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심판을 피하려면: 내가 합의해야 할 대상과 합의금이 무엇인지 알아야!
연예인 박수홍 씨 친형이 구속되었습니다.
박수홍 씨는 근 10년간 100억 이상을 횡령한 혐의가 있는 형을 고소하였습니다.
그 이전 20년 것도 있지만 그것은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박수홍 씨는 목숨을 끊을 생각도 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형제, 모두에게 등을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대로라면 박수홍 씨는 친형제나 자녀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용당하였습니다.
박수홍 씨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형과 7대 3으로 재산을 나누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형의 재산은 100억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생이 번 돈 중에서 상당 액수를 가질 수 있었지만 형은 그 합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박수홍 씨는 고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그렇게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7-58)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가서 그 값을 다 갚아야 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그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마지막 심판 때 나를 고소하는 자일까요? 당연히 내가 피해를 준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해를 준 대상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됐다고 할 때까지.
저도 군대에 있을 때 운전병으로 사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군용 트럭으로 프라이드 한 대를 폐차시켰습니다.
다행히 그 차 운전자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300만 원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저는 군 재판에 넘겨지어 그에 해당하는 만큼 옥살이해야 합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그 돈을 여기저기 꾸어 마련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지어 피해를 주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녀가 누구에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대상은 부모입니다.
그 사랑에 반하여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자녀에게 그 죗값을 보상하도록 오히려 합의금을 내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장 큰 죄를 짓는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우리 ‘양심’입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고소합니다.
양심의 고소를 당하는 이는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고 미워합니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심은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들어주신 우리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하느님의 법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멈추려면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해 주신 것처럼 하느님 자신이 합의금을 내어주셔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받은 ‘가죽옷’이 그 합의금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해 주셨습니다.
그 합의금을 받는 순간이 특별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입니다.
고해성사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합의금으로 나의 고소자인 양심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치 제가 제대하고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주시는 합의금을 원치 않고 내 힘만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것은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감옥살이하고 나와도 부모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고해성사해도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가시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완전한 합의금을 주셨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가라앉으면 미움도 가라앉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을 심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비가 심판을 이깁니다.
내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만나느냐, 따듯한 부모로 만나느냐는 내 안의 양심 가책을 당신 피로 잠재워 이웃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하느님의 다양한 초대 앞에
기후나 날씨의 변동, 천재지변을 예측할 수 있는 징후들이 있습니다.
요즘 인간들을 가장 큰 공포에 빠지게 만드는 대지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지표가 기울어지거나 융기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인간들보다 감각 기능이 예민한 동물들이 미리 감지하고 대피하기도 한답니다.
지진이 일어나기전의 자연에서 징후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이렇습니다.
쥐나 비둘기, 까마귀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온순했던 개들이 갑자기 사납게 짖습니다.
고양이들이 나무 위로 올라가 안절부절 못합니다.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난폭한 행동을 합니다.
바다에서는 낫선 물고기 떼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동면해야할 뱀이나 개구리들이 밖으로 나옵니다.
저도 가끔씩 잘 알아맞히는 감지능력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전날 밤 하늘에 달무리가 보이면 그 다음날 어김없이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더군요.
갑자기 개구리 울음소리가 커지고 잠자리 떼가 낮게 날면, 그리고 흙냄새가 나면 틀림없이 30분 내로 비가 왔습니다.
이런 자연의 징조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예측하면서 미리 미리 대비하는 인간들이었지만, 가장 큰 징조,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에 대한 징조,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메시아 도래에 대한 징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징조는 풀이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너무도 한심했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한 어조로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우리 매일의 삶 안에서도 다양한 징조, 징후들이 다가옵니다.
그 때마다 그 징표들이 의미하고 있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노력, 그것이 필요합니다.
멀쩡하던 건강에 적신호가 왔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자주 시름시름 아프고 상습피로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병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하고 잘 보살피라는 하느님의 요청입니다.
자신의 삶을 차분하게 돌아보라는 표시입니다.
극단적인 일 중독이나 다양한 중독 증세에서 벗어나 좀 쉬라는 부르심입니다.
전혀 예기치도 않았던 실패나 좌절이 내게 찾아왔습니다.
빠져나갈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좀 더 겸손해지라는 신호입니다.
좀 더 자세를 낮추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좀 더 큰 그릇으로 거듭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든 환난이 찾아왔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생일대의 큰 시련입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난관입니다.
그것은 빨리 하느님께 돌아서라는 요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 인간만사란 것은 원래 다 그렇게 불완전하게 한계를 지닌 것임을 빨리 알아차리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정말 피하고만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달아나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을 통해 우리를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부르십니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전한 세상으로, 고통과 눈물의 세상에서 행복과 희망의 세상으로 건너오라고 부르십니다.
여기가 다가 아니라고,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죽음은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얼굴을 봅니다>
2022. 10. 21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시대를 알아보아라, 늦기 전에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얼굴을 봅니다>
나의 얼굴을 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기쁜 얼굴과 슬픈 얼굴을
나의 얼굴을 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밝은 얼굴과 흐린 얼굴을
환한 얼굴과 어두운 얼굴을
나의 얼굴을 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희망찬 얼굴과 불안한 얼굴을
따스한 얼굴과 차디찬 얼굴을
나의 얼굴을 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생기 돋은 얼굴과 핏기 잃은 얼굴을
결연한 얼굴과 무덤덤한 얼굴을
나의 얼굴을 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마음을 담은 얼굴을
삶을 담은 마음을
시대를 담은 삶을
올바르게 시대를 가꾸고자
정성스레 시대를 품고자
뜨겁게 시대를 사랑하고자
나의 얼굴을 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