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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生涯
김 영 수
그는 1908년 1월 11일(양력 2월 12일- 편자) 오전 11시 春城郡 新南面 甑理(실레)에서 부친 김춘식(金春植) 씨와 모친 沈 씨 사이의 팔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春川에서 農事를 영위하던 집안은 家勢가 부유하였으므로 서울에 와서 백여 칸 집을 지니고 소위 千 석을 내리지 않는 地主집 살림을 꾸리고 있을 적입니다. 그래서 집안은 시골과 서울, 두 패로 왕래하며 지냈습니다.
맏아들 다음으로 연거푸 딸만 다섯을 낳은 끝에 일곱 번째에 얻은 아들이니 더없이 귀엽게들 여겼습니다. 그뿐더러 재산이 더 많이 생기도록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아명을 ‘멱서리’라고 불렀습니다. 집안이 넉넉하고 가문도 행세하는 편이겠다, 아들이 둘이나 되겠다, 남 부러울 것이 없는 부모는 막내둥이 ‘멱서리’가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허나 막내둥이는 횟배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세살박이 ‘멱서리’는 배가 아프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자반뒤집기를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집안의 어른 아이, 주인 심부름꾼 할 것 없이 어린아이 따라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담배를 가르쳤습니다. 아버지가 대에 엽초를 담으면 ‘멱서리’는 칼표(당시에 좋은 담배였음) 궐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어른이 성냥불을 대어줄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멱서리’는 아무 앞에서나 담배를 피우되 피우는 품이 어른과 같이 익숙했던 것입니다.
그 뿐이랴, ‘멱서리’에 대해서는 아무나 손찌검은 물론 탓하지도 못할뿐더러 무엇을 하든 상관 말라는 아버지의 분부였습니다.
핏기가 없는 ‘멱서리’는 말을 더듬었습니다. 말을 하려면 입을 벌리고 한동안 힘을 들이다가 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徽文高普 2학년 때 訥言校正所에서 고쳐서 그 후는 흥분하는 외에는 말을 더듬지 않았습니다.
애지중지하는 부모의 그늘에서 자라나던 그는 어릴 적부터 장난이 심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모르고 지냈으며 다니며 노는 양이 귀여워서 모든 사람에게 귀염을 받았습니다. ‘멱서리’를 사랑하던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되겠으나 부모의 사후에도 방탕한 형은 그를 집안의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食率이 근 30명이나 되어도 그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으며 부모에게 고자질할 줄을 몰랐고 특히 자라면서도 욕을 몰랐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누이들이 말썽을 부리면 하는 말을 흉내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형수가 청을 안 들어주자 골이 난 그는
“아 아주머니 시에미 똥구녕이래라.”해서 집안을 웃음판으로 만든 일이 있습니다.
1914년 3월 27일 어머니 심 씨가 병사했습니다. 일곱 살 되는 그는 시골(춘천)에서 미처 올라오지 못한 형 대신 상복을 입고 葬地인 德沼까지 상제노릇을 의젓이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버지 품에서 자랐으나 대부분의 시간은 누이들이나 대대로 내려오며 유모였던 ‘수캐엄마’의 품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장성해서까지 ‘수캐엄마’를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삼년상이 채 나가기 전에 불행은 또 닥쳐 왔습니다.
1916년 5월 21일,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여읜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부모 생존 시부터 방탕해 마지않던 형은 그해 8월 관철동(貫鐵洞)으로 이사를 하자 본격적인 난봉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형은 주야로 음주하는 가운데서 취담일지언정 “우리 유정이”라면서 조실부모한 그를 측은해 했습니다. 그리고 어리나 점잖고 재주있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형에 따라서 집안 식구들도 자연히 그를 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식량이 딸렸을 제 딴 사람들은 양쌀이나 조밥을 주었으나 형은 자기와 같이 따로 지은 쌀밥을 먹게 한 일을 봐도 알 것입니다.
조실부모에서 오는 외로움과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형의 난봉으로해서 그는 점차 內省的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허둥지둥 돈을 뿌리며 웃자를 부리는 형과는 달리 그는 어디까지나 深慮하고 나이에 비해 침착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그에게 낙(樂)이 있다면 영화구경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녁밥을 먹고 있을 양이면 가까이서 나팔소리가 들려옵니다. <優美館>에서 손님을 부르는 나팔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들으면 그냥 참고 배길 수가 없어 뛰쳐나가는 그였습니다. ‘에데이포로’나 ‘하리케인 핫지’가 반주에 맞춰서 모험을 하는 동안 세 시간 반의 슬픔과 걱정을 잊고 딴 세계에 젖을 수 있는 것이 큰 기쁨이며 꿈과 같고 어쩌면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프로가 바뀌면 그는 네 살 되는 조카를 데리고 으레껏 가는 단골손님이었습니다.
그는 그해부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글방에 다녔습니다. 1919년 봄까지 4년 동안에 千字文, 啟蒙萹, 그리고 通鑑을 배웠으며 특히 그는 붓글씨를 잘 썼습니다.
漢文공부를 마치고 열세 살에 齋洞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해서 이듬해에는 3학년으로 진급하고 4학년 졸업하는데 늘 優等이라 급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형도 술 먹고 정신을 못 차리는 가운데서나마 신이 나서 남에게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1923년에 徽文高普에 입학하면서 이름을 김나이(金羅伊)로 개명했습니다. 이 이름은 2학년까지고 3학년부터는 金裕貞으로 본시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2, 3학년 때의 일입니다. 하학 후 운동장에서 철봉을 하고 있는 그는 投砲丸하던 자의 실수로 砲丸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얼마동안 실신했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것에 맞고도 죽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대견했던 모양입니다. 가끔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일을 일기나 다른 글 속에서 뇌까리고 죽음을 넘어선 자신을 불사신인양 암시를 하고 했습니다.
高普시절에 그는 바이올린 배우기, 아령, 야구, 축구, 스케이팅, 권투, 유도 소설읽기, 영화 감상으로 日記를 쓸 틈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貫鐵洞에서 동대문밖 崇仁洞으로 이사해서 그는 전차로 통학했습니다.
형은 난봉이 絶頂에 달해서 술과 계집에 빠져 정신없이 가족들을 들볶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나 자식은 주정꾼의 매 맞기에 밤잠을 못 잤으나 그만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음은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는 여기서도 예외였던 것입니다.
그 동생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행해주는 형이었습니다. 운동기구에서 책, 옷, 영화구경값에 이르기까지 거역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양이 준수하고 이목구비가 유달리 훤하게 생긴 그는 일거일동이 점잖고 어떻게 보면 영감처럼 구수하고 그 슬기로움이 향기마냥 몸에서 풍기니 남들이 우러러 칭송하는지라 그의 형인들 싫을 리 없을뿐더러 오히려 승낙해 했습니다.
일후에 돈 때문에 형제간의 사이가 멀어지기까지는 그럴 수 없이 그 동생을 위했던 것입니다.
그는 손재주도 있었지만 붓이나 펜글씨를 잘 썼고 그림 그리기도 잘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도 취미가 있었습니다.
崇仁洞집 동편은 孫秉熙 선생의 저택 <常春園>이요 남서편은 朴泳孝 씨의 저택이요 북편은 과수원에 인접해있어 봄이면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봄을 한껏 즐기게 했으며 여름은 피어 흐드러진 푸른 잎이 마음을 충만시켜 주었으며 가을은 그대로 단풍잎이 思春期에 접어드는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이면 술이 취하지 않은 형은 곧잘 20명 가까운 집안식구를 거느리고 앞산 위의 넓은 바위에 올라가 문안(市內)쪽의 전깃불 구경을 하면서 땀을 들이곤 했습니다.
다정다감했고 끝까지 착했던 ‘멱서리’,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배불리 먹고 한껏 호사를 해도 허깃증과 허전함을 금치 못하는 그의 심정은 흡사 영원히 놓쳐버린 새를 밤하늘 은하수 속에서 찾는 것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뚜렷이 모르면서 한 해 두 해 나이는 거침없이 쌓여 갔습니다.
그의 바로 위의 누님을 흥선이라고 불렀습니다. 딴 누님보다 자상하고 마음이 너그러운 흥선누님은 그에게 있어 어머니 대신으로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녀가 광주(廣州) 유 씨 네로 시집간 후로는 의지할 곳 없는 그에게 있어 집안은 텅 빈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매형 내외도 그를 다녀가도록 청했지만 그도 기회 있는 대로 광주 누님 집엘 곧잘 들렀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들 남매지간은 유달리 우애가 두터웠습니다.
이때 그는 한동안 영화구경은 뜸한 반면 아령과 바이올린 그리고 책 읽기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바이런 시집을 즐겨 들고 다녔습니다. 날마다 저녁나절이면 그가 켜는 가느스름한 바이올린 소리는 듣는 사람의 신경 위에 한 줄기 애절한 선을 그리고 지나갔습니다.
재산은 한도가 있는지라 형의 낭비로 가산은 줄어서 崇仁洞에서 寬勳洞, 淸進洞으로 점차 살림을 줄여서 백 칸 집이 삼십 칸으로 전락하고 드디어 1928년 봄에는 春川 실레로 이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조카(형의 아들 永壽)를 鳳翼洞에 사는 삼촌 집에 맡기고 형은 나머지 식솔을 거느리고 춘천 실레로 이사하고 말았습니다. 형이 둘의 식비와 학비를 대준다고는 하지만 군색해서 살림을 줄이고 하향하는 형편이고 보니 말과 같이 못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슬프다고 한 잔, 즐겁다고 한 잔, 매일 장취(長醉)하는 형의 일이니 결과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특별한 부업을 경영하지 않고, 먹고 남는 식량을 곳간에 쌓아두지 않는 한 돈이 필요할 때 수시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추수 이후 아니면 출납을 못하는 것이어서 서울 삼촌과의 셈도 자연히 해마다 늦가을이 되곤 했습니다.
醫師로서 한창 벌어들이는 三寸의 경제형편은 저축하며 살아갔지만, 그렇다고 제집에서처럼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두 번 세 번 달랄 것을 한 번으로 要約하는 수가 비일비재하니 저절로 군색에 빠지기 마련이었습니다.
2, 3학년 때부터 안회남(安懷南)이 매일같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같은 반이었습니다. 안 씨는 피부 색깔이 검어서 집안 식구들은 그의 이름대신 ‘깜둥이’라고 불렀습니다.
매일밤 찾아오는 ‘깜둥이’에게 묻어나간 그는 밤 새로 한 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웃통을 벗어젖히고 아령을 했고 학교에서는 틈틈이 철봉을 하고 하학 후에는 마이루줏뎅 (손을 대지 않고 공중에서 넘는 재주), 물구나무서기, 땅재주, 텀블링을 ‘깜둥이’와 함께 한바탕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집에 오기 전에 재동 네거리 호떡집에 들르거나 여유가 있으면 설렁탕을 한 그릇 하곤 했지만 날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집에 와선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끝마친 그는 부리나케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종묘 앞 박수호의 집 바깥방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박은 안회남과 내외종간으로 홀어머니의 외아들로서 가슴을 앓는 길이라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끔찍이 위했습니다. 그래서 행랑방 한 칸을 아들에게 내맡겨서 젊은이들의 사랑방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Y․C․K 하모니카 서클을 만들고 매일밤 하모니카 연습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Y․C․K는 김유정의 머리글자입니다. 하모니카밴드를 이끌고 나가자니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이듬해 봄인가 확실히는 기억하지 못하나 <단성사> 개관 몇 주년 기념행사 때 그는 모닝을 입고 <단성사> 무대 위에 섰습니다. 스물한 살의 그의 얼굴은 너무나 해사했고 주체 못하는 정열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는 하모니카 독주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관중들의 박수를 받고 흥분하기도 했습니다.
그 소문을 숙모에게서 옮겨들은 삼촌은 그를 앞에 불러 세워놓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얘 유정아, 너 미쳤니?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가 있느냐 말이다. 신파쟁이 모양으루 극장에서 하모니카 따위를 불다니…… 얼굴을 못 들구 댕기겠구나.”
숭인동 집에서 같이 살고 있을 때 삼촌은 따로 선생을 두고 거문고와 양금을 배웠고 한때는 바이올린도 켜던 그였으니 음악을 이해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모니카를 애들 장난감으로 보고 극장을 멸시하는 말투였습니다. 그가 하모니카를 택한 것은 간편하고 대중적이며 아무나 불 수 있는 값싼 악기라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후는 삼촌이 듣는 데서는 하모니카 소리를 일제 내지 않았습니다.
1929년은 그에게 있어 액운의 해였습니다. 그해 늦여름 하기방학이 끝날 무렵 그는 치질을 앓았습니다. 외과의사인 삼촌은 자기가 다니는 적십자병원에서 수술을 해 줬습니다. 그것이 후일 그에게 치명상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로부터 얼마 안 된 가을 어느 날의 일입니다. 그는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간통집으로 접어드는 참이었습니다. 그때 저쪽 여탕문이 열리면서 목간통에서 갓 나온 얼굴의 젊은 여인이 부랴부랴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물 대여섯 되어 보이는 그 여인은 상기된 기름한 얼굴에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틀어 올렸습니다.
그는 살맞은 사슴처럼 그녀의 뒤를 눈으로 좇으면서 한동안 멍청히 서 있었습니다.
그는 열여덟 살부터 사방에서 사위감으로 탐내는 좋은 자리를 물리치고 당분간 결혼을 않기로 거절해오는 터이더니 이날 이후는 더구나 결혼 문제는 생각 밖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음날 목간통집 근처에서 서성대다 그녀를 발견하고 뒤를 밟아서 그녀의 집과 남도기생 박 모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의 작품 「두꺼비」는 그의 심경과 실패에 돌아가는 그의 사랑의 경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기나 서한 그리고 취중의 말(그의 조카에게 한)들을 견주어 보건대 그의 사랑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병적인 점이 많아서 어딘가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만.
“후리후리한 게 몸맵시가 있나, 길쭉한 얼굴에 말씨조차 정이 우러나지 않는 그런 매력없는 계집이었어”
이 말은 가끔 만취했을 때의 그의 독백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자신의 말대로 매력도 없는 그 여인임을 분명코 알고 있으면서 뜨겁게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도소리만큼은 잘했지.”
그는 술이 얼크레 하면 콧노래식으로 한마디 하는 척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도명창이라서 몸을 내던져가면서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애정일지도 모를 향수를,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낀 숙명적인 모순덩어리의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살 때 여읜 어머니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려 그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 사진과 두 군데서 이루어진 환상을 가슴에 그린 것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여인으로선 큰 키에 기름한 얼굴하며 벗겨진 이마와 올라간 눈귀가 남자의 상에 가까우며 눈초리의 날카로움이 그 성깔의 팔팔함을, 그리고 꼭 다물어진 얇은 입술이 의지의 굳건함을 엿보게 했습니다. 이렇게 남이 보면 애정은 고사하고 냉엄한 위압감을 느낄 정도의 여인이건만 그는 그분에게서 정열과 샘솟듯 하는 기쁨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분의 친정이 실레에서 작은 고개 둘을 넘는 곳, 동내면 학곡리로서 심씨 집안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데다 특이한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은 그분의 일이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누구나의 버릇이겠으나 밤낮으로 어머니를 그리며 찾고,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는 어머니를 비슷한 아무에게서나 느껴보는 젊은이의 일이니 이성에 대한 애정과 혼동되기 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를 여의고부터 ‘수캐엄마’의 젖을 빨고 만지며 눈을 감고 거기서 어머니를 느끼곤 한 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어린 아이를 데린 여인에게서 풍기는 젖내음 속에서 무한한 향수를 달래곤 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를 보기까지는 며칠밤을 뜬 눈으로 새우며 몸부림치며 그리워하다간 막상 그녀를 대하고는 환멸을 느끼는가 하면 그런 가운데 환희를 찾으려고 애걸복걸하는 그였습니다.
그녀가 없어도 좋았던 사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여인이면 누구나 좋았을 테니까요.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면 오히려 비탄에 빠지니 없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한 사랑이었으리라 짐작되며 어느 한편으로 생각하면 더없이 순결한 사랑이 아니었겠는가 느껴집니다. 하여튼 그는 몇 살 위인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얼마 동안은 몸을 돌보지 않고 한 생각에만 골똘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책상머리에 ‘소박(素朴)’이라고 써붙여 놓고 ‘두꺼비’의 답장없는 편지를 정성껏 썼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쓰여진 편지는 수없이 고쳐 써지고 문장은 수없이 닦이어 구절마다 피와 땀이 배었습니다. 원래 그는 정이 넘쳤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가시밭길도 싫다 하지 않고 찾아나서는 그의 성격은 아무도 가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死後 일기책장 사이에 꽂혀있는 아래와 같은 血書 한 장이 발견되었습니다.
— ×× 너를 사랑한다.
아마 손가락을 깨물어 쓴 글씨리라. 힘주어 그어진 획은 꼿꼿하니 억제하는 마음의 굳건함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明月館 또래에서 두어 번 만났으나 목숨을 건 사랑은 고백도 없이 종말을 맺고 말았습니다.
생각컨대 후일 그의 문장이 아름다워진 것은 이때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 가끔 그도 운을 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술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도 그러했거니와 그냥 있을 수 없는 그는 술을 먹어야 했고 그러자니 돈이 필요했습니다.
추수전에 돈을 부치라니 무리였지만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그의 사정이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는 편지를 여러 번 집에 부쳐도 시골에서는 돈 대신 딴청의 답장만 오니 기가 막혔습니다.
하루는 잡지만한 편지가 집에 왔습니다. 그의 형은 편지를 뜯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편지지 한 권이 들어있고 편지지 한 장 한 장에는 ‘돈’자를 크게 한 자씩 쓴 것이었습니다. 형은 대단히 화를 냈습니다. 늦가을에서야 조금 보내주고 초겨울에 서울 와서 조금 주었습니다. 그만한 돈은 호랑이 아가리에 강아지 턱밖에 안 되었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친구들 사품에 끼어다니며 누구의 술이든간에 그는 매일밤마다 폭음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며 어려서 일찍 어버이를 잃고 허전함을 의탁할 곳 없는 설움이며 형의 걷잡을 수 없는 방탕으로 인한 가산의 궁핍이 가져오는 가지가지 불행에 대한 생각이 쉴 사이 없이 파도처럼 그에게 밀어닥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극도로 슬퍼했고 따라서 의기소침하여 그의 생애 중 이때부터 고민이 심각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낙심하였다가 뉘우치고 힘을 가다듬어보고 그러다간 낙망의 나락에서 허덕이고 번복하기를 끊이지 않았으나 난관에 굴복함이 없이 꾸준히 뚫고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어떤 난관이라도 조용히 참고 견디는 그의 인내력은 대단하여 옆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처절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겨울에 돈을 가지고 온 형은 사직동에서 여섯 간 짜리 기와집을 그에게 사주고 시집에서 살다가 온 둘째누이와 함께 살게 했습니다.
두 내외의 잠자리를 감시하여 아들을 며느리방에 들지 못하게 하는 시어머니의 시기심과 박대에 못 이겨서 시집을 뛰쳐나온 그녀는 소격동에 있는 피복공장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공장살이와 살아가는 데 많은 근심과 불만 때문에 신경질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徽文高普를 졸업하고 延禧專門 문과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에 실레에 내려간 그는 새 세계를 발견하였습니다.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실레는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유록색으로 무르익어가는 산과 유리처럼 맑은 물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았습니다. 헐벗은 초가집, 헙수룩하게 입고 다니는 마을 사람들, 부드러운 그들의 사투리, 소의 울음소리, 개소리, 갖은 새소리, 그 중에도 꾀꼬리와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꿈속 같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그는 앞개울에 나가서 웃통을 훌렁 벗어젖히고 세수를 했습니다. 잎 끝에 이슬이 맺힌 벼잎을 보고 앙징스런 오이덩굴을 보며 집으로 들어옵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모두 친숙해 보이고 산골이 다 잔치집처럼 축복에 넘쳐 흐르는 양 기꺼웠습니다.
모시 고이적삼으로 갈아입은 그는 짚신을 신었습니다. 그는 시골에 오면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도 한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조카와 놀러온 사람들을 데리고 목욕하러 한들로 가곤 했습니다. 한들은 실레에서 오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들판입니다. 들 어귀에는 보가 있고 보 어귀에는 길 반이나 되는 깊은 늪이 있어서 동네 목욕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클로루’를 연습했습니다. 보 옆에는 꽤 넓은 숲이 우거져서 서늘하게 보였습니다. 그 옆에 봇도랑을 끼고 오막살이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 소작인이며 선대부터 내려오며 主從關係에 있는 돌쇠네 집이었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길에 그가 들러서 봉당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면 소리없이 내닫는 돌쇠어멈의 낮은 목소리는 은근한 것이었습니다.
“데련님, 볕이 많이 더워유…….”
그들이 주고 받은 말은 그대로 ‘산골 나그네’에 나타났습니다. 돌쇠네 모자가 당한 그대로입니다. 집과 인물, 사건이 모두 실화로서 가감없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의 내력을 아는 이들이 그의 작품을 읽었을 때 흔히 느끼는 바 誇張이 없는 반면 정확한 관찰과 예리한 표현(문장)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작중 인물 거의가 실인물임을 발견할 때 더욱 놀라며 적어도 그 당시의 그의 눈길을 거친 자이면 그의 어느 작품을 보고서도 이것은 누구일게라 추측케 될 것입니다.
그는 영화에서 喜劇에 관심이 컸습니다. 하루 로이드 보다는 챠리 챠플린을 좋아했고 그보다는 바스다 키튼의 생전 웃지 않고 남을 웃기는 연기를 좋아했습니다.
챠플린의 황금시대의 한 작품에 餓死狀態에서 친구가 먹음직한 큰 수탉으로 헛보이는 것이나 구두를 삶아먹는 장면은 그에게 잊히지 않는 인상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술 이외에 아무것도 눈에 띄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예술을 해야 되고 진실히 삶을 살자면 예술을 내놓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그는 조카(영수)에게도 틈있는 대로 권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조카에게 읽기를 권한 책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罪와 罰’……도스또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도스또예프스키
‘귀여운 여인’……체호프
‘外套’……고골리
‘마리아와 광대’……루이 필립
‘홍당무’……르나아르
‘阿Q正傳’……魯迅
이상은 그가 남에게 권했으며 그자신 퍽이나 좋아했다는 말도 될 성 싶습니다.
‘따라지’를 쓰기 며칠 전에 그는 하목뢰석(夏目瀨石)의 ‘坊ちやん’을 읽었습니다.
1936년 가을의 일입니다. 어느 신문사에서 독촉하는 원고를 방문 밖에 사환을 세워놓고 많은 양의 원고를 순식간에 써서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잡지에 발표됐을 때 읽어본 조카는 빈틈없이 꼭꼭 짜여진 글에 탄복하고 말았습니다. 비상한 정신력을 가진 그는 예술 때문에 좀더 오래 산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돌쇠네집에 들렀을 제 이웃집에 ‘들병이’(移動式 酌婦)가 왔습니다.
얼마든지 호탕해질 수 있는 그는 술상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조금 후에 홍천쪽에서 행금(깡깡이)쟁이가 무거운 걸음으로 그곳에 당도했습니다.
행금쟁이는 기름때에 찌들은 행금과 입에 물은 피리로 구슬픈 곡을 잇달아 켜며 끊일 줄을 몰랐습니다. 처음엔 술 몇 잔으로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행금쟁이도 건달이어서 행금으로 못하는 짓이 없이 잘하므로 같이 놀기로 했습니다.
그는 행금소릴 듣기보다 행금 끝에 달려있는 새를 보았습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대가리와 몸뚱이는 털이 벗겨져 알몸이고 꼬리에 두세 잎 할미새털인 듯 달고 있는 새는 행금쟁이와 비등한 나이같이 보였습니다. 늙고 헐벗은 새는 새하얗고 저의 쥔이 부르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마다않고 ‘네’하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행금쟁이가 하는 소리지만.
산골의 여름밤은 금시 밝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술을 마셨습니다.
저녁나절 지점으로 심부름 갔던 자가 빈 술통을 도로 지고 오므로 그제사 일어서는 그였습니다.
다음날은 다른 들병이가 왔습니다. 그래서 또 닭을 잡고 술상을 벌였습니다. 그날은 저녁때부터 흐리더니 밤중에 비바람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열어젖힌 방문 밖을 내다보며 강원도 아리랑을 목청놓아 부르며 흥겨워 했습니다.
며칠 후에 오 리 떨어진 물골에 갔습니다. 굽이쳐 내려오는 개울바닥은 온통 고자리 쑤시듯 파헤쳐서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파놓은 구덩이에선 벽채와 삼태기를 든 금쟁이들이 두더지처럼 꾸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모여든 들병이는 한동안 이곳 금전판에서 술을 팔다가 딴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머무를 줄 모르는 집시처럼. 이들이 이동하는 여로가 실레였습니다. 여기서 본 것과 그 후에 병 휴양차 가있던 충청도 금광에서 얻은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 ‘금따는 콩밭’입니다.
하기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돗자리와 원고지를 들고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종일토록 명상에 잠겼습니다. 며칠 후 사흘 밤을 새워서 ‘산골 나그네’가 쓰여졌습니다.
그는 그의 조카(永壽)가 가정형편을 개탄하며 세계 일주를 한다고 新義州에서 上海로 가던 중 여의치 않아 돌아온 것을 보고 부러웠던지
“네가 떠날 때 나한테 말이나 하고 떠나지…….”하며 책망 아닌 책망 비슷이 비친 일이 있었습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으나 침착하고 치밀한 그는 떠나진 못하고 부러워했던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그가 시골에서 그때 제일 즐겼던 일이 있습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뒷동산 움푹 들어간 골에는 그의 조상의 산소가 있습니다. 그곳을 외박골이라 부릅니다. 여름밤 달이 휘엉청 밝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저녁 후 그는 외사촌 누이동생과 조카(珍壽), 식모 아이를 데리고 외박골로 올라 갔습니다. 붕긋한 산소 앞에서 그를 가운데 앉혀놓고 둘러 앉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모니카를 불었습니다. 하모니카 소리는 맑게 개인 드높은 하늘에 영롱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거기 앉았던 소녀들은 마음이 황홀해짐을 느꼈습니다. 젖빛 안개가 달을 꿈속으로 이끄는 밤, 초록빛 나뭇가지에서 뻐꾸기가 쉬지 않고 울던 그때가 나는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뿐이랴, 물골로 형과 여러 사람이 전렵하러 갔을 때 꺽지와 쏘가리회를 먹던 일은 끝내 잊지 못해하는 추억의 하나였습니다.
“거무툭툭한 꺽지란 놈을 거꾸로 잡고 초고추장에 꾹 찍어 대가리부터 어썩 씹으면 꼬리로 두 볼을 툭툭 치지…….”하며 서울의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말하고는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은 그에게 기쁨도 있었으나 큰 병을 앓아서 우울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서울에 간 그는 늑막염을 앓았습니다. 형에게 병 치료비와 생활비를 청구했으나 적은 돈으로 어름어름 때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한 집에 살고 있던 매형 鄭氏가 운을 떼었습니다. 둘째 누이는 광업소에 技師로 있다는 정 씨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技師라는 것이 거짓임이 그 후 자연히 밝혀졌음.—
“아무 때 분가해도 할 것이구 자네두 어린 애가 아니니…….”
목적은 분가가 아니라 재산의 분배를 강요하라는 암시였습니다. 그보다 10여 년 연상이요 사회경험도 많은 정 씨가 남도 아닌 처남인 자기를 해롭게 할 리는 만무하리라 단순히 생각했던 그는 정 씨의 말대로 정씨가 소개하는 法律事務所에 다니며 일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되어 법정출두를 통고받은 형은 당황했습니다. 나어린 동생으로 사랑했고 믿어오며 때때로 자신의 낭비를 후회하고 있던 형은 그 동생에게 분배해 줄 재산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형 자신의 말로.
그러던 것이 이 일을 당하고 나니 배신했다고 생각키는 동생이 한없이 괘씸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정 씨의 꾀임이 아니고는 그렇게 매정스럽고 대담하게 나올 수 없는 동생이라는 것을 잘 아는 형은 병을 앓고 있는데 돈이 없어서 그러려니 생각했고 집안꼴 되어가는 품과 朴 某 기생과의 일이 있는 다음의 아물지 않은 상처로 공중에 떠있는 동생이 무턱대고 허둥지둥 돈을 원하고 있는 것보다 번둥번둥 놀며 지내는 정 씨가 말할 수 없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형은 그를 실레로 오도록 해서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러자니 소송은 취하시키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소송을 제기하게 된 한 가지 이유도 그럼으로 방탕한 형에게 일침을 주어 개심케 하여 집안 살림을 바로 잡아보자는 데서였더니 만큼 형의 애걸하는 편지를 받은 그는 아차 하고 그 짓을 후회한 다음 정씨와 의논없이 취하했습니다. 난봉부리는 형의 낭비를 막고 따라서 자신도 득(得)하자는 속셈뿐인데 법정에서 형제가 가운데 재산을 놓고 서로 다투는 추태를 상상했을 때 그는 몸서리를 쳤습니다.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래지질 않도록 착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내려온 그는 안방에서 그의 형과 마주 앉았습니다. 형은 며칠 전부터 동생을 만나면 잘 타협해서 살아나가도록 할 생각을 먹고 벼르고 있었으나 막상 동생을 대한 형은 마음이 달라져 갔습니다. 알콜 중독자의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술기가 있는 형은 처음부터 빈정대며 고집을 부리고 굽힐 줄을 몰랐습니다.
“어 참, 잘난 양반을 몰라 뵙고 나같은 놈이 공연히 그랬습니다.”
애초부터 형은 근 20세나 나이 어린 동생을 넘보고 그의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그는 형에게 잘잘못을 일깨워주고 뉘우침을 권하여 준준히 타일러서 여태까지의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말했습니다. 형은 동생이 말을 할수록 엇나가고 말았습니다. 끝내는 형은 불이 이글이글한 화로를 방바닥에 엎어뜨렸습니다.
이후로 그는 형에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형은 그대로 동생과 사이가 뜨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쇠약한 몸은 고쳐야 했습니다. 뱀도 먹고 닭도 먹고 했으나 때로는 술을 더 많이 먹었습니다.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형은 형대로 딴 궁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중구난방이 되었습니다. 약과 술을 닥치는 대로 먹어대는 그는 열과 도한이 끊일 줄을 몰랐습니다.
몰이해한 형의 마음이 그의 병을 고쳐주는 데 있지 않고 마지막에 가까워오는 가재의 탕진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혼자서 향락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주위를 경계하며 전전긍긍하는 품이 한 푼도 나올 가망이 없었습니다. 형에게 곤욕을 받으면서 잠결에도 형을 탓하는 조카를 나무랄만큼 그는 선량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해 버렸습니다. 학교는 단념하고 병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처음뿐이요 나중에는 그것마저 되는대로 하자는 마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그의 조카(영수)가 마을 사랑방을 얻고 20여 명의 아동을 모아서 東亞日報社 ‘브나로드’ 팜플렛을 교재로 야학을 시작했습니다. 며칠 안 되어 집주인은 사랑방을 쓴다 하여 동짓달에 부랴부랴 움을 팠습니다. 제 맘대로 쓴다는 기쁨에서 그와 아이들은 저희들의 놀이터를 즐겁게 이용하였습니다.
아이들에 둘러 싸여서 한 때는 시름을 잊고 한 일에 몰두할 수 있었으나 집안에 돌아왔을 때는 심사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해 겨울에도 철새처럼 들병이들이 실레를 거쳐 갔습니다.
땅거미때 눈이 푸뜩푸뜩 날렸습니다. 야학을 마쳤을 때 소리없이 쌓인 눈은 발이 푹푹 빠졌습니다. 그는 조카와 젊은 조명희(趙明熙) 군을 이끌고 아랫 마을로 갔습니다. 그는 조카와 조 군을 데리고 술과 담배를 함께 즐겼습니다. 술집은 코다리찌개에 막걸리를 먹느라고 아래 윗칸이 떠들썩했습니다. 빽빽이 들어 앉은 사람 사이를 오르내리며 새로 왔다는 들병이가 술을 따라 놓고 아리랑타령을 구성지게 불렀습니다. 눈, 코다리찌개, 막걸리, 아리랑타령, 들병이 이상 다섯 중에서 한 가지가 빠져도 무의미한 것이라고 그는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그날 이후로 그 들병이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술자리를 옮기며 달포를 지냈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모르는 들병이. 그녀는 돌쟁이 아이가 있어 틈틈이 젖을 빨렸으며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노름쟁이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치마와 몸에서 풍기는 젖내가 그로 하여금 어머니에 대한 向念을 일으키게 한 것을 보면 朴 某 기생 다음으로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던 그는 담배 연기에 숨이 답답해서 눈을 떴습니다. 윗목에 화로를 끼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아랫목의 그와 계집을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 보고 있는 들병이의 사내를 그는 본 것입니다. 그는 필연적으로 복수의 행동이 있으리라고 믿고 경계해 마지 않았습니다만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그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하자
“일찍두 않은데 가보지…….”하며 그에게는 아랑곳없다는 듯 계집 등 뒤에 붙어 자는 어린 아이를 끌어당기며 중얼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들병이를 다시 보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그가 시골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민주적이었다는 점입니다. 몰락도정에 있을망정 그의 집안 사람들이 다 반상을 가리어 가노(家奴)를 대하기 짐승처럼 했으나 유독 그는 꼭 존경하는 말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언동이 겸손하고 소박한지라 남녀노소 누구할 것없이 쉽게 친근할 수 있었고 의식적으로 그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샅샅이 체험하고 관찰했던 것입니다. 천성이 착한 그는 나쁘게 말해서 어수룩하고 냉철하며 좋게 이야기하면 예지가 넘쳐 흘렀습니다. 남을 의심치는 않으려 했으나 부정을 보고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기질이며 감수성이 예민했습니다. 열하기 쉬운 그는 인내성이 남달리 강하여 밀고 나가는 힘이 황소와 같았습니다.
들병이와의 관계는 위에 말한 것 외에 서너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약하겠습니다.
매일밤 오한이 나면 도한으로 몸이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은 그가 무슨 기운이 있었겠습니까. 병약한 몸으로 술집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상대방의 다소와 강약을 생각지 않고 나서는 그는 패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2, 30 명의 많은 사람을 혼자서 대적할 제 조카(영수)와 협조자 조명희군에게는 배후를 경계시키며 내달아 상대방을 참패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젊은 혈기라고 하기엔 수긍되지 않는 기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치고 받는 그의 동작은 민첩하기 제비와 같았고 끊일 줄 모르는 용맹은 사람들을 감탄케 했습니다.
이듬해 이른 봄, 움에 불이 났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오는 아이들이 거의 모여서 배우기를 시작하려는 참에 불이 난 것입니다. 움막을 드나드는 문 옆에 페치카식으로 만든 아궁이가 과열했던 것입니다. 불은 삽시간에 퍼져서 출입구에 늘어뜨린 거적과 벽둘레의 이엉이 타고 위로 뚫린 들창까지 분간키 어려웠습니다. 연기와 불길 속에서 그는 들창으로 아이들을 내던지고 나서 밖으로 나와 아이들을 세어 보았습니다. 옥이라는 제일 작은 아이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옥아! 옥아! 이리 오너라, 이리루.”
연기와 불길이 꾸역꾸역 나오는 들창 속에 머리를 틀어박고 고함을 쳤으나 인기척이 없자 그는 들창 구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불과 5, 6초 되었을 때 창구멍으로 의식을 잃은 옥이가 던져지고 곧이어 온통 불에 그을린 그가 기계체조하듯 밖으로 튀어 나왔습니다. 그의 조카나 조명희(趙明熙)군은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움 속에 아무도 없다고 우겨댔던 것입니다.
후일에 그가 친구와 술을 먹다 가끔 드잡이를 놓는 것은 건강해서가 아니고 아무리 쇠약한 때라도 그의 칼칼한 성품이 민첩한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늦가을일 것입니다. 형은 약간의 토지와 임야를 판다고 내놨습니다.
그는 서울에 갔으나 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매형 정씨는 돈도 없이 그날그날 허송하고 있는 그가 눈에 가시였던지 자기가 알고 있는 모광업소의 현장 감독으로 그를 충청도로 내려 보냈습니다. 말인즉 병휴양이었지만 약은 고사하고 매일 광부들과 어울려서 술만 먹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얻어진 것이 ‘금따는 콩밭’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몇 달 후에 서울에 돌아온 그는 다시 실레로 갔습니다. 이번의 그는 전일과는 딴판이었습니다.
마을 사랑방에서 야학을 계속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라 칭했습니다.
農友會歌
1. 거룩하도다 우리의 집 농우회
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2.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
나서라 호미를 들고.
(이하 불명)
그의 작사로 곡은 ‘러브 인 아이들레스’의 後章의 한 구절을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노인회와 부인회를 조직코 회합마다 농우회가를 부르게 하고 마을 사람들의 민주 사상 계몽에 전력을 경주했습니다. 이 사업은 중년층의 절대적인 협조를 얻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겨울에는 공회당 건축기성회가 동민을 동원시켜 雪中 벌목을 시작했습니다. 그에 소요되는 일체의 재목은 그가 제공한다는 조건으로였습니다. 꽤 많은 재목을 소비했는데 형이 이에 대하여 일언반사(一言半辭) 불평을 하지 않은 것은 특기할만한 일입니다. 열성으로 나선 그들, 그와 조카(영수)와 협력자 조명희군(일찍 작고 하였음)의 노력으로 늦여름에 낙성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동민들은 그의 의도하는 바를 짐작하고 동조하였습니다. 농우회가 목적하는 바 도박과 음주를 금하고 氣風을 진작하여 상호협조하는 정신을 함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을 술집에는 손님이 없고 싸움하는 자가 줄었습니다. 특히 이웃지간에 억지 쓰는 자가 있으면 회의 압력을 받게 되어 자연히 그 버릇이 없어졌습니다.
집을 지어 곁방살이를 입주시켰습니다. 동네 공동자금으로 저리 금융토록 했습니다. 성냥, 빨래비누, 석유 등 생활 필수품을 공동 구입하여 염가로 공급했습니다. 전답을 공동경작하여 단체생활을 체득케 했습니다. 그러는 것을 동민 전체가 다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이해득실 관계로 그런 일을 반대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간이학교(簡易學校)의 인가가 그의 명의로 이듬해 여름에 도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름은 금병의숙(錦屛義熟)으로 정해서 간판까지 걸어 놨었으나 그가 떠난 다음 그의 조카도 서울로 가고 홀로 남은 조명희군의 힘은 그것을 이끌고 나가기엔 너무나 무력했던지라 공회당만 주인 잃은 흉가집마냥 헙수룩히 서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의 형은 가산의 전부를 내놨습니다. 마침내 그의 집안의 종언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는 사람은 돈을 몇 번에 견질러줘서 그때마다 형은 그에게 핑계로 넘겼고 최후에 그에게 준 돈이라곤 청산된 금액의 삼십분의 일 정도였습니다.
그것을 주면서 욕심 많은 (아마 정신없는) 형은 자기 아들(영수)도 약간의 돈을 주어 그와 함께 추방하듯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형을 원망하는 조카를 억누르고 형에 대해서 한마디 말이 없었습니다.
서울에 온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빈손이 되었습니다. 써 볼 것 없는 적은 돈이었습니다.
이제 형에게는 손을 내밀지 못할 것이며 순순히 주고 싶어도 줄 돈이 없는 형. 욕심 많고 몰인정했던 형은 자신의 몸도 망쳤고 집안의 여러 사람에게 못할 노릇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생전에 회오를 모른 채 운무 중에서 지내며 그보다 더 오래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공장에 다니는 누이에게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목간값서부터 담배값에 이르기까지 누이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보다 매형 정씨의 압력까지 받아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교활할지언정 착하지 못한 정씨는 제 자신도 놀고 먹으면서 말끝마다 그를 은근히 꼬집어 뜯는 것이었습니다.
곤궁에 빠져 고생함과 초조 끝에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 갔습니다. 병원(서울시청 위생진단)에서 肺結核으로 진단하자 그는 조바심이 되고 모든 것이 슬프게 여겨졌습니다.「연기」 「따라지」는 이 시절 전후의 일입니다.
드디어 식객인 두 사나이를 거느리고 공장에 다니는 누이는 신경질이 더해가고 빚은 늘어나서 꼼짝할 수 없이 경제상태가 긴박해졌습니다. 그렇게 하자는 鄭氏의 말대로 집을 팔기로 했습니다. 집을 판 돈으로 전방을 세얻고 누이는 장사를 시키고 나머지는 약을 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말뿐이고 집 판 돈으로 먼저 술을 사왔고 그 다음은 鄭氏의 군주전부리에 약간 쓰여졌습니다. 군주전부리라는 것은 곡절이 있는 것으로 다음 기회에 밝히겠으므로 이만 해두기로 하겠습니다.
그들은 惠化洞 어귀 개천가에 방 한 칸에 헛간 한 칸을 얻어서 누이에게 밥장사를 시켰습니다. 노동자를 상대로 하는 장사로 술도 달라면 받아다 주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농담을 하면 그대로 들어 넘겨야 손님이 끊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것을 방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하나하나 착념하고 있던 鄭氏는 손님이 간 다음 안해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시기가 되고 내외 싸움이 되어서 누이를 발길로 걷어차 한 길이 넘는 석축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뛰쳐나온 그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산에 올랐다가 거리를 헤매다가 밤이 들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래도 집이라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鄭氏의 눈초리에는 언제나 가시가 돋치게 마련이었습니다. 밥을 먹고나면 丁氏가 꼬투리 없는 화를 내면서 누이를 들볶습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은 더욱 아파집니다. 누이 내외와 한방을 쓰기란 곤욕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슨 핑계를 해서든지 鄭氏와 겸상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끈기있게 살려는 그는 「소낙비」를 썼습니다. 도서관에 다니며 달포를 고생하고 나선 건강이 심히 나빴습니다. 그해에 「소낙비」가 朝鮮日報에 당선이 되자 오래간만에 그의 손에 돈이 들어 왔습니다. 장사를 한다지만 늘 꿇리는 누이를 돕는 뜻에서 급전을 돌려주고나니 약 살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희망에 찬 그는 가슴이 벅찼습니다.
누이의 집에서 鄭氏와는 개와 고양이로 마음이 편치않아 하루가 민망한 그였습니다.
형수 혼자서 조카 두 오뉘를 데리고 사는 것을 생각한 그는 신당동으로 그들의 집을 찾아 갔습니다. 형이 시골에서 온 집안 식구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헤쳐놓자 형수와 조카 남매는 셋방을 얻고 있다가 얼마후 조카가 취직을 했던 것입니다. 조카는 어느 회사에서 적은 월급을 받고 근근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과 같이 살기를 원했을 때 조카와 형수는 쾌히 승낙했습니다.
형수와 두 조카는 그의 병치료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근심을 해줘서 마음은 편하고 먹고 지내기에는 별 걱정이 안 되었으나 한갓 돈이 없어서 걱정이었습니다. 말인즉 약을 산다고 부지런히 원고를 썼으나 돈을 손에 쥐고나면 그의 마음은 달라졌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술을 사면 먹어야 했고 술이 취하고 보면 한 잔 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였습니다.
이때부터 벽에는 ‘謙虛’가 써붙여지기 시작해서 그가 작고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약을 쓰는 한편으로 부지런히 술을 마시고 취하고 나면 무슨 설움이 그리도 많은지 슬피 울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밤을 새워가며 원고를 썼습니다. 물론 돈이 필요해서도 썼겠지만 글쓰는 열은 남의 몇 배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무렵에 이상(李箱)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이상이 그의 집에 올 때는 먹도미(손바닥만한) 한 마리를 들고 왔습니다. 그것을 중국집에서 찜을 해옵니다. 이 두 사람은 만나면 술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조카를 데리고 서울시청 부근에 있는 낙랑(樂浪)파라에 갔습니다. 차(茶)가 나오고 조금 후에 이상이 나와서 그와 몇마디 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와 조카가 큰길로 나와서 무교동쪽으로 몇발 걸음을 옮기자니 뒤에서 이상의 소리가 났습니다. 이렇게 이상은 차 판 돈으로 술을 바꾸어 먹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뒷골목 선술집을 들르면서 문학적 토론에 밤이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가 李箱을 좋아한 것은 자기와 같은 肺結核이었기 때문에 더 했던 것입니다.
그의 조카가 회사에서 상여금을 탔을 때 그가 바라던 바 모시 두루마기와 고도방 구두를 맞춰 주었습니다. 그는 자랑삼아 그것을 입고 외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는 술에 취해서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들어왔습니다. 자기의 줏대를 굽히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는 가끔 친구와 치고 받고를 곧잘 했습니다. 병이 들어서 약해질수록 더 용감해지는 그였습니다. 술이 잦으니 몸인들 배겨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약에 보태어 쓰겠다고 주선해 주는 분의 덕택으로 방송국엘 다녔습니다. 하얀 모시두루마기에 고도방을 신고 퇴색한 회색 중절모를 앞챙을 푹 눌러쓰고 집을 나서는 그는 어딘가 늠름하고 깔끔한 기풍이 풍겼습니다. 남들은 군색한 선비로서 동정하는 기색이었습니다만.
昌信洞, 新堂洞, 孝悌洞으로 셋방을 옮겼을 때는 악화된 병도 고칠 겸 술도 피할 겸 貞陵에서 오리쯤 떨어진 산중의 작은 암자로 수양하러 떠났습니다.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자 도한과 열이 덜해지고 기침이 덜해서 다행으로 알고 식구들은 기뻐했습니다.
며칠만큼 찬거리를 들고 찾아가는 조카(영수)를 보고 그는 그동안에 지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점심후엔 산골물에 목욕을 하고 볕에 닳은 너럭바위 위에 누워서 2, 3시간씩 일광욕을 하기를 날마다 계속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8월 하순에 절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병이 대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카와 그때마침 와 있던 廣州 매형 유씨가 달려갔습니다. 볕에 그을은 그의 얼굴에는 낙심과 초조가 엇갈렸습니다. 예전에 수술했던 곳이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위 위에 누워서 뒹군 것이 아주 나빴다는 말들이었습니다. 유씨와 조카는 번갈아가며 그를 업고 정릉 골짜기를 빠져 나왔습니다. 한참 오다 그를 길가에 내려놓고 쉴 참에
“할 수 있으면 우리집에 와서 고치도록 하라” 는 광주 매형의 얼굴을 치켜보는 그의 얼굴은 어린 아이의 허식 없는 그것이었습니다.
그의 병은 치루(痔漏)이였습니다. 치질이 심해지니 폐결핵은 여반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폐결핵에 걸리면 불치의 병으로 모두들 단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이야 뭐라든 그의 가족들은 그래도 그를 살려보려고 갖은 약을 구해서 써 보았습니다. 그러는 가족들의 심경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갈수록 병은 뿌리를 깊이 박고 그는 고통으로 해서 글쓰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는 여름에 절에 갈 때 깎은 후로 이내 길러진 머리로 방에서 요강에 뒤를 받아내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병을 털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한 칸 방의 윗목을 칸을 질러 푸른 포장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소설을 못 쓰면 추리소설 번역도 좋았고 ‘홍길동전’의 약기도 좋았습니다. 돈이 될 것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습니다.
8월부터 金文輯씨가 왕래하며 病苦文人 救濟運動으로 나온 돈을 전하곤 했습니다.
치질이 심해지자 그는 식사도 적은 돈으로 많은 영양을 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버터에 감자와 우유와 쇠고기와 양파 등으로 수으프를 만들어 먹었고 배추쌈을 즐겼습니다. 그가 시골에서 6, 7월경 목화밭 배추를 먹어서 그때부터 좋아했던 것입니다. 가난에 쪼들린 살림에 된장인들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수는 친정붙이를 찾아서 얻으러 다녔습니다. 한번은 괄시 못할 친척집에 조카(진수)를 된장을 얻으러 보냈다 실패한 일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돌아온 조카(영수)가 집안이 곤궁해서 구걸에 가까운 생활을 함을 부끄럽다 비관하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없어서 구걸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그는 꼭 병을 털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한번 왔다가 그냥 돌아가기엔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몹시 수척해가는 그는 원고를 쓰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한 칸 방 윗목에 작은 책상을 들여 놓을만큼 포장을 치고 벽은 검은 종이로 발라서 낮이라도 포장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명상에 잠기거나 글을 썼습니다.
그해 가을 李箱 夫婦가 그를 찾아 왔습니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이상의 부인은 그때 드물게 보는 단발머리를 하고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유정형, 난 일본에 가겠소.”
그는 놀랐습니다. 친한 친구 한 사람이 곁에서 떠나가는 섭섭함도 있었지만 행동의 자유를 잃고 앉은 자신을 생각하고 훨훨 떠나는 이상을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일본에 가서 더 배우고 쓰고 하겠소.” 하는 말엔 더 부러워했습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대문께로 나가는 이상의 뒷모습을 방문 안에서 내다보던 그는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연전에 그의 조카가 중국에 갔다왔을 때나 이상이 일본으로 떠날 때나 같이 가고 싶은 마음 금할 수 없었으나 나라 밖에 한 발도 내디뎌 보지 못하고 길섶의 엉겅퀴처럼 하염없이 일생을 마친 그였습니다.
그후에 그는 조카(진수)를 보고 여러번 말했습니다.
“내 병이 낫거든 우리도 일본에 가자.” 하며 밤낮으로 별렀던 것입니다.
회색 아니면 검은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사시(四時)로 쓰고 다니는 회색 중절모를 푹 내려쓰고 아무 데나 나타나는 그는 겸손해서 수줍을지언정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취중토론 끝에 난투하고서도 잠을 자고나면 씻은듯이 잊어버리고 그 친구와 만나면 반가와 했습니다. 아무리 다투어도 뒷말이 없고 중상모략을 모르는 그였습니다.
이해 겨우내 그는 최정희(崔貞熙) 여사의 말을 집안 식구에게 했습니다.
“최정희 여사는 참으로 좋은 분이야”
“작은 아버지는 그분의 무엇을 좋아하세요?”
“최여사는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그 외에도 최정희 여사의 좋은 점을 쳐들어 존경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병약했던 최여사를 그가 볼진대 누구에게서보다 동감할 수 있는 여러 점을 발견했으리라 믿습니다. 최여사의 말을 그는 아래와 같이 끝맺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순박하고 거짓이 없어야 되고 침착해야 하며 겸손해야 된다.”
김래성(金來成)의 「청춘산맥」에 있는 말로 그 옛날 박(拍)이란 동물은 꿈을 먹고 살았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도 박과 같았는지 모릅니다.
사계절 어느 때고 환절기에 접어들면 그는 수필 속에서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속고 속아 이렇게 현실에 부닥쳐 절망 속에 몸을 내던지고 있으나 다음 계절에 틀림없이 금시 발복할 무엇이 올 것이라고. 문밖에 누군가가 큼직한 희망을 한아름 안고 계절과 함께 다다른 것처럼 굳게 믿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뇌까리며 진실로 그것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회사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조카를 기다릴 적도 그와 비슷한 마음이었습니다.
“쟤 진수야, 오빠가 오늘은 무엇을 사가지고 올까?”
환자에게 줄 뭣이든 한 가지라도 사가지고 들어와 버릇한 조카는 빈손이 아닙니다. 캬라멜이나 과자, 그렇지 않으면 실과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먹는 재미보다 기다리는 마음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그는 주위의 절망상태 속에서 희망을 창조(발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현실에서 초탈하려고 한 것이겠지요.
이때 그는 ‘숱밭’(아마 숯밭이 아닐까)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벽에 메모를 붙이고 긴긴 겨울밤을 상념에 잠기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굉장히 크고 좋은 장편 소설을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늦어도 내년 늦여름부터는 시작할 것이라며 자기 병 시중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형수를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놈만 쓰면 아주머니께 기와집 한 채 사드리고 진수하구 나하구는 일본으로 공부하러 갈테니 그동안만 고생하세요”
두 조카와 형수는 불평은 생념도 않는 사람이나 그는 자신의 속셈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생가야 자기의 속이야기, 특히 그 성과를 알 수 없는 계획을 자신만만하게 남에게 말한 전례가 없었던 그의 일이라 그것을 꼭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의 말을 굳게 믿고 병 고치기에 한층 힘을 쏟기로 했습니다.
‘숱밭’은 실레를 무대로 청년운동 전후를 줄거리로 마을사람을 총동원시켜 이루지는 것이 아니었겠나 추측이 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날이 남에게는 까마득하게 여겨졌지만 온 집안 식구 네 사람은 글 쓰는 당자가 되어서 그날이 꼭 오도록 얼마나 바랐는지 지금까지 그 마음은 잊혀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겨울이 깊어짐에 그는 더 수척해졌습니다. 그가 병이 위중해지자 현덕(玄德)이 날마다 집에 들러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말벗으로 지냈습니다. 그는 현덕의 온후한 성품과 거짓없고 정열이 넘치는 언행에 끌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친밀하고 존경했습니다. 그가 작고했을 때 누구보다 슬퍼한 사람이 현덕이었습니다. 이상이 일본에 간 다음에 그들은 더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때부터 그가 광주에 갈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현덕은 그를 찾아와서 그의 병을 근심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병약했던 현덕(현경윤)은 그를 위해서 부드러운 목청을 가다듬어가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현덕의 (季氏-현재덕)가 형을 따라와서 놀다가 그림 이야기가 나와서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습니다.
4, 5개월간을 깎지 않은 머리는 어깨에 내려왔고 퇴색한 수염은 그를 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누렇고 창백한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하며 곤궁과 우울이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반 곱슬머리 속에 드러난 번듯한 이마가 그의 품위를, 큼직하게 찢어진 눈귀와 그 속의 빛나는 안광이 찬란한 꿈을, 꿋꿋한 콧대와 굳게 다물어진 얇고 큰 입술은 끊임없는 인내와 강한 의지를 엿보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油畫로서 현덕의 계씨가 한 달을 두고 그렸습니다. 캔버스 앞에 동저고리 바람으로 쭈구리고 앉아있는 그는 무엇을 생각했으며 그의 面像은 어떠했는지 군색한 중에 돈을 들여가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그 자신이 玄德에게 청한 것은 무슨 뜻에서였는지 설명하기 어려우나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입니다.
그림이 끝나자 그는 玄德의 季氏와 바둑을 두었습니다. 판은 종이에 그리고 알은 상자 오린 것을 썼습니다. 초심자였으니까 두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십원짜리 아코디온을 사서 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끝에 그는 아편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끝내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과 중독 이후의 곤란한 병세를 빤히 알고 있는 그는 사용하는 데 調節을 잘 했습니다. 그래서 광주에 가서는 아편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남보다 강한 자제심과 거센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사후에 보니 밤톨만한 검은 약이 서울에서 가지고 갔던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 조카(영수)는 銀順이란 색시와 장래를 약속하고 지내는 터로 가끔 집에 찾아 왔습니다. 처음에 그는 銀順을 반가이 맞고 흥낙한 마음으로 인사를 했으나 만나는 도가 겹칠수록 그는 銀順이를 미워했습니다. 그가 廣州에 갈 때는 미워서 못견뎌 했습니다. 외아들을 둔 어머니가 아들을 귀여워하는 나머지 며느리를 미워하는 것이나 같은 심리에서 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조카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조카가 회사에 가고 없으면 그는 집안 식구 있는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침착하고 속이 넓은 그도 편중된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조카가 회사에서 상여금을 타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외출하는 조카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영수야, 이따 들어 올 때 내가 제일 좋아할 것을 사다 다오.”
밤중에 돌아온 조카는 주먹만한 덩어리 초코렛을 사왔습니다. 속으로 실망은 했겠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편을 쓰는 사람에게 아편 이외에 또 무엇이 있겠느냐 생각한 조카는 초코렛을 내놓으며 말없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때 李箱의 부인이 그를 찾아와서 슬픈 얼굴로 이상의 죽음을 전했습니다. 부인의 말을 듣는 그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습니다. 부인이 돌아가고 난 후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까운 사람이 갔다.”
이때의 집안은 참말 빈곤했습니다. 입을 옷과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모조리 전당포에 들어갔고 성한 사람의 식량은 물론 환자의 음식마저 제대로 댈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호배추쌈도 고추장이 없어 못 먹었습니다.
집안이 말할 수 없이 옹색하게 되자 생각턴 나머지 그는 조카(진수)를 데리고 廣州매형 俞氏의 집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때 여객 자동차부에는 玄德과 兄嫂 母子가 전송했습니다.
그는 차중에서 조카에게 비스듬히 몸을 의지하고 눈만 감으면 정신없이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매형의 집은 과수원을 경영하여 서울 조카보다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매형 내외는 반가이 맞았으나 사돈들은 눈치가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집은 넓고 누이가 성가시도록 잘 해 주었으나 그는 부자유스럽고 불편해서 애를 썼습니다.
“빨리 우리 집으로 가야지. 좁아두 우리 집이 제일이야.” 하며 조카(진수)와 쑥덕대기도 했습니다. 마음 안정이 안 되는 그는 이튿날 서울 조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번 노는 날 꼭 오라는 편지였습니다. 편지를 부치고 나선 이튿날부터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자동차 엔진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적마다 내다보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때때로 시간을 물어서 서울에서 오는 막차 시간인 다섯 시가 넘으면 착 가라앉는 그였습니다.
어느 날 바깥 마당에서 까치가 울고(이것은 그의 말) 오정때쯤 서울에서 조카(영수)가 왔습니다. 그럴 수 없이 반가와하는 그를 조카는 눈물을 참으며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조카는 20여일에 두 번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형수에게 명장(名壯)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 아주머니. 여태까지 서울에서 제가 아주머니께 불역하고 화낸 것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후회하고 다시 안 하기로 했습니다. 병이 나아서 이번에 집에 가면 아주머니 고생 안 시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그는 뉘우치고 용서를 빌고 그리워했고 한편 분발해 마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누님에게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누님은 한 냄비 그들먹하게 끓여서 상위에 놔주었습니다. 그것을 그는 뜨는 둥 마는 둥 조카(진수)에게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멋쩍어서 못 먹는 조카를 누님 모르게 빨리 먹도록 하기 위해서 화까지 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여태껏보다 사뭇 큰 넓이의 반자지를 뒤집어 큰 글씨로 ‘謙虛’를 쓰고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나에게 啓示가 있을 지어다.’라고 써서 윗목 벽에 붙여 놨습니다. 이 종이는 그의 사후 다른 유고와 함께 안회남에게 주고 정리를 의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원고지에 쓴 ‘숱밭’ 구상(메모)를 붙였습니다. 즉 背水의 陳을 친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아무리 괴로워도 날마다 세수는 잊지 않았으나 이때부터는 끝내 세수는 고사하고 눈꼽마저 떼지 못하게 한 것은 낙심한 나머지 자포자기한 것 같았으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조카(진수)가 눈꼽이 더덕더덕한 그의 눈에 수건을 댈 양이면 그는 버럭 소리를 질러 화를 내며 타일렀습니다.
“겉에 보이는 눈꼽만 떼면 정한 줄 아느냐? 속에는 그보다 더러운 고름이 꽉 차 있는데…….”하며 무참해하는 조카에게 그는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란 제 생긴대로 보여야 하는 법, 더 잘 보일 것도 없고 더 못 보일 것도 없는 것이다.”그리고는 또
“이번에 서울 가거든 나하고 일본에 가자. 그래서 둘이서 공부하고 나는 쓰고 하자.”하며 초저녁에 멀쩡하던 그는 한밤중에 항문에 고통을 못이겨서 누님에게 보아 달라고 했습니다. 누님이 봐도 아프기는 매일반으로 별 수 없었습니다. 심한 통증으로 그는 밤을 새웠습니다.
이튿날 새벽 먼동이 터올 무렵 그는 廣州 매형 俞氏 내외와 조카(진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너무 짧고 한스러운 그의 일생은 가족뿐이 아니라 생전에 그를 아껴주던 여러 사람에게 미진함을 허다히 남겨놓고 1937년 3월 29일 아침 6시 30분, 어둠이 걷혀짐과 함께 그가 짊어졌던 멍에는 벗겨진 것입니다.
슬프고 괴로웠을망정 누구보다 깨끗한 생애를 살다간 그였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때쯤 산에 흔히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그에게 비기기를 잘 했습니다.
遺骸는 家族(그의 형 부자)에 의해 廣州에서 서울 서대문밖 화장터로 직행하여 초라하나마 조용한 장례를 치렀던 것입니다.
그가 作故한 지 31주기인 금년은 그의 進甲의 해로서 뜻깊은 바 있으며 金裕貞文人碑가 세워지는 衣岩(옷바위)은 그가 실레를 떠나기 며칠 전에 최후로 친지들과 밤고기를 뜨며 내려가다가 다다른 곳입니다. 실레에서 흐르는 시냇물은 옷바위강에 합칩니다. 그곳에 세워지는 그의 碑는 들어넘길 인연은 아닐 것입니다.
그 遺蹟의 保存과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도움이 될까 생각한 끝에 不實한 제가 감히 이 글을 抄하여 항간에 訛傳된 그의 경력을 정정하려는 것입니다.
年代順이 확실치 않은 것은 사진설명에 그치고 다음 기회에 詳述하기로 하겠습니다.
글 가운데 ‘그’는 거의 전부가 삼촌을 말한 것입니다.
이 글은 三寸과 한 방에서 지냈던 저와 어머니(글 속에는 형수)와 누이 동생 珍壽 세 사람이 몇 달을 두고 기억을 더듬은 끝에 모아진 것이며 시일이 긴박하여 대충 추려 쓴 것입니다.
끝으로 金裕貞文人碑 建立委員會의 여러분과 金裕貞全集 編輯委員會의 여러분, 이에 협조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968년 4월
金山 水營에서 金永壽) 씀
인용출처: 『김유정전집 』. 현대문학사,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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