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강미자, 2024)
김수영의 동명의 시가 한예리의 목소리를 빌려 영화 내내 울려 퍼진다. 이런 구절로 시작한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말뜻이 명확하게 다가오진 않는데 그래서인지 유독 더 인상에 남는 말이다. 강미자 감독의 <봄밤>은 동시대에 만들어진 영화 같지 않다. 자꾸만 쓰러지는 두 주인공은 잘못된 곳에 불시착한 사람들 같다. 대신 이 영화는 어느덧 한국영화에 희박해진 세 가지 이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는 길과 땅이다. 류머티스병을 앓는 수환은,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는 영경은 자꾸만 쓰러진다. 그럴 때마다 화면에는 바닥과 지면이 노출된다. 이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제나 단단하고 먼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환기한다. 그 길과 땅 위에 환청처럼 고통스러운 시구가 덧입혀진다. 두 번째는 부축이다. 넘어진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이 손을 더듬거리듯 그들은 서로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서로를 부축하는 연인, 함께 끌어안는 두 사람. 육체의 멜로드라마가 실종된 한국영화의 풍경에서 <봄밤>의 두 연인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세 번째는 나무와 꽃이다.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은 혼자서 나무 아래 멈춰 서 있거나 꽃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때 존재하지 않는 상대방이 식물의 표상에 반사되고 있다. 2010년대에 진입한 한국영화의 촬영 장소가 급격히 도시로 집중되면서 사라져 버린 어떤 표상이 이 영화엔 기록되어 있다. 고통스럽고 희미하지만 아름답게. (김병규)
김수영 /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이웃들 소식
º “페드로 알모도바르 기획전” @대전아트시네마
대전아트시네마는 현재 “페드로 알모도바르 기획전”을 진행 중이다. 상영작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 <하이힐>(1991), <라이브 플래쉬>(1998), <나쁜 교육>(2004), <귀향>(2006),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까지 총 6편이며, 7월 23일(수)까지 이어진다. 시간표는 대전아트시네마 네이버카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반 8,000원.
º 『인생 50년 영화 50편』(오시이 마모루 / 박동섭 옮김 / 마르코폴로)
1951년생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1968년부터 시작해 2017년까지 매해 1편의 영화를 골라 편집자와 수다 떨듯 각 작품에 대한 추억과 평가를 이야기한다. 자신만의 뚜렷한 기준으로 고른 51편의 영화 목록과 비평적 관점이 흥미롭다. 오시이 마모루가 꼽은 작품으로는 <어둠의 표적>(1971), <철십자 훈장>(1977), <도레미파 소녀, 피가 끓는다>(1985),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1988), <살인의 추억>(2003), <퓨리>(2014) 등이 있다. 가격은 2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