대목은 군부 내 파워 게임이다. 당시 전두환과 정승화는 군내 파벌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전두환은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최초 육사 졸업생인 11기 선두주자다. 육사 1기부터 10기까지는 6개월 단기교육을 받고 임관했다. 정규 4년제 교육은 최초의 미국식 장교양성 과정이었다. 그래서 11기는 스스로 ‘진짜 육사 1기’라고 자부했다. 전두환은 11기 이하 진짜 육사의 대표라는 자긍심에 가득 찼다. 육사 엘리트 조직인 하나회의 리더였다.
반면 육사 5기 정승화는 비(非)육사 출신과 가까웠다. 육사 2기 김재규는 정승화를 참모총장에 추천했다. 두 사람의 인맥은 겹쳤다. 정승화 인맥의 대표가 비육사(육군종합학교) 출신 선두주자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재규 인맥의 대표가 육사 9기 정병주 특전사령관이었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10·26으로 계엄사령관이 된 이후 군내에서 제거해야 할 김재규 인맥을 오히려 강화한다고 의심했다.
정승화는 10·26으로 계엄사령관이 되자마자 육본 교육참모부 차장이던 장태완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했다. 정승화는 또 김재규의 안동농림학교 후배로 1975년부터 특전사령관이란 요직을 맡아온 정병주를 경질하지 않고 유임시켰다.
이는 곧 전두환 인맥의 배제를 의미했다. 전두환은 자신도 곧 ‘제거’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실제로 정승화는 전두환을 강원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12월 9일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노재현은 “시해사건 수사중인 상황에서 합수부장을 경질하면 오해 받는다”고 반대했다. 전두환은 이미 정승화가 자신을 내쫓고 후임 보안사령관에 장태완의 단짝을 앉히려 한다는 구체적 첩보까지 입수했다.
12·12는 군내 파벌의 헤게모니 다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세대교체를 불러왔다. 정승화는 구(舊)군부였고, 전두환은 신(新)군부였다.
경복궁에 초대된 신군부 9인방
12·12는 10·26 이틀 뒤부터 시작됐다. 전두환은 10월 28일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직후 수사국장 이학봉과 다음 단계 수사에 대해 협의했다.
핵심은 정승화 수사 방안이었다. 이학봉은 당연히 구속수사를 주장했다. 전두환은 당장 연행을 어렵지만 구속수사 원칙에 동의했다. 심복 허화평 비서실장 등과 구체적 연행 방안을 협의했다.
전두환은 동시에 자신과 가까운 원로그룹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을 직접 만나 ‘군내 의견수렴’이란 형식으로 지지세력을 규합했다.
전두환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보고한 것은 11월 3일이다. 노재현이 “나라를 좀 더 안정시킨 다음에 조사하자”며 반대했다. 이후 두 차례 더 보고했으나 모두 퇴짜 맞았다.
전두환은 직접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정승화를 연행하는 정면돌파를 결심했다.
타이밍이 중요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온 최규하가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되는 12월 6일 이후가 좋았다. 정식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것이 구속력이 있기 때문이다. 12일엔 신현확 국무총리가 국회 동의를 받았고, 그날 밤 최규하 대통령과 내각구성을 최종협의해 발표할 예정이었다.
12일은 또 군 장성 진급심사 발표일이었다. 진급심사가 차질 없이 끝날 필요도 있었고, 심사 발표에 따른 축하연과 위로연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느슨한 타이밍도 적절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다. 무력충돌이 벌어질 경우 쿠데타 세력을 결집하고 대응할 수 있는 ‘지휘 캠프’ 구성이다.
장소는 30경비단이 최적이었다. 단장이 전두환의 분신 장세동(육사16기)대령이었기에 완전 신뢰가 가능했다. 청와대를 경비하는 30경비단은 경복궁 경내에 자리잡고 있어 비밀리에 움직이기 편했다. 총리 공관, 보안사령부와 가까워 신속 대응에 유리했다.
1979년 12월 13일 아침, 광화문 앞에 주둔한 신군부 쿠데타군. 노태우 사단장이 동원한 제9사단 예하 제29연대 병력으로 추정된다. 담장 뒤쪽은 철거 이전의 중앙청 건물. 중앙포토
지휘 캠프 초청대상은 확실한 동지, 병력 동원에 필요한 핵심 지휘관 9명이었다.
전두환보다 선배인 3성 장군 3명. 황영시 1군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사전 교감을 나눈 후원자들. 이들 중 황영시가 병력동원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당시 공수부대를 제외하고 실제 동원된 병력은 거의 모두 황영시 휘하 부대였다.
핵심 무력은 공수부대다. 서울 인근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동력과 전투력이 뛰어나다.
특히 공수부대는 미군(한미연합사)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한미연합사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기에 전방 전투부대 이동은 사전에 연합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서울 인근 3개 공수여단장이 그날 경복궁 30경비단에 초대받았다. 1공수 박희도(육사 12기), 3공수 최세창(육사 13기), 5공수 장기오(육사 12기)여단장이었다.
이밖에 계엄 업무에 동원돼 이미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 박준병 사단장, 그리고 71훈련단장 백운택 준장 등이 모였다.
청와대 외곽 경호를 맡고 있는 33경비단 김진영 단장(대령)은 장세동 30경비단장의 요청에 따라 9명의 손님을 맞이하는 안내자 역할로 미리 와 있었다.
조홍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장도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다. 조홍은 이날 헌병으로 유일하게 장군 승진했다.
전두환은 조홍의 승진을 축하하는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12일 저녁 신촌의 고급 한식집(요정)에 조홍의 직속상관인 장태완 수경사령관, 진급을 도와준 정병주 특전사령관, 그리고 헌병 병과 상관인 김진기 헌병감을 초대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초대받은 3명은 정승화측 핵심 3인방이다. 승진 축하 파티는 전두환이 만약의 경우 예상되는 반대세력 지휘부를 묶어두는 자리였다.
전두환은 치밀한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고 오후 6시 30분 총리공관으로 직진했다. 그러나 현실은 시나리오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 등장인물
◆김진영=1938년 경남 통영 출신. 육사 17기 대표화랑으로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청와대 외곽경비 담당인 33경비단 단장으로 쿠데타군에 가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로 강제 퇴임.
◆노태우=1932년 경북 달성 출신. 육사 11기. 전두환과 절친으로 하나회 핵심. 12·12 당시 9사단장으로 병력 출동. 대장 예편 이후 내무부 장관과 민정당 대표 역임.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당선. 퇴임 후 반란죄로 무기징역. 2021년 사망.
◆류병현=1924년 충북 청원 출신. 육사 7기. 초대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12·12 당시 신군부에 협력해 합참의장으로 영전. 주미대사 역임. 2020년 사망.
◆문홍구=1924년 경남 합천 출신. 일제 강제징집돼 일본군 복무. 6·25 전쟁통에 육사 9기로 임관. 12·12 당시 쿠데타군에 반대해 강제전역. 에너지공단 이사장. 2019년 사망.
◆박준병=1933년 충북 옥천 출신. 육사 12기로 하나회 멤버. 대장 예편 후 민정당 국회의원 사무총장. 자민련 부총재. 2016년 사망.
◆박희도=1934년 경남 창녕 출신. 육사 12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제1공수여단장으로 병력 출동해 국방부와 육본 점령. 육군 참모총장. 보수우익 활동가.
◆백운택=1932년 대구 출신. 육사 11기로 하나회 창립멤버. 12·12 당시 71 훈련단장으로 가담. 1982년 1군단장 재직중 사망.
◆우경윤=육사 13기. 12·12 당시 육본 범죄수사단장으로 합동수사본부에 파견. 정승화 총장 연행 중 총상 입어 하반신 마비. 육본 헌병감 역임. 소장 예편.
◆유학성=1927년 경북 예천 출신. 1949년 정훈 1기로 임관.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12·12 쿠데타군에 참여. 대장 예편. 중앙정보부장. 민정당 국회의원. 군사반란 유죄선고 받고 대법원 최종심 기다리던 1997년 사망.
◆장기오=1932년 서울 출신. 육사 12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5공수여단장으로 병력 동원. 중장 전역. 총무처 장관. 김영삼 정권에서 군사반란 재판이 시작되자 미국행.
◆장세동=1936년 전남 고흥 출신. 육사 16기 하나회. 전두환의 최측근. 12·12 당시 30경비단장으로 쿠데타 지휘부에 장소 제공. 전두환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 역임.
◆장태완=1931년 경북 칠곡 출신. 1950년 갑종 소위로 임관. 10·26 직후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발탁. 12·12 당시 쿠데타 세력과 대립.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2010년 사망.
◆정병주=1926년 경북 영주 출신. 육사 9기로 1950년 임관 참전. 1975년 특전사령관 취임후 1979년 12·12 당시 쿠데타 세력과 대립. 총격 입고 부상 후 강제 예편. 1989년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돼.
◆차규헌=1929년 경기도 평택 출신. 육사 8기. 박정희 5사단장 시절 참모 인연으로 5·16에 참가. 수도군단장 시절 12·12에 참여. 대장 예편. 교통부 장관. 2011년 사망.
◆최세창=1934년 대구 출신. 육사 13기. 하나회 멤버. 제3공수여단장으로 12·12 당시 전두환 지시에 따라 병력출동 시키고 직속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대장 예편. 국방부 장관.
◆허삼수=1936년 부산 출신. 육사 17기 하나회.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12·12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 강제연행. 전두환 정권 사정수석비서관. 친인척 비리 처벌 주장하다가 사직 후 미국행. 1992년 민자당 국회의원. 장애인 인권운동가로 변신.
◆황영시=1926년 경북 영주 출신. 육사 10기. 1군단장으로 12·12에 적극 참여, 휘하 3개부대 병력 불법동원. 5공 정권 육군참모총장 감사원장 역임. 202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