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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들 |
또 『송서』등에서는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는데, 중국 사서에는 당시에 진평군 진평현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통전』에 따르면 진평군은 북평군에 해당하므로, 진평현은 북평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요서백제의 치소인 진평군 진평현은 당나라 시대의 북평군 북평현에 해당한다. 북평현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중국백과사전』‘영락현’조에 아래와 같이 만성현滿城縣의 연혁이 나온다.
“영락현 : 동위 흥화2년(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고 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제 때 영락현을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나라 개황3년(583년)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예속시켰다. 대업3년(607년)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여 영락현을 관할하였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소속시켰다. 천보원년(742년)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永乐县 :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중국백과사전』‘영락현’
동위 흥화2년(540년)에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였으며, 천보원년(742년)에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북평군 북평현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임을 알 수 있다. 만성현 일대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이다(필자의 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 고찰” 참조). 요서백제의 치소였던 진평군 진평현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 지역이었다.
『진서』에는 서기 372년 6월에 “사신을 보내 백제왕 여구(근초고왕)에게 진동장군을 제수하고 낙랑태수를 명했다(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 晉書 帝紀第九 太宗簡文帝).” 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근초고왕이 받은 낙랑태수를 한반도 평양지역을 관할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요서백제의 치소는 왕검성 지역으로 한나라 낙랑군이 위치했던 곳이다. 그러므로 근초고왕이 받은 낙랑태수는 요서백제의 지배를 뜻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서기 370년 전진의 공격으로 전연이 멸망하는 등 하북성 지역에 힘의 공백이 발생한 시기였다. 이때 한반도의 백제가 요서로 진출하여 요서에 정착해 있던 북부여 유이민들과 연합하여 요서백제를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2) 백제의 국호에 담겨진 비밀
한 나라의 국호에는 그들 구성원들의 정체성이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백제百濟는 무슨 뜻일까?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후에 내려 올 때에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後以來時百姓樂從 攺號百濟).”고 하였다. 반면 『통전』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처음 백가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백제라 칭하였다(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고 기록하였다.
필자는 지금도『삼국사기』의 설명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는 것과 백제百濟라는 명칭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그런데 『통전』에서 백제百濟는 ‘백가가 바다를 건넜다(百家濟海)’는 뜻이라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과연 백제의 국호에 담긴 진실은 무엇일까?
『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서기 801년에 편찬한 책이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서기 650년경에 편찬된『북사』 등 백제와 직접 교류했던 나라들의 정사기록들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서기 1145년에 편찬하였으며 『통전』보다 350여년 후에 나온 책이다. 대유학자인 김부식이 『통전』이나 『북사』의 기록을 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왜 『통전』의 기록을 인용하지 않았는지 자못 궁금하다.
백제 구성집단의 이동경로 및 요서백제의 위치 |
만약 백제百濟라는 명칭이 『통전』의 기록처럼 ‘백가가 바다를 건넜다(百家濟海)’는 뜻이라면 이는 백제 역사에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 자명하다. 오늘날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백제가 현 중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 일대의 졸본부여에서 남하하여 한반도의 한강유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환인일대에서 남하하는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필요는 없다. 더구나 환인 일대는 첩첩산중으로 바다와는 인연이 없는 지역이다. 참고로 위의 지도 『백제 구성집단의 이동경로 및 요서백제의 위치』에서 통설의 이동경로는 검은색 점선으로 표시하였으며, 필자가 보는 이동경로는 붉은색 실선으로 표시하였다.
수천 명 또는 수만 명이 배를 타고 이주하려면 적어도 수백 척 이상의 배가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하는 것은 고도의 항해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통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백제를 건국한 유이민 집단은 고도의 항해술을 갖춘 해양세력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선주민이었던 마한의 지배세력들은 고조선의 준왕과 수천 명의 무리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망명하였으며, 그들이 떠나온 왕검성 지역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였다(필자의 글 “고조선 준왕의 망명과 소삼한의 성립” 참조). 그리고 백제인들이 떠나온 고향은 졸본성 지역으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였다(필자의 글 “고구려 초기수도 졸본성의 위치 고찰” 참조).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고조선의 왕검성 지역과 고구려의 졸본성 지역은 모두 고대 해양세력의 중심지였다. 백가제해百家濟海! 백제인들은 그들의 나라이름에 ‘우리들은 해양세력의 중심으로 수많은 배를 이끌고 한반도로 이주하였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그리고 떠나온 고향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가 찬란한 요서백제의 시대를 열었다.
3) 일식기록으로 보는 요서백제의 위치
백제의 일식기록을 통한 최적관측지 |
『삼국사기』에 나타난 일식기록을 토대로 삼국의 위치를 과학적으로 추적한 연구가 있다. 세계적 인 천문학자인 박창범교수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타난 일식기록들을 토대로 백제 일식의 최적관측지를 추적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적관측지가 위의 『백제의 일식기록을 통한 최적관측지』지도처럼 나타났다(박창범 저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참조). 도대체 백제일식의 관측지가 왜 저곳으로 나타난 것일까?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는 요서백제의 실체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북부여는 서기 346년 모용외에게 망하기 전까지 부여성에 있었다. 그리고 서기 346년부터 요서백제가 고구려에게 망하여 한반도로 이동하는 서기 500년경 까지는 요서백제의 치소인 왕검성지역에 있었다. 그러므로 저 지도는 북부여의 수도인 부여성에서 서기 346년까지 약 350년간 일식을 관측한 기록과 요서백제의 치소인 왕검성에서 서기 500년경까지 약 150년 동안 일식을 관측한 기록을 종합한 결과와 완전히 일치한다.
참고로 요서백제가 고구려에게 격파되어 한반도로 이주한 시기는 『양서』「동이열전」‘백제’조를 참조하면 서기 500년경이다. 『양서』에는 “천감 원년(A.D.502, 백제 무령왕 2년)에 태太의 호를 정동장군으로 올려 주었다. 얼마 뒤 고구려에게 격파되어 날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남한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天監元年, 進太號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고 기록되어 있다.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는 필자가 비정한 왕검성과 졸본성의 위치 및 부여성과 요서백제의 위치가 정확함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러면 백제의 일식기록이 왜 한반도 백제의 위치보다도 북부여인들의 활동지역과 더 일치할까? 그것은 한반도 백제와 북부여 유이민들이 요서에서 연합할 때, 나라 이름은 백제였지만 북부여 유이민 집단이 더 힘의 우위에 있었던 결과로 보여 진다. 이는 서기 500년경 요서백제에서 한반도 남부로 치소를 이동하면서 백제의 이름을 남부여로 바꾼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김부식은 북부여 집단의 일식기록을 어디에서 얻어서 『삼국사기』에 기록하였을까?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근초고왕 30년(375)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는 요서백제 시대이므로 박사 고흥이 쓴 서기에 북부여의 일식기록이 들어갔고, 김부식이 이것을 보고 『삼국사기』에 기록하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북부여의 수도인 부여성의 위치는 오늘날의 중국 내몽골자치주 파림좌기 부근이다. 『후한서』‧『삼국지』등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성은 장성의 북쪽으로 현토의 북쪽 천여 리에 있었다. 현토군의 치소인 고구려현은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대이다(필자의 글 “고구려 초기수도 졸본성의 위치 고찰” 참조). 흥륭현에는 장성이 있으며 북쪽으로 천여 리는 파림좌기 일대가 된다. 또 부여성은 요나라 때 황룡부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거란지리지도에 의하면 황룡부가 요나라 상경부근에 있는데, 요나라 상경은 현 중국 내몽골자치주 파림좌기 일대이다( 아래의 거란지리지도 참조).
거란지리지도(원나라 시대, 1344년 작) |
부여성과 요나라 5경 위치 |
(6) 백제는 동아시아 해상강국이었다.
그러면 요서백제의 위상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요서백제의 위치는 고대 동아시아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지정학적 여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그리고 한반도 백제의 뛰어난 항해술과 북부여 유이민들의 강력한 군사력을 겸비함으로써 요서백제는 동아시아 해상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관련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요서백제는 동아시아 해양세력의 중심지였다.
요서백제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곳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 지역은 고대 동아시아 해양세력의 중심지였다. 이곳이 고대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발해만은 특수한 해류의 흐름이 존재한다(아래의 『발해만의 해류 지도』 참조). 태평양 한가운데서 발생한 쿠로시오 해류의 한 갈래가 황해와 발해의 가운데를 타고 북상하면서 낙랑지역으로 흐른 후 발해만의 양쪽 해변을 따라 남하하는 특수한 흐름을 갖는다.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 어느 곳이든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서면 북상하는 해류를 타고 자동적으로 낙랑지역에 도달할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그리고 낙랑지역에 도달한 배는 양쪽 해변을 따라 남하하는 해류를 타고 자동적으로 원하는 지역으로 갈 수 있다.
이처럼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가 낙랑지역과 한반도 및 일본과 중국 동해안 곳곳을 연결하는 바다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였다. 아래 『발해만의 해류 지도』에서 붉은색 화살표가 북상하는 해류를 나타내며, 푸른색 화살표는 남하하는 해류를 나타낸다. 발해만 중심을 북상하는 강력한 해류가 낙랑지역으로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에서의 항해가 해류와 바람에 의존하였던 고대에서 이러한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는 낙랑지역이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상고시대 아시아대륙의 모든 바닷길은 낙랑으로 통하였다. 오늘날 낙랑지역이었던 하북성 보정시 일대는 해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보다 해수면이 6M가량 높아서 왕검성 지역인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남쪽은 바다였다.
발해만의 해류 지도 |
둘째, 낙랑지역은 백석산(갈석산)과 발해 그리고 세 겹의 강물이 보호하는 천연의 요새였다. 낙랑지역의 서쪽에는 태행산맥의 머리인 험준한 백석산(갈석산)이 낙랑지역을 보호하고 있으며, 동쪽에는 드넓은 발해가 펼쳐져 있고, 남북으로는 세 겹의 강물이 낙랑지역을 보호하고 있었다. 낙랑의 바깥지역을 영정하와 호타하가 감싸고, 그 안쪽으로 거마하와 대사하, 마지막으로 역수와 당하가 낙랑의 중심지인 왕검성(만성현 일대)을 감싸고 흐르는 철옹성과 같은 곳이었다.
셋째 낙랑지역은 북방 유목세력의 중심지인 음산산맥과도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북방 유목세력과 동방 해양세력의 경계에는 대흥안령산맥의 끝자락인 험준한 대마군산大馬群山과 태행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그리하여 현 북경 서남쪽에 위치한 자형관과 북경 서북쪽에 위치한 거용관이라는 험준한 관문을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낙랑지역에 위치한 자형관과 상곡에 위치한 거용관을 통하여 유목세력과 해양세력 간 교역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이를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낙랑지역은 초원길로 유럽까지 이르는 육상 실크로드와 바닷길로 인도와 아프리카 대륙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를 잇는 요충지였다.
낙랑지역은 이와 같은 지정학정 이점으로 인하여 고조선 시대로부터 동아시아 해양세력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을 얻는 세력이 중국 동해안지역 및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이르는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낙랑지역을 차지한 요서백제는 동아시아 해양세력의 중심지였다.
2) 요서백제는 뛰어난 항해술과 막강한 군사력을 겸비했다.
요서백제는 ‘주몽-온조’ 집단인 한반도 백제와 ‘동명-구태’ 집단인 북부여 유이민들이 연합하여 건설하였다. 한반도 백제는 뛰어난 항해술을 갖춘 해양세력이었다. 백제의 선주 집단이었던 마한의 지배층은 기원전 194년경 고조선의 준왕이 왕검성을 떠나 수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한 해양의 중심세력이었다. 백제라는 명칭 또한 『통전』의 기록처럼 ‘백가가 바다를 건넜다(百家濟海)’는 뜻으로 백제는 뛰어난 항해술을 갖춘 해양세력이었다.
북부여 유이민들은 비록 모용선비의 포로가 되어 요서지역으로 끌려왔지만, 전연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후연을 건국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할 정도의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요서백제는 해양세력의 중심부인 낙랑을 배경으로 하여 한반도 백제의 뛰어난 항해술과 북부여 유이민들의 막강한 군사력이 결합하여 탄생하였다. 백제가 동아시아의 해상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었다.
3) 백제는 천자국이었다.
백제는 여러 왕들과 제후들을 거느린 천자국이었다. 중국 정사인 『송서』의 기록을 보자.
“대명 2년, 여경餘慶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문무의 훌륭한 신하들이 대대로 조정의 관작을 받았습니다.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餘紀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높은 지위에 나아감이 마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가엾게 여기시어 모두 관직을 내려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으로 삼고,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과 행정로장군 여훈를 모두 정로장군으로, 행보국장군 여도와 여예를 모두 보국장군으로, 행용양장군 목금과 여작을 모두 용양장군으로, 행영삭장군 여류와 미귀를 모두 영삭장군으로, 행건무장군 우서와 여루를 모두 건무장군으로 삼았다.” 『송서』「이만열전」‘백제’
대명 2년은 서기 458년이며, 여경은 백제 개로왕을 가리킨다. 백제왕은 좌현왕과 우현왕을 거느리고 있었다. 좌현왕‧우현왕을 두는 제도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족과 선비족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천자를 뜻하는 선우의 아래에 좌현왕과 우현왕 및 여러 왕들을 두었다. 백제가 좌현왕‧우현왕 제도를 둔 것은 요서백제의 한 축인 북부여 유이민들이 모용선비의 후연 정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영향인 듯하다.
또 중국 정사인 『남제서』에도 백제 동성왕이 면중왕, 도한왕, 아착왕, 매로왕, 매라왕, 벽중왕 등의 왕들과 팔중후, 불사후, 불중후, 면중후 등의 제후들을 임명하는 기록들이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백제가 여러 왕들과 제후들을 거느린 천자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백제가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격파하다.
중국 정사인 『남제서』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격파한 기록이 나온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이 해에 북위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牟大가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건무 2년(A.D.495)에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경오년에는 험윤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하략’ 하였다(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建武二年(495), 牟大遣使上表曰...中略...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下略).” 『남제서』「동남이열전」‘백제’
위의 기록은 백제 동성왕 때의 일이다. 경오년인 서기 490년 북위가 수십만 기병으로 요서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동성왕은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북위의 군사들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북위군의 시체가 드넓은 들을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 및 북위의 경계 |
그렇다면 과연 백제와 북위의 격전지는 어디였을까? 이를 알기위해서는 당시 백제와 고구려 및 북위의 경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의 요하는 현 중국 하북성 북경유역에 위치한 조백신하였다(필자의 글 “요동지역의 변천에 대한 고찰‘ 참조). 조백신하를 경계로 하여 동쪽의 요동군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었으며, 서쪽의 요서군 지역은 백제의 강역이었다. 그리고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을 경계로 하여 북위와 고구려 및 백제가 대립하는 형세였다.
이들 지역 중에서 백제가 차지한 진평군과 요서군 지역은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는 최대의 요충지였다. 그리하여 이곳을 둘러싸고 백제와 고구려 및 북위는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앞에서 『통전』의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진평군과 요서군 지역은 당나라 시대의 유성과 북평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이는 영주와 평주지역이기도 하였다.
북위의 정사인 『위서』「지형지」에 의하면 북위는 요서백제의 위치에 영주와 평주를 설치하였다. 반면 중국 남조의 정사들은 요서백제의 위치에 백제가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백제왕들에게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의 직함을 주었다. 백제가 요서백제를 통치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또한 중국 남조의 정사들은 고구려왕에게 사지절 도독 영‧평2주제군사의 직함을 주었다. 고구려가 영주와 평주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요서백제 지역은 5세기 무렵 100여년에 걸쳐 백제와 고구려 및 북위가 모두 자기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할 정도로 서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러므로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백제를 공격한 지역은 당시 북위의 수도인 현 중국 산서성 대동시 지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던 요서군 지역, 즉 오늘날의 중국 북경지역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위는 서기 490년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3년 뒤인 서기 493년에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으며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졌다(위의 지도 ‘백제와 고구려 및 북위의 경계’ 참조).
위의 ‘백제와 고구려 및 북위의 경계’ 지도에서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이자 요서백제의 치소인 진평현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요동성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였다. 북위의 수도는 현 중국 산서성 대동시 였으며, 요서군 화룡성은 한때 북위의 영주치소였던 곳으로 현 중국 북경 유역이다.
5)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하다.
서기 4세기 후반 요서백제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칠지도七支刀이다. 칠지도는 길이 74.9㎝로서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 칼이다. 칼의 몸 좌우로 각각 가지 칼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몸의 앞과 뒤에는 60여 글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고 그 외곽을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설을 보자.
“명문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적지 않아서 판독된 글자는 연구 시점과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상당수의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한 덕분에 근래에는 꽤 많은 부분에서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뒷면〉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칠지도는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 지에게 하사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준 백제의 왕이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일 것으로 보고 있다. 칠지도는 요서백제가 일본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6) 백제, 동이의 옛 강역을 회복하다.
중국 정사인 『송서』‧『남제서』등에는 백제가 중국 동해안지역의 여러 곳에 태수를 임명하는 기록이 나온다.
“원가 27년(A.D.450) 여비餘毗가 방물을 바치며, 국서를 올려 사사로이 대사 풍야부를 서하태수로 삼을 것을 추인해 주고, 표문으로 역림·식점 및 요노를 요구하자 태조는 모두 들어 주었다.” 『송서』「이만열전」 ‘백제’
“모대(牟大, 동성왕: 재위 479~501)가 또 다시 표문을 올려, ‘신이 파견한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와 행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 등 3인은 지조와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과 정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습니다...중략...고달은 변경에서의 공적이 일찍부터 뚜렷하고 공무에 부지런하였으므로 이제 가행용양장군 대방태수라 하였고, 양무는 마음과 행동이 맑고 한결 같으며 공무를 항상 놓지 않았으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광릉태수라 하였으며, 회매는 생각이 찬찬하고 빈틈이 없어서 여러 번 근무의 성과를 나타내었으므로 이제 가행광무장군 청하태수라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림과 더불어 장군의 호를 사하고 태수의 관직을 제수하였다...중략...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와 겸 참군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와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들의] 관작을 올려 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 주었다.” 『남제서』「동남이열전」 ‘백제’
윗글에서 『송서』에 기록된 서하태수는 현 중국 산서성 지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남제서』에 기록된 광양태수‧낙랑태수‧조선태수‧대방태수 등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 청하태수‧성양태수는 산동성 지역, 광릉태수는 강소성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제가 지배한 강역들은 아득한 고조선시대로부터 동이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백제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배경으로 하여 한반도 백제의 뛰어난 항해술과 북부여 유이민들의 강력한 군사력을 겸비함으로써 동이의 옛 강역을 모두 회복하고 동아시아 해상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